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포도주 표적 (요 2:1-11)
요 2:1-1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사람들은 신비한 것을 좋아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초월적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모든 시선이 쏠리게 됩니다. 흔히들 초월적 사건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영(靈)이라 하고 인간을 육(肉)이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세계를 영이라 하고 보이는 피조 세계를 육이라 합니다. 육은 영을 몰라요.
그러므로 영이 육의 세계에 나타 날 때는 기적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은 영의 나라에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도 우리 인간들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은 것은 지금까지 인간들 세계에서 접해 보지 못한 일들을 예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물위를 걷는다든가, 중풍 병자를 고친다거나, 죽은 사람을 살린다거나, 무화과나무를 죽게 하거나, 풍랑을 잔잔케 하거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나 먹이게 하는,, 등등의 것들은 인간들 세상에서는 경험 할 수 없는 생소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행여나 자신에게도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행운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하자 이는 표적을 보기 위함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표적(表迹)이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상징화 시켜서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나가 풍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제물이 되어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죄와 사망이라는 풍랑 속에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요나가 죽음에서 살아나서 니느웨 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이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것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모두가 메시야로서의 행하실 것들의 표적입니다. 즉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일반 종교에서 행해지는 초월적인 사건들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기적(奇蹟)이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기적을 행하게 되면 초능력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그 사람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추종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성을 잘 아는 종교꾼들은 지금 이 시간도 기적을 행할 능력자가 되기 위해서 40일씩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불철주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종교에서의 기적은 영웅이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과거 복음을 몰랐을 땐 한 달을 금식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목회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한 금식이지만 그 속내에는 행여 능력이라도 받아서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바램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았으면 교회는 부흥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지금처럼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감사와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선 전 하나님께서 그 때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고 있답니다.
물론 목회를 하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아픔들을 겪다보면 교회 부흥이라는 미련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부흥이라는 매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시험을 합니다.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는 지금도 앙금처럼 남아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목사는 교회 때문에 망합니다. 보이는 교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는 선악과와 같아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늘 보이는 교회라는 허상을 깨트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교회는 복음과 비교하면 견줄 것이 아닙니다. 옛날엔 교회 없으면 죽는 줄 알았지만 이젠 복음 없으면 죽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 할 일이지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건방지고 위선적이고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재의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실제로 목사들은 교회가 부흥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립니다. 목사들이 40일씩 사선을 넘나들며 금식하는 것은 그만큼 기적이라는 능력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 세계에선 기적이란 사람들을 자기에게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되고 매력이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병 고침이라든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라든가? 특별한 체험을 하였다고 하는 것들이 성행하고 있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비한 일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신비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든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구름타고 승천하신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일들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기적들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애당초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성경을 시작하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언명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석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세계를 영(靈)이라고 하고, 인간 세계를 육(肉)이라고 했다고 하였지요. 영(靈)은 육(肉)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낱낱이 알 수 있지만, 육(肉)은 영(靈)에 대하여는 소경입니다. 영(靈)은 육(肉)에게 감추어진 세계이고, 감추어진 영(靈)이 육(肉)에게 나타날 때는 기적으로 보인다고 했어요.
성경이 시작을 열면서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靈)에 의해서 육(肉)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靈)은 육(肉)을 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힘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靈)에 속한 하나님이니 천사들이니 마귀니 천국과 지옥이니 영생이니 영벌이니 하는 것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해하기 때문에 추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 속에는 이러한 영(靈)에 속한 것들만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믿음으로만 이해 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믿음이 오면 영(靈)에 속한 것들이 이해가 되어집니다. 아니 이해가 된다고 하기보다는 믿어집니다.
인간들 입장에선 하나님의 세계 자체가 기적에 속한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선 평범한 일임에도 인간 세상에선 기적으로 보일 뿐입니다. 영(靈)의 나라에선 평범한 일도 육(肉)의 나라에선 기적으로 보입니다.
아니 영(靈)이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죽은 자를 살리거나, 병을 고치거나,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거나,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물 위를 걷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피조 세계인 육(肉)의 나라에선 놀라운 기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적 안목에서 바라보면 기적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기적에 속한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에선 알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 속한 자”들 즉 영에 속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다름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즉 영의 나라에 속한 자들을 찾아내고자 기적으로 오셨고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고 하셨습니다. 이는 너희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부리는 천사(영, 靈)입니다.
욥 1:6-7=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천사(영, 靈)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천사(영, 靈)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그럼 마귀도 영(靈)이므로 예수님과 같이 초월적인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도 기적을 일으킨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계 13:13-14=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마귀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능력을 주어서 일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임무는 지옥 갈 백성을 추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적으로 지옥 갈 자들을 추수합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세운 세상의 잡다한 종교들도 기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감추고자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미혹 할 때 기적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초월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거기에 어떤 신비함이 있는 줄 알고 그리로 몰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종말이 될수록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갖가지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 24:23-28=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는 것은 지옥 갈 자들은 거짓 선지자에게 모인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지옥 갈 사람을 기적을 통해서 모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일으키는 이유는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추수하기 위함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멸망 받을 자들을 모으라고 기적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적 자체는 나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이라면 미혹이고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처음으로 행한 기적 사건입니다. 사건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 집에 초대를 받아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없어서는 안 될 포도주가 떨어져 주인이 깊은 근심에 빠져 있습니다. 신나고 흥겨워야 할 잔치집 주인이 포도주가 떨어지자 갑자기 우울해 진 겁니다. 이를 알게 된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네가 어떻게 좀 해보라 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거절합니다. “아직까지 자기 때가 되지 않았다” 고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서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 할 것을 당부하고 하인들을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때와는 달리 하인들에게 빈 항아리에다가 물을 떠서 채우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 항아리 속에 있던 물을 손님들에게 갖다 주라고 하자 하인들이 그대로 하였는데 이상하게 손님들이 이렇게 좋은 포도주는 처음이라고 하면서 즐거워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내용입니다.
본문 내용을 보면 예수님과 마리아는 마치 선문답하듯 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안한다고 하는데도 시키고, 예수님은 안한다고 하면서도 행합니다. 왜? 이런 뜬금없는 일이 예수님의 공생애 첫 기적으로 행하셨을까요?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제자들과 하인들이 이 사건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었더라” 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은 예수님이나 마리아나 제자들이나 하인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적”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표적이란? 장차 이런 일을 할 것이라는 예표 즉 싸인(신호) 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하실 일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잔치 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준 기적은 무엇을 보여주는 예표인지 살펴봅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 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 22:1-2=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하나님에 나라를 잔치 집으로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잔치 집은 즐겁고 풍성한 곳입니다. 잔치 집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인이 준비한 음식을 먹고 마시며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에 흥을 돋우게 해주는 것이 바로 “포도주(술)” 입니다. 술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합니다.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줍니다. 잔치 집에 온 사람들은 그 순간만큼은 술로 세상 근심 걱정들을 다 잊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므로 잔치 집에선 술은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음식입니다. 그래서 잔치를 준비하는 주인은 오래전부터 맛있는 포도주를 넉넉하고 준비해 놓습니다. 주인은 손님들이 다 술에 취하여 잘 먹고 즐겁게 잘 놀다 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이런 잔치 집을 성도의 신앙생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모르기 때문에 기쁨을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자연히 잔치 집과 같이 즐거워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축복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일이 아니고 은혜를 누리고 만끽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취하여 세상만사 시름 다 잊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구약 이스라엘은 잔치 집이 아니라 초상집이었습니다.
나라 자체가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어 백성들의 삶은 노예로 피폐해져 한숨으로 지내는게 일이었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무거운 율법 신앙에 질식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신앙생활은 기쁨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이는 그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본문의 잔치 집처럼 술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종교는 갖가지 율법 조항으로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옥죄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다윗 왕 시절 그 화려하고 부국 강성하던 나라가 이처럼 쇠퇴한 것은 모두가 율법이 해이해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패망하여 종살이 하다가 제국들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지금 로마의 식민지까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여 유대교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포로 되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우리 조상들이 망한 것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서 무너진 이스라엘을 건설하자고 종교 지도자들이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때 나타난 종파들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쿰란 공동체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 시대 우후죽순같이 범람한 한국교회 교단과 같습니다. 서로의 종파를 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누가 더 율법에 엄격한 법통을 유지한 교단인지 서로 경쟁하다가 보니 백성들을 자연히 율법으로 누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종파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확대 해석하여 엄격하게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너무 지나치게 옥 죈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율법 아래 매여서 신음하면서 종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포도주 떨어진 잔치 집인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지도자들 역시도 스스로도 지킬 수 없는 조항들을 만들다 보니 외식으로 흐르고 만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간 혼인잔치 집은 구약의 율법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지옥이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면서 기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는 한숨과 걱정뿐입니다.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간 구약의 율법교회에는 사람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기쁘고 즐겁게 해 줄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기쁨도 감사도 없습니다.
그곳에 지금 예수님이 가셔서 율법이 아닌 믿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합니다. 이건 전혀 다른 복음입니다.
예전에 맛 보지 못하던 포도주인 셈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포도주라는 것을 알리는 셈입니다. 그래서 잃어 버렸던 잔치 집의 흥을 돋우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잔치 집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신 포도주 덕분으로 초상 집 같은 분위기가 일순간에 잔치 집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도의 신앙생활로 적용을 한다면 성도의 신앙생활은 잔치 집과 같이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은 또다시 구약의 율법교회 성도들처럼 신앙생활이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는 기쁨은 없고 성화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계명에 짓눌려 오금을 못 펴고 있습니다.
지금은 목사들이 성화라는 새로운 율법이 만들어서 교인들 목에 걸어 놓고 멍에처럼 잡아당기며 끌고 다닙니다. 신앙생활이 기쁨이 아니고 고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같이 말입니다. 지금도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가나 혼인잔치를 벌린 주인처럼 포도주가 없어서 좌불안석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자들은 율법적 요구를 이루어야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율법 지킴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시대 교회들은 성경에도 없는 갖가지 규범들을 만들어서 지키라고 짐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죄인들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옛 언약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새 언약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약의 포도주 대신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새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겠다는 의미에서 잔치 집에 새 포도주 사건을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의 포도주 기적은 고통스럽던 신앙생활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아직 내 때가 아직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란?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 하였다는 것이 믿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식 신앙은 사라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 아버지와 새 언약을 맺습니다.
마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서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내가 너희들과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면서 받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이란? 성도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받아야 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내 것이라고 믿는 믿음에 법이 곧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믿어지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령이 임하셔야 됩니다.
성령이 성도들에게 임하는 그 때가 곧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의 기적이 실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면서 아직 내 때가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란? 포괄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심과 성령이 임하심까지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성령이 임하여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 포도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는 성령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난 제자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던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 나자 기쁨에 사로 잡혀 담대히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 합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이는 필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낮술을 먹고 취하여서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죽고 사는 문제를 잊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기쁨으로 날마다 모이고 찬송하고 유무상통 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는 필시 술 취한 사람들이 술의 힘으로 담대해 지고 기뻐하는 모습과 방불한 것이기에 누가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술은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줍니다. 관대해 지도록 합니다. 술취한 사람들 보세요. 얼마나 너그럽고 인정이 많은지 팁도 술값보다 더 많이 줍니다. 제 정신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술이 들어가면 행하게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라는 새 술에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구원의 기쁨을 깨달으면 사람에게서 관대함과 관용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 때 만큼은 돈도 아깝지가 않아요. 그래서 헌금도 풍성 풍성 합니다.
물론 제 정신 돌아오면 내가 왜? 그러 짓을 했을까 하고 후회 하지만 말입니다. 마치 술 깨고 나서 자기가 저질러 놓은 것을 생각하고 한 달 동안 해결한다고 노심초사 하듯이 말입니다.
암튼 성령이라는 새 술에 취하면 살 맛이 납니다. 예수 믿을 맛이 납니다. 하지만 성령이라는 새 술에 취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무기력하고 힘들어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채운다는 양적인 뜻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이 믿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짐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믿어지기 때문에 새 언약 안에서 자유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성도가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하는 자는 그 속에 기쁨이 넘칠리가 없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는 종이지 아들이 아닙니다. 종은 안식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안식은 아들만이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하셨습니다.
골 2:12-23=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의문에 쓴 증서는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거운 짐으로 다가옵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 인간을 옥으로 끌고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도 지켜도 끝이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일점일획(一點日劃)도 가감 없이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겉으로 지킬 수 없는 것을 마음에 상태로 소급하여 지키라고 적용을 하십니다.
산상보훈이 새로운 율법입니다. 너희들 한번 지켜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과연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미워해도 살인하였다고 합니다. 속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하였다고 합니다. 형제에게 욕을 해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죽이고자 작정 하여서 하신 말씀입니다.
껍데기도 지킬 수 없는 것을 마음 속까지 지키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넘어진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선 넘어지게 하고 무거운 짐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짓눌려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백성이 주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종들이나 지키는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붙잡지도 맛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말씀을 지켜서 의를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다 지켜 주셨으니 만지지도 말고 맛보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신다면 그 지체는 머리가 이루신 것을 즐기면 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수 많은 교인들이 구약교회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옭아맵니다.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름하여 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성화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 대한 기쁨은 없고 거룩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신앙생활이란? 죄사함 받고 구원 얻음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말씀을 지키고 수고하여야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주심에 대하여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신 성도는 가나 혼인집과 같이 새 포도주로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당신은 구약교회입니다. 아직도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구약사람입니다. 구약식 신앙은 자기가 기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율법 지킴으로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물론 율법을 지키면 잠시 동안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자기 행함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불완전한 기쁨입니다.
이건 마치 아픈 사람이 주사를 맞고 나면 잠시 동안 통증을 잊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열심히 지켰다는 주사약 기운이 남아 있을 땐 기쁘고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다는 주사 약 기운이 떨어지면 여지없이 기쁨은 날아가고 근심과 걱정이 엄습해 옵니다.
이러한 신앙은 항상 미친 사람 널뛰듯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땐 산이라도 옮길 것 같이 부산을 떨지만 육신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가정적으로나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면 금새 기분은 다운되고 맙니다. 집안에 어려움 이 없을 땐 하나님이 좋다고 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고! 돈 없는데 큰 병이라도 걸리고! 고 3 자식이 성적이 뚝뚝 떨어지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돈 빌려 달라고 하고 좌우지간 마(魔)가 끼어 보세요. 그러면 금새 마음이고 집안이고 지옥으로 변해 버려요.
인간은 육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감정에 기복이 왔다 갔다 해요. 산들바람을 맞으면 기분이 상쾌하지만! 무더운 여름날 습도가 끼고 불쾌지수가 높아져 보세요. 성질 좋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른 땐 집에 들어오면 강아지가 촐랑 거리면 기분이 좋았지만 기분 더러운 날엔 얼쩡거리면 걷어 차 버립니다. 인간의 열심은 몸 뚱아리에 따라서 좋았다 나빴다 합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라도 해 보세요. 기분 좋지요. 그런데 바빠서 교회도 빠지고,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못 보면 불안해요. 이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열심으로 기쁨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신앙은 가나 혼인 잔치 집처럼 포도주가 떨어져 깊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 언약이라는 포도주는 인간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슬퍼 할 일도 기뻐할 일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평안이 마음속에서부터 영생하는 샘물처럼 솟아나기 때문에 기쁩니다.
성령이 속에서 샘물처럼 믿어지게 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겁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12제자들이 그렇게 살았고, 초대교회 성령 받은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도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전 고신측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철저하리만치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경건을 위하여서 TV도 집에서 없앴습니다.
기도는 하루 최소 4 시간 많을 땐 열 두 시간씩 했습니다. 성경은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성경 퀴즈를 하면 늘 일등을 하니 아예 빼 버릴 정도 였으니까요. 헌금도 참 많이 했습니다.
예배란 예배는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주일성수는 기본이고,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 구역예배, 철야예배, 산 기도다, 부흥 집회다 하는 곳은 미친 사람처럼 다녔습니다. 일 년에 40일씩 철야 기도를 하였고, 틈만 나면 산 기도를 다녔습니다.
새벽에 아이들을 깨워서 전도지 100장씩 아파트에 돌려야 밥을 주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아이들은 하루에 성경 석장씩 써야 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성경 구절을 외우지 않으면 집에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좌우지간 그 땐 미쳤어요.
저 역시도 시간만 나면 전도하는 일이 생활이었습니다. 길거리고 버스 안이고 가릴 것 없이 전도하였으니까요. 흔히 말하는 은사 체험도 수 없이 했습니다. 방언은 기본이고, 입신이다, 환상이다, 간헐적이지만 병 고침이다, 귀신 쫓음이다, 해 볼 것은 다 해 봤습니다.
오죽 했으면 주변에서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했으니깐요. 당연히 교회에서는 최고로 믿음이 좋은 집사라고 목사님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여 집사님들은 제 아내에게 저렇게 믿음 좋은 신랑하고 살아서 얼마나 행복 하느냐 라고 부러워했습니다.
제가 예배 시간 대표기도를 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예배 후에 정 집사님 기도 너무너무 은혜 받았어요 라고 칭찬을 수 없이 들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 이게 주님이 주시는 신앙생활의 기쁨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칭찬 듣기 위한 신앙으로 변질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넌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칭찬 소리가 기쁘지 않고 도리어 짐스러워졌습니다.
옛날엔 기뻤는데 이젠 기쁘지 않아요. 공허하기 시작했어요. 이건 아닌데? 사람들이 신앙 좋다고 하면 아! 예~ 예~ 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속에선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야! 라는 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음 좋다고 해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 지금까지 은혜를 빙자한 내 열심으로 버텨왔어!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목사님들의 성화와 행함에 설교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깐 신앙생활도 건성으로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 시간에 설교를 듣지 않고 성경을 보곤 했어요. 하지만 남 앞에선 그런 내색을 내지 않고 혼자서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시험에 든 건가? 내가 왜? 이러지?
그러나 한번 찾아온 마음에 갈등은 점점 더 내 마음을 장악해 왔습니다. 기도가 바뀝니다. 지금까진 “주여! 나를 주의 일꾼으로 사용하소서!” “주여! 나를 보내 주소서!” 라는 식으로 열심으로 충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여!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알게 해 주소서!” 라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열심에 미쳐 있을 땐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내면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음에 갈급함이 찾아들기 시작하니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급기야는 진리를 알게 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날 죽여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치 엘리야가 된 것처럼 말이죠.
나중엔 참다못해서 대구 칠곡에 있는 호렙산 기도원이라는 곳에 하나님과 사생결단(死生決斷)하려고 갔습니다. 누가 거기가 조용해서 기도하기 좋다고 해서 찾아 갔지요. 일종의 자살하러 간 것입니다. 날 죽이든지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든지,,
그런데 하루 밤을 지내면서 기도원 옆 무덤가에서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어요. 내 평생에 그렇게 무서워 해본 적은 없습니다. 난 나름대로 산 기도를 많이 다녀서 무서움을 덜 탔습니다.
그 동안 산 기도를 하면서 때로는 무덤가에서 수 없이 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날 밤은 왜? 그렇게 무서운지 기도도 하지 못하고 진땀만 흠뻑 흘리고 내려와서 기도원 안에서 기도 했습니다. 기도가 될 리가 있습니까? 쌩 억지지요.
그런데 그 기도원에 저하고 어떤 아주머니 한 분 하고 단 둘이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병자 였는데 얼굴이 송장과 같았습니다. 기도원이 낡아서 천정엔 거미줄이 얼기설기 쳐져 잇고 강대상은 옛날 아주 옛날 구닥다리 강대상에 마치 골동품 같고 여하튼 폐교 같은 기분이 들 정도라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고 해요.
기도원 바닥은 일제 시대 때 나무로 만든 바닥이라서 조금만 움직여도 삐꺽~ 삐꺽~ 하는데 깜깜한 새벽에 그런 소리가 들리면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결국 하루 밤 겨우 보내고 죽는 것도 아무나 안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목사님들 설교가 다 다르니 내가 말씀을 알아야겠다고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를 하고 도무지 내 신앙과 맞지 않아서 그만 두었습니다.
난 그때만 해도 은사란 은사는 거의 다 체험한 상태라서 순복음 신앙이 맞는 줄 알았는데 진리에 갈급함이 임하고 나니 도리어 순복음 신앙이 역겨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가 장로교 신학교를 가게 되어서 장로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장로교나 순복음이나 복음 모르긴 매 마찬가지지만,,,
목사가 되어서도 진리에 대한 갈급함은 사라지지 않고 날 더 채근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진리를 알아가도록 끈을 잡아당긴 것 같아요. 그래서 종말론에도 미쳐보고 성화론에도 미쳐 봤습니다.
그런데 이건 아닌데! 뭔가 허전하고 알맹이가 없는 겁니다. 당시 전 종말론에 일가견이 있어서 목사님들 약 20여명 모임을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부산 대구 울산으로 돌아가면서 세미나도 하곤 했습니다. 물론 제가 강사였지요. 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점에서 어느 목사님이 십자가에 대하여 쓴 책을 보고선 지금까지의 내 신앙이 완전히 허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세상에 난 그 책을 보고선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내 신앙이 깡그리 부서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때의 감동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마치 전기에 감전 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곤 마치 시장에서 어머니를 잃어버린 아이가 엄마를 찾았을 때의 안도감과 위로감에서 오는 울음이랄까 좌우지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왜? 이제야 이런 복음을 알게 해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응석부림도 많이 했어요.
그때 서정주 시인의 국화 꽃 옆에서 라는 시가 생각나더군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리 울었는가 보다” 라는 것 있잖아요. 제가 그 때 하나님께 한 말이 그 말이었어요.
하나님 이런 복음을 만나게 하시려고 절 그렇게 광야로 몰아치셨습니까? 원망이 아니라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던지 그 은혜에 너무 너무 행복했어요.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 율법 아래선 안식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토록 율법 신앙에 빠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전 복음을 알고 난후에 노사연의 만남이라는 노래를 복음 송으로 부르고 있어요.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냐! 그건 우리의 바램이었어” 라는 노랫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너무도 잘 표현해 주는 가사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 좋아해요.
당시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 가셨듯이 책으로 날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 가나 혼인잔치 집의 새 포도주 사건을 설교하다가 보니 그때가 생각이 나서 두서없이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암튼 전 그 당시를 제 안에 가나 혼인잔치 집에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사건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지킨 열심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기뻐하였는데, 이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포도주를 저에게 주셔서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이 진리가 되셔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전 그 때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이 주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먹고 난후에, 지금까지 먹어도 먹어도 또 다시 목마르는 율법이라는 물동이를 내팽개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이라는 열심과 충성이라는 떨어지는 포도주를 버리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주신 새 언약이라는 포도주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길게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때 제 마음이 그랬어요.
이제 말씀을 맺읍시다.
새 언약은 누림이고 쉼이지 수고가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자유하지 못한다면 옛 언약 안에 있는 자이지 결코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가 아닙니다. 내 안에 새 언약이 믿어지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주신 것입니다. 마음껏 마시고 즐거워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 갔듯이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율법이라는 물동이를 내동댕이치게 하고 이제는 내가 물을 긷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물을 마시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그 예수님의 열심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 이런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지금도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집의 기적을 성도들 안에서 일으키고 계십니다.
여러분 속에서 가나 혼인 잔치 집에 기적이 일어나시길 기도합니다. 부디 여러분도 주님이 찾아 가시는 기적이 일어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화석화 된 신앙에 성령의 단비를 뿌려 주옵소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게 하옵소서. 마르지 않는 새 포도주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 늘 잔치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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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