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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노사의 굴욕이란 하인리히 4세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눈 내리는 겨울에 카노사라는 성으로 교황을 찾아와 용서를 빈 사건이다. 무려 사흘낮 사흘밤을 눈밭에 맨발로 빌었다고 해서 화제이고, 그 사건을 계기로 교황이 군주권보다도 우위인 교황권을 수립하게 됐다고해서 의미가 있다.
아래 사진은 카노사의 성의 모습이다. 노사 성은 이탈리아 중북부의 레지오 넬 에밀리아라는 도시에서 남쪽으로 50㎞쯤 떨어져 있다. 스파게티를 시키면 갖다 주는 눈가루같은 치즈, 파머산 치즈의 원산지인 파르마와 시 정부가 100% 미취학 아동의 보육 탁아를 책임지는 도시 볼로냐의 중간에 있다.
레지오 넬 에밀리아에서 꼬불꼬불 길을 올라가니 산 꼭대기 부서진 성터가 나타났다. 입구에서부터 황제가 교황의 무릎을 부여잡고 있는 부조가 새겨진 돌 안내판이 인상적이다. 산꼭대기 폐성 부지에 올라서니 4-5 가구가 농사지으며 살고 있고 무료 박물관이 하나 있었다. 박물관을 지키는 직원은 무조건 “노 포토”를 연발한다 . 박물관 안을 둘러보니 대부분 사진 인쇄물이거나 돌, 쇠의 파편들이다. 하인리히 4세가 맨발에 검정 장포를 입고, 팔짱 낀 손 중 오른 손으로는 턱을 어루만지며 내려다 보는 인물의 사진이 있다. 가로 3m 세로 5m쯤의 이 타피스트리는 눈빛의 강렬함으로 실제 크기보다 훨씬 커보인다. 박물관 입구의 문 위에 걸려 있다.
눈빛과 몸짓은 결코 패배자의 것이 아니다. 앙심을 먹고 속으로 으르렁대는 표범의 것에 가깝다. 폐부를 찌르는 눈빛이라고 하면 보는 이에 따라 미화한 것이랄 수 있고, 서늘하면서도 폭풍같은 눈빛이라면 대체로 수긍할 수 있을 정도다. 그때 하인리히 4세의 나이 27세였다. 무엇이 27세의 젊은 군주로 하여금 이런 눈빛을 갖게 할 수 있었을까. 하인리히 4세의 인생 역정은 오늘날 보통사람들의 삶에 비하면 극적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는 6세 때 황제가 되었고 12세 때 쾰른의 대주교에게 납치된 기억의 소유자다. 16세에 결혼했고 19살에는 이혼하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해야 했다. 27세에는 눈밭에서 교황에게 사흘을 비는 치욕을 겪었고 42세에는 아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43세에는 두 번째 부인의 고발에 직면했다. 예수는 서른세살에 지상에서 할 일을 다 했고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17세에 이미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을 다 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는 19세가 기량이나 명성에서 최정상이었다.
하인리히 4세를 연예인에 비교하면 6세에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탤런트가 되고 12세에는 촬영장에서 지독한 스토커 사건을 겪고, 19세에는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파경에 이른 사람쯤 되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라면 27세에는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른 눈빛을 가질 만하다. 곤욕스런 환경이 주는 난처함을 바탕색으로 추종자를 거느린 자의 당당함이 채색된 눈빛 말이다.
사의 굴육이 있던 당시의 독일, 이탈리아를 중국에 비하면,춘추 전국시대였다. 장군이 왕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에 대들고 자신의 딸을 적에게 시집보내는, 전형적인 난세였다. 이 와중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숱한 제후들로 구성된 독일에서의 왕권 확립보다 이탈리아 경영, 교황청 길들이기가 주된 국정 목표였다.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는 교황청의 개혁파와 손잡고 역대 교황을 친(親)독일파로 키워낸, 이 국정 목표에 비교적 성공한 군주였다. 아들 하인리히 4세에게도 이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로마의 추기경들과 독일의 대주교, 귀족들이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를 갖고 있기에 그는 로마 사업에서 성공해야 독일 경영도 순조롭게 해낼 수 있는 처지였다. 문제는 하인리히 4세가 끊임없는 정복욕, 영역 확장욕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1077년의 최대 쟁점은 사제 서임권에서 비롯됐다. 교황은 이론적으로 전체 카톨릭의 성직자 임명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독일 황제, 프랑스 왕이 자기 나라에서의 성직자 임명시 황제나 왕이 보내는 성직의 권위 상징물을 수여하곤 했다. 한국 식으로 얘기하면 사제 임명시 ‘손때를 묻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사제나 고위 성직자 임명시 군주들이 적당한 비토권도 행사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하인리히 4세는 통치 초반 교황청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사제 서임권을 군주들이 포기하는 것이 교회 개혁에 부합된다’고 주장했다. 이십대 후반 들어 작센인들의 반란을 제압하고 제법 통치 기반이 강화되자 이걸 회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리 그 즈음이 상황 변경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난세라 할지라도 몇 년 새 한 입 가지고 두말 하니 여론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립각의 맞은 편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있다. 카노사의 굴욕이 있던 1077년 당시 57세, 교황 즉위 5년차의 원숙한 나이, 적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 또한 독특한 사람이다. 당시 세상은 교황이 황제같고 황제가 교황같은, 즉 성직자중 최고위인 교황이라 할지라도 세속적 경영자, 장군, 권력자의 면모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 즈음 대부분이었던 정치형 교황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형 교황이었다. 이 점이 양자간 파국 관계를 이해하는 주요한 대목이다. 어찌 보면 기껏 독일 한 나라 안에서의 사제 서임권 문제였는데 정치가형 교황이었으면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었을 문제를 원리원칙적, 교조적 교황이 있었기에 대 충돌로 가지 않았나 싶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총명함을 일찍 인정받아 사제로 양성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제자였고 나중에 교황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그레고리우스 6세가 폐위돼 독일로 유폐되자 따라갔다가 후임 교황의 명을 받고 귀국했다. 바티칸에서는 교회 개혁 운동을 이끄는 단체를 지휘하다가 1073년 교황에 축성되었다. 총명하고 의리있고 조직력도 있는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 신학자, 목회자, 수도자적 면모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다. 사제 서임권 문제를 놓고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자 이탈리아와 독일 전역은 황제당, 교황당으로 나뉘어 국론이 들끓었다. 이탈리아에도 황제당이 있었고 독일에도 교황당이 있었다. 이 구분은 몇십년 쯤 뒤에는 아예 정식으로 구엘프 (Guelf, 교황당) 와 기벨린(Ghibelline, 황제당)이라는 호칭까지 따라붙는 대립으로 번져간다. 대립이 가장 첨예한 지역은 교황과 황제의 영향권 중간 지점인 북 이탈리아의 밀라노였다. 양파에서 암살과 습격이 잇따랐다. 이 와중에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에 파견한 고문단 5명을 파문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종교적 공민권의 박탈 조치다. 파문 당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반역과 살인을 합법화해주는 선언이다.
교황은 한편으로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성직임명권 문제에 대한 협상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대체로 관용적인 성격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시내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 귀족 젊은이도 용서한 일이 있었다.
하인리히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막 국내 반란을 진압하고 황제 취임 후 처음으로 기가 살아난 젊은 권력자는 더 강공으로 나갔다. 독일의 주교들과 이탈리아 북부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1076년 로마에서 열린 교회회의에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편지를 보냈다.
"찬탈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하인리히는 이제 교황이 아닌 가짜 수사 힐데브란트에게 보내노라……"
회의장은 한 순간 가마솥처럼 끓기 시작했다. 교황은 주교들의 면전에서 공개 모욕을 당했다. 그것도 30년 연하의 황제로부터. 그는 퇴로가 없었다. 황제는 이렇게 해서 파문됐다. 막상 교황이 파문을 내리자 독일 국내 정세가 돌변했다. 야심에 찬 귀족들은 공공연히 새 황제 추대 운동에 들어갔다. 황제권은 아직 고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귀족들은 교황에게 파발을 띄웠다.
새 황제를 선출할 전체 귀족 회의를 할 계획이니 몇월 몇일 아우구스부르그로 와주십사 하는.교황이 참석 방침을 정했다는 소식에 황제 하인리히는 착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교황에게 비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몇몇 시종만 데리고 로마로 향했다. 가서 빌면 잘 될 것이란 믿음보다, 이 길 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주변을 에워쌌다. 상황은 교황도 편치 않았다. 아우구스부르그 회의 참석차 알프스를 넘을 계획이었으나 먼저 건 전령에 따르면 독일 귀족들이 약속했던 호위병은 보이지 않았다. 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하인리히가 남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로마를 떠난 교황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급히 카노사의 성으로 향했다. 1076년 12월부터 1077년 정월까지의 일이다. 여기서 카노사의 굴욕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카노사 성의 주인이자 지금의 피렌체까지를 아우르는 토스카니 지방의 영주 마틸다. 당년 33세의 이혼녀, 아버지 때부터 교황파였으며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 꿇는 사건을 잘 마무리해 훗날 교황청이 있는 성베드로 성당에 안치되는, 미모의 여성이다.
미틸다와 클루니 수도원장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로 했다. 교황이 먼저 도착해 황제를 기다리는 사이 황제는 공손하게 용서를 빈다는 시나리오가 작성됐다. 교황은 난처했다. 황제를 폐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러 가는 길에 황제가 들이닥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일 일은 아니었다. 미탈다는 이렇게 설득했다. 정치가 아닌 사제의 입장에서 회개한 탕아를 용서하시라고. 사절이 양쪽을 번갈아 오가고 황제는 약속대로 정월초 카노사에 도착해 사흘낮 사흘밤을 맨발로 눈밭에서 용서를 빌었다. 교황은 이를 받아들였다. 카노사 박물관의 하인리히 4세 타피스트리는 그런 정세를 읽은 공인이 만든 것이다. 두 사람은 명분과 실리를 각각 나눠 가졌다. 교황청은 유럽 여러 나라 군주중 서열 1위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무릎꿇고 빌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그뒤 수백년간 교권과 왕권이 충돌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처절하게 용서를 빈 점을 강조했다.
황제 하인리히는 실리를 취했다.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귀족들을 각개격파하고 몇 년 뒤 역으로 새 교황을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교체했다. 교황 그레고리는 결국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타계했다. 교회에 수백년 통용될 엄청난 정치적 승리를 가져온 이 수도사 기질의 교황은 개인적으로는 승리의 과실보다 가시에 찔려 임종했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여기 망명지에서 죽는다.” 그의 유언이다. 하인리히도 뒤끝이 좋지 않았다. 일시적 위기도 넘기고 원수도 갚았으나 귀족들이 그의 아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56세를 일기로 내전의 흙먼지 속에서 사망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알지도 못했지만 이를 몸으로 실천했다. 잘생기고 키가 크고 학자와 문인을 존중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평생 싸우는 일로 날을 지새운, 전쟁 기계로 살다가 생을 마친 황제로 남아 있다.
카노사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이미 황혼이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황제의 말년, 그도 한번쯤 자기 인생을 돌아보았을 법 한데 무엇이 가장 생각났을까. 기록에 의하면 그는 여섯 살에 즉위해 체계적인 교육도 못받았으며, 어린 시절의 납치, 교황과의 치욕과 복수, 아들의 반란을 가장 마음아파했다고 한다. |
참고
네이버 블로그 http:// blog.naver.com/kjion159 참고
김진웅외 , 『서양사의 이해』, 서울:2004, 학지사.
E.M. 번즈 『서양문명의 역사』, 서울:2000,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