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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5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17,15.22─18,1
복 음 : 요한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을 두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신력이 웬만큼 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며느리가 새 식구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신혼집에 방문하신 시부모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데 글쎄 밥을 태운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인상을 쓰면서 “너는 친정에서 밥하는 것도 못 배웠니?”라고 나무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시어머니는
“내가 한 번 봐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 미안하다.”라면서 오히려 사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시어머니 중에 누가 정신력이 강한 분일까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며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정신력 강한 사람이 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신 다음
제자들을 홀로이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고
당신과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말씀하셨었지요.
첫째, 진리의 성령으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 것이며(요한 14,16-17),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며(요한 14,25-26),
셋째, 진리의 성령으로서 예수님의 일을 증언할 것이며(요한 15,26),
넷째,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요한 16,8).
오늘 복음에서는 이제 다섯 번째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안내자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외의
또 다른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이 깨닫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도와주고 격려하여 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길로 제자들을 이끄시는 안내자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의 안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만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요한 14,16-17,14,26,15,26-27,16,7-11,16,12-15).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인데,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인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또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6,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고 아빠스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유 없는 독서는 쓸데없다.
~ 성령의 도유야말로 구원을 촉진 시키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되새겨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타밈 안사리의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를 읽었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석물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색은 삼원색이 있습니다.
빛의 삼원색은 함께하면 더 밝아지고,
물감의 삼원색은 함께하면 더 진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색은 석물리면서 다양한 빛과 색을 나타냅니다.
인류의 문명도 크게 4개의 문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입니다.
이 문명은 모두 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크라테스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와 갠지스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황하문명은 황하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각자 시작된 문명은 실크로드를 통해서,
해상의 무역 로를 통해서 서로 석물리며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는 4 복음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의 복음서만 있다면 예수님의 한 모습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4복음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영성적인 사유를 하게 해 줍니다.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주론적인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임마누엘’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갇힌 이들,
아픈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각자의 복음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복음서를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박해의 시기였고, 아직까지 교회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법과 페르시아의 문학과 대화를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세상에서는 문명과 문화의 변방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살던 사도들이 문명의 중심지인
로마와 아테네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보이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성령의 도우심과 뜨거운 열정으로
마침내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과 법과 문학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십자가의 힘을 증언하였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당당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제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들 각자의 복음서를 가지면 어떨까?
가브리엘 복음서, 안드레아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로사 복음서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사가처럼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처럼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루가 복음사가처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도전은
‘그리스의 철학, 로마의 법, 페르시아의 문학’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신화와 종교의 틀을 벗겨버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가치와 의미를 빨아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의 사고는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푸른 별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막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직 지금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우쳐 주시리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절)
성령께서는 스스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영감도 주고 말도 한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그분의 가르침은 아들의 가르침이며,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하느님 안에 살 때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15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신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 즉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파스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천국으로 건너간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사도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광장에서
직접 아테네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제까지는 디아스포라의 유다인 회당을 매개로 복음을 전해온 그가
다신교 풍습에 젖어 있던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선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수한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고,
하도 섬기는 신이 많다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단을 세워 놓고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오로는 그들이 섬기던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에서 뛰어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현세적 상황에서도 인간적 기대가 투사되어 실현되면 신이 발생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발생적 신관’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랑과 선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 ‘계시적 신관’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모든 민족들의 종교는 자연적인 신관으로부터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느님께서 직접 밝혀주심으로써 알게 된 계시적인 신관이 생겨났습니다.
이 계시적 신관을 받은 민족이 히브리 민족과 한민족입니다(창세 10,25.30).
한민족이 받은 계시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신성의 발자취들입니다.
즉, 민속으로는 제천의식이요, 유적으로는 고인돌이며,
기록으로는 단군신화에 기록된 천손의식과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한민족의 신관은 유난히 경천사상이 뚜렷하고
여기서 우러나온 효의 윤리와 선과 의로움을 중시해 온 민속 등에서 나타납니다.
고려와 조선조에 무신론적 통치 이데올로기에 눌려 수면 아래에 잠복한 채
민간 심성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던 이 한민족의 신관을 새삼 깨닫게 된 역사적 계기는
천주교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온 오묘한 섭리의 과정 덕분이었습니다.
중국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서학서의 도움으로
조선의 선각자들이 본격적인 그리스도 신앙의 신관에 접할 수 있었고,
이들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 안에서 전해 내려오던 신앙 감각의 도움을 받아
그 진리성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문난적으로 몰릴 각오를 무릅쓰고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였습니다.
실제로 경천사상과 효의 윤리, 그리고 선과 의로움을
유난히 강조하는 한민족의 신관은 인종적으로 우리 민족과 유사한
이웃 중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보여주는 자연발생적 신관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관은 쉽게 바뀌지 않고 민족성과 민족문화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법인데,
지금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보여주는바,
힘과 부를 숭상하며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세속적인 행태에서도 그들의 신관이 잘 나타납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신관이 무속과 역술 등으로 미신화된 배경에는
고구려 왕조 시대 이래 조선 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계시 신관을 억눌러 온 불교와 유교 등의 무신론적 사상 통제가 자리잡고 있고,
이는 무수한 신들을 만들어 내는 역작용을 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로 알려진 환웅과 그 아들로서 국조가 된 단군도 신으로 숭배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단군신앙입니다.
특히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신적 기원을 알려주는 국조(國祖)로서
공경의 대상일 뿐 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신들도 공경하고자 하는 뛰어난 조상들을 부르는 경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흔해 빠진 神 개념의 세속화 내지
사사화 현상에 대한 또 다른 부작용이 생겨나서,
과학만능시대가 도래한 21세기 한국 사회에는
광범위한 무신론과 일상적인 유물론 사상 풍조가 만연해 있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알지 못하는 신’을 공경하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교하던 지혜로운 방식을 감안 한다면,
우리도 신과 하느님 신앙을 오해하는 모든 이들의 숨은 지향을 읽어야 합니다.
다신론이든 무신론이든 또는 유물론이든 신관에 대한 역작용과 부작용 현상은
신과 하느님 신앙을 부인함이 아니라 신적 가치의 실현을 갈망하는 표현입니다(사목헌장, 21항).
불교와 유교 등 무신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신적 가치라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하면서 양심과 사상과 신앙의 자유가 없었고
인간 존엄성은 너무나 하찮게 취급되었습니다.
이에 천주교는 신적 가치에 따라 평등과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요구하였으며
백 년 박해 만에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아 인간화된 문명을 앞당겨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넘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평등이라는
실질적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국내적 과제가 남아 있고,
외세에 의해 강요당한 분단과 분열을 자주적으로 극복하고
남북교류를 앞당겨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해야 할 민족적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직된 서구적 신관에 편향되었던
기존 신자들과 무분별하게 무신론과 유물론에 기울어졌던 많은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 신앙에 따른 한민족의 신성을 체험하는
민족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토록 오래전부터
아시아의 동방에서 하느님을 섬겨 온 우리 민족을 진리의 영께서 이끄실 섭리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요한복음 대목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 하느님께서 드러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령과 당신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시지요.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요한 16,13).
말씀을 공유한다는 건 당신과 성령께서 마음과 뜻으로 일치하신다는 것이지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이 온전히 하나로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같지 않나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9-50)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이미 비슷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을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전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듯이,
성령 또한 예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은 이렇듯 한 뜻을 지니시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 선교를 다룹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부정하기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사도 17,23)
유일신이신 하느님이라고 소개하는데,
그가 전하는 분이 곧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그는 성부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라고 밝힙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를 주시고, 살아 움직이도록 숨도 불어넣어 주시고,
또 생명을 지탱하고 관계를 꾸려가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고, 성령의 도움으로 나날이 새롭게 거듭납니다.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 17,27)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육화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현존을 통해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리 곁에 온통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그분의 현존을 벗어나는 곳이란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분명 "영원히"라고 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묶여 사는 우리에게 "영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신비를 믿는 우리에겐
두려움이나 의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에 가득한 성령을,
그 기운을, 그 사랑을 호흡하며 성삼위 하느님 품에 잠겨 듭시다.
그분께서는 나의 온 세포 구석구석을 채우고 계시고,
누추한 마음에도 충만히 머물러 계시고,
숨 한 모금에도 깃들어 계십니다.
그분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계시고, 또 나를 온통 둘러싸고 계시니
그분이 곧 나이고, 내가 또한 그분입니다.
나는 그분과, 성삼위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이런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요?
성령이 충만하면 성경해석이 잘 될까?
전삼용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말씀을 전해 주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지금은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다면,
성령의 역할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하시는 말씀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가톨릭 잡지에 글을 쓸 때,
“예수님은 유다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분이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은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로 바꿔서 실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키지 못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십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저 아드님한테서 들으신 말씀을
당신 생각을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하느님이신데도 말씀에 한마디도 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이기에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말씀을 해석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분열을 일으키려는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 불리는 ‘유주얼 서스팩트’는
주인공이 자신을 심문하는 경찰을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런 해석을 통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범인은 해석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또 최고의 반전 영화는 ‘식스 센스’입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상황을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작 죽은 유령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정작 자신이 유령임을 깨닫게 되는 때는
해석하는 대상이 아닌 해석 당하는 대상이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감히 해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말씀에 해석 당하는 대상입니다.
감히 성령께서도 말씀을 해석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해석하려는 것은 말씀 위에 서는 교만한 행위입니다.
사람도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 시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분열이 일어납니다. 해석은 오해를 낳고 분열을 낳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베드로의 믿음 위에 세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여기 어디에도 베드로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없습니다.
베드로 위에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어렵습니다.
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행하신 성찬례가 예수님의 진짜 살과 피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몸과 같이 여기라거나 그냥 예식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예식을 거행하라는 명령이셨습니다.
또 그들은 진리의 기둥이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성경은 성경이 아니라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모님을 하느님처럼 섬긴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어떻게 인사하였습니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성모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분은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2-43)
친구의 어머니도 공경해야 하는데
주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께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을 질투하실까요?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께 공경을 올렸고
이것은 태중의 아기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말씀만으로!”란 가치를 들고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왜 실제로는 이렇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지 못할까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령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말씀을 받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십니다.
이것처럼 해야 합니다. 말씀은 해석할 대상이 아니라 믿을 대상입니다.
믿고 순종할 대상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아버지가 죽으며 밭에 보물이 있으니
파서 갖는 사람이 임자라고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밭은 돌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밭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계속 밭을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 않자 첫째는 아버지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돌밭을 파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래도 둘째는 열심히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니 정말 엄청난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의견이 달랐을까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해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분명 자신에게 좋은 일임을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류에 빠졌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 보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을 믿게 만들어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순종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녀에게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밭을 파 보면 보물이 나올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도 첨가하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먼저 말씀을 믿고 순종합시다.
그러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가장 완전한 해석입니다.
해석이라기보다는 ‘이해’입니다.
한 말씀에 여러 해석이 나온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러 개의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분열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성경 해석 문제로 갈라진다면 그건 사탄에게 속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가장 충만한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입니다.
내가 진리의 기둥인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여 옳고 그르다를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씀의 심판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게 합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