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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틴(Sabatin)의 수기(手記) 전문(全文)
작년(1894년) 8월(조선 음력) 일본인들에 의해 사실 상 생포 상태라 할 수 있는 일본 경찰의 구금 하에 조선 국왕은 러시아와 미국의 어떤 대표자들과, 선견지명이 전혀 없고 안목 또한 좁은 미국인 고문 K. 그레트 하우스 등의 권고로 유럽인 몇 사람, 즉 제너럴 다이, 닌스테드 대령, 세레진 사바찐을 불러 궁궐 안에 거주케 하도록 하였다.
일본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직접 보라는 뜻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말하자면, 점잖은 방관자로서 우리를 초청한 것이다. 우리들, 즉 다이 장군과 닌스테드 대령, 그리고 나의 임무는 밤낮 4일씩 교대로 궁궐 내의 여섯 개 건물에 차례로 거처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궁궐 내에는 언제나 유럽인 두 명이 거주하게 된 것이다.
1895년 신력 10월 7일부터 8일에 걸친 밤. 궁궐에는 다이 장군과 내가 있었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무사한 밤이었다. 새벽 4시에 나와 다이 장군이 잠자고 있는 거처에 조선 육군 중령 이가균이 뛰어 들어왔었는데, 이가균은 다이 장군의 특별 수석 통역원이었다. 그는 숨이 턱에 차서 흥분된 어조로 일본 군인들과 일본인들의 훈련을 받은 조선 훈련대 대원들이 지금 궁궐을 포위하였다고 전하였다.
다이 장군과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궁궐 시위대 장교 본부가 있는 위병소로 달려갔다. 위병소에는 보통의 경우 6~7 명의 장교와 2명의 중령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사람도 그들을 볼 수 없었다. 4시 반쯤에 다이 장군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궐문을 순회하려고 하였다. 다이 장군은 이가균 중령에게 통역을 위해 같이 가자고 하였으나 그는 국왕을 꼭 알현해야 한다면서 거절하였다.
조선인들은 누구도 다이 장군과 동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이 장군이 내게 직접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다이 장군을 보좌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와 함께 궐문을 순회하게 되었다.
우리는 북서문에 접근하여 문틈의 폭이 약 3인치나 되는 것을 통해서 총검과 일본 군인들의 황색 띠가 달린 독일식 군모를 보았다. 우리가 문 곁으로 다가갔을 때 일본 군인들은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숨으려고 하였다. 어림 잡아서 약 40~50명은 되어 보였다.
우리는 곧 북동문으로 다가갔다. 조선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는 약 2백~3백 명의 조선 병사들이 집결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조선 병사들을 단 한 사람도 발견치 못했다. 다만 무엇인가를 의논하는 군중의 왁자지껄한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우리들이 북동문에 이르렀을 때 어떤 조선인이 다가와서 큰 소리로 문을 열라고 몇 번 외쳤다.
새벽 5시 궁궐 공격이 시작되었다. 북동문 밖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연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막힘 없이 유창하게 연설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전에 연습까지 해두었음이 분명했다. 연설이 끝나자 조선인 군중들로부터 아우성과 울부짖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그 직후 몇 분이 지난 후 문을 둘러싼 군중들이 궁궐의 방벽을 타고 넘어 서쪽으로부터 위병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위병들은 자기의 초소를 포기하고 총의 실탄을 뽑아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궁궐에는 모두 합해 1천 5백 명의 병사들과 40 명의 장교들이 있었다. 4시 30분부터 5시에 이르는 시간에는 2백 50~3백 명의 병사들과 8명의 장교들이 남아있었다. 그 밖의 장교들은 제복을 벗어 던지고 총과 탄환을 버린 채, 도망쳤다. 5시 10분 내지 15분 경에 조선인들이 서소문을 통해 궁궐로 돌입해 왔다. 궁궐에 잔류한 약 3백 명의 위병들과 8명의 장교들은 서소문으로부터 궁궐로 가는 노상에 집합하였다. 위병들은 무질서하게 길 좌측에 떼지어 있었다.
일본인 습격대는 계속 서소문의 틈, 5~6개의 틈과 그 넓이는 1~2인치 정도의 그것을 이용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궁궐에 돌입한 조선 신병 훈련대 들은 시위대 병사들을 향하여 세 번 일제히 사격을 하는데 한 번에 30~ 40발씩은 발사를 하였다. 이처럼 사격을 가했으나 시위대 병사들을 사살하려는 의도는 아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시위대 병사들의 머리 위를 향하여 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나와 다이 장군은 화선에 서있었다. 벽을 따라 협문의 우측에는 내가, 좌측에는 다이 장군(궁궐도면-a-에 나, -b-에 다이 장군)이 서있다. 우리 두 사람을 벽이 방어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습격대로부터 80보, 즉 800 야드 미만의 거리에 있었는데 그때의 짐작으로 탄환은 20~30피트쯤 머리 위로 날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세 번에 걸친 사격으로 다만 병사 한 사람이 어깨에 부상당한 것을 나는 목격했을 뿐이다. 일제 사격을 당한 시위대 병사들은 한 번도 응사 하지 않은 채 총을 버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정복을 벗어 던지거나 탄환을 뽑아버리면서 도망쳤다. 도주자들의 무리는 떼를 지어 두 방향으로 밀려 나왔는데, 그 중 한 무리는 다이 장군을 길 좌측으로부터 우리 유럽인들이 거처하는 집 방향으로 끌려갔다. 그쪽으로는 습격자들이 가지 않았다.
약 3백 명에 달하는 또 하나의 무리, 즉, 병사들과 궁궐에서 종사하는 각종 하인들과 red coat 등은 나를 황후와 하녀들이 거처하는 황후의 여궁인 건청궁 옥대루마당으로 60~70 보쯤 끌고 갔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무리에 휩쓸려가면서, 나는 황후전(건청궁 마당, 앞에 소개된 궁궐도면 c를 참조)에 있는 두 개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5명의 일본 보초병과 일본 장교 한 사람을 보았다.
동시에 마당에는 또 훈련대 소대와 오동나무 문장이 들어있는 일본 옷이나 양복을 입은 20~25 명 가량의 일본인들 또한 있었다. 일본 보초병들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으며 일본의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군 신병, 훈련대의 소대는 총을 비스듬히 황후전 쪽으로 향하게 하여 발 옆에 세우고 정렬해 있었다. 조선 훈련대 소대 가까이에 풍채가 좋고 옷을 잘 차려입은 한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오른 손에 단검을 뽑아들고 있었는데 그 검은 서양식 검으로서 칼날은 8~10인치 가량이나 되었다.
그는 조선 여자(궁녀)들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밖으로 끌어낸 뒤에 창문 밖으로 높이 약 6피트의 되는 곳에서 아래로 내동댕이치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하면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내가 황후전 마당에 서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0~12 명의 궁녀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 마당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궁녀들 가운데 그 어느 한 사람의 궁녀도 신음소리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고 완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그들은 머리채를 틀어 쥐인 채 끌려갈 때에도 그러했고, 마당에 내동댕이 질 쳐지면서도 결코 소리를 지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궁녀들의 의복에도, 몸에서도 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꼭 말해두고 싶은 것인데, 나는 일본인 20~25명 중 칼을 뽑아들고 있는 사람을 4~5 명밖에 못 보았다는 것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검을 어떤 사람들은 두 개의 검까지 갖고 있었지만 모두 칼을 칼집에 꽂아두고 있었다.
황후전 마당에서 내가 목격한 조선 여성(궁녀)들은 모두 살해 당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여야 할 것은 나는 이것을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조선 여성들의 침묵은 진정 그들의 용감성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황후전 마당으로 들어갔을 때 내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즉, 5~6보 가까이에서 일본인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두 궁녀의 얼굴을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살아있었고, 상처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피를 못 보았다.
이들 두 궁녀의 입술은 꼭 다물어져 있었고, 이들에게 끌려갈 때에도 마루로부터 마당에 떨어질 때에도 작은 소리조차 하나 내지 않았으며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 중 한 궁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땅바닥에 쓰러진 채, 물러가는 일본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자의 얼굴은 냉담한 표정이었고, 주위의 모든 사물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것 같았다. 황후전 마당에 쓰러져 있는 궁녀들은 약 20~25보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나는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일본 병사들과 장교 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찬스는 일본 장교의 보호 밑에 몸을 맡기거나 하여 일본군 장교에게 나의 운명에 대하여 책임을 떠맡기도록 하는 것이라고 결심을 하였다. 나는 일본 장교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에게 처음에는 영어로, 그러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는 나는 몇 개의 일본어 단어를 알고 있었던 관계로 해서 일본어로 말했다.
그러나 일본 장교는 내가 일본말을 하는 것을 보고, 나의 느낌에 마치 시간이 없어 바쁘다는 듯이 행동을 하더니 나를 두고 가버렸다. 나는 일본 병사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주위를 살피면서 내 쪽은 안 보려고 퍽 애쓰는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일본 장교도 그렇거니와 일본 병사들도 아마 나의 목숨을 되는 대로 놔두어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강도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나를 처리하게 맡겨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 그대로 나는 단도로 무장한 일본 신사에게 나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신사는 위에서 말한 대로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는 일본인들의 지휘자처럼 보였다. 일본인들의 두목이며, 지휘자인 그에게, 영어로 아침 인사를 했다. 나는 반갑게도 이 지휘자가 영어를 제법 알아듣고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본인은 나의 인사에는 대답지 않고 곧 나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다.
"당신의 이름은?"
"사바찐!"
"당신의 직무는?"
"건축가!"
질문이 끝나자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소원을 말했다.
"나는 나의 의사와는 전혀 반대로 이 장소에 들어와 있는 것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일본 신사들이 대단히 흥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관계없는 사람이 이곳에 서있는 것은 위험하고 또 여기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신이 나를 보호해주실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면서 눈짓으로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는 일본인들을 뚫어지게 보았다.
일본인 지휘자는 나의 말을 심중하게 듣는 것 같았고, 긴장된 모습으로 내 말을 듣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찬찬히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예민한 눈초리와 응시를 태연하게 견디려고 많은 애를 썼다. 만일 내가 연기를 잘하지 못하거나 혹은 불안과 공포의 모습을 보였거나, 또는 지나친, 이런 경우에 부자연스러운 용기를 발휘를 하였었다면 나의 일은 최악으로 끝이 나고 말았을 것이라는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잠깐동안 생각하였던 그 일본인은 매정하고 단속적인 음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보호를 받고 있소. 움직이지 말고 여기에 서 계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가버리려고 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친절에 대해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 친절을 끝까지 저에게 베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저에게 병사 한 두 사람만 붙여 주십시오, 다른 일본 신사들은 제가 당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일본 지휘자는 곧 황후전 마당에 서있는 병사들 가운데 훈련대 병사 두 명, 일본어를 잘 하는 자를 불러 내 곁에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상태로 나는 약 15분 간 서있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모든 사건의 시각을 시계를 보면서 기억해 두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행동은 매우 위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15분 동안 나는 위에 서술한 모든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바로 황후전 창문 밖으로 일본인들이 10~12 명의 조선 궁녀들을 내던지고 있는 것을. 황후전 마당에서 내가 부득이 15분 간 머물렀던 마지막 순간에 일본인 5명이 흥분하여 시뻘개 진 얼굴로 사납게 외치면서 황후전 마루로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일본어로 연설을 하였는데 대단히 정력적이었다. 그 후 일본인 5명 모두가 황후전 안으로 뛰어들어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함성을 지르면서 어떤 궁녀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달려나왔다.
일본인 5명은 너무나 성급히 달려나와 마루에서 멈출 수 없었으므로 희생자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 희생자는 정면으로 나에게 부딪혔다. 흥분한 일본인들은 세 사람들 가운데 오동나무 문장이 있는 옷을, 다른 두 사람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곳에 내가 서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라면서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잔인하게 뚫어지게 보면서 약 10초 간 멍청히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후 그들은 한꺼번에 다 같이 일본말로, 또 조선 말로 내가 누구인가 왜 여기 와 있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일본말과 조선 말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체 하고 있는 순간이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그들에게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5명의 일본인 가운데 누군가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또 앞으로는 알게 될 것이지마는 나는 그들이 알아들었다는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혹은 나를 지키고 있는 조선 병사들의 설명에 만족하였는지, 그들은 즉시로 돌아서서 황후전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침 이때 나와 안면이 있는 조선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도 내가 들어온 작은 문을 통하여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큰 소리로, '아아!'하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나를 두고 저쪽으로 가려고 하는 일본인 5명을 멈춰 세우고 대단히 흥분된 어조로 무엇이라고 말하였다. 이 순간이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괴롭고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다.
일본인들은 격분하여 나에게 달려드는데 나의 수호병 들은 옆으로 물러가 일본 강도들에게 길을 내주었다. 나에게 달려든 일본인들은 나의 옷깃을 잡아끌면서 또 어떤 자는 나의 양복 소매와 앞깃을 붙잡고 내가 그들에게 황후의 처소를 가르쳐줄 것을 큰 소리로 외치며 위협적인 어조로 강요하였다.
그들이 일본어로 또는 조선 말로 고함치고 있을 때 나는 마치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 하면서 나에 대한 무례하고 불손한 태도에 대해 놀라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로 그때 나의 옷깃을 잡아당기던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 꽤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나에게 말하였다.
"황후는 어디에 있는가? 황후의 거처를 알려달라!"
나는 전력을 다해 변명하였고 설득하였다.
즉, 나는 황후의 얼굴도 본 적이 없거니와 유럽인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조선국 황후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황후의 거처를 알아 볼 권리조차 없었다고 하면서 온갖 구실을 붙여서 용서를 빌었으나, 일본인들은 나를 황후전으로 끌고 갔다.
아마 그들은 내가 황후의 거처를 알려줄 것을 강요하려고 굳게 결심이라도 한 듯 했다. 바로 이때 일본인 지휘자가 나타났다. 그가 나타났을 때 나를 끌고 가던 일본인들은 나를 놓아두고 정중한 자세로 지휘자에게 나와 나를 알아 본 조선인을 가리키면서 잔인하고 성급한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부하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일본인 지휘자는 나의 곁으로 다가와 매우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황후를 찾아낼 수가 없다. 당신은 황후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가?"
나에게 황후가 어디 있는가를 묻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나는 그에게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조선의 관습과 법에 따라 황후를 볼 수도 없었고, 또 황후의 거처를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일본인은 나의 변명을 접수한 듯 부하에게 나를 다치게 하지말고 내버려두라고 명령하였다. 다만 나를 알아본 조선인이 나를 지키는 일본 병사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조선인이 사건의 유일하고 위험한 목격자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본인 지휘자는 조선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 같이 나에게는 보였다. 그는 아마도 동의한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물러가려고 했다. 이때 나는 우연히도 바보같이 걸려든 쥐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해야한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보초병이 저지하는 것을 물리치고 일본인 지휘자에게 재빨리 다가가서 결례를 사죄하고 그이가 나를 보호해준다고 한 약속을 상기시켰다.
또 나는 일본인 신사들은 언제나 약속을 지킨다는 좋은 예를 몇 번이나 보았고 잘 알고 있노라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끝까지 친절을 베풀어달라고 빌면서, 나를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병사 한 명을 나에게 붙여 궁궐 밖으로 호송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일본인은 수호병 두 명에게 나를 데리고 궁궐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나와 안면이 있는 조선인은 문제가 이와 같이 해결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듯, 나를 궁정 뒤에 있는 골목길로 데리고 가면서 앞 장 서서 걸어가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그에게 복종하였으나 황후전을 빠져나오면서 조금 걸어가다가 조선 병사들에게 앞장서서 가도록 요구했다. 나의 강한 요구에 그들은 마지못해 앞장서 걸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와 같이 행동한 것은 나와 안면이 있는 조선인이 나를 호송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무엇인가를 설득하기 위해 수상하게 속삭이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더욱 의심했던 것은 궁궐 밖으로 나가는 큰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데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로부터 벗어나 다만 조선 군인 두 명과, 허약하고 무장조차 하지 않은 조선 양반 한 사람을 상대하게 되자 나는 약간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울 각오까지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인 장사 5명이 나에게 달려들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양손을 가슴에 십자형으로 얹어놓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보여준다거나 혹은 본능적으로 살려달라고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면 나는 아마 십중팔구 살해당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무사히 궁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궁궐의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일본 병사들과 장교들을 보았는데 국왕이 유럽인들을 접견하시든 전각 부근에는 일본 병사 1백~150 명과 그들을 지휘하는 장교 8~10 명으로 구성된 보초 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의 숫자로 보아, 또 그 곳에 많은 조선인 고관들을 보아 나는 이 자리에 국왕이 계시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궁궐을 빠져나왔을 때는 아침 6시였다. 황후전으로부터 궁궐의 남문까지의 거리를 10~15분 걸어왔다고 계산하면 5시 45분, 5시 50분까지도 일본인들은 황후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궁궐에서 빠져나와 나는 그 길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였다. 아침 6시 30분 경에 그 곳에 도착하였다. 나는 즉시 내가 목격한 모든 것을 K. 웨베르 공사에게 보고하였다. 나는 공사 각하와 또 공사관 서기관에게 내가 목격한 것을 서면으로 진술할 필요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우연히도 불행한 사태에 합류함으로써 유럽인 중에는 유일하게 서울 사변(신력 10월 8일)의 목격자로 되어, 사변의 묘사를 하자는 것이었으나 귀찮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본 수기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한 최초의 진술인 것이다. 몇몇 외국인들이, 즉 예를 들자면 서울 주재 독일 공사와 같은 이들이 본 진술과 같은 묘사를 서면으로 써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나는 그들 모두에게 거절하였다.
서울 사변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첨가할 것은 없다. 주해를 달고 결론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고 또 그것을 뒤섞어 놓은 것을 나는 원치 않으므로 언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한 가지 곁들여 말해야 할 것은, 왜 내가 서울 사변의 목격자로 된 것이 결국 불행한 상황을 초래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후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 각하는 유럽 국가 대표자들과 함께 일본 공사를 방문하였는데 후자로부터 궁궐 습격에 일본인은 한 사람도 관련되지 않았다는 설명을 듣자 유럽인 중 목격자가 있다고 말하고 내가 이야기 한 사실을 일본 공사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벌어진 사태는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왜냐하면, 첫째, 서울 사변을 지휘한 자들이 모두(그 중에는 위에서 말한 지휘자도 포함되어 있다.) 즉시 서울을 떠나 제물포를 거쳐 조선을 떠나버렸으며,
둘째는 나의 생명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다. 일본인들과 친일적인 신당에 속하는 조선인들이 내가 실제로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지 않았는지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웨베르 각하 자신도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대강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말을 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의사를 나에게 토로하였다. 바로 그 날 즉, 신력 10월 8일 저녁에 나는 유럽인 한 사람과 조선인 두 사람으로부터 나를 암살하려는 기도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 이유는 일본인과 조선인 범죄자들이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자기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까 겁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장차 대질심문이 있게 되면 내가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불안한 정보가 계속 내 귀에 들어왔고, 나는 가족의 안정을 위해 밤에는 집에 머무르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열병을 경험하였다. 바보같은 광신적인 일본인, 혹은 비겁하고 비열한 조선인에게 암살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항상 사로 잡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궁궐에서의 임시 직업마저 잃고 말았는데 공사관은 금후 나를 조선에서의 어떤 기관에도 취직을 위한 추천장을 써주지 않겠다는 통고를 보내왔다. 나는 공사관 건설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그에 해당하는 보수, 즉, 건축물 가격의 7%를 지불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겨울은 닥쳐오는데 나와 가족은 생계비가 한 푼도 없었다. 나는 조선을 떠나 나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보려고 결심을 했다. 내가 처한 위험을 생각할 때 그리고 대사관과 나의 유감스러운 비정상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 나는 일본이 파견할 서울 사변 특별조사단이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까지 만이라도 당분간 조선을 떠나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서울 사변의 다음 날, 조선 정부는 나에게 공식적으로 내무성 고문관이라는 높은 자리를 권고하여 왔다. 그러나 이 권고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조선의 신당이 나를 위험분자라고 간주하고 있는 증거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조선 정부로부터 받은 권고에 대하여 K 웨베르 각하에게 보고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선정부의 내무성 유길준 차관으로부터 권고도 받았다는 증거로 공사관 고문서실에 권고지를 보관해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를 웨베르 공사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러시아 공사 각하에게 조선정부로부터 받은 청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고 충고를 듣길 바랐으나 공사관에서는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 없고 이젠 모든 것을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다는 대답이 왔다.
위에서 진술한 10월 8일 서울 사변의 묘사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직접 목격한 기록이다. 다음에 나는 서울에서 돌고 있는 10월 8일 사변과 관련한 소문과 그리고 내가 직접적인 목격자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확실한 근거가 있다고 보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이 사실에 확실한 근거가 있다고 믿게 된 것은, 그것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과 나는 친교를 갖고 있었고, 그들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출판물에 의하면, 궁궐 습격은 마치 궁궐 시위대를 질투한 훈련대 병사들이 국왕의 특별 경비대, 즉 근위대의 영예를 무력으로 쟁취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일본출판물에 의하면 훈련대 병사들과 궁궐 수위대 사이에 불쾌한 오해가 발생하여 훈련대가 해산될 위험을 느낀 병사들이 국왕을 직접 알현하고 그들에게 은전을 내려주실 것을 간청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하고 조선 궁녀들과 고관들을 살해한 데 대해서는 일본 공사가 유럽인 중에 목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에는 일언반구도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짐작컨대, 만일 일본공사관이 10월 8일 사변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할지라도, 내가 10월 8일 사변의 거의 모든 것을 목격하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게 됨으로써 일본인들은 그들을 추궁하는 고발자들의 "열린 카드"를 수중에 장악하게 되어, 이에 적응하여 그들 자신의 외교적 책략을 구사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만일 내가 목격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많은 실수를 면치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을 폭로함으로써 우리는 일본인들 보다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일본인들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고발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리고 사실의 폭로로 인하여 초래된 새로운 사태에 대비하도록 새로운 책략을 꾸미고 있다.
오늘의 상황을 보면 일본인들이 무사히 비난을 면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곁들여 말한다면 일본인들은 러시아 대표로부터 10월 8일 서울 사변에 일본인들이 참가함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공사관 서기를 이 목격자에게 파견하여 그 증언이 어느 정도로 확실성이 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목격한 것 가운데 몇 가지를 말해주었다.
나를 방문한 일본공사관 서기와의 접견을 거부하고 목격한 몇 가지 사실을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았거나, 또 목격한 사실을 아무렇게나 왜곡하였다면 그것은 현명한 태도라 할 수 없을 뿐더러 위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10월 8일 사변에 일본 정부가 참가하였다는 소문이 제물포와 서울에 퍼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일본 정부가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으며, 증거가 또한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10월 9일과 10일 양일 사이에 일본 군함 2척이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날 10월 10일 밤, 이 군함에 일본 하천 기선이 접근하여 사복을 입은 많은 일본인들이 군함에서 내렸다고 한다.
일본 군함 한 척은 즉시로 닻을 올리고 바다 쪽으로 떠났다. 또 일본 기선 한 척은 10월 9일 저녁 9시에 제물포를 출항, 일본을 향해 떠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돛을 올리고 10월 9일 새벽에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기선은 독일 기선 "Clow-clow-joo"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욱 괴이한 것은 이 기선이 시모노세키 해협 등대의 바로 옆에서 돌연히 암석으로 인해 좌초되어 기선으로부터 일본인 여객들이 내렸다고 한다.
황후에 대해서는 전후 당착한 소문이 많이 나돌고 있었다. 아직까지 황후가 살해당했는지, 혹은 생존하고 있는지 누구도 확신하고 있질 못하다.
아쉬운 대로 나 자신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의 어떠한 보호와, 그것이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고 신화적인 얘기에 불과 하드라도 그들의 힘을 기대할 원인이 없었더라면 황후는 항상 닥쳐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전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여야 했을 것이다.
비호의 약속은 황후에게 지나친 기대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의 궁궐 내 체류도 황후와 궁궐에 종사하는 모든 조선인들에게 잘못된 안도감을 주었다.
이것으로 나는 뜻밖에 목격한 최근 서울 사변에 대한 묘사를 끝마치려고 한다. 그러면 이제 10월 8일에 발생한 조선 정부의 쿠데타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하여 나의 소견을 첨부해볼까 한다.
작년에 일본인들이 조선을 강점한 직후 황후의 친족 민씨 일가가 영도하는 조선 보수당, 소위 말하는 친 중국당이 모든 권력과 정권을 잃었다. 조선 정부의 수뇌부는 일본인들이 임명한 중간 계층의 조선인들이 차지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그들의 가문이 조선에서 세력과 영향력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를 들면, 현재 조선 정부의 총리 김가진, 또는 작년 대원군이 비밀리에 파견한 조선인들에게 살해당한 김치구 같은 사람들이다. 두 정당 가운데 수구파는 언제나 러시아와 그의 영향에 대하여 호의를 갖고 있었고, 개화파, 즉 친일파는 항상 일본과 미국에 동정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언제나 교묘하게 수구파와도 개화파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국 외교의 이와 같은 위선적인 것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오늘 날 시의에 맞지 않는다고 나는 판단한다.
러시아 국 대표는 언제나 수구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는 제삼자의 눈에 뚜렷했고, 나의 비견에 의하면 그것은 대단한 현명한 조처였다고 본다. 왜냐 하면 수구파는 언제나 저항력이 강했고, 믿음직하고, 지대한 영향력을 국민 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그와 같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구파의 수뇌자는 항상 황후였다. (약간 다른 의견으로는 대원군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황후는 언제나 청국을 반대했다. 1888년 청국인들이 명명일 기념 만두요새를 이용하여 황후를 독살하려고 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황후의 특색은 항상 기략이 풍부하고 지력이 뛰어나고 행동이 출중한 것이었다. 그 예로 1884년에 실패한 조선 혁명(개화운동)을 지도 하다가 상해에서 살해당한 김옥균 다음의 친일파 두목으로 유명한 박영효와의 문자 그대로의 외교전에서 발휘한 황후의 재치를 보면 충분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 황후는 진실로 현명한 여성이었다. 또 중요한 것은 과거 1876년, 특히 1882년, 1884년의 쓰라린 경험을 하였기에 대단하고 세심한 그리고 간교하게 생각한 후 황후가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였더라면, 즉, 누구의 원조에도 기대를 걸지 않았더라면 이 난경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판단은 달랐다. 1876년, 1884년, 특히 1882년에 황후는 무서운 위험에 빠졌으나 역시 자신의 지력과 재치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싸움을 조정한 후 일시적으로 잃었던 영향력과 세력을 다시 획득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에 특기하여야 하겠다.
이번 경우에 있어서 사태는 불행하게도 조선 황후에게 아주 좋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간섭하여 어떤 위험에도 완전히 안전하다고 하였기에 황후의 경계심을 잃게 하였던 것이다. 안전 보호에 대한 거듭된 약속에도 불구하고 황후는 여전히 여러 차례에 걸쳐 종래의 경험을 살리며 동양적인 지계로써 처신하여 왔었다.
일본이 요동반도에 얽힌 외교전에서 실패한 시기까지 황후는 일본인들과 조선 친일파들과의 맹렬한 외교전을 성공리에 전개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여순항과 요동반도로부터 부득이 물러난 후, 일본인들이 금후 조선이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용서치 않는다는 등등의 설득에 황후는 점차 굴복하기 시작했다. 소나기는 지나갔으니 이제는 일본을 겁낼 필요가 없다고 황후를 설득함에 특별한 노력을 다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바로 조선이 처한 복잡한 현 정세를 이용하여 누구보다 먼저 유리한 조건으로 여러 가지 이득권과 특권을 획득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사실 미국은 조선에서의 채굴권을 그야말로 꼴사나운 만큼 조선 측에 불리한 조건으로 획득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 대표 K. 웨베르 각하도 역시 일본 세력의 일시적 쇠약과 쇠퇴를 이용하여 자기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친족인 존 따그 여사-동 프랑스 알자스 주 태생-를 조선 정부에 취직시켰다. 그러자 그녀는 조선 궁궐에 근무하였고,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더욱 중요했고, 그들에게는 위험하였다.
겉치레뿐인 존 따그 여사의 직무는 귀족 집 딸들을 위한 수예 강습소의 설립이었으나, 겸해서 그녀는 요리사들의 고문이었고, 유럽식 대 오찬회를 차릴 때의 조언자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특별한 직무로 말미암아 존 따그 여사는 빈번히 황후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녀 자신의 말에 의하면 자주 두 세 시간 계속하여 황후를 만나 자리를 같이 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상황이 순조롭고 또 시기가 보다 정상적이고 사정이 다른 때였더라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오늘 날 일본의 지나친 욕심을 제어하고 모든 일본인들의 숙망이었던 요동반도의 지배를 단념시킨 그 러시아 나라 대표의 각별한 친절을 받게 되자, 불행한 황후는 점차 본래의 조심성을 버리고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으로부터 몽땅 소탕 당한 것 처럼 완전히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황후와 존 따그 여사의 지나치고 시의 적절치 않은 친밀한 관계는 일본인들과 조선 친일파들의 격분을 극도로 자아냈다. 이에 대해 서울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진 않는다.
덧붙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존 따그 여사는 성격상으로 보아 전혀 외교에는 무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불안전하고 애매 모호한 상태에서 외교를 모르는 사람하고 밀접한 교제, 설혹 그것이 개인적 성격을 띄었을지라도 그런 교제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불행한 황후에게는 대단히 위험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런 장면을 목격한 바 있다. 금년 9월 초(신력 4일)에 궁궐에서 현 조선왕조 5백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었다. 축하연 조직위원회는 미국인 레전드르 장군과 존 따그 여사, 그리고 사바찐으로 구성되었다. 사바찐은 식장 장식을, 존 따그 여사는 오찬 준비와 식탁 차림을 책임 맡았었고, 레전드르 장군은 별다른 임무를 맡지 않았다.
기념행사 프로그램 작성을 위한 회의에 조선 정부 고관들이 약 20명 참석했는데, 개화당에 속하고 있는 두 분과는 안면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손님의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일본 요리점 급사를 부르자고 제의하고 토론에 붙일 것을 요구했다. 이때 일본인이라는 말 한 마디를 듣고 존 따그 여사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들에게 욕질을 하면서 침을 배앝기까지 하였다.
안목이 좁고 어리석으며 여자의 비위를 잘 맞추는 남자로 소문난 레전드르 장군은 웃으면서 맛 장구를 치고 있었다. 얼핏 보면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었고, 신력 10월 8일에 갑자기 타오른 모닥불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인들과 조선 친일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든 또 한 가지 상황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에게는 어떠한 이권도 특권도 거부하면서 미국인들에게는 귀금속 광산채굴권을 주었던 것이다.
또 존 따그 여사에게는 자택 건설을 위하여 약 1만 달러를 하사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지도하는 수예강습소 건설도 예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더 말할 수 있지만 이쯤 해 두기로 하고, 위에서 약술한 묘사를 통해 10월 8일 서울의 비극의 원인과 결과를 독자들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는 바이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연구소>에서 소개한 자료 - 1994년 2월
[출처=http://cafe.daum.net/pass2011/7rCJ/58?docid=1JegF|7rCJ|58|20100511153211&q=%BB%E7%B9%D9%C6%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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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러시아 건축가 그 사람이죠?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하신 그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