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빵을 좋아한다. 당뇨나 비만 걱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빵이 멀리 해야 할 음식이라지만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나도 빵을 무턱대고 먹었다가는 금방 배가 나오기에 조절을 잘 해야 한다.
아내가 살 찐다고 빵을 거의 먹지 않기에 나는 빵집 앞을 지날 때마다 갈등을 겪는다. 먹자니 살 찔 걱정이고 그냥 지나치자니 빵 냄새를 외면하기가 힘들다.
오늘은 내 어릴 적에 먹던 찐빵 이야기다. 지금이야 군것질거리가 지천으로 널렸지만 어릴 때는 왜 그렇게 먹을 것이 없었는지 모른다.
물론 점방이라 불렀던 작은 가게 하나가 동네에 있기는 했으나 과자나 껌, 오다마사탕, 미원, 사카린 같은 것뿐 찐빵을 팔지는 않았다.
점방도 부잣집 애들이나 이용을 했지 나처럼 가난한 집 아이가 점방에서 사는 것이라곤 어머니 심부름으로 가끔 미원이나 사카린을 사는 정도였다.
아버지가 그 많던 재산 홀라당 말아 먹고 일찍 세상을 뜬 후 어머니는 빚쟁이에 시달리며 날마다 남의 집 품을 팔아야 했다.
품삯도 돈보다 대부분 식량으로 받았다.
농사 지을 땅이 없으니 어머니가 돈을 만질 기회는 갯뻘에 들어가 조개 같은 해산물을 캐서 팔아야 했다.
바다가 멀기도 했는데 어머니는 공동묘지가 있는 산 모퉁이 지나 산등성을 넘는 지름길로 부지런히 바닷가를 다녔다.
나도 가끔 엄마를 마중하러 그 산등성을 넘기도 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마을 앞 저수지와 읍내로 가는 신작로가 보였다.
저녁밥을 먹은 후 어머니는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굴이나 조개를 깠다. 그 일을 마치고도 구멍난 내 바지 무릎이나 양말을 꿰매기도 했다.
내가 바늘 귀에 실을 끼워줘야 할 만큼 침침한 눈으로 어머니는 밤 늦도록 할 일이 많았다.
어머니가 오일장 가는 날은 모처럼 몸뻬 대신 월남치마를 입었다. 나는 어머니가 장에 가면 신작로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듬성듬성 미루나무가 서 있는 신작로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장에서 돌아 온 어머니가 광주리를 마루에 내릴 때 나는 침부터 고였다. 신문지에 싸인 찐빵 냄새 때문이다.
서둘러 신문지를 벗기면 설탕이 뿌려져 있고 신문지 글씨가 묻어난 찐방이 하얀 얼굴을 내밀었다.
목이 빠지게 기다린 보람에 행복함이 밀려왔다. 어머니는 그토록 미워했던 장애인 형도 잊지 않고 챙겼다.
"성하고 나눠 먹어야지."
"응, 줬어."
찐빵이 두 개일 때는 형과 하나씩 나눴지만 세 개나 네 개일 때도 형은 하나만 주고 나머지를 내가 다 먹었다.
누가 뺏어 먹을새라 마당 모퉁이 장독대에 걸터 앉아서 먹던 찐빵이 왜 그리도 맛이 있던지.
한입 얻어 먹을 요량으로 꼬리 흔들며 쳐다보는 누렁이에게는 손톱만큼 떼어 주고 혼자서 그 빵을 다 먹었다.
이미 식어버린 찐빵이지만 손가락에 묻은 설탕까지 핥아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부지였던 내가 한없이 밉고 후회가 밀려온다.
빵이 한 개뿐이더라도 절반 뚝 잘라 어머니 드시라고 내밀어야 했건만 오직 내 먹을 생각뿐이었다.
점심도 못 먹은 어머니는 얼마나 허기가 졌을 것인가.
찐빵 하나쯤 드셔도 되건만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허기를 참으면서 그 긴 신작로를 서둘러 걸었으리라.
내가 그때 허겁지겁 달게 먹었던 찐빵은 엄마의 한숨과 허기가 밴 빵이다.
그 귀한 빵을 얻어 먹고도 나는 어머니한테 청개구리 짓만 골라서 했다. 통곡하고 싶을 만큼 후회스럽다.
요즘도 나는 전통시장 골목 찐빵을 파는 가게 앞을 지날 때면 어머니 생각을 한다.
찐빵을 한 입 물면 가끔 왈칵 감정이 밀려와 코끝이 찡해진다. 죄 많은 이 인생을 어찌할 것인가. 찐빵에게 보내는 고백이다.
첫댓글 어머니의 한숨과 허기가 밴 찐빵..
찐빵에 얽힌 애닯은 사연에
덩달아 목이 매입니다 ㅠ
모렌도 님 오랜 만에 뵙는군요.
지금도 찐방을 먹을 때면
그때 하얀 찐빵 표면에 묻어났던 신문지 글씨처럼
제 가슴에 새겨진 罪文이 저를 눈물짓게 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 찡한글 이네요
철없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나이 먹으니 아주 오랜전 생각이 납니다
아마도 철이 늦게 드는가 봅니다
그나마 늦게라고 철이 들면 나을 텐데
저는 철딱서니 없다는 지청구를 아내한테 자주 듣습니다.
철없던 시절을 마야님과 함께 추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ㅎ
찐빵은 아니지만 지금 엄니 좋아하시는 카스테라를 사와서 드리고 이 글을 읽으니
한입 배어 문 제 입속에 카스테라가 현덕님의 찐빵마냥 목이 매이게 합니다 어머님의 그 사랑을 그 희생을 어찌 잊겠어요. 죄많은 인생이라 하지만 철없던 어린 시절이었으니 어머님은 아들을 자랑스럽다 생각하실 것입니다.
노인에게는 카스테라가 참 좋은 음식입니다.
당 떨어졌을 때나 입이 궁금할 때 부드러운 간식으로 그만이지요.
저도 자식 입에 밥 들어갈 때가 가장 행복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은 나이를 먹어도 지울 수가 없네요.
리진님 어머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어릴적 엄마의 존재는 초능력자로 비춰진듯 합니다. 본인은
굶주려 배가 허리에 붙을 지언정 자식들 배곯게 하진 않앗어니 까요.저도 5일장 따라다니기도 햇구요. 또 마중나가서 맞이
하기도 햇습니다.
그런거보면 요새 세상에 풍요함
을 누리는 우리세대는 복받은
세대 같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초능력자 맞습니다.
저도 님처럼 장에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던 생각이 나네요.
가끔 제가 이겨서 장터 구경도 하고
팥칼국수도 얻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금박사 님도 빨리 건강 찾으셔서 이 좋은 세상 오래 누리시길 바랍니다.ㅎ
@유현덕 네 사실 제성격상 죽고 사는거
별루 연연하지 않지마는 결코
포기는 아니합니다.
할수있는한 땡빛을 내서라도
후회없이 치로를 전부 시도
할 작정이지요.
어릴때 전 찐빵은 구경도
못한거 같고 술빵이나
개떡 보리떡 이런것이
기억이 납니다.
술빵은 부드러웟지만
개떡 보리떡은 거칠엇는데
그것도 배부르게 먹어보질
못햇네요.
붕어빵도 생각이 나는데요.
형제들 서로 하나라도 더
먹어려다 싸움도 나고 매도
맞아보구요.참 그러고 보니
어릴적 처절한 삶이엇던거
같습니다.
지금 병실에 있어도 못먹어서
글치 먹을건 항상 남아 돌지요.
송편 또 호두과자 카레 또 게맛살 군것질 과자 예전엔 상상도
할수 없는 풍족한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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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인절미 먹고 싶으면 떡집 가서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예전에는 모든 걸 직접 만들어야 했기에 어머니 수고가 대단했지요.
멧돌에 갈고, 절구에 찧고, 시루에 찌고, 별식 하나 먹으려면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비플렛 님이 드신 그 모찌떡도 어머님 수고로움으로 만들었지만
자식이 맛나게 먹는 모습에 많이 행복했을 겁니다.
아 ~ 목울대가 뜨거워지고 눈물이 ...ㅠ
마침 누가 부르는데 대답을 제대로 못했네요.ㅜ
감정이입이 되어서 혼났습니다.
님을 슬프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제 가슴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추억입니다.
찐빵을 보면 먼저 어머니 생각부터 난답니다.
제목을 (찐빵과 죄많은 인생)으로 했음 좋았겠어요 쓰신 글 다 모아서 책내고 돈많이 벌면 찐빵이나 쫌 사줍쇼
뭐가 이뿌다고? 이러면 할말없고
나 미워하는 사람이 한두명이어야지 ㅋㅋ
저는 엄마에게 너무 못한 자식이라서 이런 글도 못씁니다
가슴아프게 잘읽었어요^^
제가 글을 쓸 때면 제목부터 먼저 정하고 쓰고
써 놨던 글을 올리는 게 아니러 즉석에서 막 나오는 대로 씁니다.
죄 많은 인생이란 제목을 정하고 썼다면 몇 줄 못 썼을 거예요.
목이 매이면 손가락부터 떨려 자판을 두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 돈 벌면 님에게 찐빵인들 못 사겠는지요.
구운빵도 실큰 사 드리겠습니다.
글구 제가 몸부림 님 이뻐하는 거 아시죠?^^
유현덕님~~
어릴적 제 모습보는거같습니다.
5일장에 가신날은 엄마가 오시는 신작로가 한눈에 보이는 뒷동산에서 한나절이 넘게 신작로만 바라보며 기다렸지요.~~^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오로지 엄마에게만 집착했던것같아요.
지금처럼 나이가드니 (지금에 나보다 훨씬 젊었던엄마 52년을 살다간) 홀로 5 남매를 혼자서 키운 엄마가 요즘은 더 많이 보고싶습니다.
저와 판박이처럼 똑같은 추억을 갖고 있네요.
저도 마을 입구 바위 턱에 올라가 신작로를 바라보며
엄마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답니다.
저는 세상 나오고 며칠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는 사진으로만 보고 자랐습니다.
여기요 님의 애틋하고 가슴 애리게 하는 사연에 깊이 공감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초중고시절, 먹거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물론 가난한 흙수저로 태어난 때문이겠지요.
한창 먹을 나이에 늘 허기진 배를 안고 살다가
어쩌다 학교 앞이나 분식집에서 찐빵을 사 먹으면 왜 그리도 맛이 있던지요.
그 시절,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갑니다.
민순 님의 추억을 공감합니다.
저도 어릴 적 학교 앞 작은 분식집에서 붕어빵을 팔았더랬습니다.
친구가 사 먹은 붕어빵을 한입 얻어 먹으려고
갖은 재롱을 떨었던 기억이 있네요.
친구가 붕어빵 꼬랑지 떼어주면 냉큼 받아서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지요.ㅎ
어머니께서 떠나시고 오랫동안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많이 내려 놨다고 느껐는데, 글을 읽으며 다시 눈물이 흐르네요..
노을향 님도 저처럼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있군요.
지금 와서 후회한들 아무 소용없겠으나
저는 가능한 착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 어머니한테
죄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하네요.
어머니를 그리는 님의 마음을 함께합니다.
저도 찐빵에 대한 사연이 있어요.
찐빵집에 들어가 세갠가~네겐가~먹었죠.
들어갈때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주인이 안보이길래..
돈 안내고 냅다 뛰었어요.
두고 두고 마음에 맺혀있는 가난했던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이죠.
그 어려웠던 고난의 시기에~
어머니들 마음은 모두 비슷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럴 때 웃어도 되지요.^^
저는 그런 기억은 없지만
하교길에 학교 앞 분식집에서 나는 냄새가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돈 있는 친구들은 붕어빵 사서 먹고,
누구는 사탕도 사서 먹고,
그때 오다마 사탕이라고 있었지요.
친구가 입에서 빨아 먹다가 이빨로 뚝 쪼개서
한쪽 주면 냉큼 받아 먹었네요.ㅎ
유현덕님 글을 읽을때는 가슴이 저려옵니다
고생많이했습니다
제 처가 지금까지 시부모에게 삭이지못하는것은
그많던 재산 큰아들에게 땅한평
못물려주고 숫저하나 못주고 떠나시며. 운명의 순간에 며느리 손을잡고 용서를 빈것뿐이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댓글만으로도 청솔님이 걸었을 고된 길이 짠해옵니다.
제 아비도 조부 돌아가시자 흥청망청 재산 탕진하고 떠나면서
빚만 잔뜩 남기고 가는 바람에 큰형와 어미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요.
하나 있는 숙부가 결혼해 저금날 때 달랑 오두막 초가와 쭉정이 논 한 필만 주고는
제 아비는 한량처럼 즐기면서 남은 재산을 탕진했다 합니다.
작은 아버지는 평생 형을 원망하며 살았다네요.
청솔님이 걸은 길에 위로를 보냅니다.
위대한 어머니들입니다
내 배고픔보다
자식 입에 들어가는것이
더 배부르게 느끼는 엄마
어머니ㅠ.ㅠ
솔직하게
저는 아직 엄마도 계시고
배고픔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때 그렇게 배고파 힘들었을 친구들도 배려하지 못했네요
그래서인지 지독히 가난하게 자란 남자를 만났습니다
죄받은걸까요 ㅎㅎ
아부지가 사주시던
호빵의 추억은 있어요
나도 ㅎ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는 부자가 부럽지도 늙음이 서럽지는 않으나
어머니를 울게 했던 지난 날이 사무치게 후회될 뿐입니다.
아부지가 사 준 호빵의 추억처럼
정아님의 일상이 따뜻했으면 하네요.
가난하게 자란 남자에게도 잘 해주세요.ㅎ
찐빵 솥에서 뭉게뭉게 피어 오르던 수중기 뿌연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보며 얼마나 군침이 흐르던지 왜 굶주렸던 기억은 여태두 이리 선명한지
운선님의 뿌연 수중기 속 추억이 저와 닮았습니다.
지금 찐빵이 옛날 맛이 안 난다는 사람도 있지만
설마 그때 찐빵 만드는 기술이 지금보다 나았겠는지요.
허기졌던 시절이라 뭐든 맛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찐빵처럼 둥글고 따뜻한 봄날 되셔요.ㅎ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초3)
어머니 행상으로 고생하시는게 너무 안쓰러워
중학생때 밤에 시험공부하며
내 꼭 효도하리라 공책에 새겼었지요~
결혼후에도 작지만 매달 5만원씩 용돈 챙겨 드렸고
사과 배 참외 수박 복숭아 특히 홍시감 다 잘드셔서
사서 같이 먹던일~
사골뼈도 꽈드렸고
파전도 해드렸고
엄마도 우리집 오시면 딸위해청소도 해주시고 사랑 주고 받은 기억이 충만해~
눈물도 웃음도 같이 나오네요~
부모님께 사랑받고 산다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
부모님 가신뒤에 알게되었지요~^^
좋은사탕 님, 정말 사탕처럼 달큰한 효녀 심청입니다.
저는 효도한 기억보다는 속 썩인 기억밖에 없어 늘 죄인처럼 살지요.
떠나고 나니 잘해준 것보다 못해준 것이 한이 되어 남습니다.
그래도 좋은사탕 님의 모녀관계가 흐뭇해지면서
제가 엄니한테 효도한 것마냥 기쁘네요.ㅎ
유현덕님 글을 읽다보면 거의 다 5,60 년대 어렵던 시절 향수 가득한 이야기 들이어서 글을 읽는 내내 찡한 가슴 속 울림이 있습니다.
전 어렸을 때 울엄니 께서 울남동생 들에게만 숨겨놓고 주셨던 비타민을 끝내 찿아내어,
한 통 모두 다 겉에 달콤했던 당의정만 핥아먹고 속 알갱이는 죄다 버려 울엄니께 호되게 혼 났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
지금 되돌아 보니 모두 다 그리움 입니다.
그리움 소환 해 주신 유현덕님 글 추천하고 갑니다. ^^~
비록 제가 자란 고향 공주 산골 추억은 11년에 불과 했었지만,
지금 되돌아 보면 천둥벌거숭이로 산과 들을 마냥 자유롭게 뛰놀면서 자랐던 유년기의 귀한 추억 들은,
그리움의 풍성한 보고로 전혀 부족함이 없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 한 일 입니다.
흙먼지 풀풀 풍기던 신작로 십리 길을 걸어 유구장으로 부모님 따라 다니던 일도,
여름방학 이면 새벽에 일어 나 이슬에 바지 섶을 다 적시며 중학교로 가서 보건체조 하던 일도,
동네 살던 또래 아저씨들이나 조카 님들 (집성촌이어서) 따라 앞 뒷산으로 가 사슴벌레를 잡아 놀던 일,
짚으로 솜씨좋게 여치 집 등 잘 만들던 아저씨들,
정월 대보름 날 이웃집 부엌으로 떼로 몰려 가 보름 찰 밥과 나물들을 훔쳐다 뒷동산에서 맛있게 비벼 먹고 나서,
좀 더 먼 길을 걸어 다리밟기도 하고 들판에서 쥐불놀이를 구경 하던 일,
울엄니께 남의 부엌에 몰래 들어 가 밥을 훔쳐 먹었다고 호되게 혼났었던 일 등등,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습니다. ^^~
수피아 님이 제 글을 읽고 많은 추억을 소환하셨네요.
님의 추억거리 중에 처음 듣는 것도 있고
아~ 맞다. 나도 이런 추억이 있었지 하는 것도 있고
아련한 추억을 돌아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장면들이 많이 잊혀졌지만
유독 신작로에 대한 기억은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열네 살에 낡은 가방을 들고 고향을 떠날 때도
그 신작로를 통해 서울로 왔지요.
수피아 님의 순수한 추억을 공감합니다.
저는 엄마가 팥삶아 쪄 주신 찐빵이 생각나네요
그리 달지도 않으면서 팥이 많았던~~
가끔 먹으면 맛나지요^^
홍실님이 찐빵 좋아하는 것이 저와 닮았습니다.^^
찐빵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자식들을 위해 빵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어머님이 대단하셨네요.
그게 어머니의 힘이겠지요.ㅎ
그시절엔 찐빵을 먹을수 있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지요~~
어머님께서도 시장 하셨을 텐데......
우릳들의 어머니들은 참 어렵고 고단한 삶을 사셨습니다
네, 찐빵뿐 아니라
떡도 명절과 제사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네요.
그때는 바나나도 아주 귀했습니다.
제 어릴 적 소원이
학교 선생님 아들이 먹던 바나나를
먹어보는 일이었네요.
지금은 그 바나나가 지천으로 널렸으니,,
고들빼기 님도 이 좋은 시절 오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