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이승만 동상 세우면 오세훈 시장 대통령 될지도! 역사적 인물에 감사하는 지도자에게 국민들은 보답을 할 것이다. 돌에 새긴 이름은 영원하다. 趙甲濟
이틀 전 여행단을 조직, 경북 칠곡군에 있는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 갔다 왔다. 작년에 세운 이승만 트루먼 백선엽 동상 덕분에 방문객이 세 배나 늘었다고 신슬우 관장이 자랑했다. 한국전쟁은 20세기 3대 전쟁 중 하나이고 그 결전장은 다부동이다. 나폴레옹 전쟁의 결전장이 브뤼셀 남쪽에 있는 워털루, 2차 세계 대전은 스탈린그라드와 노르망디이듯이 다부동은 앞으로 세계적 명소가 될 것이다. 多富洞은 부자가 많다는 뜻인데 여기서 흘린 수만 명의 남북한군과 미군 전사상자의 희생을 딛고 대한민국은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으며 한국 전체를 부자동네로 만들었다. 이승만 트루먼 동상은 애국 기업인 金博 앨트웰 설립자의 發議와 李喆雨 경북도지사의 적극적 협조로 성사되었다. 문재인 좌파정권 때 동상 건립을 결단한 李 지사의 용기는 요사이 더욱 빛난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동대구역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 시의회의 협조를 받아 속도를 내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광화문 지역의 송현동 녹지 공간에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반대파를 설득하고 있다. 이 녹지 공원엔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기증한 세계적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도 들어선다. 세계적 기업인과 세계적 지도자가 같은 공간에서 어울리면 相乘작용을 일으켜 이곳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정통성의 중심인 광화문의 핵심 시설이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이다. 비록 소수의 반대가 있지만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고 그런 반대를 극복하여 세웠다는 점에서 훈장이 될 수도 있다. 지난 총선으로 보수세력이 초토화된 가운데서 송현동에 건국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게 되면 그 주역은 오세훈 시장이 되어 보수세력의 열광적 지지를 얻고 차기 대통령 후보 선두 그룹으로 급부상할지 모른다. 역사적 인물에 감사하는 지도자에게 국민들은 보답을 할 것이다. 돌에 새긴 이름은 영원하다. *2008년 파리의 군사박물관(엥발리드)에 드골 특별 전시실 신설을 축하할 때 당시 대통령 사르코지는 전임 대통령 시라크와 함께 참석했다. 이 전시실은 시라크 대통령이 제안했고 사르코지가 실천에 옮겼다. 사르코지의 업적으로 꼽힌다. ///////////////////////////////////////////////////////////////////////// 엠마뉴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몇년 전 공식 사진을 찍을 때 드골의 회고록을 책상 위에 펴놓았다. 사회당 정부 장관 출신 젊은 대통령이 드골의 계승자를 자임한 셈이다. 드골의 이름을 딴 거리가 프랑스에 3600개나 있다. 드골 공항, 항공모함 드골호 등등. 사르코지는 대통령 재임시절 군사박물관 앵발리드에 드골室을 신설하였다. 그의 공적으로 평가된다. 드골의 가장 큰 공은 2차 대전 초기의 패전국 프랑스를 종전 때는 승전국으로 만든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독일 분할 점령에 참여하고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과 루스벨트는 프랑스에 냉담하였지만 처칠이 강력히 추천하였다. 드골은 '다시 프랑스를 위대하게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1950년대 말 알제리 독립 문제로 內戰 일보 직전까지 갔을 때 프랑스는 은퇴생활을 즐기던 그를 다시 구세주로 불러내었다. 그의 요구대로 헌법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고 10년간 대통령직에 머물게 하였다. 최근에 영국인이 쓴 드골 전기가 또 나왔다. De Gaulle(by Julian Jackson. Belknap Press; 39.95 달러, 928페이지.) 나는 두 번 나라를 구한 드골을 李承晩에 비교하곤 하는데 큰 차이점이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신들의 정치이념을 이어갈 세력을 만들지 못하였는데, 드골은 마크롱 같은 좌파 출신(지금은 중도 표방)까지도 그의 후계자를 자처할 정도로 주류적 정치 유산을 남겼다. 1871년의 보불전쟁 패전과 1940년의 對獨항복이라는 치욕을 겪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불러일으켜 '위대한 프랑스'를 재건하자는 그의 호소는 지금도 유효하다. 이 전기는 드골에 우호적이다. 이상하게 영국인들이 쓴 드골 전기가 많은데 대체로 긍정적 평가이다. 드골은 유머 감각이 없고, 침울하면서도 거창한 쇼를 좋아하였지만 생활은 금욕적이고 소박하였다. 대통령 관저의 전기료는 私費로 냈다고 한다. 샤를르 드골은 1970년에 80세로 고향에서 사망하였을 때 유언에 의하여 간소한 가족장으로 묻혔다. 그는 죽기 전해 대통령職을 사임하였다. 행정개혁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스스로 물러나 고향 콜롱베로 돌아갔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동맥경색으로 急死하였다. 그는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과 함께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參禮하는 것을 금하였다. 2차대전 때 프랑스 해방군으로 함께 싸웠던 戰友들의 참례만 허용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 유언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聖堂에서 별도의 영결식을 가졌다. 드골은 조촐한 자신의 墓碑에는 이름과 生歿(생몰) 연도만 쓰라고 유언해 놓았다. 그래서 이렇게만 새겨졌다. "Charles de Gaulle, 1890–1970". 그는 은퇴후에 대통령의 年金을 받지 않았다. 다만 대령계급에 해당하는 年金만 받았다. 유족은 그의 死後, 관리능력이 없다고 하여 그의 저택을 팔았다. 드골의 회고록은 처칠의 2차 대전 회고록에 못지 않을 정도로 名文이다. 어마어마한 독서량을 가진 이였다. 이 傳記에서 저자는 <드골은 프랑스의 명예를 지켰다>는 문장으로 끝을 냈다. 이코니미스트 書評者는 <드골의 가장 큰 업적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들 자신의 명예를 지켜내자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점일 것이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