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 이미화
4419번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성남으로 달려가면
웬만큼 가서는 쉽게 닿지 않을 것 같은 먼 곳에
'선한 목자 교회'가 우뚝 서있다
그 곳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대치동을 지나 개포중학교를 지나고 수서역에서 커브를 돌아야 한다.
커브길을 돌면 멀리 사막의 어디쯤처럼 선한 목자 교회가 나오는데
지친 퇴근길엔 먼 거리를 재다가 졸기도 한다
운 좋으면 라일락 향기
어둑한 밤 공기
'경찰은 여러분과 가까이 있습니다'
외진 길에서 손들어 버스를 세우는 여자
가로수
먼 곳에 서있던 선한 목자 교회가
벌써 내 뒤에 있다
내 앞에 먼 곳을 지나
어느새 가까운 곳
다시 먼 곳이 된다
우리는 어디를 가기 위해 중간 어딘가에 좌표를 정하곤 합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은 좌표 지점까지 매우 구체적입니다. 선한 목자 교회까지 가려면 "4419번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성남" 방향으로 달려 "대치동을 지나 개포중학교를 지나고 수서역에서 커브를 돌아야 한다./ 커브길을 돌면 멀리 사막의 어디쯤처럼 선한 목자 교회가" 나오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곳까지 가는 동안 그곳을 잊기 일쑤입니다. "지친 퇴근길엔 먼 거리를 재다가 졸기도" 하여 지나치고, 때로는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다른 재미를 느끼다가 지나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운 좋으면 라일락 향기"에 취하여 있다가, 아니면 그저 "어둑한 밤 공기"를 느끼다가, 아니면 "경찰은 여러분과 가까이 있습니다"는 간판을 새삼스럽게 보다가, 아니면 "외진 길에서 손들어 버스를 세우는 여자"의 심경을 따라가다가, 아니면 창밖에 서 있는 "가로수"를 무연한 마음으로 보다가 지나칩니다. 지나치고 나서야 "먼 곳에 서있던 선한 목자 교회가/ 벌써 내 뒤에 있다"고 떠올립니다. 이런 묘함이 길 위에서 반복됩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왜 길 위의 중간 좌표를 깜박깜박 잊게 되는가? 저는 그 이유를, 길 위에 있는 내가 끊임없이 변하는 것에서 찾고 싶습니다. 인생의 길 위에서,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길 위에서, 집까지 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존재이고, 길은 과정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먼 곳'으로 설정된 '선한 목자 교회'였지만 도중에는 '먼 곳'이 아니게 되고 좌표로서의 역할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중에는 다른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좌표란 '지금-여기'서 멀리 보며 설정한 것이지만, 실제로 거기까지 가는 것은 항상 '지금-여기'의 연속으로만 주어진다는 사실도 좌표를 잊게 하는 원인입니다. 왜냐하면 '먼 곳'을 바라 볼 때 중요성이 '지금-여기'의 연속으로 확보되는 과정에서는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는 '지금-여기'에 의해 좌표의 의미가 상실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좌표란 길의 확실성을 보장해 주는 무엇일 수 없고, 그로 하여 쉽게 지나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좌표는 "내 앞에 먼 곳을 지나/ 어느새 가까운 곳/ 다시 먼 곳이 된다"고 말합니다. 결국 생이라는 길 위에서의 좌표는 확실성의 근거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 확실성에 '집착하고-잃고'를 반복합니다. 생의 매순간이 그렇지 않음을 가르쳐주는데도, 묘하게 지나쳐간다고 매번 가르쳐주는데도,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항상 '지금-여기'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생생한 삶이라고 말하는데도 말입니다. 먼 곳은 늘 먼 곳이 아닙니다. 좌표도 늘 같을 수 없습니다.
-글/ 오철수 시인
첫댓글 저도 아시키덜에게 틈만 나면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고 눈을 부라리곤 합니다. 뽀리는 연애해서 좋겠당.^^
시보다 선생님 평이 정말 재밌어요. 학원에서 집까지 가는 길 중간 쯤에 '선한 목자 교회'가 있어요. 선한 목자 교회부터 성남이 시작되는 곳이라 거기까지 가면 집에 거의 다 간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거든요. 집까지 거리도 눈에 보이는 듯하구요. 근데 막상 선한 목자 교회까지 가면 그곳에 왔다는 걸 모르고 정신차려보면 어느새 지나쳐 있더라구요. 그래서 쓴 시인데 오래된 시네요.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시, 감동적이고 다시 생각나는 시 쓰기 위해 노력하겠어요^^
사랑하면 보이는 게 참 많아요. 물론 보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워낙 성장을 위해 그다지 필요 없는 것들이에요. 그러니 열나 사랑해요. 거기에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들도 쑥쑥 자라나거든요^^
아련한 그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지금-여기'에 의해 좌표의 의미가 상실되는 말씀에도 또,,,,, .^^
시 읽고 시평읽고 다시 시 읽기를 반복하다보니 내가 버스를타고 가는 느낌이 드네요.좌표는 확실성의 근거가 아니다라는 말씀 늘 지금-여기에서..저도 다시한번 새깁니다.그런디 보리가 연애를..더 이뻐졌겠네^^
그 확실성에 집착하고 잃고를 반복한다는 말씀이 와닿네요. 한 단어에 들어 있는 많은 의미들을 단단히 곱씹어야겠습니다. 삶의 철학이 그래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삶에 대한 사랑>은 패러다임을 바꿔요. 그래서 모든 면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시선과 체험의 시를 쓰게 하죠. 예전에 누군가가 그렇게 묻습디다. 삶에 대한 사랑을 말하면 모든 시가 <삶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겠냐고>. 이는 형편없는 이해입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을 <삶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 것으로 오해하다니>. 저는 요즘 이곳에서 생산되는 작품에 많은 기대와 희망을 엿봅니다. 선구적 행위로 값진 시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니 젊은 것들은 더욱 치열하게 문학투쟁의 모양을 만들어나아가야 해요.
지금-여기, 아모르에 충실하다보니 이렇게 좋은 시가 나오는군요. 저희들도 덩달아 미화님으로 인해 큰 깨달음 얻습니다.
내밀한 눈을 가진 막내 보리. 어느새 가까운 곳 먼 곳이 되네.
그렇지요? 나는 좀더 모험적이고 좀더 멀리나가고 좀더 다부지게 싸워서 한계를 넓히는 삶에 대한 사랑이 쏟아졌으면 좋겠는데.....좋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고거이 예쁘기만 해서 쬐금 걱정^^
시가 곧 시인이다 란 말에 많이 긍정해왔던 편입니다. 보리의 시 = 이미화 .. 수긍하다가도 시를 들여다보면 조금 헷갈려요. 실은 칭찬입니다 ^^
저도 이제 시를 제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에... 시 속에 내 삶이 내 실천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얼마전에 거의 10년을 시나리오에 응모했는데 떨어져서 '난 뭔가?'하는 허무에 빠졌는 친구와 그런 이야길 했어요. 우리 이젠 뭔가를 쓴다고 할 때 정성을 다해 쓰자고 했어요. 무엇보다 아모르의 정신에 감동 받았을 뿐, 그 뿐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