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경비대는 미군정이 편성했다.
장교는 경찰과 마찬가지로 미국식으로 미군에 의한 재교육을 받았다. 교육생은 대부분 일본과 중국, 만주국에서 교육받고 복무한 군인 경력자가 대부분이었다.
1945년 12월 5일 국방경비대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일본군 장교 출신 이응준(대령)과 원용덕(소령)이 협조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운영하고 1946년 4월 30일 폐교했다. 곧 육군사관학교에 유사한 학교를 만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형근, 채병덕, 유재흥, 정일권(이상 대위). 백선엽, 김백일, 이성가(이상 중위) 임관 등 110명을 배출했다.
1946년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정규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서울 태릉에 세워졌으며 이후 육사의 전신으로서 6개월 단기코스를 운영했다. 6월 15일 조선경비사관학교가 됐으며, 88명을 모집했다. 나중에 대한민국을 세우고 1948년 9월 1일 정식 육군사관학교가 됐다.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경찰의 보조역량으로 규정, 경찰만으로 치안유지를 하기 어려울 때 동원하는 예비전력으로 양성. 경찰 보조, 군대가 아님을 강조했다.
마치 군인이되 군인으로 정식 대우받지 못하는 신분이었다. 왜야하면 미소 연합국에 의해 치안유지는 가능하지만, 점령국에 토착 군사력을 양성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1월 14일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미군정은 조선경찰예비대로 불렀다.
국방경비대의 편성과 지휘관 구성을 보면, 총사령관에 미군 마셜 중령이 맡고.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원용덕이 초대 사령관을 했다. 이때 이응준이 미군정 국방사령부장을 도와 부대편성과 주둔할 곳, 모병과 필요장비, 교육훈련 등 전반을 알려줬다. 그 결과 이응준의 계획대로 각 도에 1개의 부대를 배치하되 처음 보병중대로 시작해서 대대, 연대, 사단으로 키워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장비는 우선 일본군의 구구식 소총 등 무기를 사용하고, 사병은 20세 전후의 현지 청년을 모병키로 했다.
그렇게 해서 1연대는 서울 태릉에서 채병덕 중대장이 만들고, 미군 장교 2명이 파견되었다. 그런 식으로 2연대는 대전, 3연대는 전북 이리, 4연대는 전남 광산, 5연대는 부산, 6연대는 대구, 7연대는 청주, 8연대는 춘천에 배치됐다.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에 대해 군사적인 측면을 강조해 ‘국방사령부’로 이름을 짓고 이어 ‘국방부’로 변경했으나, 소련이 항의하자, 1946년 6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조선시대 군영 이름인 ‘통위부’로 했다.
9월 12일 국방장관 격인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요인인 ‘유동열’을 임명. 이후 대한민국 정부 출범할 때까지 2년간 재직했다.
12월 1일 오늘날과 비슷한 군인 계급을 제정했다.
1946년 12월 23일에는 조선경비대 사령관으로 광복군 출신 송호성을 임명했다.
1947년 12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연대는 여단으로 확대해 나갔다.
*아래 유튜브 방송을 참조하시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