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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28,1-17
1 유다 임금 치드키야의 통치 초기 제사년 다섯째 달에, 기브온 출신의 예언자이며 아쭈르의 아들인 하난야가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3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곳에서 가져가 바빌론으로 옮겨 놓은 주님의 집 모든 기물을, 내가 이곳에 다시 돌려 놓겠다.
4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아들 여콘야와 유다의 모든 유배자를 이 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정녕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겠다.’”
5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제들과, 주님의 집 안에 서 있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6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였다.
“아무렴,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주님께서 당신이 예언한 말을 실현시키시어, 주님의 집 모든 기물과 모든 유배자를 바빌론에서 이곳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라오.
7 그러나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전하는 이 말씀을 들어 보시오.
8 예로부터, 나와 당신에 앞서 활동한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들에게 전쟁과 재앙과 흑사병이 닥치리라고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
10 그러자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내어 부수었다.
11 그러고 나서 하난야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겨 이와 같이 부수겠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길을 떠났다.
12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순 뒤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가서 하난야에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고, 오히려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다.′
14 참으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모든 민족들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우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
나는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었다.′’”
15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17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 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 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건너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태 14,19)
오늘 복음은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얘기입니다.
제자들은 굶주린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주님께 제안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가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나무라시지는 않고, 그러나 “그들을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무라시지는 않고 새로운 길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새로운 길이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긴 하지만 실은 당신이 주시는 방식인데, 지금까지 제자들은 이렇게 줘 본 적이 없고 어쩌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줍니까?
사실입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결과를 놓고 보면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줄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진 것이 없어도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진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 말해서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것을 주거나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형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 나눠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도 받는 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선 받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가운데 받는 것을 잘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줄 마음이 없이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받아서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제게 많은 후원을 해주시는데 그것으로 제 주머니 채운다고 생각하시면 후원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넙죽넙죽 잘 받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저의 가난을 생각하며 안 받으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다 받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께 받으신 것을 오늘 제자들처럼 나누시도록 제가 다만 통로가 되어 드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손에 얹어 놓아라>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사랑으로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시편 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 문제는 해결된다고 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2024년 통계자료는 7억 3,3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는 세계 인구의 9%에 해당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 아동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가운데 은총의 충만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 앞에서 그 정도의 꿈밖에 꿀 수 없단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만약 제자들이 자신들이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당신 믿음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그 씨가 잘 자라면 새들이 깃들어 쉬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행복입니다.
씨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누군가를 쉬게 하고 힘을 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가 가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불안이고 인정받지 못함인데,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명을 가진 이는 능력자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지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온 세상을 배불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에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나의 능력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식의 작은 꿈은 버립시다.
작은 꿈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 화학자, 엔지니어,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으며 355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폭발물 산업에서의 그의 발명품과 사업 벤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전쟁과 산업 분야에 널리 사용된 그의 발명품의 파괴적인 잠재력 때문에 종종 비판받았습니다.
1888년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동생 루드비히 노벨(Ludvig Nobel)이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신문은 실수로 Ludvig 대신 Alfred의 사망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죽음의 상인은 죽었다(The Merchant of Death is Dead)'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에서는 노벨이 폭발물을 발명하고 폭발로 인한 파괴로 이익을 얻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노벨은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르지 영감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고 난 후 변화하게 된 똑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이 자신에게 묶여 있다면 여전히 죽음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남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노벨은 자기 재산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기여에 보답하는 데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는 2,000억 정도 되는 재산으로 어떻게 세상에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개인과 조직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을 제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895년에 작성된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남은 실현 가능 재산 전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의 유언집행인이 안전한 증권에 투자한 자본은 기금을 구성하고, 그 이자는 매년 전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상금 형태로 분배되어야 합니다: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2,000억을 가진 부자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돈으로 온 인류를 먹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노벨상 제정은 그의 유산을 ‘죽음의 상인’에서 ‘인류의 은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물에 감사할 줄 알 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길 때, 사람은 그것으로 세상의 배를 불리는 일에 사용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 됩니다.
먼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고기를 잡는 기술이든, 공부하는 기술이든, 예체능의 능력이든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 그것을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십니다.
나는 그 일의 일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은총의 통로가 되고 이 은총의 통로가 됨으로써 그 은총을 주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이 때문에 5천 명을 먹이는 기적 안에서 정작 놀라는 것은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고 그것을 다시 나누어주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1)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인데,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제자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의 건의에는 예수님을 걱정하는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쉬시지 않고 계속 일하시는 것이 걱정스러우니까 일단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건의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자신들의 배고픔도 의식했을 것이고, 예수님과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도 생각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무 대책이 없을 때, 또는 해결 방법이 전혀 안 보일 때,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있다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럴 때에는 청원기도는 안 바쳐도 됩니다.
감사기도는 바쳐야 하지만.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몹시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런데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말씀드리는 ‘기도’와 같습니다.
2)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표현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이지만,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배고픈 상태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이 말씀은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 있는 말씀인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으로, 또 ‘치유의 은총’으로 사람들의 영적인 허기와 갈증을 해결해 주셨는데, 이제 육신의 배고픔도 해결해 주려고 하십니다.
3)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몹시 당황스러운 명령입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없고 빵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정을 잘 아시면서도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당신이 따로 생각하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에 “내가 마련해 줄 테니.” 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뜻으로는 “저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4)
기적이란,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재료로 삼아서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 ‘기적의 빵’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받아서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명령이 말씀하신 그대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명령을 신앙인들이 잘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그것을 받은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즉 교회는, 사람들의 사정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는) 공동체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만일에 세상을 향해서 담을 쌓아놓고서 신앙인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또 사랑 실천을 외면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도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목자 예수님처럼! -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삽시다”>
“주님,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시편 119,29)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새벽 뉴스를 확인하니, “사상 최악 폭염, 2018년 이후 첫 40도...열흘은 폭염”, 기후위기가 현실화되는 불길한 느낌입니다.
“평화의 하느님 말씀을 억누르지 마라. 전쟁은 패배다.”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 후 강론 시 말씀입니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패배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하느님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쟁입니다.
어제 읽은 삶의 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불교에서 관觀은 지혜로 경계를 비추어본다는 의미이다.
관심觀心은 마음을 그리 보며 바르게 살핀다는 의미가 되겠지.
앞으로 세상을 잘 관觀하여 길 잃지 말고 인연이 닿거든 또 보자.’
주지 스님의 편지에 착안한 작가는 관병觀病이라는 단어를 발굴해 병을 헤아리고, 살피며, 관계하는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투병鬪病, 치병治病도 아닌 반려병伴侶病이랄까?”
이런 지혜와 일맥상통하는 ‘놀다’라는 시입니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
<정현종 ‘놀다’ 시 전문>
어느 시인이 책상위에 붙여놓고 자신을 경계했다는 다음 대목의 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서 책만 읽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이 또 있겠는가?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우라.
학자도 땀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며, 다양한 일들을 경험해봐야 한다.
노동은 책 읽는 것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신의 글 속에서 쓸데없는 잡담과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과일이든 스스로 예쁨을 경계해야 한다”
다산 옛 어른이 말씀도 마음에 새겨집니다.
“한 갑자의 공부를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바로 ‘마음’과 ‘일상’이다.”
모든 공부를 귀결하는 말마디가 ‘마음’과 ‘일상’입니다.
‘마음관리’와 ‘일상’을 충실히 살아냄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고백성사차 들린 어느 순박한 수도사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온 무거운 수박 선물을 잊지 못합니다.
후에 체중계에 달아보니 무려 10.1kg이었고 농부의 노고에 감동했습니다.
영양, 봉화, 진안 등 해발 300m 산기슭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자라 과육이 아삭한 ‘산(山)수박’입니다.
불암산 기슭에서 불암산 정기를 받아 영적 거인 수도자로 살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참 예언자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 하난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리자 비로소 말문을 여는 하느님의 사람, 예레미야입니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보내시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용기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소통의 일치관계에 있는 기도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레미야와 대칭 구조에 있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예레미야의 긍정적 덕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착한목자 예수님은 말그대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이며, 그의 덕목은 기도, 자비, 지혜, 용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 후에 계속되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예수님은 깊은 관상적 휴식의 기도를 위해 외딴곳을 찾습니다.
삶이 복잡하고 힘들수록 외딴곳의 쉼터와 샘터, 배움터와 기도터의 마련은 필수입니다.
저에게는 이른 새벽마다 강론을 쓰는 집무실이 외딴곳입니다.
예수님이 한결같이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한 것도 외딴곳에서의 아버지와의 깊은 내적일치의 기도 덕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외딴곳의 광야에 도착했을 때 미리 대기하며 기다리고 있는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에서 착한목자로서 그분의 자비와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자비의 연민은 하느님의 얼굴이며 분별의 잣대입니다.
자신과 제자 일행의 휴식보다는 아프고 배고픈 군중들의 고치심과 먹이심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주님의 분별의 지혜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나타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의 존재가 다음 대목에서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언행은 정직하여 속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주눅들지 않으시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신 자비와 지혜의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고치심에 이어 군중을 먹이심으로 구체적 사랑이 표현됩니다.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진 것 전부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놓아 나눴을 때, 즉시 이어지는 주님의 봉헌의 기도입니다.
군중을 풀밭에 자리 잡게 명하신후 진인사대천명 마음으로 봉헌기도를 바칩니다.
마치 광야여정 중의 오아시스 미사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그대로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이요 이런 절박한 자세로 미사를 봉헌해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군중들을 감동시킨 제자들의 나눔이요, 예수님의 봉헌기도에 마침내 모두가 배불리 먹은 기적입니다.
아마도 군중은 가진 것을 다 자발적으로 비워 나눴을 것이니 차고 넘치는 기적입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기적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광야 인생 여정중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기도와 회개,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진실과 용기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
(시편 119,4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들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성서 해석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 그대로의 해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2000년 전과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정국가였습니다.
한 국가에는 한 종교가 허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권과 신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종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방의 종교는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병든 이를 치료해 주고, 어린이를 돌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말씀에 대한 해석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으로는 우리의 썩을 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졌지만 모두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의 품삯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오후에 일한 사람도, 저녁이 되어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그런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나눔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쁨이 됩니다.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나눔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하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실천하는 사랑>
어느 책에서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이의 전사 요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소개합니다.
“해보겠다고? 해보겠다는 건 없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만 있을 뿐!”
솔직히 이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참 많지요.
그러나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과연 변하는 것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런저런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소망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과연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용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해야 한다.”
불가능한 상황이어도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만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죽은 사람의 물건을 정리해 주는 유품정리사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개 제일 좋은 것은 써보지도 못한 채 죽는다고 말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생활에서 하는 사랑의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을 해보지도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간다면 큰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하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먹을거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면서 불가능하다고 항변합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만이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아주 작고 보잘것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귀한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따라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향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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