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하지만 풍요로운 삶
군중 속의 고독, 풍요 속의 빈곤 등 글깨나 깨우쳤다는 분들이
지어낸 말치곤 그럴듯해 얼른 이해 못할 때가 있어 헷갈린다.
하지만 필자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곤
커피 한잔 홀짝홀짝 하면서 ‘빈곤 속 풍요’라는 주제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흔히 풍요 속 빈곤이란 말이 회자되는 이유는 아무리 성공하여 풍요로워졌다한들
내면, 정신적 세계를 논하기 전에 늘 마음속에 덜 채워졌다는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는 한,
늘 부족하고 특히 금전적인 면에서 그러하여 소위 말하는 갈증이 계속 느껴지니,
그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재산 축적에 여념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 과유불급이란 말을 가슴에 새기어 두고 실천하면 해결될 것이나,
인간이기에 또한 알면서도 실천을 못하는 것이다.
억만장자 빌 게이츠는 Waste Management라는
재활용역회사를 소유하다시피한 대주주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지구환경 개선운동도 하며 부를 축적하는 경쟁도 별로 없는,
치열한 경쟁이 한창인 전기차나 배터리 사업 등과는 다른
어수룩하면서도 알짜배기 장래 유망주라고 한다.
한마디로 빈병 등을 수거하며 부를 축적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분들이 있나하면 빈곤 속 풍요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분들이 있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사목하는 한 신부님은 전체 신자들에게 빈병 수거를 독려하여
조금이나마 넉넉지 못한 교회 재정에 보탬이 되고자 하시던 생각이 난다.
또한 전에 살던 동네에 쓰레기 수거 전날 어둠이 깔린 저녁엔 웬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이집 저집 쓰레기통을 뒤적뒤적해 이상히 여긴 적이 한두 번 아니었던 기억도 난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역시 쓰레기 수거 전날 밖에 내놓은 각종 수거통을 어둠속에서 뒤지는
그림자 비슷한 물체를 목격한 집사람이 약간은 놀란 듯한 음성으로 내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이유야 여러 사연들이 있겠지만.
우리 동네에도 “힘든 이웃이 있나보네”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부터는 빈병들을 빈 상자에 한데 모아 그 분의 수고(?)를 덜어드렸다.
그 후 얼마간 있다 현관 벨이 울려 나가보았더니 웬 할머니 한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웃에 사는 사람인데 힘든 분들을 위해 제가 출석하는 교회의 모금운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일주일에 한번 몇 년째 이렇게 빈병을 수거하고 있는데
상자에까지 따로 모아주셔 너무 편하며 고맙기에 인사 말씀하러 들렀습니다.”라고 하셨다.
좋은 일 하는데 종교 유무가 무슨 상관이며(사실 종교 없음에도 착하고 좋은 일 하는 분들 많으며
교황님 말씀 빌리지 않더라도 무종교인들도 똑같이 절대자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
더구나 종교의 구별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마는 굳이 할머니 말씀, 자신은 개신교 신자라며 하시며
나의 종교를 묻기에 쑥스러워하며 천주교 발바닥 신자랍니다 했더니 역시 다르긴 다르시군요 하신다.
이야기하다보니 장황해졌는데 이번 주엔 억척같이 비가 쏟아진다.
비를 맞으며 찾아온 몸도 불편하신 천사 할머니 건강이 허락되지 않아
더 이상 이 일을 지속할 수 없다 하신다.
그 천사할머니 덕분에 덩달아 그동안 작은 혼자만의 행복감을 느꼈었는데
별안간 그 행복감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얼마간은 안절부절 했다.
그 천사 할머니가 훗날 천국 문에 들어가실 때 살짝(?) 묻어 들어가려 했는데, 다 틀렸다.
이뿐이랴. 마약중독 청소년 선도사업에 오랫동안 애쓰는 고교 동창 목사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더 열악하고 불우한 교우들 가정을 묵묵히 돌보는 개척교회 목사님들,
이런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기에 이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분들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절대자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진정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감사의 마음’을 단지 ‘봉사’라는 환원하는 형식으로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묵묵히 실천하고 계시는 분들이라는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생각난다.
엄격히 말하면 ‘봉사’라는 말은 맞지 않는 어휘라고 하는 것이다.
빈곤 속 부자들이 바로 이런 분들이 아니신가.
문성길/前 워싱턴서울대 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