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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본역사를 잡종신화시대(죠몬시대로부터 다이카개신 전까지),천황공가시대(다이카개신부터 헤이안시대까지),무가시대(가마쿠라,무로마치,에도바쿠),끝으로 천황관료시대(명치유신을 거쳐 현재까지)네단계로 구분해서 인식하며,명치유신은 다이카개신의 19세기 버전으로서 천황공가시대와 현재의 천황관료시대는 무늬만 다를 뿐 그 속내용은 본질적으로 일란성 쌍둥이로서 닮은 꼴의 시대이며,다이카 개신후 천황공가정권이 한반도의 영향에서 벗어나 일본인 스스로의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의 역사였다면, 명치유신후 현재의 천황관료정권은 아시아를 혐오하고 아시아를 벗어나 완전한 자폐증 환자에 이른 나라이며,현재도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바,이러한 자폐증 환자국에 이르게된 계기의 출발이 바로 명치유신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일본사 무가시대만 다시 떼어놓고 봤을때,저는 무가시대는 기,승,전,결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전개되었다고 보는데요,그리고 3대 무가정권의 전사까지 합치면 대략 천년의 역사라는 유구한 흔적을 가지는 일본역사의 독특한 특수형태로 봅니다.
1.기-무가정권탄생 전사의 시대:세이와천황(858~876)시대를 기점으로 잡으며,3대 무가정권탄생의 쇼군들이 기를 쓰고 세이와 겐지를 자처했다는 것이 이 무가탄생에 세이와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의를 절대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며,이때 부터를 초기 무사단의 탄생의 최초 씨앗이 뿌려지는 출발과도 같다고 봅니다.이 무가정권 전사의 시대는 바로 후지와라가를 필두로 하는 공가의 섭관시대의 시작과도 겹치는데,결국은 섭관시대와 무가시대는 천황권력의 약화속에서 천황의 배다른 두 쌍동이로 태어나서 무가라는 동생은 공가라는 형님의 그늘 속에서 350여년의 설움을 받고 성장하여 기어코 형님 공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움켜짐으로서,상대적으로 공가는 더이상은 그 뒤로 힘을 펴보지 못하고 일본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일본역사에서 공가의 역사적 의의는 헤이안 문화,문학 예술정도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요?)일본사는 무가라는 중심으로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전개 되었다고 봅니다.이 가마쿠라 막부탄생전의 전사(前史)에서 무사의 탄생배경 및 그 성장,그리고 성격규정(즉 戰士적인 성격이 강하느냐,토지영주적인 측면이 더 강하느냐등),그들의 토지예속 및 지배관계,다른 무사와의 지배관계등 무사단의 형성구조등에는 밝히고 해명해야 문제가 숱하게 널려 있으나 이에대해 저의 무지를 고백하며,차후의 과제로 넘기겠습니다.사실 역사연구는 어떤 집단의 태동기를 규명하고 해명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2.승-가마쿠라막부 시대:무가가 일본역사의 중심이 됐음을 보여준 것으로, 탄생은 했으나 아직 성장 하려면 갈길이 멀었던 시대이고 무가권력 시스템의 기본틀이랄까 구조를 조형해 낸 시대.더이상 쓰면 개론서를 베끼는 수준을 넘지 못할듯 하여 부질없는 짓으로 보고 각설하렵니다.
3.전-전국시대:저의 엉뚱한 생각은 저는 무로마치정권 이전 즉 1281년 제 2차 여몽 연합군의 침략이후부터 1603년까지를 모두 전국시대로 봅니다.즉,전국시대의 시작을 제2차 여몽연합군의 침략에서부터 잡고요,무로마치 전기 막부탄생이라는 중간 과도기의 수많은 가지치기를 거쳐서 최종 메이오정변후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국시대라는 최종성숙기를 거치면서 전국다이묘라는 열매를 맺었고 이 열매는 이에야스에 의해서 최종 수확되었는데,이 수확의 성격이 노부나가.히데요시.이에야스 각각 다른 길을 걸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수확했다는 것이고,노부나가의 열매수확방식이 중단되고 완성되지 못한 것에 저는 항상 아쉬움이 있습니다.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라고나 할까요^^
저의 조금은 생경한 가설적 비유로 다시 정리 한다면 일본 전국시대라는 꽃,열매랄까 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탄생하는데는 역사의 장기지속이라는 관점으로 봐야되고,기나긴 역사적 과정이 축적되고 중첩된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즉 우리가 통상 알고있는 전국시대를 하나의 큰 덩어리로 놓고서 이 전국시대가 탄생할수 밖에 없었던 그 기원을 아주 멀리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굳이 다른 식으로 비유한다면,6.25전쟁이라든지,그냥 1차세계대전 같은 단 시간에 끝난 전쟁도 김일성의 38선 도발이나 세르비야 청년의 페르디난드대공 암살이라는 단순한 원인이나 계기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설명할수 없듯이,하물며 일본 전국시대라는 전체 덩어리의 시작을 어떤 개별사건(오닌의 난이나,소운의 이즈습격,메이오정변 같은)에서 찾고 설명하기 보다는 가마쿠라 말기부터 겐무신정,그리고 무로마치 막부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과정에서 배태되고 성장하고 성숙된 결과물이라고 봤을때 우리 머리에 전국시대상이 훨씬 더 명확히 그려진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그런 측면에서 전국시대의 기원은 훨씬 오래전에 시작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저는 보고 있으며,이는 마치 제가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같은 생각을 차용하여 일본 전국시대사에 대비시켜 도발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하실수도 있겠으나,그보다는 제 입장은 그냥 하나의 가설을 제시해 보고 싶다는 취지정도로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그리고 이 가설을 증명하는 것은 저로서는,현재로서는 완전 무리라고 고백 하겠습니다만,증명하지도 못할 가설을 제시해서 뭐하게 하고 물으시면 할말이 없고요...그래도 상상의 재미가 있잖아요^^)
1)초기 탄생기(씨앗 뿌리기)1281년 고안전쟁(제 2차 여몽연합군의 침략)이후~1392년 남북조 내란종식까지 111년
2)중기 과도기(가지치기)1392년부터 1493년 메이오정변까지 101년
3)말기 성숙기(꽃피우고 열매맺고 사라지기)1493~1573~1603까지 80년에서110년이라는 3단계의 역사적 과정 속에 이루어진 현상으로 봅니다만,
만일 2단계 요시미츠의 남북내란 종식후 중간 과도기에 무로마치 막부가 체제통합과 안정을 유지해 냈었더라면,3단계 전국시대로 전환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며,3단계 전국시대의 종식에 있어서도 1573년 이후 오다권력이 지속 유지 됐다면 일본 체제는 정치권력적 측면은 중앙집권에 경제는 상업상의 개인 자유를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가지 않았을까,즉 일본 근세,근대(화)는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전국시대를 좀더 자세히 풀어쓰면:
A초기탄생기(전반전):1281고안전쟁~1331겐코의변(50년):장원-공령제 해체,가마쿠라 막부의 슈고-지토제 분열,고케닌제,소료제 붕괴과정,지방에 고쿠진의 극히 초기모습출현(고쿠진으로 인식도 안되고 고쿠진이라는 개념화 불가능)
(후반전) 1334겐무신정~1392남북조통일(58년):막-슈연합정권 수립:고쿠진 슈고에 종속되면서 고쿠진들 지방촌락구조 지배권 형성 극히 초기화 단계.
B중기과도기(전반전):1392통일~1441가키츠의난(50년):막-슈연합정권 분열:막부독재에 슈고불만,슈고압박에 고쿠진 불만,고쿠진압박에 소영주,농민불만:복합적이고 중층적 불만 축적 :지방영국은 실질은 슈고영(주)국제하의 슈고다이묘시대이나,다른 한편으로는 쿠니잇키(=고쿠진잇키),지역적잇키,쇼고잇키,쓰지잇키발생=슈고다이묘 지배체제수립및-고쿠진의 연합정권
(후반전) 1441~1493년메이오정변(52년):막-슈연합정권해체,슈고영국제해체과정,슈고다이묘-고쿠진간의 관계에서 종속약화=역으로 고쿠진들의 촌락지배 강화(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출현)
C말기성숙기(전반전):1493~1542이에야스탄생(50년):막-슈 권위 모두 사라짐,(슈고영국제는 해체되고 슈고권만 형식상 유제로 남음)하극상의 상시화속 각국 자체 토지지배권 쟁탈전 돌입,다이묘영(주)국제 형성과정, 고쿠진영주 지역지배권 강화 :슈고,슈고다이,고쿠진영주들 각기 세력경쟁,누가 흥하고 망할지,분국패권 차지할지 예측 불허,역사적 경과는 슈고나 슈고다이,고쿠진영주에서 센고쿠다이묘가된 센고쿠다이묘지배체제에 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들은 종속되는 길을 밟음.
(후반전) 1542~1603이에야스막부수립(51년):앞시기의 센고쿠다이묘 자체 세력교체 계속 일어나며,센고쿠지배체제 강화및 센고쿠다이묘-중소다이묘-고쿠진영주들의 복합적 쟁투시대(분국내의 하극상 최고로 극대화),인근 센고쿠다이묘들과의 토지지배권 쟁탈전 돌입.천하통일과 새로운 권력창출이 중대문제로 떠오름.:오다가 그 길을 제시하고 보여줌(천하포무: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새일본을 만들겠다는 것,새일본의 의미는 아직도 저에게는 오다의 길의 미완성으로 미지수로 남음)**오다가 전국통일을 완수했으면 저는 이 전국시대 말기의 후반의 마지막 기점연도와 종점연도를 오다의 탄생년도인 1534~0000로 했을 것입니다.
**추가생각:1.슈고직으로서의 슈고기간,시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저는 잠정적으로 무로마치 초기(1338~1392)로 봅니다.
2.슈고영국제하의 슈고다이묘의 시대를 특정화 해야할 뿐 아니라 그 가문역시 특정화시켜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이에 해당하는 시기를 저는 무로마치 중기(1392~1477)로 봅니다.그런데 이 시기에 생존했던 슈고가문이라고 모두 슈고다이묘로 보면 곤란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무로마치 말기(1477~1573)는 1477에서 1493까지는 슈고영국제와 더불어 슈고다이묘의 해체과정으로 보고요,새로운 다이묘영국제와 중소다이묘,고쿠진영주의 1국 패권쟁투시대로 저는 봅니다.
1.고안전쟁후 토지소유권을 가마쿠라 막부권력은 안정시키지 못했다.이말은 당시 슈고나 지토나,고케닌이나 비코케닌(군지나 쵸시계층 출신으로 소영주들)은 막부가 토지소유권 안도만 시켜주면 만사오케이 만족했을 거로 봅니다.
2.토지소유권을 겐무신정도 안정화시키지 못했다.오히려 이를 더 엉크러(?) 놓았다.
3.무로마치 막부에 들어와서도 남북조동란기에 막부는 토지소유권문제를 슈고연합으로 안정화시켜려고 했으나,이는 오히려 슈고의 토지소유권을 넘어서 토지지배권을 확립시켜주는 방향으로 흘러갔다.역사의 역설이라고 봅니다.즉 이말은 가마쿠라의 막부때와는 근본적으로 토지에 대한 관념(?)이 바꼈다고 봅니다.
4.저는 슈고와 고쿠진은 그 출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크게 봐서 슈고는 가마쿠라막부의 슈고의 계보를 이은자들로 보고 고쿠진은 지토층의 계보를 이은 지역에 뿌리를 둔 재지영주(이게 고쿠진의 순수모습으로 봅니다)라고 봅니다.모르겠습니다.지토층에서도 고쿠진이 아닌 슈고로 상승한 가문이 있어서 지역에 슈고로 무로마치 막부로 부터 슈고직을 얻은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그런다해도 분명한 것은 슈고와 고쿠진은 그 개념적으로 분명히 다른 계층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봅니다.
5.남북조내란이 종식되고(저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료순의 큐슈의 남조가 평정된 1392년으로 봄)
슈고와 고쿠진의 길은 다르게 그 역사적 경과가 진행됐다고 봅니다.즉 슈고는 슈고다이묘의 길로 가고 고쿠진은 다시 분화되어 슈고의 히칸그룹으로 편성된자와 고쿠진나름으로 자생적으로 권력기구를(즉 가신집단을 형성한 케이스를 말함)만들어 내어 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가 된자로 두 가지 길로 나뉘었다고 봅니다.
6.이 가신집단을 새롭게 만들어낸 고쿠진은 기존의 고쿠진과는 다르게 보아야 된다는 것이 저의 고민이고 저의 암중모색입니다.과연 이들의 역사적 실체가 있느냐이며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무가가문이 이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즉 고쿠진에서 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가문으로 성장한 무가가문이 어떤 가문이냐입니다.
7.슈고영국제가 가키츠의 난으로 막부의 권위가 훼손되면서 슈고영국제 역시 흔들리고 해체되기 시작하면서,다른 식으로 말하면 슈고영국제가 다이묘영국제로 전화되면서 슈고다이묘의 히칸그룹에 있었던 고쿠진영주들은 오닌의 난이후 슈고다이묘에 하극상을 일으켜 중소다이묘의 길을 걷게 되고,지역 자생으로 성장한 고쿠진영주는 자신들의 토지지배권 및 권력기구를 더욱 정비하게 되었다고 봅니다.그러나 역시 슈고다이묘의 히칸그룹에서 중소다이묘로 전화된 고쿠진영주들이 이 자생의 고쿠진영주들에 비해서는 모든 점에서 훨씬더 유리 했다고 봅니다.저의 기본 큰 쟁점은 역사의 어느 경과에 과연 고쿠진이 토지지배권+가신단을 구성한 어떤 특정 권력집단이라는 형식으로 기존 고쿠진과는 다른 계층,즉 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가 탄생했느냐입니다.단순히 토지지배권만을 가지고 본다면 즉 재지영주라는 개념으로만 본다면 고안전쟁후 전국시대 마지막까지 존재했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그러나 기존 고쿠진과는 다른 X(앞으로는 이 계층을 X로 표기하겠습니다.)가 탄생했다면 이 X는 기존 고쿠진도 자신의 지배(다른 고쿠진을 가신화함은 물론이고 지자무라이 까지 가신화해서))하에 포섭하거나 두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그러니까 제가 7에서 말한 다이묘영국제하에서 기존 고쿠진(+지자무라이 포함)은 중소다이묘로 포섭,종속되거나,이 X=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에게도 포섭 종속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그리고 중소다이묘나,X=지역적영주 에게도 포섭,종속되지 않은 잔여로서의 고쿠진도 있지 않았을까요?결국은 토지지배권,뿐만아니라 하나의 권력기구(가신단의 구성 측면에서)수립이라는 이 두가지 문제에서 센고쿠 다이묘(이들은 토지지배권+가신단의 합리화 및 군사동원의 합리화까지 다 이룩했다고 봅니다만)로 가는 과정에서 중소다이묘 뿐만 아니라 X=지역적영주도 형성해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만,
1.슈고(다이묘)에서 센고쿠다이묘가 된 가문:시마즈,오토모,기쿠치,오우치,야마나,코노,호소가와,다케다,이마가와,사다케,우쓰노미야(고즈케),소 가문의 300년내력과
2.슈고히칸이나 고쿠진(영주)에서 센고쿠다이묘가 된 가문:이토,사가라,아소,오무라,류조지,마쓰우라,하타노,모리,아마고,우키타,이치조,우쓰노미야(이요),초소카베,미요시,아사쿠라,아자이,나가오,롯카쿠,진보,오다,도쿠가와,사토미,유키,아시나,하타케야마,이와키,다테,모가미,난부,아키타,오노데라,무토,카사이,오사키 등등의 가문을 슈고의 히칸출신인가 순수 고쿠진(영주) 출신인가로 나누고 이들 가문 300년 내력을 추적하고
3.기타 고호조가문과 사이토가문의 300년 내력을 추적하면 어떻게든 고쿠진(영주)에 대한 개념정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문제는 이들 가문의 300년 내력을 추적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봅니다.센고쿠다이묘 기원에서1.슈고형,2.슈고히칸형,3.고쿠진형4.기타형을 순수형으로 놓고 쇼군직신단은 하나의 중첩된 형태로 보면 되니까 1.2.3.4에서 어떤 가문이 쇼군직신단에 한때라도 속해 있었다 하더라도 1.2.3.4형의 기본적 범주의 외연(형식)과 내포(내용)를 훼손시킬 정도의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만....문제는 오히려 이 고쿠진형이 1.2.4에 겹쳐서 나타날때 이 고쿠진은 뭐냐 하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즉 원래는 고쿠진 출신인데 슈고나 히칸을 거쳐서 다이묘가 되었다든지 했을때,또는 고쿠진 자체에도 고쿠진과는 다른 고쿠진(영주=X)의 모습이 나타날때 이들을 어떻게 규정해 주느냐의 문제가 더 골치아픈 문제라고 저는 봅니다만.... 지역토호,소영주,고쿠진,고쿠진영주제,슈고영주제,슈고영국제와 지역적영주제,다이묘영국제=센고쿠다이묘제(센고쿠영국제?)
간단용어풀이:고쿠진이란 남북조 무로마치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 독자적인 영지를 소유한 토착영주를 지칭하는바,이들이 연합일심동체화하여(소위 말하는 잇키계약을 체결하여)일으킨 조직화된 무력봉기를 고쿠진잇키라고 한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리 모토나리가 중심이 되어 형성된 고쿠진잇키로서 이 고쿠진잇키를 결성하여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아마코 가문에 조직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간단용어풀이:소료제]중세무사단에서 소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데,재산의 노른자부위를 기량(재능)이 출중한 남자자식에게(장남이 아니어도 상관없음)양도하여 이 중심재산을 받은 자식이 그 집안의 소료[한자어로는 총령]를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나머지 기타 영지들은 소료이외의 자식,즉 쇼시[한자어로는 서자]들에게 양여하여 이들은 제작기 독립된 생활을 꾸리지만 완전 독립은 아니고, 전시에는 소료에게 군사적 재정적으로 그 힘을 몰아주는 경우도 있다.한 예로 오미 고가군의 야마나카씨의 경우 본가(소료)는 고가군이지만 서자(쇼시)들은 가와치,이즈미,셋츠등에 거주했었다.그런데 이 소료제는 무로마치막부시대에 들어와 해체의 길을 걷는바,즉 독립된 쇼시들이 그 집안의 하극상을 일으켜 집안쟁투가 발생하는데,이 하극상을 빨리 해소한 집안이 오닌의 난이래의 전국시대를 살아남는데 유리한 고지를 잡게 되는 것이다.하리마의 경우 무로마치 4직중의 하나인 아카마츠 일족들의 영지였는데,히데요시가 1577년 하리마 침공에 나섰던 그 시점까지도 일족의 그 누구도 하리마를 통일시키지 못하고 다 고만고만 한 고쿠진으로서 일족간에 일진일퇴의 쟁투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는데,결국은 히데요시의 하리마 침공으로 모든 일족이 남김없이 각개격파되어 그 흔적도 없이 멸망해 버리고 만다.요는 하리마가 소료후손이 됐든 이런저런 쇼시 후손이 됐든 한 가문이 하리마를 히데요시 침공전 일국통일 해 놨더라면 그렇게 처참하게 패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반대로 히데요시가 모시던 오다가는 오다 노부나가 집안의 경우, 오다 집안은 그당시 오다가문에서 극히 말예의 집안(말단 부교출신집안)이었지만,노부히데-노부나가로 이어지면서 1559년에 다른 오다가를 모두 멸망시키고 오와리를 일국 통일해버렸기 때문에 1567년에 미노점령후에는 <천하포무>의 깃발을 내걸고 전국통일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나 호빵은 소료제 붕괴후 어떤 가문이 일국통일을 빨리 이루어냈느냐가 전국시대 생존의 아주 중요한 관건이었다고 본다.그렇지 않은 가문들은 모두 일국통일한 중요한 다이묘가문들에 모두 멸망되거나 철저히 종속되어 그 생존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즉,가마쿠라막부 말기부터 시작된 소료제의 붕괴과정으로부터 생겨난 일족의 내홍을 어느 집안이 가장 빨리 극복했느냐가,그 집안이 고쿠진 영주로서 센코쿠시대에 살아남을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이다.
<소료의 단독상속에 의한 (즉 가마쿠라막부체제의 소료제 해체와 더불어 잇키계약제 형성:파광자주)쇼시들의 히칸화가 진행되어,재지영주가 영지의 정치적,경제적구조를 직접적으로 장악할 필요가 생겨났다.그때문에 재지영주는 그 재지성(토지지배권:파광자주)을 한층더 강화시키고,지역적인 정치과제(군사과제포함:파광자주)에 대처할 필요가 생겨났다.>저는 위문장을 가장 주목하게 되는데요,
1.이러한 과제가 이들 고쿠진들에게 당면과제로 제시된 시기가 언제였을까 궁금하게 되고요.
2.이러한 고쿠진들의 과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내부적으로 고쿠진 자체의 권력기구창설,즉 가신집단의 형성과 합리화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는 의문이 들고요,
3.고쿠진(영주=X)들의 상대적 역량속에서 잇키계약이 해체(?)되고,그리고 서로의 힘의 역학관계속에서 고쿠진 자체의 지배종속의 분열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느냐입니다.
4.쇼시에서 히칸으로 간 고쿠진들은 역사적 경과 속에서 어떻게 진화했느냐가 이 고쿠진영주(X)를 푸는 해법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 권력기구창설이라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즉 토지지배권을 확실히 확립하는 방법은 어떻게든 가신집단의 형성문제 뿐만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초기형태지만 권력기구를 만들어 또는 하나의 상설회의체,조직체를 만들어 지배자(유력 고쿠진,다이묘)의 권력의지가 합리적으로 행사되고 있느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야만이 가신단의 군사적 동원에도 명분과 그 실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즉 고쿠진들 중 역사적 어떤 시기에 권력기구창설이 되어 있지 않고서는 오닌의 난 이후에 1국패권경쟁의 무대에 서보지도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이게 빠를 수록,그 권력기구의 조직이 합리화되고 그 연대가 강할수록 그 무가가문은 훨씬 유리한 고지에 선다고 봅니다.처음에는 단순한 토지지배권의 문제였는데 어느 시점에는 정치권력문제가 훨씬더 중요한 문제로 각 지역,쿠니의 당면과제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하면 확실히 내 지배하에 두지?어떻게하면 효율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지 하는 문제는 토지지배권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이 문제는 센고쿠다이묘가 되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로 봅니다.이들 가신단의 토지지배권문제는 안도해주면 되는 문제지만, 이들 가신집단을 자신의 권력기구(조직)체 안으로 확실히 편성해 내는 문제,이들의 군사적 편제와 동원문제는 토지지배권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요,이는 토지지배권의 논리와는 다른 권력논리가 등장할 수 밖에 없으며,이를 어떻게 합리화시키느냐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요는 가신집단에게 어떠한 만큼 권력과 권한과 직책을 부여하느냐의 문제로 이는 센고쿠다이묘에게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 이전 고쿠진 중소다이묘 수준에서도 이는 똑같이 중요한 문제로 보기때문에 저는 항상 토지지배권+권력창출(기구)을 같이 놓고 전국시대를 바라봅니다.역사가님이 올리고 계신 오다권력의 교토지배를 저는 이 권력창출의 문제로 봅니다.즉 자신의 권력(지배)을 그 해당 지배지역에 어떻게 관철시키느냐의 문제로 보며,이게 장차 어떻게 변용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해봅니다.그래서 제가 고쿠진과 다른 고쿠진영주(X)의 해답을 푸는데 안개속을 헤매는 이유가 되겠습니다.단순히 토지지배권만을 위한 각 고쿠진들의 자율적이고 평등한 잇키결합을 넘어서 그 고쿠진 자신에 한정하여 봤을때 순수 내적으로 자신의 지배지역에 어떠한 형태로든 초기수준에서 권력기구(그냥 쉽게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일족+그 외의 가문을 종속시켜서 자신의 권력의지가 작동되고 또 반대로 가신역시 그 지배를 받아들이게끔 하는 뭔가를 만들어냈느냐는 것)를 만들어 냈느냐 아니냐에 따라 고쿠진과 고쿠진영주(X)를 구분하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권력기구의 초기모습,차츰 진화되는 모습등을 계속 추적해서 보면 결국은 센고쿠다이묘의 권력기구에까지 도달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오다의 권력기구에까지 도달하게 된다고 봅니다.이 권력기구(조직,장치)의 초기 맹아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고 우습겠지만 이 초라하고 우스운 모습이 계속 역사적 경과 속에서 계속 진화하고 합리화 되었기때문에 센고쿠의 권력기구가 만들어진 것이고,예컨대 슈고히칸그룹에서 중소 다이묘,센고쿠다이묘로 가는데 고쿠진보다 우위에 선것은 토지지배권역의 크기에도 있었지만 이들 그룹은 고쿠진영주(X)보다도 이 권력기구의 합리화에 있어서 훨씬 정치권력적으로 그 테크닉에 있어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고쿠진영주(X)에 비해서 패권게임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수 있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저의 총체적인 가설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고쿠진이 처음부터 고쿠진영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저의 가설은 고쿠진은 그 탄생후 300년의 역사적 경과속에서 끊임없는 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즉 그들의 물질적 경제적,정치권력적 관심 속에서 이들은 처음에는 토지소유권만 안도받을 수 있었다면 이게 가마쿠라막부말기체제든 겐무신정체제든,무로마치막부체제든 토지소유권만 안도받으면 될 문제였던 것이 이 3체제 어느 체제도 안도를 시켜주지 못했다는데서 이들은 토지지배권을 확립해야하는 것으로(왜냐하면 자신들의 직접적인 대립관계에 있는 슈고(다이묘)들이 막부로부터 토지지배권을 노리고 들어왔음으로), 이들 역시나 자신의 지배지역의 토지지배권을 확립해야 하는 문제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이 토지지배권을 확립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문제를 넘어서 하나의 권력을 창출해 내야 하는 문제까지 이 고쿠진들은 안게 되었고,이게 바로 권력기구를 형성해 내는 문제로 저는 보는 것입니다.이렇게 권력을 가장 최하단위에 있어서도 창출하지 않고서는 이들은 생존을 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이 권력기구의 형성문제가 바로 고쿠진과 고쿠진영주(X)를 제가 한사코 구분해서 보려고 하는 이유입니다.그리고 이들 고쿠진영주(X)가 되기위해서는 다른 고쿠진,지자무라이들을 어떻게든 자신의 지배체제안으로 연합,종속,복속시키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럼으로써만이 군사적동원의 합리화를 기할수 있고,이럼으로써만이 다른 고쿠진영주(X)나 다른 다이묘들 (저는 이들을 슈고히칸화의 길을 걸었던 계층으로 현재는 잠정적으로 봅니다만)역시나 고쿠진들이나,지자무라이들을 포섭,종속,연합,복속시켜서 하나의 권력기구속으로 편입시켰을 테니까 이들이 1국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패권게임이 진행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결국은 이들 고쿠진영주(X)는 슈고히칸화의 길을 걸었던 다이묘들에게 다시 연합,종속,복속됨으로써 하나의 일국지배체제가 완성된다고 저는 봅니다.물론 고쿠진영주(X)가 1국 패권을 차지한 경우도 있었겠지요.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센고쿠다이묘 40여가문 출자를 파악 못하고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정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일단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일본 전국시대(300년)가 이런 진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오다의 천하통일에 있어서 새로운 권력창출을 다시 들여다 보게 되고 오다는 과연 새로운 권력창출로 이러한 문제를,이 중대과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새로운 일본의 지배체제를 만들어 내고 냈을 것인가가 하나의 그냥 저의 항상 중대 관심사가 된다고 보겠습니다.고쿠진영주(X)시점부터 이들은 단순한 토지지배권자가 아니고 하나의 권력집단이고 물론 센고쿠다이묘는 말할 나위가 없다고 보는데요,이들을 어떻게 오다는 어떤 권력시스템으로 자신의 지배체제로 편입,종속,복속,연합시키느냐의 문제는 오다의 길이 끝까지 안갔기 때문에 저는 항상 허황된 상상만 하게 됩니다.이에 대한 저의 허황된 상상의 가장 순수한 내용은 <전국시대 용어문제에 대하여>의 게시글의 신사본론님의 댓글에 제가 답변 댓글 달면서 이미 썼으니 더이상 말하지 않으렵니다.궁극적으로는 역사자료와 이에 대한 개념적 파악이라고 볼수 있고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전국시대를 바라보는 문제의식이라고 보겠습니다만,(저는 역사해석에 있어서 이 문제의식을 가장 중요시하는 입장임)일단 문제의식은 차치하고,기실 저는 아직 전국시대 관련 역사자료를 많이 접해 보지 못해서 상당한 위태로운 논지를 지금 전개해 나가고 있다고 저는 자인합니다.즉 하나의 상상적인 가설,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개념을 먼저 만들어 놓고,현실 역사적 자료(그당시의 역사적 경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저 자신 고민하고 있습니다.더구나 일본처럼 60여국의 경우에는 그 현실 역사적 상태나 그 경과는 극히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가설과 개념으로 일관되게 다 풀어서 설명한다는 것도 억지가 아닌가 하는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그러나 60여국에서 어떠한 다양한 사례가 튀어나오든 저의 기본 관점(토지지배권+권력창출)과 전국시대는 고쿠진의 진화의 역사였다는 기본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다만 제가 일본 역사자료를 많이 접해 보지 못해서 이를 제대로 설명 못하고 안개속을 헤매고 있을 따름입니다.
요즈음에 전국시대를 제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또 NHK대하 <군사칸베에>를 보면서 제가 제대로 역사용어를 알고 쓰고 있는가,그리고 <군사칸베에>가 비록 역사드라마이지만 과연 작가는 제대로 역사용어를 쓰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고 또 의문이 생겨서 이의 해답을 갈구하는 심정으로 질문합니다.
<군사칸베에>드라마에 이런 대사들이 나옵니다.
1.1573년 아자이 고다니성 함락이 끝난뒤 오다의 히데요시에 대한 포상장면:오다왈:<히데요시 네이놈,이번 전투에 큰공을 세웠는데도 언제 다이묘가 되느냐고 투덜대고 다닌다면서,...그래 네 소원대로 이번에 다이묘를 만들어주지.>(제가 조금 윤색했음)
2.1575년 5월 나가시노 전투전후 쯤에 모리가의 외교승 안고쿠지 에케이가 하리마를 돌고나서 상황보고하는 장면:에케이왈:<대분분의 하리마 지자무라이들은 우리를 따르기로 했습니다.다만 히메지성의 구로다가 조금 신경쓰입니다.>
3.1575년 구로다 칸베에가 오다의 기후성을 방문 코차크성의 코데라가는 오다가에 복속함을 표시하면서 말하는 장면:칸베에왈:<하리마의 대부분의 중소다이묘들은 지금 모리가를 따르고 있지만,이는 모리가의 기세에 잠시 눌려있는 것에 불과하고,제게 맡겨주신다면 제가 앞장서서 오다편에 서게끔 설득해 내겠습니다.>
왜 같은 하리마의 성주들( 오키시오,초스이,고즈키,다츠노,아가,코차크,미키성)을 두고 에케이는 지자무라이로 표현하고 칸베에는 중소다이묘로 표현하느냐는 것입니다.(이 드라마 한국인 번역가가 이를 잘못 번역했나 싶어서 제가 부족한 히어링으로 재삼재사 확인했음)이 드라마에서 칸베에의 오다 접견시 칸베에는 시동(아직 모리 란마루가 아님)이 코차크성주대리라고 오다에게 소개합니다.에케이는 자신이 모시는 대 다이묘인 모리가에 비하면 하리마의 성주들은 하찮게 보여서 지자무라이들이라고 폄하해서 표현한 걸까요?반대로 칸베에는 자신이 모시는 코차크성주 포함 그 반열에 있는 성주들을 높이봐서 중소다이묘라고 부른 걸까요?아니면 이 드라마의 오리지널 작가가 역사지식이 부족해서 깜박하고 드라마 회수가 바뀌다보니 용어 혼선을 빚은 걸까요?또 오다가 히데요시에게 다이묘로 만들어주지 했을때의 다이묘란 무슨의미일까요?실제로 과연 과연 다이묘라는 말이 실지로 그 당시 쓰였을까요?센고쿠라는 말도 안쓰였던 그 시대인데 과연 이 다이묘라는 말은 실지 역사적 실체를 가지고 그 시대에 쓰였던 말일까요?
제가 앞에 쓴 연대 구분 스케치에서 여러 용어들을 남발했는데요,예컨대 장원제,슈고,지토,고케닌,고쿠진,슈고영국제=슈고영주제,(여러 영국을 거느린 슈고나 슈고영국을 따로 부르는 용어가 있는 듯하던데....),슈고다이묘,슈고권,슈고다이,쿠니잇키(=고쿠진잇키),쇼고잇키,지역적잇키,쓰지잇키,다이묘영국제,센고쿠다이묘=대다이묘,중소다이묘,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등등 제가 써놓고도 제가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 썼는가 제 자신이 의심스러울 정도인데요,
저의 의문은 이렇습니다.1.슈고,슈고다이,지토,고케닌,고쿠진,지자무라이까지만 그 당시에 실지로 역사적 실체를 가지고 당대인들이 서로 그렇게 인식하고 알고 썼었다고 봅니다.
2.그러나 슈고영국제이하 모든 용어들은 근 현대에 와서 논자들이 또는 역사가학자들이 그 당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용어라는 겁니다.그럼 과연 이런 용어들이 당시의 어떤 시기,어떤 지배형태,어떤 계층을 정말 의미적합하게 개연성있게 잘 설명해주는 도구(용어)냐 했을때는 저의 과문한 지식으로는 뭐라고 왈가왈부할 것은 아닙니다만,그래도 전국시대 입문 초심자로서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과연 우리는 이런 용어들을 사용해서 그 시대를 정말 잘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는걸까?우리는 드라마나 역사책이나,역사논문이나, 역사소설에서 이런 용어들이 쓰였을때 개인 각자각자는 어떤 상을 그리면서 이를 본인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쓰고 있는지 다시한번 의심할수 밖에 저는 없었습니다.
3.위의 드라마 대사 지문에서 에케이가 실제로 그당시(1575년 당시) 그런대사를 했을걸로 가정하고요,여기서 에케이가 지자무라이라는 말을 썼을때는 지자무라이는 그당시 하리마실세들을 고쿠진으로 보고 거기에 토호(=토착무사)들을 포함해서 그렇게 부른 걸까요?즉 에케이가 지자무라이라고 불렀을때 이는 고쿠진+지방토호를 모두 포함한 말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요?그러나 기실 지자무라이는 고쿠진과는 그 급과 격이 달리 재지토호로 소영주이며 고쿠진지배권에 복속되어 있는 토착소영주,토착무사에 한정해서 써야되는 용어가 아닐까요?그렇다면 또 이 토착 소영주는 누구란 말일까요?한 촌락의 소를 책임지고 고쿠진에게 세를 납부하는 묘슈에 해당되는 계층일까요?
4.저는 위의 시대구분에서 1441~1493년 연간에 지역 고쿠진들은 고쿠진영주로 하나씩 변신했을거로 추측했는데요(다시한번 강조합니다만,위의 연대구분 스케치의 그 내용은 그냥 순전히 저의 추측으로만 여겨주시기 바랍니다.실지로 역사상의 전개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역사용어들로 막연히 추측하여 꿰맞춘것에 불과함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제가 지금 이 게시글에서 관심있는 것은 이 시대 구분문제가 아니라 이 용어들이 얼마나 쓸모있는 용어들이냐를 의문시하고 질문하는 겁니다.)과연 고쿠진과 고쿠진영주(=지역적 영주)는 그 역사적 전개에서 어떤 차이점을 노정시켜길래 역사학자들은 이 새로운 용어인 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라는 말을 만들어낼수 밖에 없었을까요?
5.이제 가장 의문스러운 다이묘라는 말을 따져봅니다.과연 무로마치시대때 슈고다이묘라는 말이 있었을까요?이건 역사학자들이 슈고영국제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그 논리적 모순(슈고영국제하에서 슈고라는 말은 모순이므로)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용어가 아닙니까?이제 정말 센고쿠다이묘라는 말을 따져봅니다.<슈고영국제>하에 슈고다이묘-고쿠진과 대관계를 맺는다면,<다이묘영국제>하에서는 센고쿠다이묘-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와 또는 중소다이묘-고쿠진(지자무라이포함)들이 각각 대관계를 맺는다고 저는 봅니다만,도대체 슈고다이묘에 다이묘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역사적 실체로서 가능한 말일까요?그러니까 실제로 슈고영국제가 정말로 일본 무로마치시대 어느쯤엔가 실지로 있었던,즉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가 확인해 보고 검증할수 있는 상당히 설득력있는,개연성있는 역사용어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이의 논리적 연관으로 정말 도대체 슈고다이묘라는 것이 실지 역사적 실체로 있었던 계층(=신분집단)일까요?그리고 다시 도대체 이 다이묘라는 말이 당시 쓰이지도 않았던 말을 센고쿠에 붙었을때 그 역사적 실체를 어떻게 구성해내야 할까요?요컨대 <중소다이묘영국>이 있고 <센고쿠다이묘영국=분국)이 있고 <고쿠진영주지배영역>(과연 고쿠진영주의 지배영역을 고쿠진영국이라는 역사용어로 쓸 수 있을지 의문시되어 고쿠진영주 지배영역이라는 말을 썼음)이 삼자는 일본 60여 국에서 말기에(1493~1603)에 우리가 추체험적으로 확인할수 있으며 이에 상관성을 가지고 중소다이묘,센고쿠다이묘,고쿠진영주등은 정말 그당시 실존했던 여러 무가계층들을 잘 분별해주고 이들을 설득력있게 잘 설명해주는 용어들이라고 볼수 있나요?
결국 저는 이렇게 밖에 말할수 없습니다.말기(1493~1603)에 일본 60여국은 당시 그런 용어가 있었든 없었든,또 그당시 사람들이 그런 용어를 사용했든 안했든 우리는 당시 말기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다이묘라는 말을 안쓸수는 없으나, 이때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이 용어들인,<다이묘><중소다이묘><다이묘영국제><센고쿠다이묘><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고쿠진=쿠니슈-이 고쿠진이라는 말은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개념이 아니고 그 당시 실지로 쓰이고 서로간에 인식가능한 계층을 표시하는 용어로 저는 알고 있음><지자무라이-이 용어 역시 그 당시 실지 사용된 용어로 알고 있는데,도대체 당시사람들은 이 지자무라이로 누구를 칭했을까 저는 아직도 의심스러우며,도대체 지자무라이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등의 용어에 대해서 아직도 (일본역사학계에서)개념정리가 안된 용어들인걸로 저는 알고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 명확한 정의를 하고,또는 개념파악을 하고 일본 전국시대 및 기타 무로마치막부등의 역사상 파악을 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저는 아직도 전국시대 역사입문 초보자로서 이들 용어들이 어떻게 정의되는지,정의될 수있는지,지금 이 순간에도 잘 모르겠고요,항상 고민됩니다.
1.하리마의 7성주들은 중소다이묘입니까?고쿠진입니까? 지자무라이입니까?
2.고쿠진과 지자무라이는 같은 계층입니까?다른 계층입니까?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뭡니까?
3.슈고다이묘라는 말은 역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상의 용어입니까?아니면 무로마치막부 당시 그 시대에 실지 쓰였던 말입니까?
4.다시 전국시대(1493~1603)에 들어와서 다이묘라는 말은 전국시대 그당시 실지 쓰였던 말입니까?
5.다이묘는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센고쿠다이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개념으로 다이묘 단독적인 용어로서 전국시대(1493~1603)에 한정해서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이 뜻은 이에야스 막번체제하에서의 다이묘의 기준이 아닌 전국시대 그 시대에 한정해서 우리는 그 전국시대의 다이묘를 어떻게 정의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겁니다.)
6.다이묘라는 말이 전국시대 그 당시 실지 쓰였던 안쓰였던 말이건 간에 중소다이묘와 센고쿠다이묘=대다이묘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서 구분해서 봐야 합니까?그리고 다시 전국시대에 한정해서 중다이묘,소다이묘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구분해야 합니까?
7.고쿠진과 고쿠진영주(=지역적영주)에 대해서 타카마츠님은 같은말 아닌가 하셨는데,저는 이에 대해서 달리봅니다.고쿠진은 가마쿠라말기에 여러 출자를 두고 탄생해서 전국시대말까지 존속했던 계층이고 <슈고영국제><다이묘영국제>하에서도 지속 그 생존력을 유지한 계층이라고 봅니다만,이 고쿠진 영주는 슈고영국제하에서는 맹아적인 상태로 있다가 1441~1493년 년간에 하나의 지배영역을 독자적으로 배타적으로 장악한 계층으로 기존 고쿠진과는 그 성격이 다른(기존 고쿠진들은 슈고다이묘에 종속되거나 반종속되어 있었다고 봄)계층으로 역사상의 어느 시기에 특정하게 생겨나서 성장한 집단을 개념화해야 하는 논리적 실질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념이고 또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용어로 봅니다.즉,고쿠진 영주는 1441~1493년간에 탄생해서 1493~1542년의 <다이묘영국제-슈고영국제가 다이묘영국제로 바뀜)>의 형성과정에서 중소다이묘,고쿠진영주들은 센고쿠다이묘의 패권을 두고 다퉜다고 저는 봅니다.이런 상황에서 비로소 하나의 분국이 탄생된다고 저는 봅니다.따라서 고쿠진은 그냥 하나의 재지영주일뿐이며,고쿠진 영주는 일단 자신의 영역 지배권을 확립한 계층으로 보며,중소다이묘 역시 하나의 지배영역을 차지한 계층으로 보나, 다만 그 차지한 영역의 범위와 그 지배권의 장악에 있어서 중소다이묘는 훨씬더 크고 더 강력했다는 차이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따라서 1493~1542년 년간에 각 60여국의 패권을 두고 양자는 다퉜을때 중소다이묘들이 그 우월한 위치에 설수 밖에 없었으며,결국 중소다이묘들이 센고쿠다이묘로 변신할때 이들 고쿠진영주들은 이 센고다이묘에 종속되는 길을 걸을수 밖에 저는 없었다고 봅니다.물론 고쿠진영주에서 한 국가의 패권을 차지해서 센고쿠다이묘로 변신한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만....그러나 역시 중소다이묘에서 센고쿠다이묘로 변신에 성공한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요....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말기 상황(1493~1603)년간의 일본 60여국의 각국의 상황과 역사적 전개를 잘 몰라서 딱히 이렇다 저렇다 확정지어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만,저는 일단 가설적인 추측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재지영주로서 그냥 고쿠진은 지자무라이를 확실히 피관화해서 가신집단을 구성하지 못하지만,고쿠진영주는 지자무라이를 피관화하고 하나의 가신집단을 구성하며,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의 소를 확실히 장악한 계층으로 저는 보고 싶습니다.제가 뭔가 오해하고 잘못알고 틀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일 고쿠진영주라는 말이 고쿠진이라는 말과 혼선을 빚는다면 저는 이 고쿠진영주의 개념상에 맞는 적절한 용어를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봅니다.저는 아직 <고쿠진영주>와 <지역적 영주><센고쿠영주>가 같은 말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안서며, 이 <지역적영주><센고쿠영주>라는 말 조차도 뭔가 급조해낸 용어처럼 영 불만입니다.
PS:1.저는 중소 다이묘는 그 출신이 슈고영국제하에서 슈고다이묘 또는 슈고다이묘의 피관그룹(이들도 어찌보면 큰 테두리하에서는 고쿠진영주들이라고 봐야겠지요)에서 <슈고영국제> 가 <다이묘영국제>로 전화되면서 성장한 계층으로 보며,고쿠진영주들은 고쿠진에서 순수(?)자생 성장한 그룹으로 봅니다.즉 같은 고쿠진영주들이었지만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면서 1493~1542년에 각 영국(분국)의 지배권을 다퉜다고 보며,결국은 대체로 슈고나 슈고다이묘 피관그룹에서 성장한 중소다이묘들이 센고쿠다이묘로 변화되는 길이 더 빠르고 더 우위에 있었다고 봅니다.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순수고쿠진에서 자생성장한 센고쿠다이묘인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났다고 봅니다.한 분국의 센고쿠다이묘가 되는 것과(한 분국의 센고쿠 다이묘가 됐어도 전국통일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가문이 사라지고 몰락했나요?)정작 센고쿠다이묘가 천하통일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게임이 아닐까요??
2.역사가님이 번역해서 올리신 <제국전국사-인근의 센고쿠다이묘들>에 보며는 오다씨 가문을 소개할때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일개 소다이묘(小大名)였던 오다 노부히데의 적자로 태어나>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요....저는 이문장을 읽으면서 오다 노부히데를 왜 소다이묘라고 부르지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즉,이건 실지 전국시대 그당시 썼던 말일까?아니다.이건 이 웹글 작성자가 아무런 개념없이 그냥 쓴 말로 봐야 된다.이건 일본 역사학논문이나 책에도 안나오는 말일거라고요....그럼 도대체 오다 노부히데는 죽기전에(1551년) 어떤 계층으로,어떻게 부르는 것이 합당한 용어일까?즉 가신들이 부른 관직+도노나 우에사마나 오야가타사마의 호칭이 아닌 오늘날 지금 우리가 역사학적 용어로 노부히데를 어디에 위치시켜줘야 맞는가 조금 고민되고 의심이 들더군요.오다 노부히데는 고쿠진 영주인가?일부 지역적 패권을 차지한 지역적 영주인가?아니면 아직 센고쿠다이묘는 안된 <센고쿠영주>인가?중소다이묘라는 말을 써야 하는가?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참조]고쿠진에 대하여 일본원어 그대로 올리니 일본어 해독이 가능하신 분은 한번 참조삼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고쿠진을 모르면 일본 전국시대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언제 시간 나면 제가 일본원어 아래에 번역해서 번역문을 첨부해 올리겠습니다.
【호빵님 특별 번역문:고쿠진을 모르면 일본 전국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고쿠진명가를 얼마나 많이 정확히 자세히 알고 있느냐에 따라 전국지식 레벨의 하수와 중수가 구분됩니다.3인방(대마왕+원숭이+너구리)만 반복해서 나불거리는 놈은 마치 무신불립이 개소리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처럼 초하수 왕초보입니다.참고로 아래 호빵님 번역문은 일본어 위키백과 고쿠진편을 번역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国人 <파공자 번역문> 고쿠진 고쿠진이란 주로 가마쿠라시대의 지토층으로부터 발생했고,남북조시대부터 무로마치시대에 걸쳐서 각국의 개발을 추진했던 무사층이다.고쿠진영주라고도 한다.종합해서 부를경우 쿠니슈 또는 고쿠진슈라고 한다. 고쿠진은 헤이안시대 중기에 성립한 후기 왕조국가체제하에서 장원과 공령의 관리자였던 쇼칸,군지,쵸시,호시의 계층이나,거기 출신으로 가마쿠라시대이래 수많은 지토의 계보를 잇는 각국 현지의 영주를 일반적으로 칭하는 것이며,동시대에 실지 사용된 자료용어이다.막부나 슈고,장원영주 외부에 존재하여 지배층에 대항하는 재지세력의 의미로 사용되며 독자의 영역지배를 노렸다. <고쿠진>이라는 호칭은 <재지에 거주한 소료를 중심으로 독자의 세력을 지닌 무사>를 지칭하는 말로서,가마쿠라때부터 여기저기서 보인다.그들의 직접적인 기원은 가마쿠라시대의 지토시키의 무사이며,그런 무사들이 토착화해서 재지영주가 되었던 것이다.가마쿠라시대에는 지배층에 반항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띈 악당(=아쿠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이 계층의 무사들이 중요한 존재로 인식된것은 가마쿠라막부 멸망의 전후로부터 남북조 말기에 걸쳐서이며,특히 간노의 소란때부터이다.남북조시대에는 각국의 정치군사는 나라의 토대로 그 허리를 장악하고 있던 영주들에 의해서 움직여졌다.한편으로 고쿠진들은 중앙정계의 동향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고쿠진은 무로마치 막부나 슈고다이묘,장원영주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을 축적한 재지세력으로까지 성장한 것이다.그 배경에는 남북조 동란기에 자신의 지배하에 있던 각성된 농민층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무로마치막부나 슈고다이묘의 지배나 간섭에 대해 저항하며,마차나 도이마루[가마쿠라시대에 주로 항만에 살면서 화물의 보관,수송 중개매매를 하던 업자]에 머물렀던 운송업이 발달함에 따라 유통경제,지역경제의 신장이 있었다. 영지의 경영에서는 각국에 머물며,재지영주로서의 고쿠진영주는 여러곳에 산재해 있던 지방을 지배하는 지토영주형의 지배형태로부터,일보 더 전진하여 본령을 중심으로 집중성을 지닌 영역지배를 하기에 이르렀다.고쿠진은 장원영주와 농민층의 대립에 개입하고 대관직이나 업무직등을 떠맡는 경우도 생겨났다.고쿠진영주의 영역지배는 그 이전의 재지영주에 비해서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가 확고했다.검지에 대해 고쿠진들이 연합해서 저항한 것이 그 한예이다. 고쿠진은 슈고나 장원영주등의 지배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피관이 되거나해서 반종속적으로 그 지배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자신의 영역내의 농민층의 상층신분인 지자무라이를 피관화는 것을 통해서 얻은 강력한 군사력이나 인접 고쿠진과 제휴를 배경으로 해서 지배세력에게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다.남북조시대로 부터 무로마치시대에 걸쳐서 자주 일어난 쿠니잇키(쿠니잇키=고쿠진영주들의 연합)는 형태나 그 모양은 제각기이지만 고쿠진영주들의 결합이라고 볼수있다.<끝> |
4.결-에도시대:이에야스의 열매수확방식이 성공한 것으로 지방분권의 막번체제로 완성된 시대로 이 시대는 2번 승의 가마쿠라체제의 근세적 변형,변주곡 정도로 비유하면 맞다고 봅니다.3번 전의 300여년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체제안정을 기했다는데, 이 에도시대는 그 역사적 ,문화적 의의를 충분히 다했다고 보나,제 자신은 이 시대에 대해서 특별한 참신성과 어떤 역사적 진보성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냥 그런대로 안정되서 좋았다고 보려나요^^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봅니다.
이제까지 서술한 내용도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의 전개(다만 일본 전국시대를 300년으로 본다는 정도가 저의 엉뚱하고 대담한? 생각정도로 봅니다만)여서 이하 글쓰기가 조금 쑥스럽습니다만,제가 평소 갖는 의문이랄까 해답은 가마쿠라 막부 탄생이나 일본 전국시대의 탄생(즉 1281년 고안전쟁후 1300년도를 그 기점으로 보고서)의 근본 원인이랄까 그 기원은 바로 일본 경제사적 관점에서 봤을때 토지 생산력의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비롯되지 않았나 싶고요,이러한 토지생산력의 변화에 맞추어서 가마쿠라 막부는 그에 조응하는 권력시스템이 일정부분 잘 작동했으나(직접적으로 명시하면 새로운 토지소유영주들의 이해를 잘 반영하고 그들의 토지를 안도시켜주는 시스템이 그런대로 잘 작동했다고 보나) 무로마치 막부는 새로운 토지생산력과 더불어 새로이 탄생된 신흥 무사계층인 고쿠진 비롯 숱한 소영주들의 이해를 합리적으로 체제내로 포섭,통합할수 없었다는데서 그 체제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노정시키면서 근 270년 동안 일본역사를 전국동란의 시대로 빠져 들게 했다는 것입니다.한국역사, 경제사도 잘 모르는데 일본역사,특히 무가시대를 경제사적 관점에서 더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저의 능력밖의 엉뚱한 서술이 될까봐 더 이상의 전개는 중단 합니다만,단 한 가지 베버가 자본주의라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제도 형태를 오로지 그 정신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면서,이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점과 그들 종교의 경제윤리가 동서 문명의 보편사적인 흐름을 갈랐다고 (물론 이 종교적 세계관 하나로 갈렸다고 베버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고,어느 일면을 강조해서 봤을때 그렇다는 것이며 그 동서문명의 분기점의 다양성은 여러각도에서 해명 가능하다고 봅니다만)본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일본 무가시대는 역사유물론적인 견지에서 경제사(토지제도사 포함))에 촛점을 두고 봤을때 더 확연히 우리의 이해하는 머리에 명석히 그 상을 그릴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뭔가 더 쓰고 싶고 아쉽지만, 제 공부와 생각의 한계로 이 정도에서 멈추는게 현명할듯 싶습니다.
글 최종 마무리는 일본 근대사로 와서 몇가지 제 생각의 단편을 적어 봅니다.역사는 돌고 돌아 일본 근대사는 저는 고대천황공가시대를 천황관료시대로 탈바꿈 시켰다고 보는데요,여기서,공가,무가는 탈각되고 사라졌지만,역사는 반드시 그 뒷 시대에 흔적을 남기고 억압되었던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고 봤을때,일본 근대사에서 결코 간과할수 없는 부분이 바로 천황제(이데올로기 포함)에 충군애국이라는 사무라이 정신(기실은 권력 지배층의 통치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명치유신후 지속적으로 이용되어 왔다고 봄)이 다시 결합되었을때 일본 역사는 어떤 길로 갈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겁니다.이 말의 배경에는 바로 메이지 유신후 1889년 제국헌법이 제정될때 아주 중요한 아킬레스건이 있는데,바로 군부 권력을 천황제 직속의 권력기관으로 독립시켰다는 것입니다.즉 제국헌법하에서 군대는 내각의 권한이나 지휘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황 직속의 독립된 헌법기관이었고, 바로 이 중대결함이 바로 일본 군부의,나아가서 일본 전체의 군국주의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며,문민내각이 근본적으로 이들 군부의 모험주의적 책동에 제동을 걸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천황은 상징권력이고 군대(현재까지는 자위대이지만)는 현 일본 내각총리의 권한하에 있지만,만일 역사의 반복적인 힘을 믿는다면, 일본 극우익이 정상국가론을 부르짖으며,신헌법 9조를 개정하면서 군대를 천황과 내각수반의 지휘권 안으로 이중 권력상태로 만든다면,이러한 사태는 언제든지 사무라이정신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일본이 다시한번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군국주의의 길을 걷는 것을 막을 수없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내각과 군부는(정상국가화되어 자위대가 군대로 변경된 뒤를 말함)같이 합작하여 천황을 다시 현실무대로 끌어내어(끌어낼 필요도 없이 천황이 반대하지 않으면 승인으로 해석하면 그만이지요^^) 충군애국사상의 고취하에 신군국주의 길을 걷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법에서 풀려난 여러 귀신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설마 그러겠어가 사람 잡는다는 것입니다.왜 이런 쓸떼없는 노파심의 생각을 저는 계속 안할수 없는 이유가 바로 천년이라는 무가시대가 일본역사에 드리운 암영을 걷어낼수 없다는 사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일본은 사무라이 나라니까 싸움 좋아하고 그리고 생명을 경시하는 야만의 나라라서 걱정된다는 게 아니고요,제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문민통제를 받지 않는 권력이 바로 무가권력이라는 것이며,바로 그런 역사를 일본은 천년이나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 바로 저에게 하나의 역사의 교훈이랄까 시사점을 준다는 것입니다.일본 군부는 쇼와 시대에도 그 전례가 있지만 문민내각은 통제를 받지 않는 군부책동을 저지하지 못했고, 작금의 현대에도 재 반복될 공산이 크며, 이는 모두 문민권력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무가시대라는 역사적 경험을 일본은 길게는 1000년 짧게는 700년동안 가졌다는 것입니다.제가 일본 무가시대를 보는 최종 포인트가 비로소 드러났습니다만,바로 천황지배하에 있지만 천황통제에서도 벗어날수 있고, 문민권력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며,이를 처음부터 무시하며,문민권력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이 오히려 생소하게 와닿는 그런 무가시대가 일본은 어떻게 지속 가능할 수 있었는가와 그게 지금의 현재 일본역사에 어떤 함의를 갖는 가가 기실은 제가 일본 무가시대를 관심있게 바라보는 저의 최종 관점 포인트입니다.그럼 오로지 남는 문제는 무가권력,또는 군사력,군부는 문민권력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의 정당성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고 묻는다면......항상 그래야만 합니까??여기서 갑자기 1970년 일본 자위대 옥상에서 궐기하며 자결한 미시마 유키오가 생각나는 건 뭘까요??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1970년 11월 25일, 왕년의 우국열사 에토 고자부로(江藤小三郞)의 자결에 자극받아 다테노카이 대원 네 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市ヶ谷) 주둔지(지금의 일본 방위성防衛省 본성)를 찾아가 동부방면총감(東部方面総監)을 감금하고, 막료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사무실 앞에서 발코니 연설로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연설을 하고는 5분 뒤에 할복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우익(新右翼)이라 불리는 우익 세력이 생겨나게 하는등 그후 일본 국내의 정치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위키자료로 좀더 보충한다면,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자위대의 쿠데타 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한 뒤 약 5분 후 모리타 마사카쓰(##미시마 유키오의 주장 중에서 현 아베정권하에서 다 이루어지고, 남은 것 하나는 자위대의 군대로의 명칭변경과 그 쿠데타 하나만 남은것 같네요!!그러기 전에 헌법 제 9조의 개정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