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지도자를 위한 ‘賢者’ 李光耀의 충고
“중국은 경제력으로 일본과 한국까지 흡입하려 할 것.”
“관리자는 만들 수 있지만 지도자는 타고 난다.”
“나는 학자와 이론을 무시한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는 등소평, 요시다, 그리고 말하기 곤란한 한국인.”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파멸시켰을 뿐 아니라 현대 한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들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한국인은 역동적이고 무섭다.” 워싱턴의 파워 엘리트가 傾聽(경청)하는 사람
미국 하버드 대학의 스타 교수 출신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닉슨 대통령과 함께 美中 화해를 성공시켜 세계의 전략 구도를 바꾼 사람이다. 그는 李光耀(이광요, 리콴유) 싱가포르 전 수상에 대하여 이런 찬사를 보냈다.
<나는 반세기 동안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는데, 리콴유 전 수상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준 이는 없었다.>
키신저는 리 전 수상을, ‘달리 비교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지능과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했다. 워싱턴의 파워 엘리트들을 리 씨를 만나는 것을 하나의 자기 학습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키신저는 그를 지도자(leader)일 뿐 아니라 사상가(thinker)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가 직면한 이 세계 정세의 본질과 아시아에 대한 그의 분석을, ‘깊숙한 통찰력’이라고 극찬하였다. 리콴유는 아시아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면서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정치가이다. 중국과 서구에서 인기가 높다. 세계 지도자들이 가장 傾聽(경청)하는 사람일 것이다.
최근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그래함 엘리슨 및 로버트 D. 블랙윌 교수가 그를 집중적으로 인터뷰하여 책으로 냈는데(MIT 출판부, ‘LEE KUAN YEW, The Grand Master's Insights on China, the United States, and the World’), 특히 중국에 대한 관찰이 흥미롭다.
“한국, 일본도 중국 경제권으로 빨려들 것”
*중국은 거대한 시장과 구매력을 무기 삼아 이웃 나라들을 자신의 경제 시스템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일본과 한국도 불가피하게 그렇게 될 것이다. 중국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나라들을 흡입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이웃 나라들은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남아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중국의 인질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경제를 통한 영향력의 확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국제 정치면에서도 군사력보다는 외교정책을 앞세운다.
*중국이 세계의 패권 국가가 되는 데 가장 큰 약점은 문화, 언어, 그리고 다른 나라의 人材(인재)들을 끌어들여 同化(동화)시키는 능력의 부족이다. 중국이 싱가포르처럼 영어를 公用語(공용어)로 삼지 않으면 외부의 인재들을 데려가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보다 인구는 네 배나 많은 데도 기술 혁신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좋은 아이디어를 놓고 경쟁하거나 토론하는 문화가 약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절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무너질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안다. 중국에서 민주화 혁명 같은 게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면 잘못이다. 천안문 사태를 주동하였던 학생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1인1표제에 의한 민주제도를 단연코 반대한다. 그렇게 하면 多黨制(다당제)에 의한 政爭(정쟁)으로 안정이 무너질 것이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1920, 1930년대의 軍閥(군벌) 시대가 再來(재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도부가 실용적이란 걸 전제로, 중국이 잘못 될 확률을 20% 정도로 본다.
*習近平(습근평, 시진핑)은 胡錦濤(호금도, 후진타오)보다 강한 지도자이다. 그는 늘 웃는 얼굴이지만 강철 같은 영혼의 소유자이다. 나는 그를 넬슨 만델라 級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시련을 많이 겪은 덕분에 굉장한 감정적 안정력이 있어 개인적 불행이나 고통으로 해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사람이 아니다.
*중국은 세계 최강의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개발도상국과 달리 중국은 중국으로 남기를 원할 뿐 서양의 명예회원이 되기를 거부한다. 중국은 그러나 독일과 일본과 러시아가 군사력으로 (英美圈에) 도전하였다가 실패한 경우를 연구하여 미국과 군사력 경쟁을 하면 질 것임을 잘 안다. 군사적 대결을 피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웃으면서 40년 혹은 50년을 견뎌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들의 大戰略(대전략)은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앞으로 10년간 세계가 직면할 가장 큰 문제를 열거하면, 첫째는 그리스의 부채 위기, 둘째는 북한의 위협, 세 번째는 일본의 停滯(정체), 네 번째는 이란의 핵개발과 중동 분쟁의 가능성이다.
*러시아의 미래는 어둡다. 인구가 줄고 있다. 술, 비관주의, 출산율의 저하, 평균수명의 단축 등. 푸틴은 러시아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어야 한다. 술을 그만 마셔라, 열심히 일하라, 좋은 가정을 만들라, 아이들을 많이 낳아라!
“관리자는 만들 수 있지만 지도자는 타고 난다”
올해 만 92세인 리콴유 전 수상은 賢者(현자)의 느낌을 준다. 거의 혼자의 지도력으로 세계최고의 도시국가를 만든 경험을 나눠 가지려는 의욕이 넘친다. 하버드 대학 교수와 가진 집중 인터뷰에서도 ‘좋은 나라를 만드는 지도력’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지도자는 타고난다고 못 박았다.
*사람들과 지도자들을 경험적으로 관찰해 보니 한 인간의 능력, 性癖(성벽), 기질은 70~80%가 유전적이다. 지도자로 태어나지 않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관리자는 가르쳐서 만들 수 있지만 지도자는 타고 난다. 지도자는 특별한 야심과 知的(지적)인 활기와 특이한 끈기와 萬難(만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
*싱가포르는 이웃나라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깨끗한 제도를 운영한다. 우리는 법을 지킨다. 우리는 합의나 결정을 준수한다. 그들은 그렇지 못했고 우리는 해냈다. 이게 차이이다.
*한 나라가 가진 人的 자원의 질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국민들의 혁신 정신, 기업가 정신, 팀워크, 그리고 노동 윤리가 핵심이다.
*한 나라가 위대해지려면 크기만으론 안 된다. 의지, 단결력, 지구력, 국민들의 紀綱(기강), 지도자들의 질이 역사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선물한다.
*국민들의 역사는 한두 번의 선거 패배나 승리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오랜 과정의 결과로서 사람들의 성격에 의하여 결정되는 게 아니고 정치적, 사회적, 국가적 힘의 작용에 의하여 결정된다.
*나는 전문가, 사이비 전문가, 특히 정치, 사회 과학 부문 학자들로부터 오는 조언과 비판을 무시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은 사회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이상을 충족시킬 정도로 발전해야 하는지, 특히 복지를 어떻게 확대하고, 가난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를 설명하는 애완동물 같은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내가 통치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평가이다.
리콴유는 ‘인기에 연연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사람이다’면서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했다. 지도자가 사랑을 받든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쪽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지도자는 언론에 영혼을 빼앗기려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나는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리콴유는 동양적 실용주의 정치가의 脈(맥)을 잇는다. 중국 전국시대의 명재상 管仲(관중)에서 시작하여 鄧小平(등소평), 리콴유, 일본의 명치유신 志士(지사)들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富國强兵(부국강병) 노선이기도 한데, 朴正熙(박정희)도 이 그룹에 속한다.
*나는 유럽 기준으로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중간일 것이다. 스스로는 나를 리버럴(liberal)이라고 여긴다. 나는 기회의 평등을 믿는다. 실패한 사람이 바닥 아래로 전락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나는 시스템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싶지만 그렇게 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거나 더욱 노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고전적 의미에서 리버럴이다. 세계나 사회를 보는 데 있어서 고정된 이론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는 실용적이다. 나는 문제에 부딪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대한의 사람들을 위하여 최대한의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 해결책인가를 탐색한다.
*나의 일생은 철학이나 이론에 의하여 引導(인도)된 적이 없다. 나는 일을 해내고, 다른 사람이 거기서 성공의 원리를 뽑아내도록 한다. 나는 이론에 따라 일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어떻게 하면 일을 해낼 수 있을까를 나 자신에게 묻는다.
*간략하고, 명료하게 써진 영어 문장이 중요하다. 내가 복잡한 생각들을 간명한 언어로 압축한 뒤 이를 대중을 상대로 생생하게 전달할 수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등소평, 처칠, 드골이다. 드골은 대단한 배짱과 수완의 소유자였다. 등소평은 부서진 나라를 재건,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처칠은 군대가 패배하고 있는 순간에도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한 의지의 인물이었다.
*나는 스테이츠맨(statesman: 위대한 정치가)으로 기억되기를 원치 않는다. 스스로도 나를 스테이츠맨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나를, 신념이 강하고, 일관성이 있으며, 끈질긴 사람이라고 여길 뿐이다. 자신이 스테이츠맨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필요가 있다.
“1인1표제는 위험하다”
李光耀(이광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은 1인1표제가 민주주의를 망칠 수 있는 위험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1인1표제는 가장 어려운 정부 형태이다. 후보들이 선동적 공약을 하고, 유권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정당이 비합리적 代案(대안)만 제시하면 이 제도는 붕괴한다. 나는 1인1표제가 最善(최선)이라는 知性的(지성적)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나는 가족이 있는 40세 이상의 유권자들에겐 1인2표제를, 65세 이상에겐 39세 이하처럼 다시 1인1표제로 되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있는 유권자는 조심성 있게 투표를 할 것이고, 특히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투표할 것이니 1인2표가 좋다고 보는 것이다. 1인1표제는 유권자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을 때만 작동하는 제도이다.
*민주 사회는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민주 제도가 성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첫째, 관심이 많고 감시를 잘 하는 유권자 집단이 있어 國政(국정)을 운영할 정치인을 선출한 뒤 여론의 힘으로 그들을 통제해야 한다. 둘째, 민주사회는 정직하고, 유능한 정당이 있어서 국민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어야 한다.
리 전 수상은 공산주의 붕괴 시기의 두 지도자,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중국의 등소평을 비교했다. 고르바초프를 만나 보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 당황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고르비에 대하여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수영장의 깊은 곳을 향하여 뛰어든 사람’이라고 평했다.
鄧小平(등소평)은 단호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이 앞으로 100년간 또 다시 대혼란에 빠져든다고 판단할 때는 20만 명의 학생들을 향하여 발포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 씨는 ‘등소평이 아니었더라면 중국은 내부 폭발했을 것이다’고 했다.
鄧小平을 극찬
몇 년 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李光耀를 다섯 시간 인터뷰한 내용을 6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타임 기자가 “지금까지 公的(공적)생활을 통해서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리 전 수상은 “鄧小平(등소평)이다”고 말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1978년 11월 그가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 앞에 재떨이와 가래통을 갖다놓았으나 그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鄧小平은 ‘당신은 싱가포르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했군요, 축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뜻인가요’라고 하니 鄧小平은 ‘1920년에 내가 마르세이유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렀는데 그때는 형편없는 도시였지요. 이제 와서 보니 완전히 달라졌어요’라고 했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하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 남쪽에서 온 땅 없는 농민 출신이지만, 귀하는 관료와 작가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그 많은 명석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1992년 등소평은 南巡講話(남순강화)라는 걸 했는데 이때 ‘싱가포르에서 배우자.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때 내가 한 말을 이 분이 잊지 않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1978년에 방콕,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를 방문한 것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 나라가 3류 도시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2류 도시였고 북경이나 상해보다도 나았거든요. 그가 탄 비행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는 참모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부하들이 혼나고 있을 거야. 보고를 잘못 올렸거든.’ 그가 돌아간 뒤 數週(수주)가 지나지 않아 인민일보는 더 이상 싱가포르를 미국의 走狗(주구)라고 비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싱가포르가 깨끗하고 정원도시이며 주택사정이 좋다고 보도하기 시작했어요. 노선을 바꾼 거지요. 곧 鄧小平은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74세의 평생 공산주의자가 대장정의 동지들을 설득하여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끝까지 살아남는 두 부류의 인간”
2009년에 한 미국 高官이 리콴유를 만나 북한정권에 대하여 나눈 對話(대화)의 보고서가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의하여 공개되었다.
그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북한의 집권자들은 정신병자 같은 집단이다. 늙어서 축 처진 모습을 한 자들이 박수와 환호를 받으려고 경기장을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는 지도자를 위하여 봉사한다. 차기 지도자는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졌던 배짱과 변덕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인민들이 파리처럼 죽어가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지 않기를 원할지 모르지만,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國境(국경)에 미군이 나타나는 것보다는 핵무장한 북한을 더 選好(선호)할 것이다.>
타임(미국 시사주간지)과 한 인터뷰에서 리콴유(李光耀)는 ‘귀하는 종교적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교적 가치를 크게 신봉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기도가 사람을 치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사람을 안심시킬 수는 있겠지요. 나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인 홍슈센 전 재무장관이 죽음을 맞아들이는 자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심장마비가 와서 死境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와 부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거든요. 두 사람은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신을 믿는 사람들은 위기가 닥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는 일이지요. 한참 옛날입니다만 나는 한 프랑스 가톨릭 신도가 쓴 ‘진짜 敵’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을 썼습니다. 수용소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요. 신념을 가진 그룹의 사람들은 살아남았는데 신념이 없었던 사람들은 죽었다는 거예요. 신념을 가진 그룹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著者와 같은 신앙인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자였답니다. 이들은 끝내 그들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란 신념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들, 재능이 좋은 음악인들, 그들은 음식과 담배를 바꿨다고 해요. 그들은 그렇게 하면 어느 날인가에는 점호 때 추운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 처형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버티지 못했다는 겁니다. 신앙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투지를 가지고 결국 살아남았답니다. 인간의 정신 속에는 이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朴正熙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도자는 李光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생애 마지막 날 도고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그 7일 전에 있었던 리콴유 수상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이 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朴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지도자는 그와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리 수상은 1979년 10월16일에 訪韓했다. 金聖鎭(김성진) 문공부장관이 ‘수행장관’이란 유례가 없는 직함을 가지고 수상의 안내를 맡아 1박 2일간 경주 일대를 돌았다. 朴 대통령이 리콴유를 초청한 데는 ‘내가 건설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한번 보여 주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리 수상은 처음에는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국 허드슨 연구소 소장 허먼 칸 박사는 리 수상과 친했다. 김성진이 칸 박사를 초청하여 박 대통령을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意氣投合(의기투합)하여 말 꽃을 피웠다. 칸 박사는 그 뒤 리콴유를 만나자 “박정희란 인물이 간단치 않은 사람이니 꼭 한번 만나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리 수상에게 자신의 작품인 포항종합제철을 보여 주고 싶어 했으나 자존심이 강한 리콴유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보겠다고 했다. 외무부에서는 리콴유가 포항공항에서 내려 경주로 향할 때 浦鐵(포철)을 관통하는 도로를 주행하여 가도록 짰다. 리 수상의 옆자리에 타고 있던 金聖鎭 장관이 보니 리콴유는 벌써 눈치를 채고는 車窓(차창) 밖으로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1박 2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도 포철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김 장관이 “두 번이나 그렇게 하면 실례가 되니 경주에서 대구공항으로 가도록 노선을 변경해 달라”고 했다. 경호실에서 “안 된다”고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김 장관은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을 통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냈다.
경주에서 대구로 달리는 길 양쪽은 화려한 가을 날씨 속에서 풍요로운 농촌풍경이 황금물결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누런 벼이삭, 지붕개량을 끝낸 깔끔한 농가, 지붕위에 널린 빨간 고추. 리 수상은 비로소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끔 시계를 보았다. 이런 농촌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를 재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부러움과 오기가 뒤섞인 표정으로 상기됐다. 대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이륙한 뒤에 김 장관을 바라보고 말문을 땠다.
“貴國(귀국)의 농촌은 아주 실속 있게 잘 사는군요.”
그러고 나서 리콴유는 “이러한 발전의 비결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김 장관은 박정희의 지도력과 외국에 나가 있던 우수한 두뇌들을 귀국시켜 국내의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하도록 한 정책을 들었다. 崔亨燮(최형섭) 과기처장관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찾아가서 애국심에 호소하고 좋은 연구시설과 대우를 약속하여 귀국시킨 사례들을 설명했다. 리콴유 수상은 진지하게 경청하더니 비행기가 서울에 닿을 때까지 사색에 잠기는 것이었다.
“각하가 여론과 언론을 무시하였기에 대한민국이 성공했다”
10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리콴유는 朴 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성진은 1991년에는 駐싱가포르 대사를 지내면서 그와 재회하게 된다. 1994년 1월19일 김성진(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은 <月刊朝鮮>을 위하여 리(李) 수상과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鄧小平(덩샤오핑)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일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 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리콴유(당시는 수상직에서 은퇴)는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들어갈 만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金泳三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와 前 정권, 특히 군사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현직 대통령이 싫어하는 박정희를 포함시켜서 괜히 한국·싱가포르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리콴유가 그 김영삼 대통령을 어떻게 보았을까?
인구가 두 배인 한국이 북한을 두려워하는 게 이상해
리콴유(李光耀) 회고록 2편의 제목은 ‘제3세계에서 1류로’(1965-2000)이다. 싱가포르가 말레이 연방에서 탈퇴, 독립국가가 된 뒤 세계 최고의 도시국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한 章은 한국에 관한 기술이다. 그는 한국인에 대한 첫인상이 아주 나빴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뒤 한국인과 대만인을 보조로 썼는데, 한국인은 일본 군인처럼 무자비하였다는 것이다.
1979년 10월 朴正熙 대통령이 피살되기 며칠 전 한국을 방문한 그는 <만찬 자리에서 朴 대통령은 잡담을 거의 하지 않았다>면서 동석한 朴槿惠(박근혜) 씨가 영어로 대화를 이어갔다고 하였다. 朴 대통령을 이렇게 호평했다.
<나는 한국을 성공시키려는 그의 비장한 결의와 강력한 의지에 감명을 받았다. 朴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한국은 공업국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회고록에서 그는 몇 차례 한국인의 격정적 행태를 언급한다.
<한국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때 보면 검투사 같은 복장을 한 진압 경찰만큼 잘 조직되고 훈련되어 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거리에서 경찰관들과 싸우는 모습은 전투 장면 같다. 그들은 타협할 줄 모르는 맹렬한 성격이고, 권위에 도전할 때는 폭력적이고 정력적이다.>
1986년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는데 북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차 있어 이상하게 느꼈다고 한다.
<남한의 인구는 北의 두 배이고, 훨씬 부자이며 미국의 좋은 무기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만난 한국의 모든 외무장관들은 북한의 군사력에 압도된 듯이 말했다.>
盧泰愚(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만나니 싱가포르가 부패 문제를 해결한 비결을 물었다고 한다. 리콴유는 이렇게 설명했다.
<먼저 정확한 정보, 다음은 非인격적이고 非주관적인 접근, 셋째는 부패 척결 수사에 대한 頂上(정상)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최고 지도층이 흠이 없고, 고위층이 하부층보다 먼저 깨끗해지지 않으면 시간 낭비일 따름이다.>
“자신의 지문(指紋)이 있는 연설을 해야”
1988년 리콴유 수상은 다시 한국을 찾아 대통령이 된 盧泰愚(노태우) 씨를 만났다. 이 대화록은 딱딱한 여느 정상회담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리콴유 수상: 요즈음 모든 나라에서 TV가 가장 주요한 매체가 되어 있으며, 아이디어의 전달뿐 아니라, 감정까지 전달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TV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연설자체뿐 아니라, 표정과 인간적 풍모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실성과 정직성이 필요하며, 본인의 경우에는 그것이 가장 큰 자산이었습니다. 국내외(國內外)에서 많은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본인이 ‘허튼소리 안한다, 성실하다, 충분히 심사숙고한 말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국민이 모든 관련 상황을 다 알지 못하며,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므로 지도자를 믿느냐 與否(여부)가 관건입니다. 김대중, 김영삼 씨는 훌륭한 대중연설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보좌관들이 써주는 연설문을 가지고 그들과 경쟁하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指紋(지문)이 박힌 스스로의 표현방식이 필요합니다.
레이건 대통령도 보좌관들이 준비한 연설문을 자신이 직접 손을 대어 자기 아이디어를 가미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리듬과 성실성을 나타내려고 노력한다 합니다. 반면에 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은 좋은 연설문 작성자가 있지만 그 연설들은 자신의 말이 아니므로 국민들의 신뢰감이 부족하다 합니다.
노태우 대통령: 각하께서는 항상 자신과 친척, 주위의 私生活(사생활)을 깨끗이 하고 있는 점을 매우 훌륭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핵심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상: 공산주의자들은 본인 사무실의 냉방시설까지 비난하므로 하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본인도 얼마 전 본인의 모든 재산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임기를 시작할 때와 끝났을 때의 본인의 재산상황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상: 우리의 입장에서 재산이나 부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 모든 국민을 위하여 중요한 결정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청렴함으로써 밑의 사람들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은 악마요 살인자”
수상: 각하의 對北정책에 대한 그간의 보도를 보고 대단히 적절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중공이 개방을 취하면서, 그리고 소련이 개혁정책을 표방하면서부터 이미 그 이념적 기초를 상실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고, 경쟁력과 活力을 잃은 죽은 이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지나친 낙관론자들의 견해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 위협은 소멸된 것이 아니고, 앞으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는 인민동원의 방법으로서는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공산주의자는 결코 그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혁주의, 개방주의 운운에도 불구하고 동·서 화해는 기본적인 제약이 있습니다.
공산당의 본질은 200~300명의 무고한 시민을 무참히 몰살시키는 항공기 폭파 등을 서슴지 않는 야만정권입니다. 그들은 정상적 인간이 아닌 정신이 비뚤어진 악마요 살인자들입니다. 이 점만 유념한다면 남북한 교류는 한국에 여러 가지 利點(이점)이 많을 것입니다.
대통령: 1985년에 싱가포르를 방문하였는데, 거리가 아주 깨끗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서 거리 미화(美化)에 노력하고 있으나, 싱가포르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싱가포르 거리가 그토록 청결하게 된 데는 어떤 비결이 있는지요?
수상부인: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싱가포르 화폐로 500달러(미화 200달러 상당)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광고하였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벌금을 내는 사람은 없고, 단지 명목적인 액수만 납부하게 되지만, 단속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에 억지효과가 있습니다. 하루는 환경청장관이 청소부들에게 거리 청소를 중단시켜 보았더니, 온 거리가 단 하루 만에 지저분해졌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싱가포르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고, 매일 열심히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들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지요.
“한대도, 열대도 아닌 온대에서 잘 산다”
대통령: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하여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지요. 변화하는 계절에 항상 적응하려면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수상부인: 한국의 겨울은 혹독히 춥고, 여름은 굉장히 덥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매우 강인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으로 압니다. 언젠가 책을 읽어보니, 기후조건이 극도로 나쁜 곳에서는 사람들이 먹을 것 걱정만 하기 때문에 발전을 하지 못하고, 기후가 너무 좋은 곳에서는 씨를 뿌리고, 6개월만 기다리면 수확을 하며, 언제든지 물가에 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어서 발전하지 못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책에는 인류의 문명이 한대(寒帶)도 열대(熱帶)도 아닌 온대(溫帶)에서 발달한 것도 온대지방 사람들은 적당한 자극을 받아가면서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동남아의 화교들도 몇 세대가 더 지나면 기후조건으로 인하여 일할 생각이 없어져서 퇴보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대통령: 몇 해 전 아프리카 여행 중 나이지리아 라고스를 방문하였는데, 부두에서 3000명에 달하는 하역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고, 그늘에서 쉬고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행중 인 장관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들 중 2/3가 학질환자라고 답하였습니다. 동북아 국가들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어느 나라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난 뒤에 크게 발전하였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인 자신의 경험으로도 많은 고뇌와 어려움을 이겨낸 때가 인생에 있어, 가장 발전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수상께서 건강을 잘 유지하고 계시는 데는 부인께서 어떤 비결이라도 갖고 계시기 때문인지요?
수상부인: 그는 여러 가지 운동 중 가장 단시간에 할 수 있는 에어로빅적인 부분만을 선택해서 합니다. 4년 전에 딸이 좋은 책을 구해다 주었는데, 거기에는 자전거, 조깅, 수영, 노 젓기 등에 있는 에어로빅 요소만을 매일 10~15분 간 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수상은 골프는 하지 않습니다. 골프는 사교적인 운동이므로 여러 나라 지도자들과 사귀는 데는 유용하지만, 에어로빅 효과는 없기 때문이지요.
대통령: 시간을 절약하는 매우 경제적인 방법으로 건강관리를 하시는 군요.
수상부인: 그는 시간에 관한 한 매우 인색합니다. 젊어서는 아무 운동도 하지 않았고, 정구도 50세부터 시작했는데 15년 전부터는 자전거와 노 젓기 등을 하고 계시지요. 본인의 부모님들은 운동을 전혀 하지 않으셨지만 85세와 89세까지 사셨고, 수상의 모친 역시 운동을 하지 않고도 85세의 연세로 건강하십니다.
“위기 때 가장 중요한 건 건강과 침착성”
대통령: 본인은 학창시절에 럭비를 하였으며, 나이가 들고서는 정구를 하였습니다만,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는 시간이 없어서 정구도 못하고, 그 대신 무슨 운동을 해야 할지 연구 중에 있는데,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상께서도 이미 좋은 방법을 터득하고 계시군요. 본인은 단전호흡을 10여 년간 실행하고 있는데,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한 가지 좋은 예는 저번 대통령 선거 시 4당 후보가 모두 목소리 보전에 노력하였는데, 그 중 김대중 씨가 가장 자신만만하였지요. 그러나 20여일이 지나자 모든 후보들이 다 나가떨어지고, 본인만 남았습니다. 야당 측은 본인의 목소리를 망가뜨리려고 유세장마다 최루가스를 뿌려놓았지만, 본인이 끝까지 유세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단전호흡에서 얻은 정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상: 위기에 닥쳤을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건강과 침착성이지요. 피곤해서 쓰러져 있다거나, 고도로 긴장되어 있을 때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쉽지요.
대통령: 또 다시 선거이야기 입니다만, 레이건 대통령은 TV에 매우 잘 비치는데, 부시 부통령이 왜 그것을 배우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가 NBC-TV에 부시 부통령이 출연하고, 그 뒤에 이어서 본인이 회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역시 부시 부통령은 TV를 다루는 데 결함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상: 부시 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목의 근육에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목이 긴데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근육이 긴장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통령에게 무언가 약점이 있는 듯한 인상을 갖게 하지요.
대통령: 본인이 보기에 부시 부통령은 사람을 응시할 때,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큰 결함인 것 같아요. 누구나 상대방을 쳐다 볼 때는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어서 무언가 호소하는 듯 한 인상을 주어야 하는데, 부시 부통령은 그렇지 못합니다.
수상: 부시 부통령의 강점은 성실성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분명한 사람이며, 이중적(二重的)인 성격이 전혀 없습니다.
金泳三의 역사 바로 세우기 비판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 리콴유 전 수상을 만났다. 그는 자랑부터 하더라고 한다. 매일 아침 장거리 조깅을 한다고. 그는 싱가포르와 한국은 가족의 중요성이나 가족을 부양하는 사회적 網(망)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리 수상은 하나를 덧붙였다고 한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데 대한 공통된 이해관계가 있다고.
그는 김영삼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을 비판하였다.
<(김영삼이 주도한 이른바 역사 재판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파멸시켰을 뿐 아니라 현대 한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모든 권위에 환멸을 느끼거나 시니컬해졌다. 全과 盧는 당시 한국의 기준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 결코 악당이 아니었다. 노태우는 또 군인 출신을 후계자로 삼아선 안 된다는 미국 여론의 압박도 있어 김영삼에게 정권이 넘어가도록 허용했었다. (그럼에도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낸 것은) 다른 나라들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나쁜 신호를 보냈으니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 하는 민간 정치인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1999년 한국에 와서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을 때 리 전 수상은 이른바 햇볕정책에 대하여 이런 충고를 했다.
<남북간에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 연구소끼리, 대학끼리, 여론 형성자들끼리. 그렇게 해야 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뀐다.>
김 대통령은 중국과 북한 관계에 대하여 물었는데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중국 지도층은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무질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현상 유지를 원한다. 그래야 한국과 교역을 하고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통일이 되면 중국은 미국과 한국에 쓸 수 있는 북한 카드를 잃게 된다.>
리콴유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대하여는 비판적이다. 한국이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하면서 항의 시위를 완화시킬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갖추어갔더라면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경찰과 과격하게 충돌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에서 지도층과 국민들이 사회적 신뢰관계를 再開(재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역대 대통령들이 기업인과 관리자들을 우대하여 고도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을 해결한 다음 한국은 다시 정력적으로 전진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한국인들은 역동적이고, 부지런하며, 의지가 강하고, 유능한 국민들이다. 그들의 경쟁 문화는 그들을 성취 지향적으로 만든다.>
여객기 1등석의 수상, 승객이 먹고 남은 케이크를 먹어
1990년대 초 한국의 한 장관이 대만의 臺北(대북)에서 싱가포르行 여객기 1등석을 탔다. 싱가포르 항공이었다. 곧 눈에 익은 사람이 올랐다. 리콴유(李光耀) 당시 싱가포르 수상이었다. 그는 1등석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1등석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줄로 친다. 다른 승객들에게 전혀 제약을 주지 않았다. 수상 비서관이 한 사람 옆에 앉았을 뿐이다. 수상은 비행도중 일어나 몸을 푸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식사 시간에 승무원들은 수상을 맨 나중에 서브했다. 後食(후식)으로 케이크가 나왔다. 수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라 주고 남은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먹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한국 장관이 승무원에게 물었다. ‘당신네들의 수상을 그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고. 승무원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수상께서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답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 항공에서는 수상이 주인인데 주인이 맨 나중에 대접을 받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兵役 면제 혜택은 없다
인구가 약 550만 명인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이스라엘을 닮은 국방제도를 유지한다. 국민총생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5%로서 한국의 두 배이고, 이스라엘의 반이다. 현역은, 직업군인이 3만 2700명, 의무병이 3만 9800명, 합쳐서 7만 병력이다.
싱가포르는 국민皆兵制(개병제)이다. 18세가 되면 군대에 징집되는데, 연기가 되지 않는다. 重病者(중병자)가 아니면 모두 입대한다. 兵役(병역)특혜는 없다. 심지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에 가야 한다. 훈련기간은 3개월이다. 체육선수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훈련기간의 단축이다. 뚱보들에겐 훈련기간을 길게 준다. 제대한 이후에도 예비군에 편입되어 나이 50세(장교)나 40세(사병)가 되기까지 매년 40일간 소집된다. 30만 명이 넘는 예비군이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군대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 싱가포르 군대는 1960년대 후반 이스라엘 군대가 지도하여 만들었다. 이스라엘 고문단은 멕시코 사람으로 위장하여 建軍(건군)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퍼진 가장 큰 이유는 공산당은 깨끗하다는 환상이었다.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청렴함을 상징한 인물이 중국의 毛澤東(모택동)과 월남의 胡志明(호지명)이었다. 반면 蔣介石(장개석) 군대는 부패의 대명사가 되었다. 李光耀(이광요,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청렴한 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서 나왔다.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부패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다수 민족인 중국계의 젊은이들이 蔣介石(장개석) 정부의 부패에 분노하고 毛澤東(모택동) 군대의 청렴함에 끌려 親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1959년에 리콴유 일파가 싱가포르 시의회에 진출했을 때 그들은 反부패의 상징으로 하얀 셔츠를 입었다. 공산당 세력은 리콴유의 영국 유학 경험, 골프를 치고 부르주아 생활을 하는 것을 비판했으나 그를 부패로 공격할 순 없었다.
싱가포르엔 영국 식민지 행정기구에서 만든 부패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CPIB)이 있었다. 리콴유는 이 기구에 反부패 척결의 全權(전권)을 맡겼다. 부패혐의자 및 그 가족의 은행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부패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의 범위를 넓혔다. 1960년에 법원은 자신의 월급에 비해서 지나친 호화생활을 하는 것 자체를 부패의 증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리 수장은 자신의 친구나 장관들에 대한 수사를 막기는커녕 장려했다.
자살한 장관 유족의 부탁을 거절한 非情한 수상
1986년에 국가개발장관 테칭완이 수뢰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테칭완은 무고하다면서 리 수상을 독대하고 싶어했다. 수상은 수사가 끝날 때까지는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 며칠 후 테 장관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유서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명예를 존중하는 동양의 신사로서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하여 가장 비싼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족들은 문상 온 리 수상에게 故人(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부검만은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수상은 剖檢(부검)을 하지 않으려면 자연사를 했다는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테 장관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견서를 냈다. 유족들은 더 곤경에 처했고 결국 싱가포르를 떠나야 했다.
리 수상은 고위 공직자들이 기업체 임원들보다도 월급을 적게 받으면 뇌물의 유혹에 노출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공무원들의 월급을 민간 수준까지 올리는 데 힘썼다. 고위공직자들이 명예와 사명감에만 의존한 채 어려운 생활을 견디게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人材(인재)가 공무원 사회로 들어오지 않는다.
1995년에 리 전 수상의 부인과 아들이 부동산을 5~6% 할인받고 산 것이 문제가 되었다. 부동산 개발업자가 판촉용으로 다른 知人들에게도 그런 할인율을 적용했음이 정부 조사로 밝혀졌다. 이 개발회사엔 리 전 수상의 동생이 비상임 이사로 등재되어 있어 소문이 나쁘게 돌았다. 前 수상의 부인은 결백이 증명된 뒤 할인받은 100만 싱가포르 달러를 정부에 기증하려 했으나 정부는 이런 돈을 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 돌려주었다. 부인은 이 돈을 자선단체에 주었다.
리콴유는 1997년 동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 때 싱가포르가 健在(건재)했던 이유를 부패 청산에 돌렸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등은 위기 대처 능력을 상실했지만 싱가포르는 공직자들이 私心(사심) 없는 객관적 입장에서 정책을 펴오면서 위기를 예견했고, 위기의 소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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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려주신 소중한 말씀 과 이미지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