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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들[레알청춘일기 - 배선영] 배선영
승인 2013.09.13 21:48:21
“백수 S.”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의지’ 상태였다. 어떤 제안을 받든, 마음속에서는 ‘하기 싫어!’라는 말만 떠올랐다.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서른 살이 넘어서도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백수 생활 세 달째에 접어들고 나서는 이 생활이 슬슬 지겹게 느껴진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가도, 아직 체력적으로 충분하지 않으므로 무리라는 생각, 지금 주어진 시간을 즐겁게 보내면 된다는 생각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을 오간다. 왜 일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 때문인가? 평생을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 대한 신화로 가득 찬 이 사회에서는 쉬는 것도 마음 편히 할 수가 없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옥죄지 말고, 무리하기보다는 여유와 성찰의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불안함은 어쩔 수 없다. 종종 구직란을 보면 암담하기만 하다. 평생 어떤 곳에서도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무섭다. 성급하게 일을 구하려고 하는 M에게, 지금처럼 한가로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이고 계속되지 않을 것이니 마음 편히 갖자고 의연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다. “백수 M.” 주로 도서관에서 서식하고, 여건이 되는 한 주중에도 미사를 드리러 간다. 성체조배실에서 경건한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S와 마찬가지로, 면역력이 떨어져 병약한 M에게 병원에 가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다. 독서를 좋아하며,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DVD를 찾아보기도 한다. 요즘은 송봉모 신부님의 인간 시리즈를 읽으며 감명을 받고 있다. 부산으로 휴가를 다녀왔고, 7일 피정을 하는 등 백수 동지들 중에 가장 활발하고 알찬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M은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성경을 정독하고 싶고, 자신의 종교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선교활동을 하고 싶고, 성지순례도 가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막연하다. 지금은 자신의 삶과 예수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통찰하는 중이다. “백수 Y.” 지난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휴가도 없이 주 6일 근무를 했었다. 이른 나이에 가장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어 그 부담감으로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을 찾겠다고 과감하게 백수가 되었다. 하지만 구직란을 들여다볼수록 자신에게 어울리고 맞는 일을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결국에는 눈을 낮춰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았으나 터무니없는 근무환경과 급여에 놀라며 현실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문적인 경력도, 기술도 없어 막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늘 밝고 대책 없이 긍정적이다.
“백수들.” 무슨 일을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살면서 성취의 경험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음을 깨닫고 절망하던 S는, 같은 처지의 백수 동지들 M과 Y에게 성취감을 느껴본 경험에 대해 물었다. 어떤 일을 열심히 해서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꼈던 경험들은 셋 모두에게 분명히 있었다. 오랫동안 있고 있었던 그 경험들을 떠올리며 M과 Y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며 좋아했다. 생각지도 못한 피드백을 받은 S는 셋이 함께하는 이 시간들을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혼자만의 설렘을 느꼈다. 그리하여 S는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쉽고 간단한 것들을 제안해 보았다. 연상 게임. 그밖에도 단골 카페(4시 이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2,300원으로 백수들에겐 부담이 적은 가격이어서 무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 자주 가곤 한다)에 모여서 서로가 읽은 책들이나 가족들에 대해 담소를 나눈다. 같은 성당에 다니는 세 친구에게 종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남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울 나이에 사회적으로 정해진 코스에서 빗겨나 있는 것에 대해, 그래도 괜찮다며 서로를 위안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함께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고, 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일을 하고 있었을 때에는 불가능했던 평일 낮이라는 한가로운 시간에 이루어진다. 평일 오후, 카페도 공원도 영화관도 한산한 이때, 남는 게 시간인 백수 동지들은 자신들을 위한 공간인 것 마냥 자유를 만끽한다. 얼마 전 S의 생일 날, M은 손수 구운 케이크와 마음을 담은 엽서를 준비했다. Y도 S를 위해 엽서와 선물을 주었다. S는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의 의미는 다름 아닌 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 자신이 가진 것들을 펼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단단히 하는 것도 좋지만, 서로에게 위안이 되기도 하고 즐거움이 되기도 하기에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다. S와 M, 그리고 Y는 혼자였다면 외로움까지 더해졌을 우울한 시기를 함께 지내면서, 산뜻하고 따뜻한 날들로 만들고 있다.
배선영 (다리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