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평설 / 한영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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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거대했다. 유례없는 감염병이 유행하고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다. 둘러앉아 밥을 먹고 웃은 지 오래되었다. 사십 일의 장마, 세 차례의 태풍… 산하의 곳곳이 할퀴고 찢어지고 무너졌다. 열매는 단맛을 잃고 초록은 문드러졌다. 우리 가슴엔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리고” 가을의 문턱에 섰다. “이틀만이라도 더 남녘의 햇빛”(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이 그리운 시간이다.
그리고 배운다,는 겸손함이 새삼스러워 안희연의 세 번째 시집을 읽는다. 안희연의 시는 전달력이 강하다. 대부분의 시들이 따뜻하고 슬프다. 제호로도 선정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보자. 여기서 “여름 언덕”은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서 걸어간” 세계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오는 곳”. 그렇지만 뭔가를 배우는 곳.
누구나 가르치려 드는 세상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조금 높은 곳에 자신을 세우고 조언하고 충고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신영복 선생님의 글 중에서 ‘學而思’에 밑줄을 그은 적이 있다. 배운다는 것은 생각이 체화되어 실천에 이른다는 말이다. 무릎을 꿇고 입을 닫고 눈을 감고 나를 놓아버리는 일, “나를 도려내고 나머지의 나로 오늘을 살아가는”(「스페어」) 거다. 생각과 몸이 다른 풍경에 닿기 위해 “쫓기듯 쫓으며 걸어가”는 과정이다.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가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스페어」) “발이 푹푹 빠지는”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하루를 반복하는 끝에 겨우 마주치는 어떤 것.
그러면서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토끼뿐일까” 질문해야 한다. 겨우 “흰토끼 한 마리의 상실”에도 아파해야 한다. “왜 하필 이곳”을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는 거다. 삶의 다른 태도가 보일 때까지. 내게서 변화를 이끌어 낼 때까지.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히”지만 우리의 내일은 원하는 대로 오지 않는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못하고, 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살며,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사이를 헤맬(라이어 마리아 릴케 「가을날」) 것이다. 그럼에도 잠자지 않고 읽고, 지치지 않고 쓰기 위해서, 소유 없이 존재하는 삶 앞에 태연하기 위해서.
여름 언덕에서 배운다. “고요 다음은 폭풍우라는 사실”, 폭풍우 다음은 반드시 고요라는 사실을. 다행히 지구는 둥글다. 순환의 질서 속에서 삶은 계속된다는 말이다. 안희연의 시처럼 따뜻하게 슬프게…….
한영수 (시인)
첫댓글 안희연(安姬燕) 시인
안희연 1986년 경기도 성남에서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에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외 3편이 당선되어 등단.
한영수 시인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했다. 2010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