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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산 위에 (요19:17-22절)
신, 구약 성경은 구속사를 산을 통하여 계시하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정착한 아라랏 산은 약속의 산이었습니다. 노아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무지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나타나면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 것이라는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친 모리아 산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시는 여호와이레 계시의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주실 때 이미 어린 양을 준비하셨으며 그 희생의 산에서 친히 준비하신 양을 잡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도착한 시내산은 율법 계시의 산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율법을 받은 백성들은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를 뿌리며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변화산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이 힘을 얻으신 산이었습니다. 인성의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를 통하여, 그리고 아버지의 격려를 통하여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주님의 발걸음은 제자들보다 앞서 가시는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 산은 아라랏 산보다, 시내 산보다, 모리아 산보다, 변화 산보다 영적으로 더 높은 산입니다. 갈보리 산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왜냐하면 이 산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산에서 하나님과 범죄 한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졌습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본문에는 어리석은 백성들에 의해 십자가의 굴욕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본디오 빌라도는 주님의 죄 없으신 것을 알고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요19:14-16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보라 너희 왕이로다.’
빌라도의 조롱과 야유가 섞인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에게 조종된 많은 군중들은 그리스도를 석방하려는 빌라도의 의지를 꺾고 예수를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마지막으로 유대인의 굴욕감에 호소를 합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이 말은 유대인의 왕을 로마의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수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너무나 기가 막히는 말이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 대답이 단순한 유대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놀랍고 황당해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상식은 자신들의 왕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삿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대제사장들이 로마 황제 외에는 그들의 왕권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권 아래에 있는 선민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의 죄가 자기에게 형을 집행하는 자의 죄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요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실 때 그를 좇던 수많은 무리들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제는 온통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원수들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하였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내렸으며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요19: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이 말은 참으로 의미가 심장한 말입니다. ‘파렐라본’ 이라는 이 말은 요한복음 1장 11절에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라는 뜻으로 쓰였던 말로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던 그들이 그를 처형하기 위해서는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영접’이라는 말은 ‘손님을 맞아 대접한다.’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맞아 ‘주’로 대접하기보다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기 위해 죄인으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배반을 당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셨습니다.
그 무섭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주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누르는 무거운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참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라고 불리는 길을 따라 ‘해골’ 이라는 곳까지 가셨는데 이곳은 히브리말로 ‘골고다’ 헬라말로는 ‘크라니온’ 라틴어로는 ‘갈바리아’라고 불리는 곳으로 그 뜻은 다같이 ‘해골’ 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갈보리 산’ 이라고 부르는 것은 로마인들이 사용하는 라틴어를 따라 ‘갈바리아’를 ‘갈보리’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해골’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가장 선하신 분이 가장 악한 인간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네 가지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속죄자 예수를 생각합니다.
‘속죄’라는 말은 구약에서 약 100번 가까이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푸림’ 혹은 ‘카파르’ 라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덮다’ 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잠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또 ‘허물을 사하다.’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사6: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단 한 번 사용되었으나 그 뜻은 동일하였습니다.
*롬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러므로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도록 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속죄는 보통 어떤 동물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속죄는 돈을 지불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돈을 지불하는 것을 속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인자와 진리 또는 지혜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잠16:14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속죄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의 생명이 요구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삼 년의 기근이 발생하자 다윗이 여호와께 간구하였더니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그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잡아 그들에게 넘겨서 보리 베는 시기에 여호와 앞에 목을 메달아 죽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구속사에서 반드시 피를 흘림으로써 속죄하는 것은 특히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사람이 그 값을 지불해야만 해결된다고 예언되었습니다.
*사2: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리고 사람이 치러야 할 그 값을 오실 메시야 그 분이 대신 감당하신다는 것입니다.
*단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마틴 루터가 그리스도의 갈보리를 ‘하나님의 낚시’ 에 비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고기를 낚는 어부로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날카로운 낚시를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졌습니다. 거창한 고기 사탄이 낚시 바늘에 달린 미끼를 꿀꺽 삼켰습니다.
미끼를 삼킨 사탄이 뒤늦게 발견할 것은 속절없이 낚시에 낚여 버린 자신이었습니다.
루터가 전개한 비유는 시편 22장 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시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그리스도를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미끼 즉 벌레에 비유한 것입니다. 루터의 인상적인 비유가 좀 잔인한 것 같지만 갈보리의 그 날은 결코 맑고 고요한 날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두운 전쟁의 밤이었습니다. 우주의 미래의 운명이 달려있는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처참한 전쟁인가를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호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2. 대속자 예수를 생각합니다.
속량이라는 말의 원래의 뜻 자체가 값을 지불하고 건져 낸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노예로 팔렸으면 그는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팔려온 값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노예를 다시 사서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근족이라야 합니다.
모압 땅에 갔다가 남편과 아들을 다 잃고 빈손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을 위하여 땅 값을 다 지불하고 룻의 속량자가 된 사람은 근족인 보아스였습니다.
*룻2: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가 속량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은 것이 아니라 흠 없는 그리스도의 보혈이라.’ 고 하였습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속량의 값은 돈이 아니요, 짐승도 아니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속량 받은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자동차로 여행을 떠났는데 벌 한 마리가 창문을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아들을 날아다니는 벌을 보고 질겁을 합니다. 아들이 벌에 쏘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아버지는 천천히 벌을 손에 잡아서 쥐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잠시 있다가 그 벌을 다시 놓아 주었습니다. 벌은 살았다 싶어 다시 차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아들이 또 야단이 났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겁낼 것 없어, 내 손바닥을 보아라. 벌침이 여기 있지 아니하냐.’ 라고 하면서 벌에 쏘인 자기 손바닥을 보여 주었습니다. 침이 빠져버린 벌은 더 이상 아들에게 위협의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죽음의 침과 사망의 독소를 제거해 버렸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은 죄책이 있고, 아직은 사탄의 핍박과 유혹과 시험이 있어도 갈보리 그림자 안에 살기에 죄가 우리를 망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망이 다시는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때에 있었던 이야기로 ‘콰이강의 다리’ 라는 감동적인 책과 영화가 있습니다.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영국 군대가 콰이강 강물 위에 기차선로 건설 작업에 동원이 되었습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도구 조사를 하던 일본 헌병이 화가 불같이 났습니다. 공사용 삽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삽을 숨겨서 태국 군에게 팔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악한 짓이야 말로 목숨을 살려준 일본 천황 폐하께 불경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 군인들을 연병장에 모두 모아 놓고 삽을 팔아먹은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호령했으나 한 사람도 걸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분노하는 헌병은 마치 원수들을 대하듯 미친 사람처럼 빼든 권총에 장탄을 하고는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 헌병은 맨 앞줄에 있는 한 사람을 겨냥하고 총을 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영국군은 일제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긴장 속에서 누군가가 ‘내가 했습니다.’ 라고 나직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헌병은 그 군인을 욕하고 침을 뱉고 발로 차다가 총구로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군인을 다시 높이 들었다가 땅 바닥에 내려쳤는데 그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는 끝내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시신을 메고 막사로 돌아온 영국 군인이 공사용 도구를 헤아려 보니 잃어버린 삽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본 헌병이 잘 못 헤아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15:13-1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삽을 숨겼거나 팔아먹은 적이 없는 죄 없는 군인이 동료 군인들을 모두 살리려고 걸어 나온 그 한 걸음이야말로 희생의 걸음이요 주님을 따라가는 대속의 모습이었습니다.
3. 사죄자 예수를 생각합니다.
갈보리 산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와 가까운 사람들, 죽음을 음모한 사람들, 그리고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수의 좌우에는 강도 두 사람이 달려 있었습니다.
*요19: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그리스도께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은 그에 대한 불경이요,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강도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장 흉악한 죄인인 것처럼 한 가운데에 세웠습니다. 마치 강도들의 두목과 같은 모습으로 그를 처형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그리스도를 더욱 욕되게 하려는 악한 의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노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 모욕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자신의 결점이나 잘못을 조금이라도 들추기만 하면 가차 없이 분노하는 우리들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분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강도 중 하나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말을 합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계시던 주님이 얼굴을 들고 그 강도를 바라보면서 ‘아멘,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강도는 죄인입니다. 거기에 그의 소원인 기도마저 불완전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그리스도도 아니고,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그저 단순히 ‘예수여’ 라고 불렀으며 실낙원의 인생이 낙원을 말해야 하겠는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통치가 있는 ‘당신의 왕국’ 이라고 했으며, 지금 당장 살아야 하겠는데 예수의 나라가 임할 내일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강도의 기도를 고쳐주시기까지 하시면서 사죄하시고, 낙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강도의 이슈(issue)는 죄가 아닙니다. 갈보리 산에서 죄의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이슈는 용서입니다. 사죄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한 젊은 피고인에게 판사가 거금의 벌금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그 벌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실형을 살게 되었습니다. 법정 구속이 집행되려는 순간 판결을 맡았던 판사가 재판석에서 내려와 실형 집행관에게 젊은이를 대신하여 거금의 벌금을 모두 납부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곧 풀려났고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죄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판결을 내리고 또 그 값을 지불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농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사과나무들이 약한 가을바람에 모두 쓰러졌습니다. 실망스럽게 생각한 농부가 쓰러진 나무들을 뽑아보니 벌레가 나무뿌리를 갉아먹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태풍이 아닌 가을바람에도 열매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그 나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열매는 모으고 나무를 불태우겠다.’
그리스도의 사죄를 받은 사람은 저 농부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열매는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와 죄책을 모두 불살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죄가 얼마나 좋았기에 다윗은 그것을 자신의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시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 유대인의 왕 예수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명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빌라도가 그리스도의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은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조롱함으로 예수를 모욕하고 자신에게 예수를 처형하도록 강요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유대인들이 품어왔던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좌절을 맛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패에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유대인의 왕임을 선포하려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의 왕임을 알리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죄 패를 3개 국어로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요19: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되었더라.
이 세 나라의 언어는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히브리어는 유대어로서 종교를 대변하는 것이었으며 로마어는 세계에 통용하던 공적인 언어였으며, 헬라어는 문학적인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화나 영화에서 잘 볼 수 있는 십자가상의 ‘INRI' 라는 글자는 라틴어로서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즉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임을 온 세상에 퍼뜨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로서 예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세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 일 때문에 제사장들은 크게 망신을 당하였습니다.
*요19:21-22 유대인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악의에 가득 찬 대제사장들의 요구는 빌라도에 의해 무참히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의 부당함을 합리화 하려는 그들의 완악한 요구를 하나님은 허락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이름까지 못 박으려는 그들의 요구는 오히려 그들에게 모욕과 망신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위선으로 가장한 악한 의도는 결국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대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보리 산은 우리가 날마다 등산해야 할 산입니다. 거기에는 세속의 오염도 없고 인간의 오염도, 생각과 말의 오염도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은 신선한 소망과 확신으로 가득 찹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를 다시 살리는 새 힘과 새로운 능력을 받습니다. 갈보리는 값을 치르고 산 곳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부채도 없습니다. 이제는 파산자가 아니요, 당당한 권리를 가진 천국의 시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실력입니다. 이기고 승리한 승전의 자리입니다. 거기만이 우리가 새롭게 살아갈 수 있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노아가 올랐던 아라랏 산도, 아브라함이 올랐던 모리아 산도, 모세가 올랐던 시내 산도, 모두 갈보리 산을 향하여 서 있습니다. 갈보리 산에는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항상 오르락내리락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을 맞이하여 갈보리 산으로 올라갑시다.
갈보리는 예수님이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소에 들어가시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저 갈보리 산으로, 언덕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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