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관등은 크게 4~5세기를 기준으로 그 형태가 구분된다. 전기는 상가, 대로, 패자, 우태 등의 체제인 반면, 후기는 형과 사자가 주축이 되는 체제이다. 후기의 관등체제가 문헌상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은 위서이다. 다만 위서의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매우 소략하다. 其官名有謁奢·太奢·大兄·小兄之號. 한편 금석문을 통해 가장 이른 시기에 후기 관등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두루묘지명이다. 모두루묘지명에는 그의 선조인 北夫餘大兄冉牟에 대한 명문이 확인된다. 염모의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3세기 또는 4세기로 보고 있다.(그의 활동시기는 논외로 한다.) 그밖에 주서, 북사, 수서, 당서, 한원 및 통전에서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각 사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주서, 북사 및 수서가 비슷하고, 당서, 한원 및 통전이 비슷하다. 삼국사기나 여러 금석문 등을 종합해 보면 후기 관등체제도 조금씩 변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후기 관등체제가 대략 400년 정도 지속된 점을 고려한다면 관등체제의 변화는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후기 관등체제에 대한 일반적 시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서와 당서를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官有太大兄, 次大兄, 次小兄 次對盧, 次意侯奢, 意侯奢, 次烏拙, 次太大使者, 次大使者, 次小使者, 次褥奢,次翳屬, 次仙人, 凡十二等. <수서 고려전>
官凡十二級: 曰大對盧, 或曰吐捽, 曰鬱折, 主圖簿者, 曰太大使者, 曰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先人也, 秉國政, 三歲一易, 善職則否, 凡代日, 有不服則相攻, 王爲閉宮守, 勝者聽爲之, 曰大使者, 曰大兄, 曰上位使者, 曰諸兄, 曰小使者, 曰過節, 曰先人, 曰古鄒大加.
<신당서 고려전>
위와 같이 수서와 신당서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비슷한 이유는 관등명이 같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는 그 관등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견해는 수서를 근거로 수나라 시대의 고려와 당나라 시대의 고려의 관등체제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즉 수나라 시대의 고려는 무관이 문관에 비해 상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옳다고 볼 수 없다. 수서의 위 기록의 원형은 주서 고려전에서 찾을 수 있다. 주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大官有大對盧, 次有太大兄·大兄·小兄·意俟奢.烏拙·太大使者·大使者·小使者·褥奢·翳屬·仙人幷褥薩凡十三等. <주서 고려전>
주서와 수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次’이다. 주서에서는 대대로 이하에 ‘次’가 단 한번 쓰인 반면, 수서에는 관등마다 ‘次’가 쓰였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즉 수서를 통해 이해할 경우에는 모든 관등에 대해 관위를 설명하게 되지만, 주서를 통해 이해할 경우에는 관위는 대대로와 기타 관등에서만 설명될 뿐이고 그 이하는 태대형 등의 관등이 있다는 것만을 설명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주서에서 태대형 이하의 관등은 관위에 따른 순서로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북사에서도 주서와 마찬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오직 수서만이 각 관등 사이에 ‘次’를 끼워 넣었을 뿐이다. 수서 편찬자가 자의가 개입된 것이 분명하다. 상식적으로도 국가가 멸망하고 새롭게 창립하지 않는 이상, 연속성을 갖는 국가체계가 점차 변화할 수는 있어도 상하가 뒤바뀔 수는 없다. 관등은 권력과 부와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수백년간 지속된 국가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공직사회에 매우 큰 혼란을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관과 무관이 업무를 교차하여 수행하는 것이 일상적인 동아시아에서 굳이 문관과 무관의 관위를 통째로 뒤바꿀 실질적인 이유도 없다. 따라서 관위는 수서를 제외한 사서에서 확인되는 일반적인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한원 등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한원이나 통전에서 보이는 관등체계는 다음과 같다.
高麗記曰, 其國建官有九等, 其一曰吐捽, 比一品, 舊名大對盧, 惣知國事. 三年一伐[代], 若稱職者不拘年限. 交替之日, 或不相祗服, 皆勒兵相政[攻], 勝者爲之. 其王但閉宮自守, 不能制禦. 次曰太大兄, 比二品, 一名莫何何羅支. 次鬱折, 比從二品, 華言主簿. 次大夫使者, 比正三品, 亦名謂謁奢. 次皂衣頭大兄, 比從三品, 一名中裏皂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皂衣先人者也, 以前五官, 掌機密謀改[政]事, 徵發兵, 選授官爵. 次大使者, 比正四品, 一名大奢. 次大兄加, 比正五品, 一名纈支. 次拔位使者, 比從五品, 一名儒奢. 次上位使者, 比正六品, 一名契達奢使者, 一名乙耆. 次小兄, 比正七品, 一名失支, 次諸兄, 比從七品, 一名翳屬, 一名伊紹, 一名河紹還. 次過節, 比正八品. 次不節, 比從八品. 次先人, 比正九品, 一名失元, 一名庶人. <한원>
한원이 설명하는 관등체계는 매우 상세하다. 뿐만 아니라 사료의 성격상 신뢰성도 높다. 그런데 일부 견해는 위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지 않고 있다. 즉 고려기에는 14개 관등을 나열하고 있으나 過節, 不節은 관등명으로 보기 어렵고(盧重國의 견해), 하위 관직명으로 추정된다(林起煥의 견해)고 본다. 따라서 삼국사기 직관지를 통해 수정하여 과절 및 부절을 제외하고 마지막 관등으로 자위를 넣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매우 자의적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원의 내용은 매우 상세하다. 심지어 正從에 따라 그 관위를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려기는 첫머리에 ‘其國建官有九等’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관등이 14개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말한 이유는 고구려도 중국식 표현으로 보자면 正從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4개의 관등이 正從九等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절 및 부절을 각 정8품 및 종8품에 비견한 것과 선인을 정9품에 비견한 것은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절 및 부절을 자의적으로 제외한다면 선인이 8품이 되며 자위가 9품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상세한 기록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타인묘지명에도 ‘五族九等’이라는 명문이 확인된다. 고구려가 중국식 표현인 正從을 어떻게 구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기의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여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뿐만 아니라 고려기를 수정한 삼국사기 직관지는 고구려 멸망 당시의 관위를 나타낸다. 이 시기의 관등도 고려기를 인용한 시기의 관등체계에서 일부 변화된 흔적이 보이는 만큼 위와 같이 직관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