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로(黃耆老), 〈경차(敬次)〉(부분), 26×110cm, 개인 소장, 보물 이산해, 황기로 등 조선 중기 초서 대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을 꼽는다면, 우선 명나라의 서예가인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 1425~1487)을 들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이덕형의 묘지명 또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벽에 붙은 글씨의 주인공이 장필이라 되어 있다. 당시 장필의 초서가 유행했음을 말해주는 몇몇 증좌가 있다. 퇴계 이황은 〈정자중(鄭子中: 정유일鄭惟一)의 한거(閒居) 이십영에 화운(和韻)함(和子中閒居二十詠)〉(『退溪集』 권3)이라는 시에서, “오흥(吳興, 조맹부)을 익히다가 옛 훌륭한 글씨까지 망칠까 걱정되며, 동해(東海, 장필)를 흉내내다가 허황된 글씨나 쓰게 될까 염려되네(學書吳興憂失故 效嚬東海恐成虛)”라고 말한 바 있다.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조선 전기 글씨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장필 즉 ‘장동해(張東海)’가 당대 조선의 글씨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조맹부가 여러 글씨체에 모두 능통했으며 서예 뿐 아니라 다방면에 영향력이 컸던 원대(元代) 문화계의 거인이었던 반면에, 장필의 특장은 글씨 중에서도 초서 방면에 한정되었던 탓이 크다. 그러나 적어도 초서라는 글씨체에 한해서는 장필의 글씨는 조선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글씨를 판각한 법첩이 전해지기도 하고(ex. 『동해옹초격(東海翁草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친필 묵적도 전래되고 있다. (〈장필진묵(張弼眞墨)〉, 권벌 종가 유묵, 보물, 충재박물관 소장) 장필의 글씨는 운필(運筆, 붓놀림), 결구(結構, 글자의 짜임새), 장법(章法, 페이지 레이아웃) 모두 파격적이다. 구불구불 길게 내리그은 필획, 급격한 기울기의 사선과 커다란 둥근 동세의 호(弧)를 포함한 균형감을 결여한 글자 짜임, 그리고 글씨 간 크기의 급격한 낙차가 이루는 변화미 등등의 요소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찔한 쾌감을 느끼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