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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토록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 7)
이는 당신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며, 그렇게 살 때 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의 권능을 수락하는 일’이요, ‘말씀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희망의 증인으로 뽑힌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오늘 감사송인데 뽑힌 증인들 앞에서 십자가 죽음을 대비하여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음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을 증인으로 뽑힌 우리로 정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앞두고, 그러니까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신적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신 것인데, 여기에 의도가 있습니다.
변모의 의도는 간단명료합니다.
당신이 돌아가셔도 절망하지 말라는 것이요 희망을 보라는 것이요, 가장 참혹한 순간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눈앞이 캄캄하다. 앞이 캄캄하다.'
이처럼 현재의 암울함이 눈을 멀게 하고 미래를 캄캄하게 하기 마련인데,
이때 암울한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미래의 눈, 희망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암울한 현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면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고 현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현재의 암울함은 직시하고 인정한 다음, 그 다음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죽었는데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들은 훨훨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제자들이 당신 죽음을 보고 부활을 내다보라고 당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세 제자에게만입니까?
왜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십니까?
그 의도와 이유도 분명합니다.
희망의 증인이 되라는 겁니다.
어느 공동체건 증인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미래 희망을 볼 줄 알면 증인이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증인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는 미래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재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우리 가정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누가 우리 공동체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는 암울하지 않다고요?
현재에 감사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현재 암울하다고요?
그리스도인인 내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희망의 증인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 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 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 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 좋은 것을 보면 차지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터에서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 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체험을 함부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2코린 3,18)
요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요한 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은총만으로’와 ‘성경만으로’가 서로 모순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십니다.
주님의 변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은총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큰일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은총만이 아닌 말씀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는 것에만 목을 매면 그 기쁨에만 머물러있게 됩니다.
내가 인정받기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빈센트 반 고흐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 행위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란 그리스도를 닮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려면 그분을 마치 ‘거울’처럼 보아야 합니다.
‘금쪽이’에 한 아이는 거울을 보며 자기 모습을 보니까 말썽부리던 자기 모습을 버리고 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은총만을 바라는 이상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은총 중독’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은총 중독은 ‘말씀 빈곤’으로 갑니다.
말씀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미사 때 강론은 무시하고 성체만 영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얀세니즘은 1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이프르(Ypres)의 주교인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의 신학적인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얀센주의는 원죄, 인간의 타락, 신성한 은혜의 필요성, 예정론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선택된 소수만이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종교적 실천에 대해 매우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오직 즐거움(영적 즐거움 포함)이라면 그런 행위는 모두 죄가 됩니다.
얀세니즘이 엄격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은총만을 강조하니까 자연히 예정설을 주장하게 되고 말씀의 역할이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제10권 제33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성가의 말씀(가사)보다는 목소리에 더욱 감화될 때, 나는 벌받을 죄를 지은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음악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이와 비슷한 ‘정적주의’도 있습니다.
은총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상입니다.
정적주의는 17세기에 발생했으며 스페인 신부 미구엘 데 몰리노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적주의가 왜 이단일까요?
말씀의 실천 동안엔 마치 운전할 때 기름을 줄어드는 것처럼 은총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채웠으면 운전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때 은총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은총과 말씀의 균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수도원을 개혁하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기도에서 얻어진 에너지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거기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아드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도록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성가는 노래 부르는 이의 목소리나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가사를 음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처럼 ‘말씀만으로’라고 한다면 이는 말씀의 씨를 키우는데 태양과 비는 소용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은총만으로’라고 한다면 씨를 뿌리는 일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만으로 구원이 된다고 말할 때 서로 모순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하.사.시.를 읽으며 매일의 나의 방향을 잡습니다.
방향은 잡혀있지만, 도로를 벗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하.사.시.입니다.
그렇다고 성체조배를 하지 않을까요?
성체조배와 말씀 읽기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차를 위해선 기름도 필요하고 운전 능력도 필요합니다.
영혼이 은총이라면 몸은 말씀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원판 불변의 법칙>
평생토록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평생토록 같은 고백성사를 보고 있는 저 자신, 그리고 죽어도 안 변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법칙인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결심하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아직도 진정성 있는 변화는 요원합니다.
아직도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젊은 시절의 미성숙과 불완전과 나약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심하게 요동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래고 질긴 악습을 아직도 끼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저 위에서 오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화와 회개를 갈구하는 간절한 기도만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플러스 알파로 하느님 편의 개입과 도움, 은총과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느님의 손길에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 필요합니다.
사실 변화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합니다.
굳이 애써 회심이나 회개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단 한번 뿐인 인생, 손톱만큼도 변화되지 않고, 전혀 성장하지도 않고, 부끄러운 이 모습 그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하느님의 은총 역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삶이 시작될 때 뒤따라오는 하느님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분위기입니다.
회심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병고 역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은총의 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로 변모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삐 받으실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기적인 신앙을 떨치고 보다 이타적인 신앙에로 나아가는 것,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된 신앙에로 성장하는 것,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죄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1)
하늘나라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 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마다 폭염 경보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폭염도 혹한도 없는 나라, 태풍이나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자연 재난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또 지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테러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전쟁, 테러, 갈등, 분열이 전혀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또 진짜로 그 나라가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물론 믿고 희망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루카 20,35).
그 자격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사람만 그 자격을 얻게 됩니다(마르 8,34).
사도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일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바로 그 하늘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사도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그 체험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에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체험’이 금방 믿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오랜 시간 동안의 묵상을 통해서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체험을 하고서도 믿음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 말인데, 인간의 언어로는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다는 말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나눈 대화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대화입니다(루카 9,31).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황홀해서 이곳에서 이대로 영원히 살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고, 자신들은 그냥 노숙을 해도 괜찮다는 뜻도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라는 말은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겁에 질려 있었다.' 라는 말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3)
사도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도 중요한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해 주신 말씀, 즉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신원보증’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에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신원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신앙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 “변모의 여정”>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 17,5)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근심도 마라.
어려움 앞에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라.”
<다산>
“곤궁에는 운명이 있음을 알고, 형통에는 때가 있음을 알고, 큰 어려움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인의 용기다.”
<장자>
두 어른의 말씀이 흡사합니다.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 가면서 믿음이 굳건해질 때 우리 또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을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다 시피 주님은 중요한 때는 최측근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대동하십니다.
오늘 복음 서두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성서에서 산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자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시나이산, 엘리야의 갈멜산, 주님의 산상설교, 예루살렘 외곽의 갈보리(골고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고, 기도하시는데 모습이 변하셨다’고 말합니다.
기도 중의 변모 체험입니다.
기도는 믿는 이들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도 그렇지만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 중 하나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주님을 나중에 우리의 천국 통과 시 얼굴을 검사하실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닮았는지 또 닮지 않았는지가 판단의 잣대가 될 것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한결같이,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해 왔다면 주님을 닮을 것이다.”
제가 피정지도 때마다 기도에 대해 자주 강조해온 말마디입니다.
기도를 통한 주님의 변모요 우리 또한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면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은 변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 애제자들에게 당신의 변모 체험을 선물하십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참 절묘합니다.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에 흡족하신 주님이셨지만 그것도 순간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의 제1차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놀란 베드로는 극구 만류했으니 자기가 상상해온 영광의 메시아와는 너무나 실망스런 수난과 죽음의 메시아에 베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심한 꾸짖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말 그대로 충격요법에 의해 베드로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함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했던 제자들도 큰 충격의 상처를 받았음에 분명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기소침한 침체된 분위기가 오늘 주님의 변모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침체된 어둔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제자들을 배려한 주님의 각별한 변모 사건의 은총입니다.
흡사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특별 산상 피정 시간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복음의 은총으로 빛나는 절정의 장면에 제자들 내면의 어두움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며, 저절로 치유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미사 중 감사송의 주옥같은 말씀이 참 은혜롭고 적절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모습이 온통 찬란히 빛나게 하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온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셨나이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이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제자들입니다.
율법을 대표한 모세요 예언자들을 대표한 엘리야 두 분은 에녹과 더불어 구약의 승천한 분으로 하느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분들인데, 이들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스승이신 주님의 위상을 새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눈 대화는 루가복음에서 보다시피 필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새로운 엑스도스 사건에 이어 부활의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후대의 우리들은 이를 알고 있지만 제자들은 이를 깨달았을리 만무했고, 그리하여 복음 말미에서 보다시피 당신이 부활할 때까지는 일체 함구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부활 후에야 비로소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파스카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순박하기가 베드로답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또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호의가 이해는 됩니다만 주님의 뜻을 망각한 완전한 오해요 착각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의 은총을 독점할 수도 없거니와 신비 체험에의 집착은 결코 도움이 못됩니다.
하느님 친히 베드로의 눈먼 열광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바로 베드로를 위시한 두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워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 복음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산상에서의 주님의 변모 신비 체험은 끝났고, 주님을 따르는 단조롭고 무미한 일상의 삶만이, 십자가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변모 신비 체험의 추억은 제자들의 일상에서 샘솟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만남에서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미 제1독서 다니엘서에서 예언되고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지금도 살아 계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닮은 우리의 변모와 더불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고 믿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하루만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모두가 특히 이른 새벽 날마다 불암산 기슭 수도원 집무실에서 강론 쓰는 시간이,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 주님을 닮아 변모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우리가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 공동전례기도은총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1요한 3,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도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예전에 ‘이무기가 용이 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뱀이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마침내 용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무기도, 용도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다만 열심히 노력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났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3가지를 배우고 수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지식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영성을 닦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해 체력을 키웁니다.
모든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도 신심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신심이 깊어도 능력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능력과 신심이 좋지만, 건강 때문에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지만,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모른다면 나비가 원래는 애벌레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신학생이 사제가 되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본당으로 파견되어 사목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모임의 자리에서는 상석에 앉게 됩니다.
한 말씀을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배식을 받습니다.
버스에 탈 때도 앞자리에 앉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1인실을 사용합니다.
사제이기에 존중받고, 사제이기에 존중받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존중을 받는데, 익숙해지면 나비가 애벌레의 시기가 있었음을 망각하듯이, 왜 사제가 되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제의 말과 행동에 바리사이의 자만과 율법 학자의 교만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어가고 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빛이 났고, 옷은 새하얗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이곳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 그리고 하나는 주님을 위한 천막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이무기가 용이 되는 성공의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성품성사의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풍랑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걷는 표징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인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주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우리도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참 행복은 편하고 쉬운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지난 7월에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가진 해외 성지순례였기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낮 기온이 44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더운 날씨에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44도가 되면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집에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를 포함한 모두는 일정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순례에 임했습니다.
순례를 모두 마치고서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그늘을 찾아가면서 ‘쉬고 싶다’라는 마음이 가득하기도 했지만, 순례를 마쳤을 때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고생했기에 더 행복도 크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편하고 쉬운 것만이 행복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베드로가 나서서 이 타볼산에 초막을 지어 머무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영광 안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 행복은 편하고 쉬운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더 큰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하늘의 구름 속에서 들렸던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 것을 가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서, 이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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