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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CCPROK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주만사랑
바른 믿음을 가지라 / 마 16:1-12
미국의 유명한 투자의 귀재로 알려져 있는 워렌 버핏이 10여년 전에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워렌 버핏은 자기 재산의 2/3인 370억 달러를, 빌 게이츠의 자선 재단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온 세계에 커다란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그 워렌 버핏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직해야 돈을 번다!’ 여러분 이 말이 믿어집니까? 이와 반대로 우리 사회에는 옛 부터 ‘정직해가지고서는 못산다.’는 말이, 마치 진리인양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대부호가 ‘정직해야 돈을 번다’고 했으니, ‘정직해가지고서는 못산다’는 말은, 진리가 아닌 오도 된 교훈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제4차 세계불교포럼이 중국 무석시 염화만컨벤션센터에서 열렸는데, ‘정신(正信)과 정행(正行)’을 주제로 분과토론을 했습니다. 동국대 이사장 일면 스님이 분과토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른 믿음(正信)이 바탕이 돼야 바른 행동(正行)이 나올 수 있다. 바른 믿음에 의해 바른 행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 행위와 믿음’은 둘이 아니다.” 혹시 그가 옛날에 교회를 다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 자력 구원의 종교’로 알고 있는데, 그들이 믿음을 말하고 믿음과 행위가 하나라고 하니 신기하긴 합니다. 그럼 믿기만 하면 될까요? 아무 거나 열심히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려서 믿어야 합니다. 바른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른 것을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믿어야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른 믿음을 얘기했습니다. 고후 11:4절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은 다른 믿음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이미 ‘다른 믿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다른 믿음입니다.
백동조 목사님이 쓴 ‘바른 믿음 다른 믿음’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개신교에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그 고민의 결과를 책에 담았다고 합니다. 그는 책에서 신앙에 있어서 ‘의지적 결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또는 감성에만 머무르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믿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한 집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믿음, 순종이 없는 믿음에 그친다면, 우리가 그토록 비난하는 구원파와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까닭도, 이 대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따르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잘 믿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열심히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바르게 믿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이 변할 수 있습니다.
10년마다 한 번씩 통계청이 실시하는 종교 분포 조사에서, 2015년 신자 수가 가장 많은 종교는 기독교로 나타났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조사 대상자 중에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람이 19.7%(967만명)였고,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은 15.5%(761만명)였고, 천주교는 7.9%(389만명)였습니다. 2024년에나 종교 분포조사를 하겠지만,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17%, 불교 16%, 천주교 6%였습니다. 매번 2위였던 기독교가 1위로 올라섰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의 숫자가 그만큼까지는 못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이단 숫자까지 포함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한 이중 교적을 가진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대학교를 서울로 갔을 때, 매주 집에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려오지 못하는 주일에 나가는 교회에 등록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이중 교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독교 숫자에는 허수가 섞여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인 숫자는 17%이면 877만명인데 이중교적과 이단들을 빼면 700만 정도로 낮춰서 잡아야 될 거 같습니다. 물론 저도 기독교인 수가 1천만 명을 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숫자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바르게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르게 믿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1900년대 초에 기독교 인구는 1%가 안 되었지만, 그때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바르게 믿는 소수가, 사회와 나라를 변혁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데, 누룩은 소량이면 됩니다. 그러나 가짜 누룩은 한 움큼을 넣어도, 아무런 변화를 못 일으킵니다. 누룩의 문제는 양이 아닌 그게 진짜냐는 것입니다. 진짜를 진짜로 믿는 것이,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한 동네 공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쪽에서는 교회 전도사가 전도지를 들도 전도하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약장수가 목청을 높여 열심히 약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약장수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지자, 약장수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사도 자신의 짐을 챙긴 후 약장수에게 가서, ‘어떻게 해서 그렇게 사람을 불러 모으는지’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약병을 챙겨 넣던 약장수가, 전도사를 한참 쳐다보더니 대답했습니다. “전도사님, 사실 이 약은 가짜입니다. 하지만 전 가짜약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팝니다. 나 같은 약장수도 가짜를 진짜처럼 파는데, 전도사님은 어떻게 진짜를 그렇게도 확신 없이 전합니까?” 진짜를 가짜처럼 믿어도 바른 믿음이 아니고, 가짜를 진짜처럼 믿어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세상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시험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시험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진품 같은 짝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통 사람은 진품과 짝퉁을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오히려 진짜가 가짜한테 밀릴 수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영국의 찰리 채플린에 관한 일화가 아주 많습니다. 채플린은 단순한 코미디언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성을 가진 코미디언입니다. 그가 전성기 때 휴식 차, 아무도 모르게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 조그마한 마을에서 축제가 있다고 떠들썩합니다. 광고를 보니까, ‘채플린 흉내내기’라 해서 채플린처럼 분장해서 진짜처럼 경연대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 광고를 본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서, 진짜 채플린도 신청을 했습니다. 경연대회가 벌어졌는데, 모두가 똑같이 분장을 해서 나온 것입니다. 채플린처럼 동작과 말도 하고, 콧수염도 달고, 헐렁한 바지도 입고, 어정어정 걷는 것까지, 채플린 흉내를 기가 막히게 내는 것입니다. 진짜 채플린도 신분을 속이고 출연했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입상발표가 났습니다. 진짜 채플린은 당연히 1등을 했을까요? 3등을 했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물리치고 1, 2등을 차지한 것입니다. 진짜는 요란하지 않습니다. 굳이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수차례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닌,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긍휼 때문에 하늘의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긴 가짜가 진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르게 믿는 사람들이, 바르게 믿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같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종교지도자들이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다가, 예수님한테 핀잔을 들었습니다. 요즘엔 스마트폰 날씨 어플이 있어, 시간 단위로 날씨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새벽에 교회 갈 때, 우산을 가지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플을 통해 확인해 봅니다. 바깥에 외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외 행사를 잡아놓고도, 주간예보를 통해, 그 날 날씨가 좋다면 맘 놓고, 좋지 않다는 예보가 뜨면 날씨를 위해 염려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는 하늘을 보고 날씨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건 예수님이라서 특별히 안 게 아니고,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습니다. 지식층은 물론이고, 씨 뿌리는 사람도,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종교지도자들도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시대의 표적입니다. 그들은 날씨는 분별할 줄 알았지만,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한테 그 점을 핀잔들은 것입니다. 시대의 표적은 메시야의 표적으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다들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여러 징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여러 징조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걸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지, 멀리 갈 것도 없고 세례 요한부터만 해도 이어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는, 보다 분명한 시대의 표적입니다. 그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손바닥 만한 땅이니 예수님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들은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소문으로 듣기만 했을 거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와서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 하니, 예수님한테 핀잔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대의 표적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성경은 재림의 때에 대해,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마 24: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나 시대의 표적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없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의 재림을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들으면 혹 할 수 있는 내용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분별력에 문제가 생기면, 피해는 고스란히 성도들에게 돌아갑니다.
통일교나 전도관이나 여호와 증인, 하나님의 교회, 신천지 같은 이단적인 가르침은 분별이 가능합니다. 그들은 교리적 이단이기 때문에 분별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실행적 이단입니다. 누가 봐도 교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의 일을 빙자하여 자신의 명예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은, 이단과 별로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을 보세요. 그는 교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했지만, 거짓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발람은 다른 말로 실행적 이단인 것입니다. 주님은 종말 때에, 악한 자들이 표적을 행하며 미혹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막 13:21-22절 ‘그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성경을 알아야 분별력이 생깁니다. 분별력은 바른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바른 믿음의 기초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멀리하면서 바른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일 년에 일독은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주보에 나온대로 읽으면 1년에 1독을 합니다. 꼭 읽기를 바랍니다.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은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대가 예수님 당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특히 종교가 더 심했습니다. 지금은 TV프로에서 개그, 코미디가 사라졌지만, 몇 년 전만해도 상당 기간 정치 블랙코미디를 경험했습니다. 그 동안 뉴스가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있기는 한데, 이상하게 보고 나면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블랙코미디의 특징입니다. 정치 수준이 곧 종교 수준입니다.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은 교회가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다보니, 교회가 세상에 이용당합니다.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다보니, 우리가 세파에 흔들립니다.
주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보여주실 건 십자가와 부활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해서 문제입니다.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것을 교회에서 하려고 하고, 교육자가 할 수 있는 것을 교회에서 하려고 하고, 복지단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교회에서 하려고 합니다. 그걸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걸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걸 하다가 교회 본연의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걸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교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 안 통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떠나셨습니다. 괜히 그들과 논쟁하느라 힘 빼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며칠 앞두고는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힘 빼지 말아야 할 것이 논쟁입니다. 특히 이단과의 논쟁입니다. 가족 중에 이단에 빠진 사람도 논쟁을 통해서는 못 빼냅니다. 대학가에 이단 동아리가 많습니다.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을 할 대는 활개를 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조선일보 등 신문을 보면 이제 대놓고 광고하고 선전하고 그럽니다.
5절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떡 챙기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2명이면 그 중에는 ‘챙기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몸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다른 사람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 하나까지 잘 챙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알아서 챙기겠지’ 하다, 그냥 배에 올랐습니다. 앞의 1-4절을 보면 그리 바쁜 일이 있었던 것 같지 않은데, 서로 미루다 그랬는지 담당자가 있는데 깜박 잊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갑자기 예수님이 누룩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까 만났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떠올리며,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사건을,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도구로 활용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주관심이 제자를 양육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길어야 몇 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래 오래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류 구원의 사명을 마친 후 아버지께로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남길 것은 제자들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실 때, 뭐라고 기도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 17:11-12절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제자 양육에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속을 제자들은 잘 모르는 거 같습니다.
7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님이 누룩 얘기를 꺼내실 때, 제자들은 누룩 비유라도 떠올려야 하는데, 떡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고야,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네...’ 지금 제자들은 이미 건너편으로 가는 중입니다. 지금 생각났지만 떡을 가지러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야, 어떻게 하나... 주님께 말씀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적잖이 고민했습니다. 제자들의 고민은 예수님한테 들키고 말았습니다.
8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제자들은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괜찮았습니다. “떡을 안 챙기면 어떡하냐?” “야, 오늘 떡 당번이 누구야?” 그런데 예수님은 떡과 믿음을 결부시키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떡보다 예수님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떡 문제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대해 걱정하니, 예수님이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떡은 밥을 가리킵니다. 떡은 먹고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떡은 우리가 가진 돈을 가리킵니다. 밥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면, 믿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믿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쓰느냐를 보면, 믿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9-10절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순간적으로 ‘떡과 믿음이 무슨 상관이 있지’ 하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에서 답답한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도 어지간합니다. 어지간히도 깨닫는데 둔합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급식한 일이, 그래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급식한 일은, 불과 얼마 전 일입니다. 그들이 그걸 소문으로 전해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오천 명에게, 사천 명에게, 자기들 손으로 직접 떡을 떼서 나눠줬습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을 자기들이, 바구니에, 광주리에 거둬들였습니다. 그런 엄청난 체험을 했음에도, 예수님 앞에 떡 문제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1절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어주셨습니다. 그 정도면 말뜻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제자들은 알아차렸습니다.
12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떡의 누룩이 아닌 교훈을 말씀하신 줄 깨달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주의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잘못된 교훈은 전파력이 뛰어납니다. 이단의 가르침이 침투력이 강합니다. 주님은 오랫동안 종교기득권층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특별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이단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까지 이단이 침투해 있는 현실입니다. 그들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자들입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신앙의 척도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단들도 성경을 들고 찾아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로 성경을 왜곡시켜 해석하는데 능합니다. 교회 밖에서 성경 공부를 하는 게 매우 위험한 이유입니다. 정통교회는 성경과 함께 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사도신경, 곧 사도신조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믿기 위해 붙들어야 할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어째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죽은 죄인을 살리는 기적, 표적을 가지고 오신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표적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말씀에 순종하여,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의가 되어, 다른 이들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행위에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며, 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복만을 추구하며 산다면, 사두개인의 누룩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천국에 소망을 두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대가 악하여, 예수님이 주신 영생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부인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구원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이 세상에 증거하는,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지금은 분명히 영적인 분별력을 필요로 하는 세대입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영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분별력을 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두워 가는 세대에 살지만, 시대의 표적을 통찰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밝히 깨닫고, 자신의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삶은 고백한 대로 살아야 / 마 16:13-28
여러분, 지난 주에 우리가 바르게 믿기 위해 붙들어야 할 것이 사도신경이라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믿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고백으로 끝나도 됩니까? 아닙니다. 고백했다면 그대로 삶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고백한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커넬 샌더스(Colonel H. Sander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갔고, 그는 어머니가 일을 하는 동안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종종 요리를 했고, 열 살 때부터 농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가 열두 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여 혼자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보험 판매원, 타이어 영업 사원, 주유소 직원 등,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다가, 22살 때 램프 제조 판매업을 하다 망했습니다. 이후 힘든 직장생활에도 열심히 저축한 돈과 퇴직금으로, 39살에 미국 켄터키 주의 코빈이라는 작은 도시에 조그만 주유소를 차렸습니다. 39살 때 주유소 경영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대공황으로 인해 또 다시 전 재산을 날려버렸습니다. 그는 40살 때 다시 주유소를 경영하다가, 어느 날 주유소에 들른 한 세일즈맨이 “코빈에는 마음에 드는 식당이 하나도 없어.” 하고 투덜대는 소리를 듣곤, 식당을 차릴 생각을 했습니다.
요리는 어릴 때부터 해 와서 나름 자신이 있었기에, 자신이 경영하는 주유소 뒤에 있는 작은 창고를 개조해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메뉴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배운 남부 지방의 토속적인 음식들로, 닭튀김, 시골 스타일의 햄, 직접 구운 비스킷 등 요리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한번 맛본 사람은 누구나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식당을 개업한 지 2년이 지나자, 맛있는 음식점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주유소에 딸린 식당으로 시작했지만, 손님이 몰리다 보니, 이제는 식당에 딸린 주유소가 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주유소를 없애고 식당을 확장해, 본격적으로 요식업에 뛰어들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슬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59살이 되던 해에 샌더스는 켄터키 주 정부로부터 ‘커넬(Colonel)’이라는 명예 호칭을 수여받았습니다. ‘커넬’이라는 호칭은, 당시 켄터키 주에서는 지역에 공헌한 사람에게 명예와 함께 수여하는 이름입니다. 언제나 반가운 단골손님으로 가득한 일상에서, 그는 정말 남부러울 정도로 안정적인 성공과 풍요로움 속에 행복감에 충만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지역에 고속도로가 생겨나면서, 그의 식당이 있던 마을은 고속도로 반대편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커넬의 식당은 마치 외딴섬처럼 고립되었습니다. 당연히 식당을 찾는 손님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단골마저 하나 둘 외면하게 되고, 마침내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식당은 경매에 넘어갔습니다. 커넬 샌더슨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알거지가 되었고, 당시 정부가 빈민들에게 베풀어 주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신청을 해서 받은 105달러가, 그의 전부였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65살입니다. 하는 사업마다 망한 절망감과, 아들마저 잃은 충격으로, 커넬 샌더스는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고, 결국 사랑하던 그의 아내마저도 그를 떠나 버렸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절망과 낙심과 상처 속에 괴로워하고 있던 어느 날 밤, 그는 정신병원을 몰래 나와 이리저리 방황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마치 그 소리에 취한 듯이 그곳으로 따라 갔습니다. 그곳은 어느 조그마한 교회였습니다. 그 예배당에는 한 여인이 너무나 평화롭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노래 가사가 그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후렴)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이 찬송소리를 듣고 커넬 샌더슨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평생 예수님 없이 돈만 벌려고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한참 동안 울며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겨 그렇게 울다보니, 어느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정신병이 울며 기도하던 중에 치료된 것입니다. 샌더슨은 기도하고 힘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새로운 인생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11가지 치킨 양념 비법을 개발했고, 투자자를 찾았습니다. 낡은 트럭에 이 양념을 싣고, 미국 전역을 돌며, 이 양념을 사줄 식당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무려 3년에 걸쳐 1,008개의 식당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낡은 트럭에 압력솥과 양념통을 싣고 나타난 생면부지 노인의 제안을, 누가 믿고 투자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1,009번째 방문한 식당에서 ‘예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때 샌더스를 후원하여 식당을 유지하게 해주었고, 그 식당을 출발점으로 전 세계에 3만개 이상의 매장을 가진 KFC(Kentucky Fried Chicken)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새 출발한 그의 나이가 68살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생각, 멋진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남들이 포기할 만한 일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는 대신 무언가 해내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내게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열심히 일한 것, 그거 하나입니다.” 이후 샌더스는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비로 수익금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였습니다. 미국전역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자기의 삶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신 살아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어, 삶의 진정한 행복과 영원의 축복을 소유하게 되기를 권고하는데 남은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나이에 무슨 새로운 것을 시작하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나이가 어때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인데’라고 말합니다. 커넬 샌더스가 KFC를 시작할 때, 나이가 68세였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샌더스가 65세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후 3년 만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남은 삶을 고백한 대로 살았습니다. 고백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고백은 아름답게 포장하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고백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왔을 때, 아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했을 때는, 그 고백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부부가 고백한대로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인류 첫번째 부부부터 잘 보여줍니다.
13절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소풍을 가셨습니다. 빌립보 가리사랴 지방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약 40Km 지점 헬몬산 기슭에 위치한,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이스라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물도 풍부하고 주위에 나무도 많은 지역입니다. 본래 촌락에 불과했는데, 분봉왕 헤롯 빌립이 확장하였고,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이사랴를 붙였고, 거기에 자기 이름 빌립을 추가하여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방인이었고, 우상 숭배에 열심인 사람들입니다. 원주민들은 바알 신을 섬겼고, 헬라계 사람들은 판(Pan) 신을 섬겼고, 헤롯은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그곳에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은 소풍 가면 좋을 정도로 경치가 뛰어났지만, 정치 종교적으로는 꽤나 민감한 지역입니다. 자칫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지방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정치 종교적으로 민감한 지역에서, 자칫 위험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나마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해서 다행입니다. 부담을 크게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들 말하더라고 하면 일명 “~ 카더라 통신”이 됩니다. 소문은 있는데 출처가 없습니다. 말은 떠돌아다니는데 진원지가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한 풍문이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짜 질문을 하기에 앞서, 예비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부담없이 대답을 했습니다.
14절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습니다. 세례 요한 / 아무래도 가장 최근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혹시 메시야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을 꾸짖었다가,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 선지자입니다. 그를 죽였던 헤롯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엘리야 / 가장 강력하게 사역했던 선지자입니다. 불의한 아합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서 싸우던, 기개가 넘치는 선지자였습니다. 더구나 말라기를 통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선구자로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 긍휼과 연민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눈물을 많이 흘렸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맞서 싸우다 고난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중의 하나 / 누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선지자 중 하나일 것으로 봤습니다.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모았던 세례 요한이 허무하게 죽어서였는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괜히 마음 줬다가 또 어떻게 될까봐, 아예 기대를 접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15절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의 대답을 들으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진짜 예수님이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세례요한이라고 하면 뭐하고, 엘리야라고 하면 뭐하겠습니까? 또한 예레미야라고 하면 뭐하고, 다른 선지자 누구라고 하면 뭐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나에 대해 이 사람이라고도 하고, 저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부담스런 질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곳이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정치 종교적으로 민감한 지방입니다. 그곳이 말 한 마디를 잘못했다가는, 자기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지역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순간 머뭇거렸습니다. 얼른 주위를 살피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그때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시원한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보다 완벽한 고백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문답할 때,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면, 그렇게 대답해야 정답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은, 왕,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백성의 인도자인 왕이요, 백성의 죄를 사하는 제사장이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아버지를 하나라고 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종교지도자들이 어떻게 나왔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 5: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은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고백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여러 번 들어본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기들 입으로 고백한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 입으로 그렇게 고백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다. 아무리 생각하고 있어도 표현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수험생이 모든 문제의 정답을 생각하고 있어도, 답안지에 표기하지 않으면 0점입니다. 그런 점에도 베드로를 높이 살 수 있습니다. 그가 적극적이고도 충동적인 성격 탓에 실수도 많이 했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렸으니 말입니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린애마냥 뛸 듯이 기뻐하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집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건 베드로의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서는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지 않고서는, 고백할 수는 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듣고, 베드로는 속으로 ‘에이, 예수님도,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을 줄 알죠’ 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더구나 누가 예수님한테 개인적으로 “네가 복이 있도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칭찬 받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음에 예수님이 물으면, 내가 먼저 대답해야지’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18-19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신앙고백 한 번 제대로 하고 받은 복이 너무 큽니다.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했습니다. 인간 베드로냐, 신앙고백자를 대표하는 베드로냐 하는 논란은, 잠시 뒤로 하고 아무튼 대단한 복입니다. 더구나 천국 열쇠를 그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그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단단히 벼르고 있다가, 베드로에게 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한 반석이, 인간 베드로냐, 신앙고백자를 대표한 베드로냐, 아니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냐 하는 것보다 ‘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지 않고, ‘내 교회’ 곧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 곧 머리이십니다. 엡 1:22-23절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교회는 바로 섭니다. 교회의 상당수가 갈등 중에 있습니다. 겉으로 표출이 안 돼서 그렇지 갈등을 안고 있습니다. 세상 앞에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주님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주님을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갈보리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갈보리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혹시 예수님이 “말로만?”이라 하면 어쩌지? “아이 예수님, 왜 그러세요? 진짜예요.” “암, 그래야지, 그 마음 변하지 말아라.” 우리가 고백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갈보리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갈보리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정말이지 변하지 말고 고백한 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20절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로부터, 종종 정체가 폭로될 때가 있었습니다. 막 3:11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막 5:7절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그 때마다 주님은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됨을, 직접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대신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시키셨습니다. 대신에 주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어떤 일을 당하실지를 알려주셨습니다.
21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건 제자들의 메시야 환상을 깨는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셨습니다. 그걸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아, 혹시 우리가 들뜰까봐 그렇게 말씀하나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들 말이 안 나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도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오랜 만에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베드로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극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채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주님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앞으로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이 가야할 길을 진지하게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반대의 뜻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항변하다”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못마땅한 생각이나 반대의 뜻을 주장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말 “항변하다”는 말로 번역된 ‘에피티마오’는 ‘꾸짖다, 강력히 책망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데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나름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인정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죽음 얘기를 한단 말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하지 않았으면, 다른 제자 중에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건 책망입니다.
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말을 들은 베드로의 얼굴은 홍당무가 됐습니다. 베드로는 같은 날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무척 섭섭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본마음을 몰라주고,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이 장차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찬찬히 설명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참 베드로가 대단합니다. 예수님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도, 예수님한테 끝까지 붙어 있는 거 보면 신기합니다. 만일 교회에서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했다가, 목회자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 개인에게 사탄이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사탄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타이밍 상으로 누가 봐도, 베드로 개인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탄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사탄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사탄이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아휴, 저게 사탄 짓 하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가 사탄에게 조종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예수 안 믿고, 믿는 아내를 박해하는 남편을 향해서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진짜 마귀 짓 하네.”
24-2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을 향해 차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백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으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같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결연한 주님의 말씀 앞에, 제자들은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다소 겁먹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27-28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님이 다시 올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은 더 이상 천한 몸이 아닌 왕권을 가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백한 대로 살아야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편하게 살고자 주님을 멀리하면, 그날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예수님을 고백한대로 올바로 믿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몬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면 “아멘!” 합시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실한가, 아닌가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에수님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만 신앙고백을 할 것이 아니라, 삶을 고백한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삶을 고백한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마다 주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예수님께 대하여 바른 신앙을 지키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입으로는 잘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신앙고백하는 우리에게, 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지, 왜 헌신을 각오하고 나를 따라 오라 하시는지, 그 의미를 잘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헌신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을 순종하는 것 때문에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을 지게 하시고, 그 십자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늘의 영광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성도가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