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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오고 있는 사람이 사니 형인 걸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큰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제야 형도 우릴 알아보고 놀란다. 후미의 형들이 비명(?)소리에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뛰어 왔다가 사니형을 보자 너나없이 반가워한다. 게시판에서 '은둔'을 선언한 후, 서울에서도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었던 사니형을 지리산 능선길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이런 인연이 있을까. 이틀 전쯤 컴불형이 사니형집에 전화했을 때 어머님께서 '산에 갔다'고 하시더라는 말을 들은 터라 사니형이 자주 다니는 설악산 어디 계곡에 묻혀 지낼 줄로만 알았지 지리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모두 배낭을 내리고 좁은 등산로에 서서 반가움을 나눈다. 사니형이 지리에 든 건 이미 3일 전이란다. 백두대간을 목표로 우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중산리부터 시작해 대피소에서 비박을 해가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비박장비와 야영장비 그리고 15일치 식량까지 담긴, 30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이 워낙 무거워서 산행에 속도가 붙지 않는단다. 형이 내려놓은 배낭을 들어보니 한 손으로 들기에는 어림도 없고 두 손으로 들자 겨우 움직일 정도다. 안타까운 마음에 짐을 좀 줄이지 그랬냐고 하자, 나름대로 줄여서 싼 것이란다. 다 필요한 것들이어서 더이상 뺄 것이 없더란다.
형이 티셔츠 주머니에서 땅콩을 한 줌 꺼내 나누어 준다. 오는 중에 만난 어떤 사람이 주길래 받아 온 것이란다. 땅콩이 땀에 절어 그런지 껍질이 잘 안 까진다. 까지는 건 알맹이를 먹고 안까지는 건 껍질째 먹는다. 그래도 맛이 있다. 이렇게 만난 김에 우리와 합류해서 함께 가는 것이 어떠냐고 하자 웃으면서 난색을 표한다. 앞으로의 일정을 묻자 성삼재를 거쳐서 만복대로, 대간길을 따라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볼 생각이란다. '시간 있을 때 해보지 않으면 영원히 못해 볼 것 같다'면서. 그러면 임걸령까지만 가서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에도 역시 고개를 가로 젓는다. 임걸령은 형으로선 지나온 길을 30분정도 되돌아 가야 하는 곳이다. 하긴 산행을 하면서 목적지와 반대로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사니형은 지금 보통사람이 메고 서 있기도 힘든 배낭을 지고 있지 않은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여기서 헤어지기로 한다. 대신 내일 시간이 맞으면 우리가 타고 가는 승합차로 함께 올라가기로 한다. 배낭을 어깨에 걸고 스틱을 짚고 일어서는 모습이 능숙한 지게꾼이 나무를 한 짐 얹은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모습같다. 그 모습이 힘들어 보여서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는데 '조심들 하고 잘들 갔다 와라!'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니형은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사니형과 헤어져 임걸령을 향하면서 알형이 말한다. '사니형이 부럽다'고.
임걸령 샘터에서 점심을 먹는다. 코펠 두 개에 라면 다섯개를 끓여 나누어 먹는다. 그냥형과 컴불형이 싸온 떡을 곁들여 라면국물을 안주삼아 소주도 한 잔 씩 나눈다. 왕눈이는 오징어다리를 구워 먹는다. 그런데 다리만 있고 오징어의 몸통이 없다. 집에서 몸통은 다 먹고 남은 다리를 가져온 것 같다. 술맛이 좋다. 이러다가 발동이 걸리면 안되겠기에 팩소주 세병으로 마감을 한다. 그래도 한 사람이 서너잔씩은 마신 것 같다.
노루목 갈림길. 왼쪽으로 가면 반야봉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직진 종주길이다.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 배낭을 내려놓고 빈 몸으로 올라가면 쉽게 갔다 올 수 있겠지만 시간과 체력을 아껴야 하기에 포기한다. 대신 작년에 갔다 오지 않은 왕눈이만 올라갔다 오라하자 왕눈이가 거길 왜 가냐며 펄쩍 뛴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의외로 많이 놀라는 눈치다.
삼도봉.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의 경계가 갈라지는 봉우리다. 전라도쪽과 경상도쪽을 번갈아 보아도 그저 산과산이 이어져 산맥을 이루고 있을 뿐 어느 쪽이 전라도이고 어느쪽이 경상도인지 아무런 구분이 가지 않는다. 삼도봉을 내려서자 내리막 계단이 이어진다. 내려가면서 계단수를 세다가 2백 몇개에서 수를 놓친다. 지나가는 사람들 대화속에 얼핏 550개 라는 숫자가 들린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서자 숲이 사라지고 앞이 확 트인다. 화개재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뱀사골대피소다. 작년에는 뱀사골대피소에서 냉콩국수를 먹었다. 재로의 정성 덕분에. 국수를 삶아 차가운 샘물에 헹궈서 재로가 집에서 직접 갈아 온 콩국에 말아먹었다. 앞으로 또 어느 산행에서 콩국수를 먹어 볼 수 있을까.
화개재부터 토끼봉까지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작년에도 이 지점에서부터 무릎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보폭을 좁히고 발디디는 속도를 늦춘다. 조심한 덕분인지 토끼봉 정상에 도달했을 때까지도 무릎엔 이상이 없다. 나 뿐 아니라 일행 모두가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 구성진 새소리가 들린다. 새이름을 묻자 알형이 휘파람새라고 한다. 다시 들려오는 새소리. 정말 휘파람소리와 똑같다. 소리만 듣고 때려 맞춘 것 아니냐고 하자, 녹음된 새소리를 들어서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 한다. 앞서 가던 왕눈이는 더 속도를 내 보이지를 않는다. '왕눈이가 보이지 않으면 수상한데...'하며 농담을 한다.
연하천 대피소. 왕눈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식수대에선 두 줄기 호스에서 물이 시원하게 뿜어져 나온다. 간단히 세수를 하는데 손이 시리다. 미숫가루를 타서 떡과 함께 간식으로 먹는다.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한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곧 비가 내릴 태세다. 아무래도 벽소령에 도착하기 전에 비를 맞을 것 같다. 출발을 서두른다.
왕눈이에겐 마의 연하천-벽소령구간이다. 작년에, 선배들을 위해 벽소령에 미리 가서 저녁 준비를 해 놓겠다며 먼저 연하천을 출발했던 왕눈이를 다시 만난 곳은 벽소령을 아직 700미터나 남겨놓은 곳이었다. 등산로 옆 넓은 바위에 주저앉은 채 밑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등산화를 들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왕눈이는 홀로 벽소령에서 하산했다. '그 땐 정말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고 왕눈이가 푸념을 한다. 그러고는 '아직도 안심할 수 없다'고 다시 긴장을 한다.
왕눈이의 걱정과는 달리 예상보다 수월하게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한다. 속보로 가장 일찍 도착했던 알형이 후미의 짐을 받아주기 위해 마중을 간다. 비는 아직 오지 않지만 바람이 심하게 분다. 바람이 안부는 처마밑은 이미 먼저온 등산객들 차지다. 그래도 가장 바람이 덜 부는 쪽의 식탁을 골라 바닥에 자리를 편다. 나는 우선 방배정을 받기 위해 대피소 안으로 들어간다.
대피소 안의 마루는 벌써부터 방배정과 대기순서를 받기 위한 사람들로 꽉 차있다. 신분증을 내고 방배정을 받는데 문제가 생겼다. 예약 인원이 남자 6인으로 되어있어서 남자5인, 여자1인으로 바꾸어 배정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여자방에 있는 자리는 아직 어느 자리가 빌 지 모르기 때문에 배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7시가 되면 남는 자리를 배정해 줄테니 기다려 달라는 말을 듣고 남자자리 5개만 우선 배정을 받는다.방에 내려가 침상을 확인하고 아예 땀에 절은 옷까지 갈아입고 밖으로 나간다.
지하방에서 계단을 통해 마루로 나서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어오고 있어서 현관이 아수라장이다. 까치발로 밖을 내다 보니 폭우가 내리고 있다. 그 잠깐 사이에 날씨가 이렇게 변하다니. 사람들을 밀치고 현관 바깥쪽으로 나와보니 왕눈이가 서 있다. 아직 도착 안한 컴불형과 가상이, 그리고 이들을 마중간 알형이 걱정되어 그냥형이 또 마중을 나갔단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대원들이 도착한다. 비를 많이 맞긴 했어도 비에 대한 대비를 잘 해와서 많이 젖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밥을 해먹을 일이 걱정이다. 대피소 정원은 400명인데 취사장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50명도 채 안된다. 대피소 현관앞 처마 밑에 비를 피할 곳이 있긴 하지만 20명이 앉을까 말까한 공간이다. 더구나 이 공간들은 이미 발디딜틈없이 사람들로 꽉 차있다. 이 빗속에 실외에서 밥을 해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밤 안으로는 우리가 밥을 해먹을 수 있는 공간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자칫하면 쫄쫄 굶은 채로 잠을 자야 할 것 같다.
이 와중에 왕눈이는 물이 가득 담긴 자바라 물통을 잃어버렸다. 그 물이면 우리대원들이 마시고, 밥을 하고, 커피를 끓이고, 설겆이까지 하기에 충분한 양이다. 비가 오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물통을 대피소내 1층 여자숙소 앞에 세워놨었는데 그 물통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어떤 아줌마가 가져갔다고 한다. 가상이를 시켜 여자 숙소안을 찾아보라고까지 했지만 찾지 못했다. 벽소령에서 물을 떠 본 사람은 안다. 180미터나 떨어진 샘터에 내려가 물을 떠 올라온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를. 물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먼 샘터까지 가서 무거운 물을 떠온 왕눈이의 수고가 너무나 아깝다. 하지만 물통 분실 사건은 왕눈이에겐 더 큰 사건의 전주곡이었다.
밥해먹을 여유가 생기면 식기도구를 꺼내 모이기로 하고 일단 배낭들을 침상으로 옮긴다. 가상이도 무사히 여자 숙소에 배정을 받았다. 그런데 알형이 안보인다. 휴대폰을 해 보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 아침에 두 명 모두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지면 안되니까 교대로 켜 놓자 했던 것이 생각 난다. 왕눈이가 나가 찾아보았지만 못찾았다 한다. 혹시 취사장에 있지 않을까하여 가본다. 알형이 거기에 있다.
역시 대장은 대장이다. 알형은 대피소에 도착하자마자 취사장으로 가서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의 고된 산행을 마치고 저녁 만찬을 즐기는 자리라서 그런지 간단히 식사만 하고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한 번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죽치고 앉아 밥만 아니라 술도 마시고 떠드느라 도통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사이에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일도 있었단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인 자리확보 작업을 시작한다. 우선 대원들을 모두 불러서 쪽수에서 밀리지 않을 준비를 한다. 그리곤 알대장이 찜해놓은, 식사를 거의 마친 부부 산행객에게 양해를 구해 일어나게 하고 그자리에 버너와 코펠 등을 펼쳐 밥을 앉힌다. 다음으로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옆자리 단체산행객에게 공간을 좁혀 앉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한다. 이럭저럭 겨우 여섯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고 삼겹살을 굽기 시작한다. 좁지만 아늑한 우리만의 공간에서 독주로 건배를 한다. 지리팔경중 하나라는 '벽소령 명월'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보지 못하지만 -오늘이 음력 보름이라 아쉽긴 하다- 빗속의 대피소 취사장에서 대원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그이상 운치가 있다.
가지고 내려온 양주 1병과 소주 4팩을 순식간에 다 비운다. 술이 부족하다. 지금 같아서는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내일의 산행을 위해 술은 그만 하기로 한다. 그사이 변죽좋은 왕눈이는 옆자리 사람들과 어울려 서너 잔을 더 받아 마신다. 휴지로 식기를 닦아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가 각자의 침상에서 배낭정리를 한다. 내일 새벽 캄캄할 때 출발을 해야 하므로 바로 짊어지고 갈 수 있게 배낭을 싸 놓아야 한다. 배낭정리를 마치고 침상에 누우려 할 때 때마침 방송이 들린다. "소등합니다."
얼핏 잠이 들어 한두 시간 쯤 지났을까. 왕눈이의 다급하면서도 맥이 빠진 듯한 목소리에 잠이 깬다.
첫댓글 오솔길, 재미있게 읽고 있냐.스노 패트롤 잘 듣고 있다.특히 채이징 카스.
멍게, 대하 <지리산행기> 쓰느라 고생 많네. 근데 드라마작법 수강했수? 절묘하게 끊어버리네. 참 알 형의 쌔 차도 추카추카.^^
왕눈형의 더 큰 사건이란게 무얼까? 궁금합니다요
언제나 왕눈형의 에피소드가 긴장감을 더해주는군요. 그 밤에 다급한 목소리란 ... 혹 도난사건이 있었던 것인가? 아님, 그 산중에 누가 잘 못알고 왕눈형을 덥쳤거나... 어쨌던 3편이 기대된다.
별거 있겠어 ! 왕눈이가 변신했겠지....초울트라갭숑 청개구리로....초승달이 뜰때 개굴딱지로 변신한다는 소문 맞냐 ? 무섭게 변하데 ?
다시 반복되는 벽소령의 저주에 어쩔줄 모르고 비바람몰아치는 깜깜한 새벽에 잠못 이루고 밖으로 나와 대의와 소의 사이에서 수 없이 갈등한지 시간반 나는 천둥과 함께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번쩌억 쿠르릉 쿵...
새벽안개 헤치고 산장을 빠져나와 세석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가슴졸였고 부스럭거리는 풀잎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야 만 했는 데 ... 천왕봉가는 길은 너무도 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