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도청 앞 분수대에 올라가
시민군 모집 격문을 몇 번이고 읽었다
“이대로 광주를 전두환 일당에게 넘겨주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죽음을 맞고 말 것입니다
시민군이 되어 해방구를 끝까지 지켜 주십시오”
YMCA 무진관에서 결의를 다진 시민군 지원자들이
사격술을 익힌 다음 도청으로 향하는 걸 보고
친구 김상집의 산수동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을 기약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 주십시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질긴 울음처럼 흘러나오는
박영순의 방송에 화들짝 잠이 깨어
팔을 꿰는 둥 마는 둥 신새벽 도청으로 달려갔지만
물샐틈없이 착검한 채 에워싼 계엄군 때문에
친구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터벅터벅 산수동 오거리로 돌아오는데
한 어른이 분수대에 올랐던 나를 알아보고는
여기까지 계엄군이 곧 들이닥칠 텐데
몸을 피하는 게 좋겠다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녹두서점을 꾸려가는 장남 상윤이 형과 셋째 김상집
두 아들을 계엄군의 손아귀에 달려 보낸
친구 어머님은 슬픔을 억누른 채
행여 다칠까, 나를 친자식 보듯 걱정하시며
아무도 모르게 자식의 방에 숨겨 주셨다
마냥 그렇게 시간만 벌 수 없도록
계엄군은 수배 전단을 든 채
한 집 한 집 포위망을 좁혀 왔다
너마저 군홧발에 넘겨줄 수 없다며
상집이 어머니는 동분서주하시더니
풍향동으로 친구 문승훈의 집을 찾아가
딱한 사정을 털어놓고 그의 어머니를 모셔왔다
역시 계엄군 수사부에 승훈이도 체포된 뒤였다
두 어머니는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송정리역으로 데려다줄 테니
우선 서울로 몸을 피하라고 했다
대나무 바구니에 떡과 전을 한가득 담으시더니
택시를 타고 광주 외곽 극락강변을 빙 돌았다
광주를 벗어나는 극락교 앞에서 여지없이
착검한 계엄군의 검문을 받았다
두 어머니가 양옆에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어디 가는 길입니까? 신분증 제시하세요.”
계엄군이 차 안을 들여다보자
상집이 어머니께서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동생네랑 제사 지내러 시골집에 가는 길이요.”
계엄군은 유리문을 내리고 한참이나 나를 훑었지만
두 어머니가 친아들처럼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한참 만에 “네 잘 다녀오세요” 하고는 차단기를 올렸다
택시 기사는 냅다 장성역으로 내달렸다
광주의 관문인 송정리역은 검문이 심했기 때문이다
두 어머니는 서울행 기차 시간이 될 때까지
내게 속이 든든해야 한다고 떡을 떼어 주시며
체하지 말라고 물도 따라주셨다
기차가 역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시던 두 어머니의 모습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어머니들의 은혜를 갚을 길 막막하지만
위기에 처한 아들 친구에게 아무 망설임 없이
따뜻한 품 내주신 두 어머니를 생각하며
굽힐 줄 몰랐던 해방구 열흘의 기억
언젠가 가슴에서 꺼내 널리 나누리라
밤기차에서 밤새 깨어 맨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_박몽구 <두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