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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31,1-7
1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3 주님께서 먼 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6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
(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참으로 착잡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또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 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히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마태 15,23)
주님!
당신의 침묵 앞에서 견고해지게 하소서!
거부당함 속에서도 새로워지게 하소서!
더 큰 소망을 품고 끝없이 간구하게 하소서.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놀라운 사랑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 식의 영원한 사랑>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예레 31,3ㄴ-4ㄱ)
오늘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영원한 사랑’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순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 영원한 사랑에는 달콤한 것만 있지 않고, 벌로서 좌절을 주실 때도 있으며, 깨우치시고자 큰 고통도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벌도 사랑이요 고통도 사랑이라는 말이고,
사랑하기에 벌을 주시고 사랑하기에 고통을 주시는 거라는 말이며,
더 나아가서 구원을 위해 벌을 주시고 구원을 위해 고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또 이런 얘기도 되겠습니다.
영원한 사랑은 순간을 사랑하지 않고 영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한순간도 무관심한 적이 없고 미워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에 비해 저의 사랑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영속적인 사랑이 아님은 물론이고,
무관심하거나 미워한 적도 많은 사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닮을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미워하며 사랑할 것입니다.
미워하다가도 사랑할 것이고, 미워하다가도 다시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포기했다가도 다시 사랑할 것입니다.
영원히 무관심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 식의 영원한 사랑이고 내 식의 영원한 사랑일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내고 맙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환히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마태 15,21)고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2)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요?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예수님을 안내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튼튼한 만큼 충만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히브 11,6)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1요한 5,4).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어 간사한 마음을 다스리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능력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기적의 은총을 주기를 거부하는 모습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며 희망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가나안 부임을 칭찬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부모는 자신을 낳았으면 분명 자신을 사랑할 것이란 믿음이 있고, 또 자신을 낳았으면 키울 능력이 있는 분이란 믿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낳는 것인데 그런 사랑이 있다면 키울 능력도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자는 사랑이셔야 하고 능력자셔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그래서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은 그 능력과 함께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다 사랑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사탄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폭력이나 속임수 등을 써서 성공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공한 이들 중에 많은 수는 사랑이 커져서 능력도 커진 경우가 많습니다.
2014년 이전 현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대표 박지형은 중소기업의 기업가로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회사가 20~30억의 매출로 그리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2024년 위장암과 판막 전이로 4기 진단받았고 항암 안하면 6개월, 하면 1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6개월 뒤에 어렵게 가진 딸이 태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딸을 위해 무언가라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돈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보험회사였습니다.
자신은 6개월 뒤에 죽을 것이 확실하니 6개월치 이자를 제하고 사망보험금을 미리 달라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 청에 보험회사 직원들이 몰려와서 조사해보고는 정말 보험금을 주었습니다.
보험금이 생기자 아내와 딸이 먹고살 수 있는 더 큰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줌줄을 차고 그는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2~3년 뒤 복막을 어찌할 수 없지만, 위는 절제할 수 있어서 수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암 말기 환자로 백 차례가 넘는 항암을 맞았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그렇게 그는 10년 만에 부동산만 600억이 넘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이전에 하던 스크린골프회사까지 합치면 약 800억에 가까운 자산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모든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 하나씩 가지게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의 이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자 능력도 향상했습니다.
박지형 대표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서 이전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모든 사람을 연결하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연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능력의 향상 없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데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런 경우 자녀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녀를 방치하거나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하는 마음은 또한 능력의 향상도 가져옵니다.
이것이 혼자 살거나 많은 자녀를 키우며 살거나 결국 나이가 들면 재산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동기가 없으면 일도 하기 싫어집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 합시다.
그러면 더 큰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린 브로커비치도 생각해 봅시다.
영화로도 유명한 이 실화는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를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쳤던 PG&E에 대한 분노,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모성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96년에 3억 3,300만 달러의 합의금이 받아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직접 소송 합의금이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을 키워줍니다.
그리고 이는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자존감을 가지게 하고 그 자존감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충격 요법>
우리 주님은 나같이 비참하고 하찮은 존재와는 멀고도 먼 분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나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 나를 독차지하고 싶으신 분, 그래서 내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때면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계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오랜 역사 안에서 왜 그리도 자주 분노하시고 경고하셨으며, 때로 파괴하시고 멸망으로 몰고 가셨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때문에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는 분, 우리와 일대일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애지중지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깨트리고, 신의를 저버렸으니, 떠나간 연인 바라보듯 그리도 원망하시고 서운해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 안에만 머물며, 상호 맺은 계약에 충실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바람을 피웠습니다.
자주 우상숭배에 젖어들었고, 이방신들에게 깊숙히 빠져 들곤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주님은 우리 각자와 개별적인 관계, 더 나아가서 연인 이상의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성녀들은 그분과의 영적 혼인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 외에 한 눈 팔지 말고,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과 맺은 약속에 지속적으로 충실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거듭 자극하십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더 당신 가까이 다가서라고, 흔드시고 뒤집어놓으십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수치스런 바닥 체험도 허락하시고, 고통의 극단으로 우리를 몰고 가십니다.
바로 우리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서.
마귀 들린 딸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해온 가나안 부인이 그랬습니다.
마귀의 횡포로 죽음 직전에 도달한 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가나안 부인은 염치불구하고, 넘어서서는 안될 경계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딸의 치유를 청하는 그녀의 태도가 정말이지 간절하고 겸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걸렸습니다.”
(마태오 복음 15장 22절)
평소 예수님 같았으면, 한 가엾은 인간이 겪고 있는 참담한 고통 앞에서, 따로 청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셔서 구마와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살짝 뜸을 들이십니다.
살짝 튕기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마태오 복음 15장 24절)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더 집요하게 청하는 가나안 부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더 세게 나가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마태오 복음 15장 27절)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부인의 믿음이 더 깊어지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더 위로 올라가라고, 채찍을 통해 자극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자극은 가나안 부인을 더 깊은 겸손, 더 열렬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충격 요법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가나안 부인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강도 높은 자극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자극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고 희망한 결과 치유와 극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5장 28절)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1)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이방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이방인들은 모두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지만,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2)
이 이야기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 진주’는 ‘복음, 성사’ 등을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상 “줄 수 없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강아지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개들’은 주로 ‘들개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강아지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자가 마음의 상처를 덜 받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바꾸신 것 같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
(묵시 22,14-15)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묵시 21,6ㄷ-8)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
그러면 우상 숭배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습니다.
자기가 섬기고 숭배하는 우상을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은 채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우선 먼저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로도 해석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자녀가 되면 됩니다.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이라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4)
예수님께서 처음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청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태도로) 예수님께 청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상 위치로 끌어내린 모독죄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의 양’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제가 강아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의 겸손한 고백과 회개와 변화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믿음 없이 왔던 여자가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록 딸의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회개했고, 변화되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 청했던 은총도 받았고, 청하지 않았던 더 큰 은총도 받았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은총이고, 가장 중요한 은총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 - “기도가 답이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예레 31,10ㄹ)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사제들은 물론 믿는 어른들은 세상의 소리에 예민해야 하겠습니다.
“어른의 위로는 고요해 보이는 세상 속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다산>
“세상 모든 것은 평온하지 않았을 때 소리가 난다.”
(당송팔대가 한유의 송맹동야서>
어제 수도사제답지 않았던 언행을 심히 부끄러워하며 회개합니다.
솔직히 말해 깊이 들여다 보면 겉은 화려하고 빛나는 천국같아도 안은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입니다.
작열하는 불볕더위에 기후위기를 실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도의 끈을 붙잡고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분들을 대하면 숙연해집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류가 맞이하는 온갖 불행과 재앙의 궁극의 원인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잊은 데 있습니다.
새삼 기도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어디서나 두손들어 기도하라 눈들면 하늘이요 직립인간입니다.
작년 8월 광복절부터 시작한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7창”이 취침전, 기상후 지금도 계속되니 직립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보이는 희망이 인간이요 자연이고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가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잊으니 인간도 자연도 잊혀져 가고 병도 깊어져 갑니다.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자연을 버리니 자연은 인간을 버립니다.
소멸되어가는 지방과 시골의 무수한 빈집들을 보면서 점차 조화와 균형을 잃어가는 나라의 앞날이 심히 우려됩니다.
한때 번성했었을 폐사지廢寺地나 폐가廢家, 폐교廢校, 폐인廢人을 대하면,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역사와 더불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소리없이 마음에 젖어드는 아픔과 슬픔을 느낍니다.
어제 매달 날마다 특별히 미사를 봉헌 부탁하는 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지옥같은 세상에서 기도의 끈을 잡고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는 분입니다.
온통 심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기도같은 내용의 편지 중 몇 구절을 인용합니다.
“제가 요즘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면서 정말 인생이 별거 아님을 느낍니다.
신부님께 편지 올리면서 좀 정리가 됩니다.
언제까지 누워서 허우적댈 수만은 없지요.
동네에서 아파계시는 사모님이 그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었습니다.
그 많은 돈을 다 놓아두고 빈손으로 가는 걸 보니 더 무서웠습니다.
딸은 필요한 것을 사달라고 카톡 넣으면 그래도 꼭 사서 놓고 갑니다.
직업이 있고 그래도 믿을만 하니까 부탁을 하는데 그도 미안합니다.
이젠 제가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저를 살려주세요."
어쨋거나 신부님, 남의 기도하다가 제몸이 망가지는 줄 모르고 살고 있으니.
그래도 제가 죽기전까지는 좋은 일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말 그대로 고해인생입니다.
고해인생 중에도 구원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의 끈, 믿음의 끈, 하느님의 끈을 꼭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 축제인생을 살려고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자매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닮은 분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탄력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겸손한 기도가 정말 감동적입니다.
불퇴전의 기도의 전사를 연상케 합니다.
주님과 기도의 싸움이 전개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니 참 냉정합니다.
제자들이 한마디 거들자 재차 말씀하시는데 정말 너무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예나 이제나 세상은 길 잃은 양들로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길 잃는 자본주의 문명이요 길 잃은 각자도생의 세상입니다.
갈 길의 방향을, 희망을, 빛을 잃고 뿌리없이 표류 방황하는 병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다음 재차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간청의 기도입니다.
가나안 여자와 주님의 대화내용이 점입가경입니다.
결코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기도의 전사, 가나안 여자입니다.
그토록 주님께 대한 신뢰가 깊었던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기도가 겸손의 절정입니다.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흔쾌한 항복 선언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합니다.
가나안 이교 여자의 믿음이 참 놀랍습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인류의 보편적 감동의 언어가 이런 믿음임을, 정말 부러워할 것은, 주님께 청할 것은, 이런 큰 믿음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감동케 하신 가나안 여자의 순수하고 진실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임을 입증한,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사람, 가나안 여자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간청의 기도에 응답됨으로 드러나지만, 또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 전능이 드러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젊고 건강하고 힘있을 때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건강에 찬양과 감사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제 좋아하는 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저절로 찬양과 감사입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찬양과 감사의 양날개를 달았을 때 하느님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양으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 감사로 인생을 끝낸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가 고단한 광야여정 중의 우리에게 참 좋으신 하느님을,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먼 곳에서 와 광야의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우리 하느님께 나아가자.
기쁨으로 환호하고,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오늘 지금 여기서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연옥같기도 하고 지옥같기도 한 고해인생중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우울과 슬픔, 고통을 말끔히 털어내고 노래하고 춤추며 찬양과 감사의 축제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시며 도와 주십니다.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예레 31,13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식탁 아래의 강아지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태 15,28)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외치십니다.
기대 이상의 믿음 앞에서 그분은 기쁨을 감추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 가나안 부인은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악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딸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가 못할 일이란 없지요.
그녀는 비록 이방인이고 게다가 여성이지만 믿음으로 무장한 강인한 어머니였으니까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마태 15,26)
그녀는 강아지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믿고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어줍잖은 자존심따위는 애시당초 버렸고, 또 믿음이 주는 자존감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빵"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내려 주시는 빵을 가리킵니다.
광야의 만나이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요.
이는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특권이기 이전에 그 관계를 유지하는 탯줄입니다.
이 빵을 통해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가 이어지지요.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마태 15,27)
강아지가 주는 비하적 어감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오늘은 "부스러기"에 머무릅니다.
빵은 곡물의 가루가 물, 기름, 누룩과 섞이는 과정에 물리적 힘과 온도가 가해져 점성이 생기면서 생성된 음식이지요.
빵은 원래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빵을 쪼개는 과정 안에 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영양소나 가치로 보면 손색이 없는 원래 빵의 일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태 15,27)
이 이방 여인의 답변이 얼마나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지요!
그녀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먹이시는 창조주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셨던 옛 계약은 그것으로 그치고 말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인류를 구하시기 위한 구원 역사의 시작이라는 걸 그녀는 감지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시 하느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피어나는 이스라엘의 기쁨을 보여줍니다.
환호하고 환성 올리는 이스라엘의 모습 안에는 그들을 지켜 보시는 하느님의 기쁨 또한 서려 있습니다.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예레 31,6)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주님께 버림 받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주님의 산으로 부름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이렇게 외치며 나아가겠지요.
기대과 설렘 가득한 이 환성이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거쳐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로 번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의 몸인 생명의 빵은 그분을 바라는 모든 이에게 끝없이 쪼개어져 나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식탁에 앉은 자녀여도 좋고 식탁 아래의 강아지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주님을, 주님 사랑을, 주님 말씀을 먹고 마실 수만 있다면 온전한 빵이어도 좋고, 부스러기여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그 이방 여인처럼 믿음에서 우러난 자존감을 간직한다면 공연히 말 마디와 어감에 발이 묶여 주님 사랑의 본류를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이 말씀 안에 녹아들어가 주님의 기쁨과 여러분의 기쁨이 만나는 관상에 잠겨보면 좋겠습니다.
기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그 안에서 모든 바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품 신앙>
받아 놓은 날은 꼭 오기 마련입니다.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내일이면 돌아옵니다.
남은 일정 잘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여행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던 둘째 아들을 큰 사랑과 자비로 기쁘게 받아들였던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두 팔을 벌려서 환영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희망이며,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어느 성당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성당에 다닙니까?’라고 누군가 물으면 저와 비슷한 대답을 할 겁니다.
지금 성당은 '2111 Camino Lago Irving TX 75039'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2017년에 완공했습니다.
그 전에는 창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창고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성당 전에는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당은 건물과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당에 주보성인을 정해서 공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당은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다운타운 성당이 팔렸어도, 창고 성당이 팔렸어도, 언젠가 아름다운 지금의 성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계속된다면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옥중에서 쓴 서한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짝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품과 비슷하지만 가짜입니다.
예전에 ‘비가 올 때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가면 짝퉁, 가방을 가슴에 품고 가면 진품’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진품인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따르는 것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는 짝퉁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는데, 요즘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진품 신앙은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품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자캐오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식탁에서 흘린 것은 개도 먹는다며 주님께 자비를 청했던 이방인여인처럼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품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텍사스대학교 제임스 패너베커 교수 등은 개인 블로그 3만 5천 개와 학생들의 에세이 1만 5천 개를 분석해서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들은 질병, 외로움, 신경증, 우울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반면 긍정적인 단어를 다채롭게 구사하는 이들은 직장생활과 여가 활동 등에서 성실하고 적극적이었으며 당연히 몸도 더 건강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연구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이 1950년에 입회했던 수녀 180명의 입회 청원서를 분석했습니다.
이 청원서에서 긍정적인 단어를 별로 쓰지 않은 수녀들 가운데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34%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 ‘매우 행복한’, ‘정말로 기쁜’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한 수녀 중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무려 90%나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부정적인 말, 절망적인 말을 줄이고 긍정적인 말, 희망의 말을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모두 공짜라는 것입니다.
좋은 단어라고 해서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공짜이기에 기왕이면 모두에게 유익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말과 희망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도 커집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려고 합니다.
불평불만이 많아지고, 따라서 삶에 대한 기쁨도 줄어듭니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와서 마귀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와서는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말하면서, 여자를 쫓으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는 것처럼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여인의 믿음이 대단했습니다.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로 낮추면서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예수님께 믿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야 믿음이 커질까요?
아닙니다.
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커지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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