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비하로 억지웃음… 인격 모독도
시청자들 "못생기면 무시해도 되나"
'이런 방송을 자꾸 보다 보면 못생긴 사람, 키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은 곧 웃기는 사람 또는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란 생각이 굳어질 것 같습니다.'(시청자 김진동)
'언제까지 외모지상주의로만 일관해야 하나요? 이젠 다양한 소재로 웃음을 주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싶습니다.'(시청자 이지연)
KBS 2TV '개그콘서트'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의견들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이 큰 논란을 일으키면서 각종 포털 사이트엔 'TV 속 외모지상주의를 없애자'는 서명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가장 많은 지적을 받고 있는 건 역시 개그 프로그램. 29일 사단법인 '밝은청소년지원센터'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방송 3사에서 방송한 개그 프로그램이 외모 비하 발언을 일삼는 코너는 매주 평균 5.5건. 개그나 코미디가 '외모'를 소재로 삼는 건 웃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곤 하지만 요즘엔 그 빈도나 정도가 심각한 인격 모독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
- ▲ KBS 2TV 개그 콘서트3
◆못생긴 여자에겐 침 뱉고 싶다?…개그 프로그램
은행원 정승원(42)씨는 매주 열심히 보던 개그 프로그램을 지난주부터 안 보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남자인 제가 봐도 못생긴 여자를 놀리는 걸 당연한 일처럼 묘사하더라고요. 여자 코미디언이 스스로 '제 얼굴은 발로 만들었어요'라고 말할 때도 있고…. 아이들이 혹시나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게 될까 걱정돼서 안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현재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 방송하는 '그냥 내비둬'는 아예 외모 비하를 소재로 삼은 프로그램. 뚱뚱한 여성과 근육질 남성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보던 두 남자가 뚱뚱한 여자를 향해 이런 말을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얼굴이 슈렉 같네", "얼굴에 악성 코드가 걸렸어" "침 뱉고 싶겠지…, 침 뱉고 싶겠어."
지난 21일 방송한 코너 '초고속 카메라'에선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남자의 속마음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보여줬다. 문에서 나오는 여자 동창생이 기대보다 예쁘지 않은 걸 보고 남자는 고개를 흔들고 몸을 떨며 괴로워한다.
지난 9월 27일 종영한 MBC TV '개그야' 역시 외모 비하로 끊임없이 억지웃음을 유발하다 외면당했던 프로그램. 드라마 '선덕여왕'을 패러디했던 코너 '선덕여왕'에선 출연자들이 "얼굴이 어떻게 그따위로 생겼습니까?" "사람은 이렇게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보기 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식의 대사로 일관했고, '미녀는 외로워'에선 날씬한 세 여자와 뚱뚱한 여자 하나를 놓고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얜 성형하면서 사람 됐고…." 식의 대사를 여과 없이 방송해 시청자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SBS TV '웃찾사'에선 지난 8월 "못생긴 여자는 없애야 한다"는 대사를 방송한 적도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측은 "지난 3~4월 지상파 방송 3사 코미디 프로그램을 분석한 결과 외모 비하가 지나쳐 '의견 제시' 형식으로 행정 지도를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며 "방송에서 성형수술을 해야만 여자가 예뻐질 수 있다는 식으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건 큰 문제"라고 밝혔다.
◆'평균'에 못 미치면 웃음거리가 된다?…개그 소재 다양화 시급
뚱뚱한 남자, 마른 남자, 키 작은 남자, 여성스러운 남자도 비웃음의 소재로 흔하게 사용된다. '개그콘서트' 코너 '달인'에선 개그맨 김병만이 진행을 하는 류담을 향해 "네 다리는 족발" "네가 먹는 건 돼지 사료" 같은 식의 농담을 대수롭지 않게 던진다. '봉숭아학당'에선 유난히 마른 몸매를 지닌 개그맨 한민관을 자주 시체나 해골, 난민에 비유한다. 시청자 윤유석씨는 "이렇게 외모 비하를 소재 삼아 웃음을 주는 개그 코너는 어찌 보면 '가장 슬픈 코너'"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내용을 반복해서 접하는 청소년들은 '웃음의 폭력성'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 '재미있다'고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밝은터청소년지원센터' 지정순 미디어 전문위원은 "20명의 청소년 모니터링단에 이 같은 프로그램을 처음 보여줬을 땐 그저 '재미있다' '문제점을 모르겠다'고만 대답했다"며 "개그 소재를 다양하게 하고, 차별적인 웃음을 소재로 삼는 걸 감시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