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법 - (91) 시 창작법 - ① 글쓰기는 말걸기다/ 시인, 경희사이버대학 교수 이문재
시 창작법
네이버 블로그 - 비와 에세이/ 글쓰기는 말걸기라는 사실
① 글쓰기는 말걸기다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것은 첫 마디를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몇 마디가 뒤엉켜 버리면 끝장이다. 가까운 후배 중에 다음과 같이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다. “저어, 있잖아요, 제가,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선배에게도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사항인데…….” 그래서 그 후배가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쐐기부터 박는다. “말하려는 결론부터 말해.”
글도 마찬가지로 모든 글쓰기는 첫 문장 쓰기다.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사의 첫 문장은 ‘호객 행위’라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컨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걸어라.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다!
이제부터 글 쓰는 비결을 공개한다. 내가 잘 아는(독자가 대부분 알고 있는) 시인은 시를 한 편 완성하고 나면, 첫 문장을 백 번 이상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읽어 본다. 첫 문장이 흡족해야 시를 발표하는 것이다. 거듭 반복한다. 첫 문장에 목숨을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시(쓰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실한 것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문예장착과 학생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도 시(쓰기)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에 일고여덟은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이들과 좋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글쓰기와 무관한 젊은이들에게 두 번째 질문(꿈이 있다면,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해 보라)을 던졌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젊은 편집자들과 술을 마시다가 꿈을 물어보았더니, 몇몇은 당혹스러워했고, 몇몇은 ‘있는데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한둘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당했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내 지론을 강요했다간 싸움이 날 판이었다. 나는 ‘우리는 꿈꾼 것만 이룰 수 있다’는 무하마드 유누스(『가난한 사람을 위한 은행가』의 저자, 방글라데시의 대안 운동가)의 잠언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 나는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쓰기)가 필요하다. 시(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완전한 포로다. 나는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없다. 나는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생각하는 시간만큼, 나는 이 우주 안에서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악기이기를 지향하면서도 나의 시는 아직, 수시로 무기이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마지 않는, 한 문장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쁘게 가난을 선택할 수 있게 하소서’이다. 산업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기생의 존재’가 도시를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 야생초조차도 인간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과학적 보고서가 있기에, 함부로 도시의 바깥을 상정하는 것도 유아적으로 보인다.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한 뼘씩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아직도’ 있다면, 감히 한 권의 책을 권한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권진욱 옮김, 한문화) 책을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니다. 미국의 글쓰기 지도 전문가인 나탈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꿈에 대해서 5분 동안 써 보십시오.’
< ‘유쾌한 시학 강의, 16명의 현직 시인이 말하는 시의 모든 것(강은교·이승하 외, 아인북스, 2015)’에서 옮겨 적음. (2020.10.18.
화룡이) >
[출처] 시창작법 - (91) 시 창작법 - ① 글쓰기는 말걸기다/ 시인, 경희사이버대학 교수 이문재|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