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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26,1-9
1 유다 임금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집 뜰에 서서, 주님의 집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의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
3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
4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5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
6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7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주님의 집에서 예레미야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8 그리고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모두 마쳤을 때,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그를 붙잡아 말하였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완고함은 불신의 씨,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확실히 알아야 힘이 된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 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 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 2,40.콜로 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 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한 번뿐인 나의 인생 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 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 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정보가 다인 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채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지식이 끊기면 은총도 끊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고 묻습니다.
분명 그들이 아는 부모나 형제, 자신들에게서 그 능력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해를 추구하거나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그 은혜의 근원인 대상과 그 은혜에 내가 합당한 자세가 있는지 알려고 해야 합니다.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하며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이는 먼저 부모를 믿습니다.
그리고 알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려고 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은총이 주어집니다.
당신을 알려고 하루 5분도 투자하지 않는 이에게 그들이 청하는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교만만 커져 하느님을 자신들의 종으로 여기게 됩니다.
6.25 동란 당시 피난 중 물에 빠져 간신히 살아나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다가 열일곱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세탁 같은 허드렛일을 하던 이철호씨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했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미군들이 맡긴 옷가지들에서 때가 잘 빠지지 않으면 삶아 빨았습니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포격으로 파편을 맞아 그 수술 때문에 여차여차 노르웨이에서 살게 된 그는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다 배가 너무 고파 요리사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보통 요리를 배우려면 주방에서 2~3년씩 감자만 깎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요리의 종류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도록 감자를 여러 모양으로 깎아 놓았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6개월 후에 요리를 배울 수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요리 공부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공부와 일을 하고 대학은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노르웨이 라면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백만장자입니다.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일을 하다가 거의 30년 만에 한국에 들어와 라면을 먹었는데 너무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노르웨이에 라면을 팔아보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그들은 라면을 수세미라고 부르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스프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농심에 자기 이름을 딴 라면 브랜드를 만들어 노르웨이에 팔았습니다.
우스운 모습으로 CF 광고에 직접 출연하고 요리사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라면 시식을 직접 해 주었습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의 저자 세이노도 현재는 1,000억 대의 자산가이지만, 자신이 파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미군 부대에 있는 대학을 다녔을 때 먹고살고자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화장품이나 식료품들을 가방에 넣어 갖고 부유층 아파트들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그런 물건들은 아줌마들이 팔았고 나 같은 남자 대학생은 전혀 없었기에 경비실을 통과하기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문을 열어 준 고객들에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우선 모든 상품에 붙은 영문 라벨들을 사전을 찾아가며 모조리 외웠습니다.
바세린 연고 하나를 팔더라도 눈 화장을 지울 때 사용하면 좋다는 내용도 잊지 않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눈 화장을 지울 때는 면봉을 사용하라고 하였고 면봉도 함께 팔았습니다.
스팸 햄을 팔 때는 새로운 요리법들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한 명의 고객을 만나게 되면 얼마 후 그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하여 주었는데 정말 그 숫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났으며 사전 주문도 생겨났습니다.
은총은 알려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더는 우리에게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계기가 현재 제가 받는 은총의 거의 모든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선입관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필립보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나 사도까지 되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전의 내가 가진 지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지금 모습대로 살고 싶어 변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은총을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을 알려고 하는 노력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
마태오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못마땅하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아 불쾌하다.’ ‘기대, 희망,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거북하고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나자렛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어서 빨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동기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드뎌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고향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경탄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말씀에 완전히 빠져든 사람들, 마음 깊숙히 감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마태 13, 54-56)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릇된 질문, 그릇된 의혹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여야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眞意)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건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심장으로, 영혼으로, 전력투구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개방성의 결여’였습니다.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는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앞에 우선 마음과 영혼, 정신을 활짝 개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고향 마을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인간 측의 활짝 열린 마음과 깊은 신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기적을 계승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은 우리를 심각한 자아 성찰로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서 있는 존재로 전락하기는 너무나 쉽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1)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낮춤’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6-8)
예수님께서 시골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모습을 취하신 것은, 또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목수 일을 하신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낮춤’입니다.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그 ‘낮춤’의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코린 12,9ㄴ)
코린토 1서에 있는 다음 말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1코린 1,24-25)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코린 1,27-31)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 직책, 직무, 학위, 명예, 재산 따위는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학위나 직책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교만이고, 허영인데, 그 교만과 허영심도 죄가 되는 일입니다.
2)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5-36)
‘나자렛’은 예수님께서 다니신 ‘모든 고을과 마을’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나자렛 사람들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나자렛에 가셨습니다.
고향이라서 특별히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향이라는 점 때문에 나자렛에 가신 일을 특별한 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할 것이라고, 또는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고을보다는 좀 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이 환영하거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즉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아마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나자렛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해석하면,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고향과 집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경과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3)
루카복음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에게는, 그 일이 장차 자신들이 겪게 될 일에 대한 ‘일종의 예방주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실 때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마태 10,24-25)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삶 - “모두가 지나간다!”>
새벽마다 줄기차게 울려 퍼지는 매미 찬미노래입니다.
안도현의 시, '매미'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날마다 평생 줄기차게 찬미노래 바치는 수도자들은 이런 여름 매미를 닮았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내일이면 토요일, 머리 삭발하는 날입니다.
2주마다 깎는데 2주가 순간입니다.
아주 오래전 36년 전 수도원 초창기 두 분 스님을 모시고 선禪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저는 보름마다 머리 깎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바로 저의 심정이 그러합니다.
저 역시 2주마다 머리깎는 재미로 삽니다.
마치 ‘2주’ 단위로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루하루 ‘하루’ 단위로 삽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공동체 형제들의 내외적 움직임도 다 다르고 눈부십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사는 수도자들도 모이면 어디나 분잡한 세속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게시판에 ‘8월 제 삶의 모토’를 써서 붙여 놨습니다.
“모두가 지나간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당나라 임제 선사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은 이들로 말하면 오늘 지금 여기가 깨어 살아야 할, 주님을 만나야 할, ‘하늘 나라 꽃자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감동적인 형제의 일화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의 60대 중반의 가장처럼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분들 중의 한분입니다.
자신의 노부모와 처가댁 노부모를 돌봐야 했으며, 자식들도 챙겨야 했고, 대학교수 은퇴 후에도 아들과 함께 카페 개장을 앞두고 있는 형제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려 20여년 이상을 알콜 중독을 극복하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했고, 기적적 은총으로 교수생활중에도 막중한 책임을 다했던 분으로,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보는데, 만난 지 16년쯤 됩니다.
공학박사로 대학교수 은퇴 후, 작은 아들의 자립적 삶을 위해, 또 아버지 노릇 못다한 미안함에 빵굽는 학원에 다니며 빵굽기를 배웠고, 마침내 아들과 함께 개장될 가게에서 아들은 커피를 만드는 사장, 아버지는 빵굽는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합니다.
매사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겸손하고 진실한 형제님의 삶에 감동합니다.
어제 개장을 앞두고 봉헌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빵을 가져 왔는데, 미사를 봉헌할 때 부부의 모습은 흡사 청년들처럼 신선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청춘을, 전성기를 살게 되었다며, 이제 공학박사에서 생활박사가 되었다며 격찬했습니다.
‘데이르’(DAYRE), ‘오늘은 왕’이라는 가게 이름도 멋졌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린 왕다운 삶은 얼마나 멋진지요!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말도 마음에 남습니다.
마가렛꽃은 ‘진실한 사랑’이요, 상사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합니다.
꽃이 지면 잎이 나기에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함을 이렇게 꽃말에 담은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어느 경우든 다 지납니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곁같은 삶을 위해 기도, 노동, 공부가 조화된 삶에 운동 역시 필수입니다.
걷기 운동이 좋고 이에 탁구도 권합니다.
어제 파리 올림픽에서 탁구 여자 단식 신유빈 4강 진출에 앞서 경기를 잠시 봤고, 얼마전 읽은 ‘탁구는 감각의 대화이다’(한경록)라는 칼럼이 생각났습니다.
필자는 탁구의 이점을 “1.몰입할 수 있다, 2.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다, 3.많이 때림으로 스트레스 풀기에 제일이다, 4.최고의 다이어트 운동이다, 5.날씨에 제약없이 언제든지 쾌적하게 즐길수 있다.”로 꼽았습니다.
조화롭고 균형잡힌 영성생활에도 좋은 도움이 되고 심신을 동시에 연마할 수 있는 ‘감각의 대화’인 탁구는 얼마나 유익하고 멋진 운동인지요.
바로 ‘모두가 지나가는 상황에서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없이 살아간’, 또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삶의 대가, 삶의 달인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두 분이 흡사 대칭을 이루듯 서로 닮았습니다.
늘 독서와 복음이 대칭을 이루는 구성입니다.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도 대칭 구조입니다.
얼마전 읽은 ‘대칭의 물리학’을 나눕니다.
“자연계의 형태를 지배하는 궁극의 규칙이다.
우리 주위에는 ‘대칭’인 것이 많다.
동식물의 형태와 패션, 건축 디자인등이다.
대칭은 사람에게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실은 수학이나 물리학 등 다양한 자연 과학 분야에도 대칭성은 얼굴을 내민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우주의 형태를 결정하는 기본 규칙이 바로 대칭성이다.”
예수님과 예레미야의 대칭을 통해서 더욱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두 분 다 고립무원의 외롭고 고독한 처지였고 주변의 질시를 받고 배척을 받았던 참된 예언자였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의 숙명입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지나가는 일들에 흔들림이 없었고 참으로 초연했고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 예레미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가차없이 몰아댑니다.
더불어 오늘날 언론이 예레미야처럼 과연 참된 예언자 역할에 충실한지 살펴보게 됩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나라가 망하든 말든 달콤한 예언을 했다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입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무지에 눈 먼 온 백성이 일치하여 주님의 집에 있는 참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몰려드니 유다가 망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무지에 눈멀기로 하면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막상막하입니다.
선입견에 질투에 눈먼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선입견, 질투에서 자유로울 지혜로운 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대로 우리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부정적 보편적 정서를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사건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한, 깨달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초연하고 자유로울 수 있음은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지만, 지혜로우신 주님은 좌절하기보다는 겸손히 공부와 배움의 기회로, 도약의 기회로 삼으셨을 것이며, 묵묵히, 한결같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하늘 나라 복음 선포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주위 상황에 집착함이 없이 현실에 충실하며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주인을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빼난다.’는 말도 비슷하고, ‘방귀뀐 사람이 오히려 성을 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사실 카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던 노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지자 오히려 수산나를 거짓으로 고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노인들의 거짓과 욕망을 들추어냈습니다.
40억년이 넘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등장한 시간은 30만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긴 지구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아주 작은 시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적반하장으로 지구에 사는 많은 생명을 못 살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시간 머물다 가면서 마치 주인처럼 지구의 생태계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적반하장의 인간을 기다려 주시고, 용서해 주시지만, 감정이 없는 자연은 임계점이 넘게 되면 무섭게 되갚아 줄 것입니다.
배은망덕(背恩亡德)이란 말도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오히려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한다.’는 말도 비슷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려는 인간의 배은망덕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하시면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걷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뜻을 찾는다면 그 역시 배은망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에 가면 어머니께서 “신부님! 성사 좀 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아들인데, 아들에게 고해성사 본다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제가 더 어색해하며 성사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고해성사 후, “아들에게 성사하는 것 힘들지 않아요?”라고 물으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한테 고백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니?”
아들이 자기 죄를 알면 부끄럽지 않을까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 모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종종 신자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고해소에서 목소리 들으면 누군지 알죠?”
이분은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닌, 인간인 저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동창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봅니다.
처음에 고해성사 볼 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가장 저를 잘 아는 동창 신부에게 성사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제게 맞는 훈화를 해 주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솔직히 고해 들은 것이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종 “지난번에 성사 봤던 사람인데요. 기억나시죠?”라고 말씀하시지만,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력 나쁜 머리를 주셔서 하느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그 모든 죄를 다 기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이 세상을 제대로 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러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음이니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고향 나자렛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놀라운 손길이 드러날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상대방의 믿음을 보고 이루어졌음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존경과 사랑으로 사제를 대하지만, 종종 특정 사제를 향해 “저 사람은 사제도 아니야.”라면서 적의를 표현하고 또 폭력까지도 행사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뽑아 사제로 세워주셨음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 믿음 없음이 과연 자신을 행복하게 할까요?
믿음 없는 곳을 하느님께서는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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