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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3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교육 주간)
제1독서 : 사도 16,11-15
복 음 : 요한 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음식은 아마도 ‘라면’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많은 이가 좋아하는 이 라면을 끓일 때
어떻게 해야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요?
1) 면을 먼저 넣는다.
2) 스프를 먼저 넣는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두 2번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 점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데, 스프를 미리 넣으면 100도 이상에서 끓게 됩니다.
더 높은 온도에서 면이 익으니 더 쫄깃해진다고 주장합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라면 봉지를 보면 조리법이 나옵니다.
그 조리법과 분명히 다릅니다.
조리법에는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는다.’라거나 ‘면을 넣고 스프를 넣는다.’입니다.
이 라면을 만든 사람은 이 라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라면 전문가가 적은 조리법이 최고로 맛있게 먹는 방법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전문가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솔직히 그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미식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 맛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익숙한 조리법이 최고인 것처럼 각자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가장 맛있게 먹을 때는 ‘배고플 때’가 아닐까요? 간절할 때가 늘 최고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때는 언제였을까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게 되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간절함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주님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으며,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반응을 미리 이야기해주십니다.
세상은 주님 따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제자들을 박해하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라며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해의 순간은 정말로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오신 보호자,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과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할 때,
세상의 박해 안에서도 주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간절함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세상의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간절하게 찾고 또 함께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지만
참 행복의 길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접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고 말씀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 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기껏 '기억하라'고 만 할 뿐입니다.
참으로 무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러니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공간이고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보내신 성령께서 바로 그 고통과 박해를 통해서
바로 그 속에서 우리의 증언을 동행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
주님!
미움과 박해가 닥치면 피할 방도를 찾기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안정과 편안을 찾기보다 당신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항력으로 닥칠 때,
도저히 용서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당할 때,
바로 그때가 당신을 증거 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것이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적선지가면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통행료를 내는데 앞사람이 뒷사람의 통행료를 내주었습니다.
뒷사람은 자신의 뒷사람의 통행료를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200대가 넘는 차량은 뒷사람의 통행료를 내주었습니다.
어차피 통행료를 내야 했는데 자신이 받은 호의를
뒷사람에게 전해 주면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리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부활전례에 함께 했던 복사들에게 피자를 사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침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이 봉투를 주었습니다.
조카가 복사인데 신부님께서 피자를 사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고모는 기쁜 마음으로 제게 피자를 사준 금액보다 넉넉하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습니다.
비가 온 뒤에 맑게 개인 하늘처럼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 기일을 맞이해서 교우들과 함께 연도를 하였습니다.
연도에 함께한 분들을 위해서 김밥을 마련했습니다.
김밥을 준비한 분들에게 점심을 사드렸습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 한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지난번 부활절에 못 드렸다고 하면서 카드를 주셨습니다.
카드에는 점심 사드린 금액이 있었습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하느님을 섬기었던 리디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리디아는 온 집안이 함께 세례를 받으면서 사도들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사도들에게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지옥은 긴 수저를 가지고 밥을 먹는데
자기 입에만 넣으려고 하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습니다.
천국은 같은 긴 수저를 가지고 밥을 먹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 밥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매주 가톨릭평화신문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많은 분들의 사연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후원금을 보내 주십니다.
한 번도 보지 않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온정은 사랑으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은 수술을 받고 퇴원하였습니다.
비행기 표를 마련해서 고향을 갈 수 있었습니다.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의 오지에 우물이 생겼습니다.
가난한 산골 마을에 컴퓨터가 생겼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듯이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다.
성령을 보호자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참 기쁨이 있다.
이 성령을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15,26)이라고 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라고 아들은 말씀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 아들의 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우리는 아들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라고 한다.
바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바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으로,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26절)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들에 대해 증언하시며, 아버지에 대해서도 증언하신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도 또한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더 깊이 알아듣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는 것이다.
성령에 잠기는 삶이 우리를 그분과 더욱 가까운 사이로 만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예기치 않은 환난이나 박해가 닥쳤을 때,
제자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해
더욱 굳세게 주님께 포도나무 가지처럼 결합하여 있으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4절).
이 말씀은 성령에 관한 약속과 그들이 고난받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실 증언에 관한 말씀이다.
‘그들의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이 홀로 남아있게 되는 때이며,
그들이 적대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때를 말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2)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성덕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봐 자신에 대해 긴장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유혹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 성령 안에 살게 되면
이러한 삶 속에서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혜롭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리디아와 강완숙 골롬바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그리스도인들은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초대받은 사람들로서
육신과 세속의 차원을 넘어서는 삶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소멸시키고 성령의 사기지은에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새로운 인류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서 나타난
성령의 사기지은을 고루 입었으므로
성령의 강림으로 부활 신앙을 체험하고 공동생활 양식을 이룩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의 신기원을 실현시켰습니다.
여기서 죄와 악의 공격을 받아도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선의 기운이 상하지 않는 은총은 새로운 존재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류투성이의 현실 속에서도 진리를 알아보는 빛남의 은총은
새로운 존재들이 우뚝 서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또한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빠름의 은총으로는 통공의 에너지를 발휘하여
믿는 이들이 연대하는 새로운 인류의 단위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는 이들인 이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진리를 실천함에 있어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받쳐주는 사무침의 은총이 있는데,
이 은총이 앞선 은총 세 가지를 모두 종합시켜서
부활의 은총을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리디아의 삶과 활동은 그 좋은 사례입니다.
바오로가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는 그 이후 선교 여행을 마칠 때까지
성령의 그림자처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바오로가 필리피에 들어갔을 때
유다인들이 모이는 기도처로 가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여기서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리디아가
그의 인품과 신앙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을 필리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처로 내어놓았는데
바오로는 리디아의 집을 거점으로 필리피에 복음을 전해서
나름 의미있는 성과를 얻었고 이를 발판으로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수행하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척박한 도시 티아디라 출신인 리디아가 필리피까지 진출해 있었던 이유도
자색 고급 옷감을 국제적으로 교역하려던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그녀의 국제적인 사업수완과 안목이
바오로의 국제적인 선교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뒷배가 되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의하면 티아티라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신자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서
불륜을 저지르게 하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는 이제벨”(묵시 2,20)이라는
여자를 용인하고 있어서 큰 책망 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티아티라에 있던 유다인 상인들이 조직한 조합이
트림나스 신전의 후원조직에게 곗돈의 일부를 바치면서 은밀한 관계를 맺고
곗날이 되면 트림나스 신전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신전 사제들과 음행을 저지르는
사악한 우상숭배 풍습에 물들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겨운 풍습을 익히 보아온 리디아로서는 바오로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가 전하는 복음선포 활동을 보고 나서 그에게 사심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교우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전혀 주지 않기 위해
몸소 천막 만드는 노동까지 하며 좋은 표양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건전한 것은 기본이고 영적으로도 훨씬 더 고귀하게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첫눈에 알아보고 자기 집을 내놓는 호의를 베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리디아는 바오로 일행이 필리피에서 맞게 된 박해를 계기로
남부 아카이아 지방으로 선교를 가도록 조언하기도 했을 것이고,
다시 소아시아의 큰 도시인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2년 반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라도 귀한 양피지에 편지를 써서
이미 공동체를 세워 놓은 여러 곳에 보내서 연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리디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강완숙 골롬바입니다.
그녀는 1794년 말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편히 모시고 사람들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신자들이 주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도록 도왔습니다.
한편 여성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서 입교시키고
그 여성 신자들과 함께 활발하게 한양을 중심으로 지방에까지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궁중의 왕족 여인들과 궁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의지할 데 없는 불행한 여인들을 거두어 자기 집에서 살게 하면서
교리를 배우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부들과 처녀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최초의 동정부부로 살다가 순교한 이순이 누갈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까지 이벽을 계승하여 활약하던
열 명의 평신도 지도자들도 세례성사를 베푸는 일은
강완숙 골롬바에 모시고 있던 주 신부에게 맡겼겠지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된 정약종과 함께 열심히 수행했기에
비약적인 신자 증가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져서, 당시 4천여 명이던 신자를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만여 명으로 늘릴 수 있도록
맹활약했던 명도회 여성 회장이 강완숙 골롬바였습니다.
이렇듯, 리디아와 강완숙은 보편교회의 초대교회에서와 한국교회의 초대교회에서
새 하늘과 땅의 새 역사를 보여준 새 인류의 전형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15장에서 16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라서 양쪽의 장이 다 걸쳐 있습니다.
15장 끝부분에서 예수님은 곧 오실 성령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하시리라고 하시고,
16장 앞부분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미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 26-27)
"증언"은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감동한 내용에 대해 전하고 알리는 것이 "증언"이지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증언을 하는 주체는 분명 사람이지만,
그 사람 입에, 그의 안에 내용을 담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증언"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성령의 증언에 힘입지 않고 인간의 말재주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삼 년을 보고 들었어도
제대로 다 깨닫지 못했다는 걸 복음사가가 이미 우리에게 솔직히 전하고 있으니까요.
제자들이 체험한 것들을 성령께서
"기억하게" 해 주시고 "해석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필리피에서 말씀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 일행의 선교활동을 서술합니다.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전해지려면 "증언자"와 증언 "내용"뿐 아니라,
증언을 "듣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귀 기울이게 하시는 분,
즉 선교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존재가 선교의 필수요소인 셈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증언의 "현장"에 성부, 성자, 성령, 즉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증언자"인 제자와 성령의 내면에 담겨 있던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듣는 이"의 귀를 통해 그의 마음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가 자리 잡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내용이신 예수님께서 듣는 이를 꿰뚫고 들어가실 수 있게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분은 성부 하느님이시고요.
그러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성삼위 하느님께서 사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힘을 모으시는,
온 우주와 맞먹는 거대한 과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이 총체적인 사랑의 과정이
모두에게 순조로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1-3)
만일 하느님께서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시면,
증언자에게서 발설된 증언의 내용이 듣는 이에게 침투되지 못할 겁니다.
마치 딱딱한 갑옷처럼 경직된 그의 존재가
예수님을 튕겨 내어 거부하면 그에게 복음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그는 이 순간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알지 못한 채,
무엇과도 섞일 수 없고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돌 같은 존재로 남을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떤 씨앗도 품을 수 없고 싹도 틔울 수 없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돌덩이, 불모지처럼 멈춰버리게 되고 말지요.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닥쳐올 고난의 여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요한 16,1) 하시려는 것이고,
또 "그들의 때가 오면 (당신의) 말을 기억하게"(요한 16,4)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두가 다 알아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감추어진 보물이기에, 증언자에게 위험 요소들이 반드시 닥쳐올 터이지만,
그래서 복음을 위한 박해와 죽음이 더욱 가치롭고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마음 준비를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천 년이라는 시간과, 지구를 빙 도는 거리를 지나,
역사의 길고 험한 과정을 거쳐 기적처럼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복음이,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요.
또 이를 가능하게 하신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작업이 얼마나 송구하고 감사한지요.
선교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워
타인도 그분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기쁨과 함께 터져 나와 분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우리 입을 통해 그분의 이름이 전해지는 순간,
선교는 우리 일이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일이 되지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을 듣는 상대방 안에서도
성삼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현존하시며 협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두려워 말고, 주님과 나누는 사랑으로 기쁨 가득한 마음을 드러냅시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화답송)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