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록 로베르 신부)
로베르 신부는 1853년 프랑스 북동부 오트손느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인 빌레시르솔노에서 태어 났다.
독실하고 엄격한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난 그 역시 성실하고 총명 했다.
어린 나이에 집에서 3.5km나 떨어진 학교를 걸어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다.
점심이라야 작은 빵과 베이컨 한 조각이 다였지만 말이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어렵게 들어간 신학교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한 이래 그에게
신학교에서 보낸 시간은 따뜻하고 정이 넘첬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기억으로 남았다.
1876년 12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은 다음 날 그는 조선 선교를 명받았다.
고향인 솔노의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리고 가족과 함께 딱 일주일의 휴가를 보낸 후 조선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1877년 1월 브장송, 파리를 거쳐 마르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한 후 우선 그곳에서
조선어를 공부 했다.
그리고 9월에 중국인의 작은 배를 빌려 타고 서해안의 작은 포구로 입국한 그는 우선
황해도 백천에서 두 달을 지낸 후 전교 활동을 하며 한국인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키는 일도 맡았다.
선교 담당지역에서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 것은 파리외방전교의 방침이기도 했다.
김대건,최양업, 두 신부의 탄생은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박해지역에서 전교활동을 하는 사제로서의 삶은 참으로 고달픈 것이었다.
강원도,충청도,경상도 이곳저곳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신자들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미사를 집전하고 판공성사를 비롯해 혼배,견진성사를 행하고 또 새로운 입교자들을
교육하고 세례를 주었다.
모든 활동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가는 곳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
붙잡는 신자들의 눈물을 외면하고 돌아서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방문한 마을과 신자들의 현황을 기록해 전교회 본부로 보내는 보고서와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 쓰기도 빠뜨릴 수 없는 일과였다.
이런 신부들의 일기와 기록은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의 사료이자 103위 성인 탄생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포졸들의 급습에 대비해야 하니 매순간이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위험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1878년 리델 주교, 1879년에는 디게트 신부가 체포되어 추방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고, 블랑,두세,로베르, 이렇게 세 명만 남게 되어 책임도 더욱 커졌다.
약자들의 권리와재산 보호를 위해 앞장선 한랑신부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를 다니며 전교활동을 이어가던 로베르 신부가 대구본당의 주임신부로서
칠곡 신나무골로 온 것은 1885년 12월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주로 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며 전교활동을 펼치게된다.
어려움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고아들을 모아 거두고,무료로 장례를 치러주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선교활동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86년 한불수교조약이 맺어지고,2년 뒤 프랑스 공사가 서울에 주재하게 되면서
드디어 신앙의 자유가 주어젔다.
이때 로베르신부도 대구 근처 세방골의 교우 이장언의 집(현 상리동 세방골 성당)으로 이주하고
초가 한채를 지어 임시 성전으로 사용했다.
비록 예전 같은 박해는 없다지만 대구는 외국공관이 있는 서울이나 개항장이 있던 부산,
인천에 비해 위험한지라 바깥활동은 밤에만 상복 차림으로 다녀야 했다.
우리 풍습에 상제는 두루막에 큰 방갓을 쓰고 포선이라는 얼굴 가리게를 하고 다녔다.
그러면 말을 거는 이도 없거니와 또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조선의 이런 풍습은 외국인 사제에게는정말로 고마운 일이었다.
1887년 콜레라가 대유행했는데 이때 신자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병자를 간호하고,
장례식 때도 헌신적으로 봉사하자 감명받은 이들이 너도나도 입교 러시를 이루었다.
1889년에 초가로 된 임시 성당에 불이 났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 불을 꺼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로베르 신부는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입교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대구읍내의 신자 김옥현 바오로에게 맡겨 운영하는 고아원 사업도 성황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로베르 신부가 없는 틈을 타 사람들이 이장언의 집을 습격해 교우들을 구타하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한 항의로 로베르 신부는 토역관을 대동하고 대구감영을 방문했다.
하지만 관헌들은 통역관과 마부를 구타했다.
관찰사는 만남을 거부 했을 뿐 아니라 서양인을 내쫓아라는 영을 내렸다.
경상도 경계 밖으로 쫓겨난 로베르신부는 뮈델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프랑스공사 플랑시와 뮈델 주교에 의해 외교적으로 해결되었다.
로베르 신부 일행을 구타했던 군졸과 주민들은벌을 받게 되었고, 약탈한 물건에 대한
배상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로베르 신부 또한 호위를 받으며 대구에 돌아가게 되었다.
반사효과도 있었다. 이일로 로베르신부는 경상감사와 도내 관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보호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우리 땅에서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벌이고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등 나라가 어지럽다보니
부패한 관리와 양반들이 힘없는 이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이 다반사였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달리호소할 길이 없는 사람들이 로베르신부를 찾아왔다.
그러면 그는 신자건 가리지 않고 기꺼이 대신 나서서 나쁜짓을 한 이들을 혼내 주고
빼았긴 재산을 되찾아주었다. 이일로 입교자는 더욱 늘어 났다.
아름다운 고딕성당, 대구의 자랑이자 명소가 되다.
1891년 12월 로베르 신부는 드디어 대구에 입성했다.
읍내 대어벌 정규옥 바오로의 집(현 서야동 대성사)로 거처를 옮기고 교육사업도 시작했다.
이런 초등교육은 나중에 계산동의 해성재로 이어젔다.
1893년에는 뮈델 주교의 사목방문도 있었다. 신자들의 열열한 환영은 물론 뮈델 주교는 경상감사의
환대를 받기까지 했다.
점차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 불편을 느낀 로베르 신부는
1897년 말에 계산동의 초가를 사서 임시로 이용하며 정식 성당 건축에 들어 갔다.
1889년 성탄절에 축성식을 가진 새ㅜ 성당은 십자형의 2층 한옥이었다.
지붕에는 기와를 얹고 5명의 스님을 모셔와 화려한 단층으로 장엄했다.
조선 고유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 속에 스며들고자 한 로베르 신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새 성당의 신자들은 물론 대구의 명물이자 자랑거리가 되었다.
유창한 한국어에 적극적인 선교활동,대구의 관리들,지역유지들과도 폭넓은 대인관계를 맺고 있어
그즈음 로베르 신부는 한량신부로 불릴 정도로 대구의 명사가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새 성당은 1년이 조금 지난 1901년 2월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화재 일주일 뒤에 바로 신자들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새 성당 건립에 들어 갔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에 모두 감탄하며 신자들은 힘닿는 대로 헌금을 내놓았고 프랑스에서도
헌금을 보내 왔다. 목재를 구입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불러 벽돌을 제작하고 프랑스에 색유리를
주문하는 고생 끝에 1903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에 2개의 종탑과 내부에는 스테인드글라스
가 장식된 멋진 고딕 성당이 완공될 수 있었다.
1893년 1차 사목방문 이후 두 번째로 대구를 찾아 축성식을 주례한 뮈델 주교는 "사방 200리의
신자들이 모여들었으며, 경상 감사의 대구의 유지등 외교인들도모여들어 같이 기쁨을 나누었다"고
기록했다.
대구교구 설정의 주역,모든 일을 이루고 떠나다
새성당 건립,교세 확장과 더불어 십자형 한옥성당을 건립할 때 함께 설립한 해성재 또한
발전을 거듭했다. 수준 높은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에 양반집 자제들도 입학고 싶다는
요청이 이어져 결국 1908년 학교건물을 증축하고 이름도 성립학교로 개칭했다.
이듬해에는 야간과정으로 여자부도 병설하였다.
성립학교는 순전히 로베르 신부의 개인 부담으로 운영되었는데 규모가 크지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나중에는 사립학교로 전환하게 되었다.
고아 양육사업 역시 처음에는 제대로 된 시설이 없어 아이들을 신자 가정에 위탁하여 기르게 하고
양육비는 로베르 신부가 다 부담하였다.
이 사업은 1915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대구로 진출해 백백합보육원을 설립해 사업을
넘겨받을 때까지 이어졌다.
모두 다 로베르신부의 열정과 덕행이 이루어낸 일이었다.
사실 이런 교육과 사회 복지사업 외에도 로베르 신부는 이장언,정규옥,서상돈,김하정등 수많은 평신도 지도자를 길러내렀는데 그들은 교회를 넘어 지역사회에서도 큰공헌을 했다. 수창학교설립 시 학교부지를 제공한 정규옥,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 된 서상돈의 활약은 은연중 로베르 신부의 영향이 컸다고 할수있다.
1911년 조선대목구가 서울과 대구대목구로 나뉘며 대구가 지방교구의 대표가된 것도 당시 대구본당의 신자가 3000여명으로 지방교회 중에 가장 많았고 서상돈이 주교관이 들어설 남산동 일대 부지를 기증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으니 이 또한 로베르 신부의 공적이라 할것이다.
긴 세월 피로의 누적릴까?로베르 신부는 결국 병이 났고 드망즈 주교의 설득에 프랑스로 휴양을 떠났다가 1913년에 귀국했다. 하지만 완벽한 회복은 아니었다. 1919년 재발병하자 그는 은퇴하여 남산동 주교관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결국 1922년 1월 2일 선종하였고 많은이들의 애도 속에 1월 4일 주교관 내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박해의 증언자이자 꿋꿋한 의지와 용기로 박해를 리겨내고 대구교구설정의 주춧돌을 놓은 로베르 신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고 또 죽으리라"던 그의 모토처럼 이땅의 신자들을 위해 고통 받았고
또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대구교구청 성직자 묘지의 로베르 신부묘소
대구은행의 지역사랑지
향토문화 107호
★이방인들★ 2023여름호
임명숙 글 인용
첫댓글 우리나라에서 선교 사역자들의 역활이 힘겨웠을 것입니다.
불교문화권에 있는 한국이었으니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고 또 죽으리라"이런 마음으로 먼 이역에서 복음을 전했기에 오늘날 기독교가 꽃을 피우고 있네요.
로베르 신부님의 업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옥성당이 넘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