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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앞마당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마치 천상으로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다 올라가면 안정
감과 비례미로 조선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을 은은히 표현하는 대웅전이 앞에 다가선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으로 절의 중심이다.
현재 보물 제 434호로 지정되어 있는 중요한 건축 문화재인 대웅전은 창사 때부터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의 건물은 광해군 6년(1614)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묘전 화상이 중창했던 것이다.
그 뒤 숙종 39년(1713)에 홍보 스님이 주관하여 중건, 단청하였는데 이때 도대목(都大木)은 조헌(祖軒)
지총(知摠), 치백(緇白) 스님이었으며 화원(畵員)은 영백(永白), 치감(致鑑), 사인(思印), 건운(建雲),
명준(明俊) 스님이었다.
숙종 46년(1720)에는 대준(大俊), 우화(祐和), 처환(處還), 처운(處云) 스님들이 편수가 되어 석계(石
階)를 수리하고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그 뒤 1814년에 개와, 1871년에 단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당우의 조영은 전적으로 사찰의 승인공장(僧人工匠)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건물은 1614년에 중창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713년으로 보
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조선 중기 이전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서 1614년에 건립된 형상을 그대로
두고 그 뒤로는 수리하는 데 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오래 전의 건립 연대나 규모, 건축 수법의 정교함은 통도사 대웅전과 함께 이 지역에서 흔히 찾
아보기 어려운 예이다.
특히 조선 중기 이래의 간박하고 힘찬 다포식(多包式) 가구의 양식적 특성과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어서 목조 건축의 양식 발전을 연구하는 데 크게 주목되는 예이다.
건물의 세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면, 측면 세 칸씩의 평면에 다포식 공포를 짜고 맞배지붕을 올린 점은 큰 규모의 불전 건물로서는
특이한 예이다.
그래서인지 사찰 안에 있는 대부분의 불전들도 같은 형식의 맞배지붕을 올렸다.
겹처마의 부연(敷衍)은 유난히 길게 뻗었으며 다포식이면서 맞배지붕인 까닭에 앞, 뒷면에만 공포를
짜고 측면에는 주두(柱頭) 아래 창방 뺄목을 첨차로 만들어서 장혀와 도리의 뺄목을 받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건축 가구가 그대로 노출되지만 뺄목들이 짧기 때문에 측면으로 풍판(風板)을 달았다.
공포는 어칸에 3구, 좌우 협칸에는 2구의 보간포(補間包)를 놓고 내 3출목, 외 4출목으로 짰다.
살미는 제1첨자부터 제3첨자까지 쇠서로 만들고 그 끝을 크게 원형으로 반곡시켜서 뽀족하게 휘어지게
하여 턱을 치켜세웠지만 섬약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당차고 간박 하다.
그 위에 한대(限大)를 놓고 양두를 둥글게 파련초각(波蓮草刻)해서 장혀와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주두와 소로는 경사지게 절단하고 행공 첨차는 아무런 치장이나 초각이 없이 직절(直截)하여 배 모서
리만 약간 공글린 교두형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간박하면서도 힘찬 공포의 짜임새에서 조선 중기 이전의 건축 수법을 느낄 수 있다.
기단과 석계는 초장 때 축조된 그대로인 듯하다.
5단 석계의 이석(耳石)은 와형으로 공글려서 면석에 동백꽃을 초각하였다.
또한 기단 면석에도 동백나무 잎을 부각하고 탱주를 세워서 그 위에 장대석을 내밀기로 돌렸다.
큰 막돌 초석은 기둥뿌리 부분을 원형으로 숙석(熟石)하여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전면 좌우의 귀기둥은
고복(鼓腹)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짧게 세웠다.
다른 건물의 석물과 달리 숙석 가공한 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고졸한 느낌을 준다.
창호는 전면을 모두 열어서 달았는데 어칸을 넓게 잡아서 아래에 판장을 댄 단정한 4분합 빗살문을
좌우 협칸에는 같은 형상의 3분합문을 달았다.
또 한 좌우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달고 배면 각 칸에는 쌍여닫이의 격자살문을 달았는데 후박한 문살
이면서도 새김질이 정교하다.
내부의 목조 보개(寶蓋, 닫집) 및 불단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여 조선시대 목조 공예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내 4출목이 차지한 외진(外陣)의 천장은 경사진 빗반자를 올리고 우물 반자 틀의 종다리에는 연화문을
조각, 단청하여 장신하였다.
내진의 우물반자는 중도리 받침 장혀에 결구 시켰는데 여기에도 보상화문(寶相花文)과 연화문(蓮花文)
을 조각하여 달았다.
불단에는 여러 가지 화문과 비천상(飛天像)들을 화려하게 조각, 장식하였다.
그 위의 닫집은 아자(亞字)형 평면에 다포식 지붕을 가구 한 보개로서 운룡(雲龍), 서조(瑞鳥), 비천상
등을 조각하여 장식하였으며 정교한 축조 수법이 뛰어나다.
그밖에도 조선 후기의 제작으로 알려진 벽면의 불화들도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중앙의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부처님의 왼쪽에 계시는 분은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
보살이다.
후불탱화는 1882년에 조성된 것으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좌우에 8보살, 2분
의 분신불, 10대 제자, 기타 신중 그리고 본존 무릎 아래로 아난 존자와 가섭 존자, 좌우에 2 보살과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불상을 중심으로 법당 왼쪽 벽 위쪽 벽화에는 약사여래와 그 좌우에 협시보살로 일광, 월광 보살이 그
려져 있다.
약사여래 부처님은 질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늘려 주시며 재난을 소멸해 주시는 부처님이다.
그 아래 불화는 삼장탱화로서 1882년에 조성된 불화이며, 천장(天藏)보살과 그 좌우에 지지(地持)보살
지장(地藏)보살이 그려져 있다.
법당 오른쪽 벽 위쪽 벽화는 아미타불과 그 좌우에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묘사하고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불리는 아미타 부처님은 먼 옛날 법장(法藏)
비구로 수행할 때 자신과 남들이 모두 함께 성불하기를 다짐하는 마흔 여덟 가지의 큰 서원을 세워
서방 극락정토를 이룩하신 부처님이며, 괴로움과 아픔 속에서 허덕이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극락세
계로 이끌어 주신다고 한다.
그 아래 불화는 신중탱화라고 하며 중앙의 제석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 아래로는 팔부중과 주악
동자가 있으며 보살과 제석천 사이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 대웅전(大雄殿)의 주련
摩訶大法王(마하대법왕) 크고 수승한 법이여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짧고 긴 것 흔적도 없어라.
本來非 白(본래비조백) 본래 그 모습 희지도 검지도 않지만
隨處現靑黃(수처현청황) 곳에 따라 푸른색 노란색을 나툰다네.
♣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산문 중 첫 번째 문이다.
우리가 사는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 짓는 곳으로서 중생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성역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을 의미한다.
일주문은 일직선의 기둥 위에 맞배 지붕을 한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둥양식은 일심(一心)
을 상징한다.
즉 절을 찾는 사람은 청정한 도량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것이다.
사역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서 범어사 성역(聖域)의 문지방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진리를 구하는 마음으로 이 문을 들어서야 하며, 이 문 앞에서는 합장반배를
한다.
일주문은 '기둥 네 개가 한 줄로 늘어선 3간의 구조(一柱三間)'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이 뜻하
는 바는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연관된다.
즉 중생의 바탕과 능력에 따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로 나누어진 불교의 여러 교법을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승(一佛乘)의 길로 향하게끔 한다는 사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세 개의 문 위에는 각각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가운데 '曹溪門(조계문)'이라는 작은 편액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 존자, 달마 대사, 육조 혜능 대사의 법맥을 이은 조계종 사찰임을 나타내고,
오른쪽의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이라는 편액은 범어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왼쪽의 '金井山 梵魚寺(금정산 범어사)'라는 편액은 산명과 사명을 밝힌 것이다.
일주문은 그 이름에서와 같이 기둥 넷이 한 줄로 서서 지붕을 받치고 선 세 칸 건물이다.
여느 사찰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겠지만 범어사 일주문은 석주로서 지붕을 받치게 하는 독특한 구조로
유명하다.
처음 건립된 것은 광해군 6년(1614)에 묘전 스님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전 요사를 중건할 때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숙종 44년(1718)에 명흡(明洽) 스님이 주관하고 대준(大俊), 우화(祐和), 처운(處雲) 스님들이
편수가 되어 석주로 개조하였으며 정조 5년(1781)에 백암(白巖) 스님의 주관 하에 다시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781년에 세운 그대로이다.
특이한 형상의 기둥은 지반에서 1.45미터 정도 높이까지 배흘림을 가진 원통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연속하여 세워서 만들었다.
그 뒤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각 주칸을 동일하게 잡고 창방과 평방 뺄목을 방형으로 짜서 그 위에 1구씩 보간포(補間包)를 올린 내,
외 3출목의 다포식 건물이다.
제공(齊工)의 쇠서는 제 1, 2첨자의 경우에 뿌리 밑부분을 둥글게 하여 끝은 부리처럼 뾰족하게 턱을
치켜들게 만들었고, 제 3첨자는 같은 형상이지만 뿌리 밑부분을 파형(波形)으로 깎았다.
한대(限大)에는 날렵한 익공으로 만들고 상단을 둥글게 깎은 뒤에 그 끝을 뽀족하게 만든 보뺄목을
장혀와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행공은 하단 모서리만 교두(翹頭)로 깎고 나머지는 전부 직절(直截)하였으며 창방 아래에는 안초공
(按草工)으로 기둥을 묶었다.
일주문은 석주를 세운 독특한 구조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선 중기 다포식 가구의 전형적인 수법을
지니고 있어서 대웅전과 함께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로 지정되어 있다.
♣ 천왕문
맡은 방위 |
이름 |
들고있는 물건 |
피부색 |
얼굴 특징 |
서 원 | |
오른손 |
왼손 | |||||
동 |
지국천왕 |
비파 |
청 |
다문입 |
착한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리라 | |
남 |
증장천왕 |
칼 |
적 |
성난눈 |
만물을 소생시키리라 | |
서 |
광목천왕 |
용 |
여의주 |
백 |
벌린입 |
악한자에게 고통을 주어 불법에 마음을 일으키게 하리라 |
북 |
다문천왕 |
탑 |
흑 |
치아를 보임 |
어리석음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인도하리라 |
♣ 불이문
♣ 보제루
보제루는 불이문(不二門)에서 30여 단의 높은 석계를 올라 도달하는 중단 구역의 첫째 건물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 는 보제(普濟) 의 뜻에 부합되게 이 건물에서는 예불(禮佛)과 법요식(法要式)이
거행된다. 이러한 행사는 종종 건물 바깥의 중정으로도 연장되므로 상단이나 하단과는 다른 성격의
공간일 필요가 있다.
약 6, 7미터의 고저차로 상, 하단과 적절한 공간적 분절을 이루고 누하주(樓下柱)를 통하는 대신 보제
루의 좌우로 우회, 진입토록 하여 중정에서의 내밀함을 더하도록 하였다.
일부 사찰처럼 누각 밑을 직접 통과하게 되는 이름 그대로의 누각의 아니라 정면에 석계를 배치하고
돌아들도록 한 것이다.
언제부터 지금의 자리에 보제루가 서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적기}에는 숙종 15년(1699)에 자수(自修) 스님의 주관하에 조헌(祖軒), 회영(懷英) 스님들이
편수가 되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순조 13년(1813)에 신정(信定) 스님이 주관하고 만잠(萬岑), 관식(寬式) 스님과 민간공장(民間工
匠)인 김성대(金成大) 등이 도목수(都木手)가 되어 중수하였으며 다시 1827년에도 중건한 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건물은 1813년 또는 1827년에 중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에 실린 사진도 이때 건립된 건물로 판단되는데 형태는 지금과 거의 다
를 바 없다.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평면으로 사찰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익공(二翼工)식의 공포를 가구
하여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렸다.
수리 전에는 중전 쪽으로 온통 개방하고 불이문 쪽으로는 판벽 사이로 쌍여닫이의 판장문을 달았었다.
최근에 수리하면서 큰 막돌 덤벙 주초 위의 1.5미터 석주를 받치고 그 높이만큼 징수리 벽을 석판으로
막아서 중정 쪽에만 네 짝 미세기창을 달았다 다만 수리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익공식 공포의 형상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성을 보여 준다.
주두 위로 초익공과 이익공을 첩놓고 1출목을 짧게 내어서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익공과 행공 첨자에는 파련 형상의 단청 외에 별도의 초각은 하지 않았다.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복화반(覆花盤) 1구씩을 얹고 나머지 부분에는 회벽 마감 위에 벽화를 그려 두
었다.
최근의 수리로 예전과 비교하여 고졸한 분위기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누각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은 보
존하고 있다.
석계쪽으로는 범어사 현판이 중전쪽으로는 보제루와 금강계단(金剛戒壇)의 현판이 붙어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제루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지만 범어사의 보제루는 정면에
석계단을 배치하여 건물 옆으로 통과하도록 하여 다른 사찰과는 다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보제루의 오른쪽 벽면에는 목우도(牧牛圖)가 그려져 있다.
목우도는 송의 보명(普明)이 창안한 선화(禪畵)인데, 소를 길들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소는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을 상징한다.
즉 검은 소에서 흰 소로 나아가서 마지막 열 번째는 비어있는 원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오염된 성품을 닦아 청정한 성품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 원응료
일제 초기까지 범어사에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와 수행처인 강당, 선방 등 7 대방(大房)이 있었다.
중단 구역의 원응당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1613년 묘전 스님이 창건하였으나 이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지금 건물은 1925년에 성월(惺月) 스님이 중건한 것이다. 정면 열 칸, 측면 네 칸의 평면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원응당은 강당과 불교 전문 강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승가대학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안심료(安心
寮)와 함께 경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원응당의 '원응'은 화엄경의 도리인 원만하고 항상 응답되어 지는 것을 의미하며, 불이(不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 안심료
1613년에 묘전 스님이 중단 구역에 선방으로 창건했다고 하지만, 전후의 사정은 확인 할 수 없다.
정면 일곱 칸, 측면 세 칸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신참 납자의 선 수행을 위한 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강학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심료의 '안심'은 삼매를 얻은 경지로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 심검당
검은 지혜를 상징하는 말이며 '심검당'('지혜를 찾는 집')이란 당호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초심납자
들의 선방이었다.
사찰 규모가 커지면서 선방의 기능을 금어선원으로 옮기고 지금은 원주실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 때에는 영각(影閣)이란 이름으로 의상 대사 등의 조사(祖師) 진영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5년(1613)에 묘전 스님이 대웅전 등을 중건할 때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뒤로도 빈번
함 중건, 중수가 있었겠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정면 여섯 칸, 측면 세 칸의 평면에 서까래만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낮은 석축 기단에 방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서 1출목의 주심포를 짜 올렸다.
창방 뺄목을 안초공(按草工)처럼 만들어서 주두를 감싸고 쇠서 뿌리에 파련 형상으로 단청하였으며 그
끝을 아래로 늘어뜨린 살미를 첩놓아서 보뺄목을 받쳤다.
제 1첨자에 행공을 걸고 짧게 1출목을 내어서 장혀와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으며 내부는 한 몸처럼 보아
지를 틀었다.
이러한 건축 수법은 미륵전과 흡사한 조선 후기의 말기적 특성을 갖고 있어서 1889년의 중수 때 크게
손질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지장전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명부전(冥府殿) 또는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다 구제할 것을 서원한 보살로서 우리 민간신앙 속에서도 뿌리 깊이 작용하고
있다.
지장전은 당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저승 세계를 상징하는 법당으로서 주존(主尊)은 지옥 중생의 구제를
서원한 지장보살을 모셨다.
관음의 신앙으로써 현세의 복락을 추구하고 지장의 신앙으로써 저승의 길을 밝힌다는 불교 원리에 따
라 관음전과 함께 대웅전을 좌우에서 협시하도록 세워진 것이다.
가운데 모셔진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그리고 시
왕들(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이 있으며 문 입구에는 금강역사가 있다.
초창기 때의 당호는 지장전이었으나 그 뒤에 같은 뜻의 명부전(冥府殿)으로 바뀌었다가 최근에 다시
지장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옛 명부전 건물은 팔상전 앞, 지금의 서지전 자리에 있었다.
그 건물은 1613년에 최공(崔公)이 창건했다고 하며 그 뒤 1891년에 양화(兩華) 대사가 중수하여 내려
오다가 1988년에 소실되었다.
이렇게 서지전 자리에 있던 고색창연하던 건물이 화재로 전소하자 1990년에 대웅전 옆에 있던 탑을
현재의 일주문 옆 탑전으로 내려 옮기고 지금의 자리에 맞배지붕으로 지장전을 다시 건립하였다.
새로 지은 지장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평면에 내, 외 2출목의 다포식 공포를 짜 얹고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올렸다.
다포식이면서도 맞배지붕을 올리고 측면에 풍판을 단 것은 대웅전과 동일하다.
♣ 산령각
산령각은 불교가 전래의 토속 신앙과 습합(習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당우이다.
소규모 건물의 내부에는 가람터와 산악을 수호하는 산신(山神)과 호랑이를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
으며, 위치도 가람터의 제일 위쪽 산록에 접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평면에 간략한 주심포식 가구에 1출목을 내고 겹처마의 맞배지붕
을 얹었다.
어칸에 3분합, 좌우 협칸에 2분합의 빗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가구 수법은 그 앞의 팔상, 독성, 나한 삼전과 흡사하여 건립 시기를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
치는 않다.
♣ 서지전
♣ 휴휴정사
♣ 팔상전/독성각/나한전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또한 중앙 네 번째 칸의 독성전 문얼굴을 다른 부분과 달리 상인방을 반원형 재목으로 아치 틀기한 건
축 수법도 눈길을 끈다.
기록에는 1613년에 묘전 화상이 나한전을 창건하고 1705년에 명학(明學)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다고
하므로 원래는 이들 세 건물이 별도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05년에 학암(鶴庵) 스님이 팔상나한독성각을 중건하고 제 성상(聖像)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오래 전에 지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정면 일곱 칸, 측면 세 칸의 평면에 좌측 세 칸의 팔상전에는 삼존(三尊) 소상(塑像)과 팔상탱(八相幀)
을 봉안했고, 중앙 네 번째 칸의 독성전에는 나반존자를 그리고 우측 세칸의 나한전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을 안치하였다.
전면을 모두 문얼굴로 개방하고 좌우 각 두 번째 칸에는 3분합을 그 밖에는 2분함의 빗살문을 달았으
나 네번째 칸의 독성전으로 통하는 문얼굴은 상인방을 아치로 틀고 반칸을 들여서 2분합의 화창(花窓)
을 달았다.
공포는 짧게 작목(作目)한 주심포식으로 행공 첨차를 걸고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
쳤다.
덤벙 초석에 기둥뿌리만 숙석하여 세웠다.
파련 초각한 익공을 창방과 교차시켜서 주두를 받치고 그 위에 다시 익공과 봉두를 초각한 보뺄목을
받게 하였는데 이러한 건축 수법은 관음전의 경우와 흡사하여 두 건물의 조영을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개의 불화로 조성해 놓은 곳으로 중앙에 삼존소상과 석가모니 후불
탱화가 배치되어 있고, 그 왼쪽에는 1978년에 조성된 팔상탱화 중 홀수번호상이, 오른쪽에는 짝수번호
상이 배치되어 있다.
팔상탱화는 ①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②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③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④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⑤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⑥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⑦ 녹원전법상
(鹿園轉法相), ⑧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되어 있다.
독성전은 나반 존자(那畔尊者, 빈두로파라수)를 모신 법당이다. 나반존자는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한 성자로 알려져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꿰뚫어 알고 있고,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말법시대의 중세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한다.
나한전은 석가 삼존과 16 나한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후불탱화는 1905년에 조성된 불화로서 중앙에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제화갈라보살과 여의를 든 미륵보살이 있고 사천왕과 10대 제자를 그려 놓았으며 상하좌우 사천
왕 중 왼쪽의 사천왕은 허리를 구부린 측면관으로 이채롭다.
나한탱화는 16나한도로서 한 분 한 분 따로 그리지 않고 세 폭의 화면에 모두 조성하였다.
대개 나한도는 왼쪽에 홀수 번호 나한을, 오른쪽에 짝수 번호의 나한을 배치하고 있으나 이 나한도는
왼쪽에 아홉 분, 오른쪽에 일곱 분의 나한을 배치하였다.
♣ 관음전
관음전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은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한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고 하고, 부불
전의 성격을 띨 경우 관음전, 대비전(大悲殿)이라고 한다.
좌우보처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기도 하며 후불탱화로는 관음탱화, 42수 천수관음도 등을 모
신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고도
불리며, 줄여서 관음(觀音)보살이라고 한다.
또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추고 중생들의 괴로움을 전부 보시고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대자대비
(大慈大悲)를 근본 서원(誓願)으로 하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을 말한다.
미타삼존(彌陀三尊)의 하나로 아미타불의 왼쪽 보처(補處)이다.
관세음(觀世音)이란 '세간(世間)의 음성을 관(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라 함은
'지혜로 관조(觀照)하므로 자재(自在)한 묘과(妙果)를 얻은'이란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 하고,
자비를 위주로 하므로 대비성자(大悲聖者)라하며, 세상을 구제하므로 구세대왕(救世大王)이라고도 한
다.
이에 정토계통의 종파에서는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과 구세대왕인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극락세
계에 태어나 성불하기를 발원하며, 현세에서의 고통에서도 벗어나기를 희구한다.
비단 정토종이 아니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정 많은 우리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이 아닌가 한다.
관세음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경(經)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유독
관세음 보살님은 보살이면서도 부처님의 몸으로도 나타나 교화의 방편을 설하시는 실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발하시는 자비의 보살이시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化現)을 모시고 계시다.
왼손에는 연꽃, 감로수병을 들고 계신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을 표시하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는 뜻
을,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관세음 보살은 보통 6관음(성, 천수, 마두, 십일면, 준제, 여의륜)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성(聖)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정토(淨土) 또는 계신 곳을 보타락가(Potalaka)라 하나 원래 {화엄경}에 남인도 마뢰구타국의 보타
락가라 한 것이 처음이고, 중국에서는 절강성의 주산도(舟山島), 우리나라의 낙산사 홍련암을 보타락
가라 한다.
범어사 관음전은 원래 대웅전 바로 왼쪽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에 있던 옛 금어선원(金魚禪院)을 옮
기고 대웅전 오른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본래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이고 일체 중생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보살이므로 반대쪽의 지장전
(地藏殿)과 함께 대웅전을 협시하는 식으로 세워진 것이다.
범어사의 관음전은 사중의 유일한 청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화려하고도 우아한 단청으로 꾸민 건
물이다.
청기와 단청에는 특이한 조각을 용마루와 귀마루 네 곳에 두 개씩 전부 열 개를 붙였으며 내부에는 단
아한 관음보살상과 동자상을 조화롭게 배치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음전의 초장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웅전과 함께 광해군 5년(1613)에 묘전 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721년에 흥보 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주심포(柱心包)를 짜올린 소규모의 건물이면서도 장식과 초각이 과다할 정도이며 전형적인 조선 후기
의 말기적 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오래 전에 건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1613년의 건물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1721년의 중건 뒤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평면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규모에 도리통은 주칸이 동일하며 전면은 모두 문얼굴을 열고 각
칸에 3분합의 빗살문을, 양측면 첫째 칸에 각기 외짝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얹고 측면으로 뺄목이 짧은 탓에 풍판을 달았으며 내부에 관음상(觀音像)
과 장경(藏經)을 봉안하였다.
주심에만 포작(包作)한 주심포식이지만 1출목을 짧게 내어서 행공 첨차를 걸고 그 위에 장혀와 보뺄목
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쳤다.
덤벙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연꽃이 달린 파련 초각의 익공(翼工)을 창방과 교차시켜서 주두를 받
치고 다시 그 위에 파련 초각한 익공과 봉두(鳳頭)를 초각한 보뺄목을 받게 하였다.
둘째, 셋째, 넷째 기둥에는 용두(龍頭)를 초각하여 익공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가구 수법은 다른 건물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팔상, 독성, 나한 삼전의 경우와 거의 흡사하다.
따라서 두 건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인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거나 본떠서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비로전
비로전은 법신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으로 삼신불인 비로자나, 노사나(아미타),
석가모니를 동시에 모실 때는 대적광전, 일반으로 비로자나 부처님만을 모실 땐 비로전, {대방광불화
엄경} 또는 밀교 경전의 교주이므로 화엄전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부처님의 진신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며, 우주와
삼라만상의 참 생명의 실상을 가리키는 뜻으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일체 성인의 근본이 된다.
'비로자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광명이 우주에 가득히 비친다'라는 뜻이며 부처님의 광명과 지혜
가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게 두루 비추어 원만한 것을 의미한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좌우에 있는 분들을 협시불 또는 협시보살이라고 하며, 왼쪽에 지혜의 상징인 문수
보살이, 오른쪽에 지혜의 실천, 즉 보살행을 뜻하는 보현보살이 비로자나 부처님을 협시하고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이 취하고 계신 손 모양을 지권인(智拳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말아 쥔 모양을 일컫는다. 오른손은 부처님 세계를, 왼손은 중생 세계를 상징하므로, 부
처와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며 또한 진리의 몸으로 중생세계를 감싸고 있음을
뜻한다.
범어사 비로전은 창사 당시에 미륵전 서쪽에 세 칸 건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화엄 십찰의 하나로 창건된 만큼 화엄종의 본존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이 건립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 뒤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한참 뒤인 숙종 9년(1683)에 해민(海敏) 스님이 중창하고,
경종 원년(1721)에 진열(進悅), 관성(寬性), 청우(淸愚) 스님들이 양공(良工)으로 일하여 중수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1721년 이후로도 몇 차례의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평면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올리고 내부에는 비로자나 삼존을 봉안하였다.
기단은 최근에 수리하면서 미륵전의 경우와 같은 형상으로 축조하였으며 그 밖에도 『조선고적도보』
에서 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창방 뺄목을 초익공으로 하고 그 위에 행공 첨차와 이익공을 첩놓아 1출목을 짧게 내어서 장혀와 외목
도리를 받게 하였다.
공포의 형상만을 두고 볼 때 보제루의 경우와 흡사하다.
창호는 미륵전과 같은 형식인데, 미륵전과의 사이에는 쌍여닫이의 격자살문을 달아서 뒤쪽의 금어선
원으로 통하게 하였으니 비로전 오른쪽의 영주선재(瀛禪洲齋)라 현액한 솟을삼문이 그 정문이다.
♣ 미륵전
미륵삼부경(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미륵대생불경)에 나오는 자씨보살, 즉 부처님 다음의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셔 놓은 곳으로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 중생제도를 위해 오실 부처님으로 이때의
세상을 용화세계(龍華世界)라고 하며, 지금은 도솔천에서 미륵보살로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위해 설법
하고 계신다고 한다.
{범어사창건사적}에는 창사 당시에 2층 건물의 미륵전이 주불전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므로 창사 때는
미륵전이 가장 중요한 불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한참 뒤인 1613년에 묘전 스님이 지금의 자리에 미륵전을 중창한
이래 인조 15년(1637년)에 인흡 스님이 중건하고 고종 26년(1889)에 의룡(義龍) 스님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1889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건물이 지니고 있는 조선
후기 양식적 특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건물 내부에는 항마촉지(降魔觸地)의 목조 미륵 불상을 모시고, 전면과 좌우 벽면에는 영탱을 봉안하
였다.
원래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울리고 막돌 허튼층쌓기한 기단(基壇)에 덤벙
초석을 놓았었다.
최근에 수리하면서 숙석한 면석과 탱주를 세우고 장대석을 둘러 기단을 만들고 고복석(鼓腹石)의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수리 전과 다를 바 없는데 조선 후기 전형적인 1출목의 주심포를 짜 올렸다.
제공(齊工) 뿌리를 위로 치켜올려서 그 끝에 만개한 연꽃과 봉오리를 조각하고 파련 형상으로 단청하
였으며 창호는 전면에 문얼굴을 전부 내고 각 칸에 2분합의 빗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건축 수법은 심검당의 경우와도 흡사하여 두 건물의 건립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법당에 모셔진 미륵부처님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미륵전 밑을 파
보니 미륵부처님께서 일본을 등지고 앉아 있어 그대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 금어선원
미륵전 옆으로 '영주선제(瀛洲禪齊)'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대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하면 '청풍당
(淸風堂)' 또는 '금어선원(金魚禪院)'이라고 하는 선원이 있다.
청풍당의 '청풍'은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 할 때 '운수'의 다른 표현이며, 선원은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 중에서 가장 어렵고 힘이 드는 참선수행을 하는 곳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화두일념으로
정진하는 곳을 말한다.
선원에서는 안거(安居)라고 하여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기간을 정해서 특별 정진 수행을 하는데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하
고 이 기간 중에는 일체 외출을 금한 채 수행에만 전념하며 일정기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기도
한다.
범어사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불리는 것도 바로 선원으로 이름이 나있기 때문이다.
옛부터 훌륭한 선사들이 범어사를 많이 거쳐갔으며 근세에 경허 스님이 주석한 이후 범어사 선원이
더욱 유명해졌을 뿐 아니라,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동산 스님께서 오랫동안 주석하시며 선풍을 진작시
키고 후학들을 지도 양성하였다.
범어사에 대나무가 특히 많은 것은 동산 스님께서 대나무를 유난히 좋아하셨기 때문이며, 동산 스님은
대나무 밭을 거닐다가 댓잎 부딪히는 소리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동산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浮屠)도 대밭에 있다.
♣ 삼층석탑
보물 제250호로 지정되어 있는 범어사 삼층석탑은 신라말기의 석탑으로 신라 흥덕왕 때 범어사가 창건
되면서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미륵전 앞 마당에 서 있다.
이 석탑의 높이는 약 4m이고, 상하의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삼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이다.
하층기단은 각 면에 탱주( 柱)없이 3구씩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상층기단은 중석(中石)을 높게 하
고 각 면석(面石)에 꽉 들어차게 안상을 조각하여 그 수법이 특이하다.
1층 탑신에 비해 2층 이상의 탑신은 매우 작으며 옥개석(屋蓋石)은 추녀가 수평을 이루나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었고 평평하고 얇아 신라 하대의 양식을 드러내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거꾸로 놓인 노반(露盤)과 후대에 보충한 보주(寶珠)만이 있을 뿐 다른 부분은 없어
졌다.
이 석탑은 일제 때 수리하면서 기단 아래에다 석단을 받쳐 놓아 우뚝 서 보이나 기형(奇型)을 이루었고
주위의 돌 난간도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 종각
종루는 아침, 저녁 예불과 의식이나 행사 때 쓰이는 사물(四物) 즉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가 설치된 건물이다.
범어사 종루는 원래 심검당 오른쪽 전방, 삼층석탑 맞은편 중정에 있었다.
당시의 건물은 숙종 25년(1669)에 명학 스님이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일제 초기에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옮겨 세웠다.
건축 양식이 미륵전과 흡사하여 1889년경에 크게 손질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2층 누각에 정면 세 칸, 측면 세칸의 규모로서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법물(四法物)을 갖추었다.
막돌 덤벙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2층 누마루를 깔고 다시 2층 기둥을 세워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원래는 1층 누하주를 전부 열었으나 지금은 간벽을 막아서 기념품 판매점을 꾸몄다.
공포는 미륵전과 흡사한데 창방 뺄목을 돌출시켜서 양봉형상으로 주두를 감싸고 살미는 끝을 만곡시켜
서 연꽃을 초각하였다.
다시 행공 첨차와 제2첨차를 첩놓아서 봉두 형상을 초각한 보뺄목과 장혀 및 도리와 결구하고 내부는
한 몸처럼 보아지를 틀었다. 한편, 최근에 승가대학 일곽에 세운 또 하나의 종루가 있다.
정면, 측면 세 칸의 누각형 건물로서 1층 누하주와 바닥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 함홍당
7대방 가운데 하나로서 1613년에 묘전 스님이 창건하였고 한참 뒤인 1925년에 성월 스님이 중수하여
이를 교무소롤 사용하였다.
정면 열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지금은 사찰의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된다.
♣ 침계료
♣ 설법전(해행당)
함홍당 옆에 있는 건물은 설법전인데 원래 속가대중의 교육과 절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장소인 해행당(解行堂)을 헐고 다시 건축을 시작하여 1999년에 완공된 전각이다.
설법전은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현재 범어사에서 가장 큰 전각으로서 각종 법회와 크고 작은
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해행당(解行堂)
7대방 가운데 하나로서 1613년에 묘전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하단 구역에 있는 요사로서 정면 열 칸, 측켠 두 칸의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지금은 불교청년회 등 속가
(俗家) 대중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사용된다.
♣ 유뮬전시관
♣ 칠층석탑
♣ 당간지주
♧ 주변 암자 둘러보기
♣ 만성암
♣ 사자암
♣ 대성암
♣ 금강암
♣ 안양암
♣ 미륵암
♣ 원효암
♣ 내원암
♣ 청련암
♣ 계명암
♣ 지장암
♧ 등산코스 :
범어사 주차장-내원암-고당봉-북문-정수암-산성마을(9km, 2시간40분)
♧ 찾아오시는 길
♣ 대중교통
♣ 자가용
♧ 교 통 편 :
(버 스)
37,47,48,49,49-1,50,50-1,80-1,147,148,247,301번 버스들을 이용하여 종점에 내린 후, 승하마트 앞의
90번 버스를 이용하면 범어사 매표소 입구에 도착
(지하철)
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에 내려서 5번 or 7번 출구로 나와 두 출구 사이의 길을 따라 5분정도 올라가면,
삼신교통 버스 정류소가 나오고 거기서 90번 버스를 이용하면 범어사 매표소 입구에 도착
♧ 주변관광지 :
동래온천, 허심청, 부산대학교
♧ 정보제공자 :
1) 범어사 종무소 (051-508-3127)
2) 611-735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5동 1000번지
부산광역시청 관광진흥과 (051-888-3518 / 팩스 051-888-3509)
(조계사, 범어사, 한국 관광공사 펌)
첫댓글 가람순례 가기 전에 미리 좋은 정보를 제공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지장보살 마하살
그림이 안나오지만 자료는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