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속에 진 첫사랑
변 종 호
낙엽이 가지를 떠나는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인가 보다 마른 잎을 흔드는 작은 스
침에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해묵은 그리움들이 파문처럼 일렁인다.
첫사랑, 정녕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인가.
가슴 한쪽에 아련한 추억으로 깊이 묻어두고 불현듯 그리움이 피어오르면 누가 볼세
라 살짝 꺼내보는 첫사랑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닮은 사람들을
보노라면 지워져 잊혀진 줄 알았던 그 사람이 그리워지곤 한다.
유독 하얀 얼굴에는 주근깨가 조금 있었고 늘씬한 키에 쌍꺼풀이 진 큰 눈을 가졌으
며 생글생글 웃는 게 매력적이었다. 지금 같으면 학교 다니며 부모님께 응석이나 부리
고 돈이나 타서 쓰는 나이었을 텐데…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고된 일을 하며 기숙사 생활을 하던 그 애는 많이도 외로웠나
보다. 내 이름 석자와 보고 싶다, 라는 낙서를 조그만 수첩에 빼곡히 써놓았다고 그 애
의 다른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그 시절에는 나도 고향을 떠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고학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어머니
가 보고 싶고 힘들어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았었
다.
서로의 마음이 그러니 명절 때 잠시 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면 까만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빛을 등에 업고 흘러가는 물소리조차 숨죽여주
는 강둑에서 처음으로 단 둘이 만났다.
밤이긴 했지만 서로가 부끄러워 볼까지 달아오른 열기가 상대에게 전해졌고 하늘거리
는 폭넓은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었던 그 애는 목에서 기어 나오는 소리로 “보고 싶었
어.”라며 동동 떠가는 구름이 보름달을 가린 어둠 속에서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난생 처음으로 다가온 그 애의 손길은 너무나 따뜻했다. 서로가 꼭 잡은 손에는 땀이
흥건하게 배었지만 누구도 손을 빼진 않았다. 그 순간 아, 이게 사랑이구나!'라고 느
꼈었다.
더도 덜도 아닌 지금 이대로 멈춰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그녀를 찾아 나선 가족
들의 부르는 소리에 모두가 산산조각이 되어 흐르는 강물 위에 뿌려지는 듯했다.
기껏해야 이틀 밤을 자고 가는 짧은 휴가 기간인 데다 밤이나 되어야 만났던 우리는 이
틀 밤이 마치 고운 꿈결 같았다 수없이 나를 향해 토해 내려다. 억지로 밀어 넣어졌던
언어들이 두 사람을 맴돌며 떠나질 않았다.
꼭 편지하라고 서로에게 손가락 걸며 약속을 하고는 가슴만 부풀어 오른 채 아쉬운 이
별을 해야 했다. 돌아보면 그 때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장 행복하고 짜릿한 시간이었
다.
일 년 가까이 편지가 오가며 외롭고 힘든 타향살이에 의지하고 위로하던 두 사람을 운
명의 신은 시기를 했나보다. 얼마동안 뚝 끊긴 편지에 애를 태우던 나는 고향 친구로부
터 그녀가 집에 와 있으며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전해 들었다.
귀를 의심하고 되물어봤지만 그녀는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격리되어 있다고 했
다. 이럴 수는 없었다 무슨 죄가 있다고 열일곱이라는 채 피지도 않은 꽃을 데려가려
하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보낼 수가 없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병에 걸려도 좋다며 찾아간
그녀의 집 삽작문 앞에서 완강한 언니의 제지를 받았다. 저런 모습은 보지 않는 것이 좋
으니 제발 돌아가 달라며 나를 밀어대던 언니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실랑이를 벌이던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그녀는 밖으로 잠겨진 사랑방 방문을 손으로
찢어가며 울부짖었다. 찢어진 창살 사이로 비춰진 그녀를 도저히 두 눈으로 볼 수가 없
었다. 움푹 들어간 눈, 가죽뿐인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나를 불러냈다.
가슴이 터지고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방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나에게 친구와
언니가 매달렸다. 그날 고향을 다녀온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온통 내 안에는
그녀의 환상이 가득했다.
그렇게 어설픈 사랑의 씨를 뿌려놓고 활짝 피지도 못한 채 녹아버린 꽃이 되었다. 시
퍼런 청솔가지와 큰 돌덩이를 여린 가슴에 올려놓고는 따사로운 햇살이 온종일 어루만
지는 뒷산에 묻혔다.
이런 사랑 다시는 안 한다며 울면서 내려왔던 그녀가 묻혔던 그곳을 지난 추석 무렵
삼십여 년 만에 다시 찾았다. 설익은 첫사랑의 마침표를 너무도 쉽게 찍어버리고 잠들
어있는 그곳에는 꼬부라지고 삐뚤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그녀의 가슴을 덮고 있던 돌덩
이 몇 개만이 어설프게 반긴다.
여물지 않은 가슴에 첫사랑을 심어놓고, 마음이 무겁고 아픈 날에는 울부짖던 모습으
로, 내가 밝고 기분이 좋은 날은 웃는 모습으로 다가서는 그녀의 환상은 지천명이 된 나
에게 아직도 열일곱 꽃피는 얼굴로 환하게 웃다가 스러져가고 있었다.
2004. 19집
첫댓글 여물지 않은 가슴에 첫사랑을 심어놓고, 마음이 무겁고 아픈 날에는 울부짖던 모습으로, 내가 밝고 기분이 좋은 날은 웃는 모습으로 다가서는 그녀의 환상은 지천명이 된 나
에게 아직도 열일곱 꽃피는 얼굴로 환하게 웃다가 스러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