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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26,11-16.24
그 무렵
11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귀로 들으신 것처럼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12 이에 예레미야가 모든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13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14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15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6 그러자 대신들과 온 백성이 사제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24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으며,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나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지만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결국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시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한 죄인이 아름답다>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방법으로 속임수로 돈을 챙겼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 잔치에 흥을 돋우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 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1베드 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권자였습니다.
두 지방을 합해봐야 경기도 정도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왕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굳이 칭하자면 영주, 분봉왕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아첨하며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둘의 관계는 참으로 묘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두렵게 여기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로 세례자 요한이 곤경에 처할 때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건네는 날카로운 직언에 힘겨워했지만,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헤로데 안티파스는 원치도 않았던 기가 막힌 일-세례자 요한의 참수-을 저지르고 말았을까요?
모든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한 목숨 부지하려고 잔머리를 너무 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갖은 꼼수와 권모술수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가당착에 빠져 결국 패가망신하게 된 것입니다.
동쪽에 위치한 나바태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보기 시작하자 힘이 딸렸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들의 왕 아레타 4세와 협상을 체결합니다.
작은 강아지가 큰 개를 만나면 배를 발랑 뒤집어 항복을 표시하듯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레타4세 왕 앞에 깨갱하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왕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만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헤로데 필립보스를 찾아가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합니다.
갖은 감언이설로 꼬셨겠지요.
허영심이 가득했던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륜을 저버리고 결혼을 승낙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레타 4세 왕의 딸은 스스로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헤로데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난 딸 살로메를 데리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품에 안깁니다.
당대 비리와 악행을 자행하던 고위층 지도자들의 천적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공공연하게 천륜을 거스르는 두 사람의 악행을 고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개인적으로 헤로데를 찾아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듭된 고발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끄럼 없이 패륜의 길을 걷던 헤로디아는 복수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위협도 해봤습니다.
설득도 해봤습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전도차 애논을 떠나 갈릴래아로 건너온 세례자 요한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사해 동쪽 에브론 건너편에 위치한 마케론데 성안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 서기 28년경 참수 당함으로써 짧은 예언자로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어두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고민 끝에 찾아냈다는 나라의 중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한숨만 터져 나옵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어린 양들을 까마득한 절벽 앞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이웃이 쓰러지든 말든 내 앞길만 헤쳐 나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헛일’은 없습니다.>
1)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라는 말은 헤로데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여론만 두려워했다는 뜻인데, 그가 백성의 여론을 두려워한 것은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헤로데를 반대해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킨다면, 로마 황제는 헤로데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 황제가 임명한 영주였고, 황제의 눈에서 벗어나면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실제로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그렇다면 헤로데가 진짜로 두려워한 것은 로마 황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민심은 천심이다.’ 라는 말을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당시의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생각했고, 헤로데를 싫어하긴 했지만,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백성들도 하느님보다는 헤로데의 권력을 더 무서워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여론에 특별한 움직임이 없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그래서 ‘민신은 천심이다.’ 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2)
헤로데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여론만 두려워한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마태 10,28-31)
헤로데는 세속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의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였고, 인간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을, 또 자기 자신의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입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을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 적용하면, 헤로데나 로마 황제들 같은 어리석은 독재자들은 하느님의 심판대에서는 ‘참새’보다 더 하찮은 존재이고,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나 로마 황제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도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 적용하면, 하느님께서는 헤로데나 로마 황제들의 온갖 악행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요한이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겪은 고난들을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 2,6-11)
3)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대해서, “그의 활동은 성공일까, 실패일까?”(“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일을 시키신 것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예언자일까?
아니면 임무 수행에 실패한 예언자일까?”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실패로, 또 그에게 일을 시키신 하느님의 뜻도 실패로 보일 것이고, 세례자 요한은 임무 수행에 실패한 예언자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예언자이고, 그의 활동은 성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람들을 모두 회개시키라는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회개를 선포하라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회개 선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은 것은 그 사람들 자신들 탓이지 세례자 요한 탓이 아닙니다.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을 요한의 활동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 55,10-11)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헛일’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선물인생, 인생휴가, 인생과제 -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歸家 여정”>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10)
천상병 시인하면 생각나는 시가 귀천입니다.
오늘 묵상과 더불어 떠오른 시, 귀천의 마지막 연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저는 소풍을 휴가로 바꿔 읽어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휴가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과연 인생휴가 끝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때, 이 세상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이들 몇이나 될런지요.
영성체송 시편이 고맙게고 아름다운 인생휴가 비법을 알려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 103,2)
바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수도원에 들어와 휴가를 접은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오고 가는 수도형제들의 휴가 모습을 보면 참 금방입니다.
길게 생각됐던 휴가지만 귀원 날짜가 되면 어김없이 수도원, 주님의 집에 돌아옵니다.
꼭 우리가 세상에 인생휴가중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수도원 휴가가 끝나면 주님의 집에 돌아오듯, 인생휴가 끝나는 죽음의 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해야 할 것이나 그 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에 잠시 인생휴가 중인데 새삼 무슨 휴가?’
저에게는 실감나는 말마디입니다.
사실 인생휴가중이란 생각을 갖고 하루하루 절실하게 살려 애씁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서서히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날짜도 얼마 안 남았다는 자각으로 살아갑니다.
인생휴가 중 잠시 나그네로 머물 뿐 우리가 영원히 머물 본향은 천상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래서 인생휴가 중에 있는 삶의 여정을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의 여정’이라 칭합니다.
죽음의 귀가 날짜는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예외없이 인생휴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참 늘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의 자각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느냐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런 확인이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환상이나 거품이 빠진 본질적 깊이의 선물 인생을 살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인생휴가 멋지게 끝내고 귀가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주신 선물인생, 저만 챙기다가 싸우다가 하루하루 생각없이 되는대로 낭비하며 고생하며 허무하게 살다가 귀가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죽음의 귀가날짜에 후회없이 떠나는 자, 몇이나 될런지요?
시편 90편이 다음 대목의 고백과 기도가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믿는 이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간절한 고백과 기도의 시편입니다.
이 시편 서두 첫절은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입니다.
주 하느님만이 우리가 영원히 머물 본향의 안식처요, 선물인생을 살아가는 인생휴가중의 지상에서의 삶이 참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가 인간의 복된 숙명입니다.
하느님 주신 선물인생, 파견인생에 반드시 주어지는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요 인생사명입니다.
과연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요 인생사명은 무엇입니까?
저는 하루하루 인생과제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밀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써야 하는 강론이나 일기이듯 인생과제도 그러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살았던, 참으로 인생과제, 인생사명을 다했던 분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가, 인생사명이 무엇인지 알 때, 비로소 목숨을 걸고 투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목숨걸고 사는 사람이, 성인이, 참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이분들에게 절대 가치는 생명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느님이였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류의 빛같은 예언자들이, 성인들이, 순교자들이 없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캄캄한 암흑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악의 무리들 가운데 찬연히 빛을 발하는 세례자 요한 순교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패배인 듯 하지만 그를 잇는 예수님이요, 또 그 뒤를 잇는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에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헤로데의 모습에서 악의 정체가, 허약함이 폭로됩니다.
요한의 순교 후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알리니 예수님 또한 분명히 자신의 죽음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에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용기백배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더욱 남은 인생과제, 인생사명을, 하늘 나라 복음 선포라는 인생사명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예언자와 대칭을 이루는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존재가 진리와 정의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죄많은 백성들에게 용감히 회개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의로운 이들이 있어 존속하는 세상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이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육성을 듣는 듯 당당합니다.
이를 두둔하여 호의적으로 반응한 ‘대신들과 온백성’이 예레미야에 대해 적대적인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압도함으로써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다산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길은 정해지면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귀가의 여정길을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인생휴가중 우리 각자의 인생과제를 잘 깨달아 하루하루 잘 실천하며 자발적 기쁨으로 선물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2ㄱ)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억울(抑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시기와 질투로 누명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강한 사람에게 아무 말 못 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한 상황은 주로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성서에서도 억울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인에게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아벨은 억울할 겁니다.
아합왕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나봇도 억울할 겁니다.
왕에게 충성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우리야도 억울할 겁니다.
우리 시대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던 박종철 열사도 억울할 겁니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 했던 사람도 억울할 겁니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수사자료를 경찰에 넘겼지만, 항명죄로 1년이 넘게 재판을 받아야 하는 수사단장도 억울할 겁니다.
살로메의 춤판에 희생되어서 죽어야 했던 세례자 요한도 억울할 겁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알아주시는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던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억울함은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억울함은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부자는 평생 떵떵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의 집 문간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공정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신화, 종교, 철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아직은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아하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의 유치원생이 쓴 시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좋다.
바둑이는 나와 놀아주니까 좋다.
냉장고는 먹을 것이 많이 있으니까 좋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끝났을까요?
이 마지막 문장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우리집에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나쁜 직장생활로 집에 밤늦게 들어오고 그래서 아빠 만날 시간이 아이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이 유치원생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또 주님께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의미도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 없는 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활이 칭송받을 만한 때에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타인의 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고쳐 줄 마음으로 그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하려고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줄 모르고 타인의 잘못을 곧잘 나무랍니다.”
이러한 겸손을 갖추고 있어야 의미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또 세상에 나를 높이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 영주 역시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데만 온 힘을 쏟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기 의미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대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넘겨줍니다.
그 결과는 스스로에게도 비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합니다.
두 발 뻗고 잠잘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 자기 존재 의미를 깎아버리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의미는 주님의 일을 했을 때 환하게 드러납니다.
즉, 사랑의 삶을 살았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세상 안에서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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