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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18,1-6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일어나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내 말을 들려주겠다.”
3 그래서 내가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갔더니, 옹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5 그때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6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물의 비유'>
우리는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그물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의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들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강조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비유를 마무리 지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마태 13,47)
사실 그물 속에는 '온갖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 13,48)
'세상의 끝날'이 오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밀밭에서 가라지를 따로 뽑아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하느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이듯이,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어부들이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 올려 쓸모없는 나쁜 고기를 추려내어 해변에 죽게 내버리고, 좋은 고기는 '하늘 나라'라는 그릇에 담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의 종국적인 결말이 준엄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바다에 생명의 물을 부으시어 우리를 살게 하시고, 그 물속에서 생명을 모아들이십니다.
곧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 생명의 그물에 몰아넣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당신의 그물’ 속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 ‘그물’은 욥을 찾아와 충고했던 친구(빌닷)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덮어씌운 것이 그분의 그물이라는 것을!”
(욥 19,6)
시편 작가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실족하여 죽을세라 염려하여 주시며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셨다.
~ 우리를 그물에 몰아 넣으셨으며 짐을 등에 지우셨다.”
(시 66,10-11)
이처럼 ‘그분의 그물에 든 물고기’인 우리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바다에 쳐져 있는 그물', 곧 ‘이 세상에 쳐놓은 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바다에 쳐져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비유 일곱 가지를 마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의 의미를 깨닫고, 또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곳간에 ‘하늘 나라의 복음’이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나라는 ~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마태 13,47)
주님!
하늘나라의 그물에 저를 몰아넣으소서.
당신 말씀의 그물로 덮어씌워 당신 뜻 안에 가두소서.
세상의 바다에 저를 던지시어 당신의 그물이 되게 하소서.
온갖 고기를 모아들일 뿐 제 입맛에 맞게 고르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물일 뿐 주인이 아니듯 고기의 주인도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지옥에 가지 맙시다!>
오늘 하늘나라에 관한 마지막 비유는 마지막 비유답게 중대한 비유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장하는 상선벌악(償善罰惡)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상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 받는다는 내용의.
그런데 이것은 지옥의 실재 문제와도 관련이 있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영원히 벌하시는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요.
이것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뜨거운 논쟁 주제이기도 했지요.
당시 성공회 신부가 ‘지옥은 없다’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장은 역시 충실한 가톨릭 사제답게 ‘지옥은 있다’입니다.
그렇다고 그 지옥은 ‘불붙는 지옥’과 같은 그런 지옥이 아닙니다.
천국이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라면 지옥은 정반대로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이지요.
그런데 이 영원한 단절이 하느님의 벌 때문인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 천사들을 시켜 악인들 가운데서 악인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라고 하고 있지요.
그러나 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지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놓고 저승사자를 보내 악인을 지옥에 처넣지 않으실 겁니다.
인간이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천당과 지옥은 인간의 선택입니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유로 하느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같은 자유로 하느님과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사랑으로 선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교만으로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악령들이고 더러운 영들일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예레미야서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옹기장이와 옹기들로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예레 18,6ㄷ)
그런데 옹기장이는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버려버립니다.
“옹기장이는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예레 18,4)
옹기장이 하느님은 옹기인 우리를 흠 없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흠 없게 만든 옹기에 흠집이 생기는데 그 흠집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하느님이 흠집을 내신 겁니까?
아닙니다.
자해(自害)입니다.
하느님이 원치 않으시는 짓을 자기에게 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으로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이 사랑으로 만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렇게 자신을 자해하며 하느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면
그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며, 스스로 영원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지옥에 보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옥에 가지 맙시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추수 때가 되면>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텃밭에는 콩도 심겨져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밭모퉁이에는 흔하지 않은 가로등이 밤새 켜 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시편 126,6)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 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십니다(예레 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구분법>
오늘 복음에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비유 말씀으로 어부가 물고기를 거두어들여 어떤 종류는 거두어들이고 어떤 종류는 버린다고 하십니다.
내가 어떤 물고기일까를 알아보기 위해 일반적으로 어떤 물고기들이 거두어들여지고 어떤 물고기들이 버려지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버려지는 물고기들의 특징을 봅시다.
그것들은 맹독성이 있거나 가시가 많거나 잡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사람이 손쉽게 먹기 어려운 이런 물고기들은 사실 다른 물고기들에게도 천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기 어려우면 다른 물고기들도 먹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복어를 볼 수 있습니다.
복어는 지금 양식을 해서 독성이 없이 잘 먹기는 하지만, 예전에 복어가 그물에 들어왔다면 어떨까요?
처음엔 분명 버려졌을 것입니다.
복어는 물이나 공기를 삼켜 몸을 부풀려 몸을 더 크게 만들고 삼키기 어렵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부풀어 오를 때 직립되는 가시를 가지고 있어 추가적인 방어층을 형성합니다.
무엇보다 많은 복어의 조직에는 강력한 신경독인 테트로도톡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독소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어 복어를 먹으려는 시도를 방해합니다.
라이온피쉬는 생긴 것은 멋있지만, 지느러미에 길고 독이 있는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시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독을 주입하여 극심한 통증, 마비, 심지어 사망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밝은 색상과 뚜렷한 패턴은 다른 동물에게 독이 있다는 경고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는 라이온피쉬는 그것들을 걸러내고 식용을 하기에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서 일반 어부들에겐 버려지기에 십상입니다.
스톤피쉬는 독과 위장술로 거의 공격을 받지 않으며 만약 밟거나 만질 경우 인간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독이 있는 가시가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어와 같이 특별한 조리법으로 요리하는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먹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는 쓸모없는 물고기입니다.
전기뱀장어를 볼까요?
전기 뱀장어는 강력한 전기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특수한 전기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뱀장어가 발생시키는 전기 충격은 잠재적인 포식자를 기절시키거나 죽일 수 있어 효과적인 억제 수단이 됩니다.
다른 물고기들에게 해를 끼치는 전기뱀장어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어 식용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상어는 어떻습니까?
가장 강한 물고기이기에 천적이 없습니다.
즉, 상어는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사냥 능력과 자연 포식자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서식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상어의 지느러미를 먹기 위해 상어를 포식하기는 하지만, 생존을 위해 상어를 잡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물고기들에게 먹혀 영양분을 줄 수 없는 독성이 강하고 다른 것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험한 가시들이 있는 물고기는 인간에게도 이롭지 못하기에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물고기가 인간이라면 다른 이들에게 먹혀 자신을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은 하느님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밥이 될 줄 아는 존재가 됨을 배우는 과정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나가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출생한 성 카밀루스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성장해서는 군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대항한 베네치아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도박에 빠졌으며, 1574년경에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나폴리 거리를 방황하였습니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독기를 품고 가시를 세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1575년 우연히 신부님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일생 그를 괴롭힌 다릿병과 신세만 한탄할 게 아니라 자신도 이웃을 위해 아픔을 감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좋은 물고기 탄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온 힘을 쏟았으며, 로마의 산 자코모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가 성 필립보 네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병자들을 위한 봉사 수도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자신보다 더 아픈 이를 돌보다 하느님께 갔습니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물고기의 조건입니다.
물론 먹히는 것은 아픔입니다.
어차피 독과 가시를 품고 사는 것도 아픔입니다.
그것보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것을 배운 이는 좋은 물고기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듯이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밥이 되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먼저 이웃에게 밥이 되어주어 이웃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현대 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종말’은 지금 진행 중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4,19)
사람을 낚는다는 말이 나쁜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구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은 죽음과 멸망을 상징하고, 사람을 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물의 비유’에서, 그물을 바다에 던지는 것은 선교활동을 상징합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 라는 말은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다른 뜻으로 생각하면 교회 안에 의인들과 죄인들이 섞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그물을 아무렇게나 던져서 닥치는 대로 고기를 잡는 것으로, 즉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지 않고 아무나 다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선포하지만,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는 것은 아니고, 복음 선포에 응답하는 사람, 즉 신앙생활에 대한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비신자 교리 교육을 충분히 한 다음에 신중하게 세례성사를 집전합니다.
그렇다면, 그물 속의 고기들은, 즉 신앙인들은 처음에는 다 좋은 신앙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좋은 신앙인으로 심판대에 서고, 어떤 이는 중간에 변절하거나 타락해서 나쁜 신앙인으로 심판대에 섭니다.
2)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인 일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종말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마태 3,10).
그런데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명백하게 죄가 드러난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의인들’은 ‘회개한 사람들’이고, ‘악한 자들’은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자들’입니다.
3)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라면, 최후의 심판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는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다.”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인생이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라면, 너무 힘들지 않은가? 신앙생활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심판’은 꼭 처벌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하기 위한 심판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는 말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멸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결과는 각자 자신이 선택하는 셈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예수님)께서 구원이나 멸망을 ‘선고’하시기 전에, 각 개인이 스스로 구원과 멸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울며 이를 가는” 상황도 지금 이루어지는가?
인간 세상에는 죄 속에서 살면서도 정말로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악인들이 많지 않은가?
양심이 마비되어서 죄의식도 죄책감도 없이 살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인데, 그러나 그들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예외 없이 후회와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이라도 지옥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겉으로만 안 그런 척 할 뿐입니다.
4)
지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다음 경고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마태 3,7ㄴ-8.10-12)
자기 자신이 ‘쭉정이’인 줄 모르고 ‘알곡’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회개를 ‘남의 일’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바로 그 착각과 자만심은 대단히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죽음 -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시편 146,1ㄴ-2ㄱ)
7.21일 사후, 이렇게 크고 깊고 길게 울림을 준, 향기로 남아 있는 분은 처음일 것입니다.
향년(享年) 73세로 사망했다는 향년이란 말마디도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살아서 누린 나이 답게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누렸고 겪어낸 분입니다.
신자 아닌 경우 유가족이 청하지 않았는데 가톨릭교회 주교가 이렇게 각별히 장례미사에 추모강론을 한 경우도 사상 초유의 사건일 것입니다.
그 까닭은 믿는 누구보다 내용적으로 충실히 주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참 아름다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후 10일이 지났는데도 신문에서는 릴레이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미담성 기사입니다.
축생(畜生;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의 비유)의 시대, 비로소 인생이, 사람 얼굴을 한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흡사 불교의 윤회설을 생각할 정도로 명칭만 사람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짐승같은 모습들도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사람 얼굴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길다 싶지만 어제 기사도 소개합니다.
“작가 서해성은 그의 넋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전에 꽃을 올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하늘에서만 빛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마을에 불이 켜지면 별들의 노랫소리를 담아 내려올 것이다.
모든 잘난 것들이 사라진 마을에는 또 다른 김민기가 살고 있을 것이다.
주막을 발견하면 어떤 속기(俗氣)도 묻어있지 않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 삶도 떠내려가고 있다.
노을 뒤편의 어둠이 보인다.
무엇을 받들고 무엇을 버려야 김민기 마을에 들 수 있을까.”
(김택근)
오늘은 8월 첫날이자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창립자이자 윤리신학의 대가인 참 아름다운 사람,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그와 수도회의 모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루카 4,18) 였습니다.
그는 18세기 한생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착한목자 주교학자였습니다.
그는 엄한 윤리를 강조한 얀세니즘의 흐름 안에서도 고해소에서는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매우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며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스레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들을 돌봐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제가 이용하는 일력의 8월 주제어는 노자에 나오는 ‘독립불개(獨立不改;흔들리지 않은 마음은 단단한 몸가짐에서 나온다)라는 말마디로 우리 삶의 지침이 됩니다.
이어 8월1일 옛 어른의 말씀 역시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생각과 행동 사이만큼 먼 것은 없다.
공부는 그 먼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다.”
<다산>
이런 공부가 평생학인의 참된 공부요, 우리의 전삶을 망라한 삶자체가 공부이겠습니다.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마음에 붙어 행동으로 나타난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온다.”
<순자>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이 아니라 ‘군자의 학문’처럼 잘 살았을 때 잘 죽은 선종의 죽음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에 직결됩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오늘로써 마태복음 13장, 하늘 나라의 비유들도 끝납니다.
엊그제 복음 ‘가라지 비유의 풀이’처럼, 오늘 그물의 비유 역시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런 심판을 구체적으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때 적당한 긴장에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조언은 늘 들어도 반갑습니다.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 전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타고난 ‘이야기꾼(storyteller)’입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종말의 죽음에 임박해서는 너무 늦습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손오공처럼, 모든 시간이, 모든 삶이 하느님 수중에, 하느님 그물망에 있습니다.
그물을 들어 올리는 날이 죽음의 날입니다.
의인의 삶이었는지 혹은 악인의 삶이었는지 확연히 구분될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이런 종말심판에 대한 믿음이 의인의 삶을 선택해 살게 합니다.
어제 지인의 언급을 잊지 못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교황님의 8월 기도 지향은 '정치지도자들을 위해서'입니다.
“불공정과 불의가 만연된 위정자들 집단입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불공정과 불의가 거짓이 일상화되어갑니다.
국민들이 처음엔 놀라며 분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그러려니 하고 마비 중독되어 가는 것이, 서서히 사회 전체가, 나라 전체가, 소리없이 썩어가는 것이, 망해가는 현실이 두렵습니다.
늑대 소년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거짓말에 동네 사람들이 나섰지만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은 세 번째 정말 나타났을 때는 아무리 외쳐도 거짓말인줄 알고 나타나지 않아 늑대에 먹혔다는 일화입니다.
무신불립, 한번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를 대할 때 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물망을 들어 올릴 때가 심판의 죽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옹기장이의 비유’가 흡사합니다.
옹기장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옹기그릇과 같은 우리의 존재임을 깨달아 겸손히 그분 뜻에 따라 살 때 아름다운 삶에 죽음일 것입니다.
성가 49장 옹기장이를 조용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옹기장이 손에든 진흙과 같이
내게 있는 모든 것 주님 손에서,
님 뜻 따라 나의 삶이 빚어지리니,
가르치심 마음새겨 들으렵니다.”
진흙하니 어제 읽은 감동적인 글도 생각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 3,19) 구절에 대한 풀이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죽어서 흙될 생각말고 살아서 너는 흙으로 살아라.
온갖 썩는 것, 더러운 것, 말없이 품열고 받아들여 오래 견디는 참사랑, 모든 것 삭이는 세월에 묻었다가 온갖 좋은 것 토해내어 마침내 열매 맺도록 다시 말없이 버텨주는 흙으로, 흙으로 살아라.
너는 흙이니 오오, 거룩한 흙으로 살아라.”
(이현주)
흙의 영성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흙에서 나온 흙처럼 겸손한 참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겸손(humilitas)이자 사람(homo)이요, 이에 가장 가까웠던 분이 예수님이자, 앞서 소개한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은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모두에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너희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 비유들을 다 깨달았는지 물으시며 각오를 새로이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집주인처럼 성경의 곳간에서 지혜로이 새것도 옛것도 꺼내면서 기존관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시편 146,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옹기장이 하느님 손길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오늘 되시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옹기장이로 비유하십니다.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예레 18,4).
흙은 가소성(可塑性)이 있어 만드는 이의 의도에 따라 모양의 변형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옹기장이는 이를 잘 알기에 제대로 된 형태가 나올 때까지 계속 흙을 매만지지요.
일단 흙으로 빚은 그릇이 가마에 들어가 불에 구워지면, 그때는 형태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뒤늦게 결함이 발견되어도 수정이 불가능해서 결국 깨버리는 수밖에 없지요.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는 내 손에 있다."
(예레 18,5)
그러니 우리가 아직 진흙 상태로 주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비록 흠 많고 일그러진 몰골이라도 우리를 포기해 내던져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심을 다해 재차 삼차 사차... 계속 다듬고 고쳐 주실 것이니 말이지요.
우리가 창조 때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때까지, 하느님 모상성이 충만히 빛날 때까지 용서와 자비와 기다림의 주님 손길은 지치지 않고 무한 반복될 것입니다.
복음은 지난 며칠 동안 이어지던 하늘 나라 비유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 13,48)
하늘 나라는 일단 열린 상태의 그물입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가 다 들어 있지요.
세상 종말에 선별작업이 시작되면 그때에는 선인과 악인의 처지가 극명하게 갈릴 겁니다.
사후 세계를 믿는 우리에게 다소 긴장감을 형성하는 대목입니다.
신앙도 사랑도 희생도 나름 하느라고 했건만 자기가 백 프로 선인 축에 끼일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좋은 것들"을 먼저 골라낸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분명 좋은 부분이 다 있으니까요.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먼저 고르고, 남은 것 중에서 비교적 좋은 것을 고르고, 또 나머지 안에서 그나마 좋은 것을 고르고 ... 이 작업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고기가 그릇에 담겨질 것 같습니다.
고기로 비유된 우리 중에 좋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영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고르고 고른 선별 작업 후에도 밖에 버려질 나쁜 것, 악한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울면서 이를 갈 것"(마태 13,50)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통탄해서 울며 이를 간다는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늘 나라를 갈망했다면 비록 실수는 있을지언정 하늘 나라에 맞갖는 모습으로 살려고 애썼을 터이고 그 자국은 영혼에서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하늘 나라에 어울리는 모습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고 적극적으로 그 반대의 길을 가던 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있는 내내 하늘 나라에 속하기를 거부하며 하늘 나라에 속할 만한 이들과의 교류조차 불편해 했을 것이고요.
어쩌면 그들은 하늘 나라를 자기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바꾸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불평하고 분열시키고 분노하는, 울며 이를 가는 것이 매우 익숙한 이들일 확률이 더 크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좋은 것들을 골라내는 하느님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눈길을 바라봅니다.
행여 하나라도 놓칠까 주의를 기울여 살피고 또 살펴 좋은 점을 찾아내는 자애 가득한 시선입니다.
진흙이 제 꼴을 갖출 때까지 싫증 내지 않고, 노고를 마다 않고 다시 흙을 주무르는 옹기장이의 정성어린 그 손길과도 닮아 보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의 좋은 점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또 더 좋게 되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시지요.
좋은 것이 나올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껏 흙을 매만지는 옹기장이의 땀방울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맺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옹기장이 하느님 손길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자애로운 그분 손 안에 있으니 모든 걱정 붙들어매고 믿고 감사하며 의탁합시다.
우리는 하느님이 손수 빚으시는 멋진 작품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옹기장이와 진흙>
낯선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서로 교환하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명함에는 이름, 직장, 메일,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저는 이름을 소개할 때 주로 세례명인 ‘가브리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브리엘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준 천사입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쉽게 저를 기억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이름과 세례명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과 세례명의 뜻과 의미를 떠올리고, 그 의미에 맞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지역의 이름을 따라서 성당 이름을 정합니다.
제가 있는 성당의 이름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댈러스는 지역 명칭이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주보성인의 이름입니다.
미주 지역의 성당은 대부분 한국의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려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개신교회는 이름을 정하는 방식이 가톨릭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개척교회의 목사님과 공동체가 교회의 이름을 정하는데, 지역의 명칭이나 주보성인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성인이라는 교리가 없고, 가톨릭처럼 속지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보면 ‘반석교회, 빛과 소금 교회, 광명교회, 온 누리 교회, 사랑의 교회, 방주교회’와 같이 성경에서 교회의 이름을 찾습니다.
한 목사님이 공동체와 함께 교회의 이름을 정했는데 ‘주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의 이름을 주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님도 아니고, 교회의 주인은 장로님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기에 ‘주님의 교회’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원칙에 따라서 10년만 목회하고 떠났습니다.
장로들도 임기를 정하고 모두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와 목회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들이기에 큰돈을 들여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 큰 강당을 지어주고, 그 강당의 일부를 교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 재정의 50%는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고, 50%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헌금 봉투에 이름도 적지 않았고, 주보에 헌금 낸 교우의 이름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니 이름을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했어도 교우들은 기쁘게 헌금했다고 합니다.
1년 예산을 정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지출했다고 합니다.
다만 모든 지출의 원장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지출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예산을 정하면 그 예산에 부족한 금액을 확보하기 위해서 헌금 설교를 해야 하는데, 예산을 정하지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걸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니, 35년이 지났어도 공동체는 사랑과 기쁨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옹기장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입니다.
진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과 사람입니다.
세상 만물은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오직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 진흙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실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십시오.
더불어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인간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모든 계획도 사라져 버린다.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셀던 글래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상당수는 사실 필요가 없지요.
지금까지 이루어진 놀라운 발견 중 대부분이 우리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예요.
매일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는 기쁨을 제외하면 말이죠.”
결국 물리학자들의 연구는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신학생 때의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철학, 신학을 배우며 이것이 과연 이 세상에 어떤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조금 더 이해하는 기쁨이 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되지 않는다고 또 잘 모르겠다며 공부하기를 소홀히 했던 저의 게으름을 늦게나마 반성하게 됩니다.
신자들도 하느님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서 우리 역시 선한 모습으로 악인과 구별되게 됩니다.
또 그 안에서 하느님을 이해해 간다는 기쁨도 얻게 됩니다.
알려고 하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쓸데없는 노력이라고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수록 하느님을 더 모르게 되면서,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치 그물에 걸린 온갖 종류의 고기 중에서 좋은 것만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도 의인들은 받아들여지고 악한 자들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그때 가서 울며 이를 갈면서 후회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의인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또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알려고 한다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맘껏 누리면 그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고, 남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이 결국 악인의 길이 되고, 심판 때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특히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강조하셨던 사랑의 길을 걷기 위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그분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지금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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