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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최초 한국인 이임학 박사
코리아미디어, 2001년 10월 1일
"조선말로 해주세요....... 조선말로 해 주세요... 조선말을 들으면 다시 생각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임학 박사(1922년 함남 함흥 출신)와 기자가 처음 통화한 내용이다. 그는 한국보다는 조선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나오는 한국이 일제시대로부터 해방전후 1940년 후반에 청년기를 보낸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1944년 경성제대 물리학과를 조선인으로 최초로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한국역사에서 1944∼1945년도는 일제치하에서 저항하던 이육사가 북경의 감옥에서 해방을 일년 앞두고 옥사했고 시인 윤동주가 옥사했던 한국사의 아픈시절이었다. 이임학박사 역시 국대안 반대로 서울대학교에서 나왔고 이 사건은 이임학교수를 해외에서 계속 연구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외국에 있는 대학에 편지만 하면 입학할 수 있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는 분의 도움으로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이후 UBC로 표기)과 연결되었고 그 학교에서 장학금을 준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후 미국의 다른학교들에서도 장학금을 줄테니 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한번 간다고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브리티쉬 칼럼비아 대학으로 갔습니다 " (대한수학회사 - 성지 출판사 1998년 인터뷰 전문)
그는 이런 이유로 1953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밴쿠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임학 박사는 그동안 연구자료를 구하기 힘들었던 한국과는 다르게 연구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구할수 있는 UBC에서 그는 왕성한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이 대학에 유학 왔을 때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그는 이미 미주지역 수학계에 논문을 발표한 한사람의 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1949년 어느날 남대문 근처를 지나다가 미군이 버린 쓰레기에서 발견한 미국의 수학지를 보고 조른(Zorn)이라는 유명한 수학자가 자기 연구 결과 중 중요한 한부분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한 것을 이임학 박사는 그 답을 발견해 조른(Zorn)에게 편지했고 조른(Zorn)은 그 편지를 받고 이것을 미국의 수학계에 이임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논문이 발표된 잡지는 미국수학회의 정기 학술지인 '불레틴 오브 어메리칸 매쓰매티컬 쏘사이어티(Bulletin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박사가 캐나다로 공부하려 왔을 때였다. 본인도 모르고 그 본인이 태어난 조국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이미 세계적인 수학자의 반열에 들어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 과학자가 최초로 해외에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박사의 서울대학교 제자이고 서울대학교 수학과 5회 졸업생인 김주환 박사(전 SFU 수학과 교수)와 7회 졸업생인 장범식 박사(전 UBC 수학과 교수) 말에 의하면 이임학 박사는 UBC 수학과를 세계적인 위치로 끌어 올린 연구가라고 말했다.
"1970년대 수학 확률론에서 최고의 학자였던 'Chung Kai Lai (鐘開來)'라는 중국계 학자(Stanford 대학 수학교수)가 밴쿠버에서 있었던 수학회에 참석하고 모든 일정을 단축하고 이임학 박사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세계 유명한 대학에 비하면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은 작은 학교이기에 대학자가 이임학 박사를 만나기 위해 무척 노력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노력한 이유는 이임학 박사가 발표한 논문들이 수학계에서는 엄청난 업적으로 인정되었고 밴쿠버 UBC에는 이임학이 있다는 말이 세계 수학계의 하나의 유행어처럼 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로는 최고의 영광인 캐나다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모임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 수학계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UBC 유학 2년만에 박사 학위를 땄다. 그가 수학계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세계의 많은 학교에서 교수로 오라는 제안을 했고 그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그 어떤 이론이 잡힐것 같은 그 시점에 그는 한국정부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했고 그는 갑자기 무국적자가 되었고 그 사건은 그의 모든 연구가 한국인 이임학이 아닌 캐나디언 이임학으로 학계에 소개되는 한국 수학사의 오류를 들어내게 된다.
또한 이박사에게 이 사건은 그의 생에서 자신이 태어난 한국이 준 가장 깊은 상처로 아직도 남아있다.
20세기 초 군이론은 수학계의 최대 관심사였고 단순군에 대한 이론은 수학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라잡게 된다.
특히 기초군이 되는 단순군이 발견될 때마다 세계 수학계는 파문과 흥분으로 떠들썩했다.
이 파문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이임학 (79세,남)박사이다. 그는 60년대 두 종류의 새로운 단순군을 발견한 수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군론에 '리군(Ree Group)'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연구에 대한 평가는 대단한 것이였다. 프랑스인 J.Dieudonne가 쓴 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이론에 공헌한 학자 21명에 꼽힐 정도로 그가 남긴 수학계의 연구 업적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리군 (Ree Group) 2종과 20여개의 단순군에 대한 연구 결과는 그를 세계 수학계의 거목으로 만들었고, 뿐만 아니라 그는 현대 수학계에서 유명한 수학자 중 한사람인 라그랑드 (Langlands)란 제자를 양육한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리군 (Ree Group)에 대한 연구논문이 1984∼1994년까지 90여편이 나올만큼 그의 연구는 세계수학사에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 남아있다. 특히 어느나라 수학사전이든지 이임학의 리군 (Ree Group)이론은 이임학의 성을 딴 리군 (Ree Group)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그중 그의 Ree Group론은 일본의 저명한 '이와나미' 수학사전에, 그리고 미국의 수학 백과사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는 것은 그가 발견한 리군 (Ree Group)에 대한 학문적 평가를 높게 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박사의 연구 활동은 계속되었고 그가 연구논문을 발표할때마다 수학계는 긴장했고 그 결과에 대해 찬사를 받았다는 흔적은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장 권위있는 수학자들의 역사서라고 할수 있는 J.Dieudonne 저서인 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역사적인 연구업적가 21인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이임학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는 현재 밴쿠버에서 UBC 학생 진료소 의사인 중국계인 부인 Rhoda Ree과 둘이 살고 있고 아들 3형제는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임학 박사의 아내이면서 그의 연구활동을 말없이 뒤에서 그림자처럼 보아온 Rhoda Lee는 "내 남편 이임학 박사의 삶은 수학이다. 이박사는 수학자이다. 이것 외에는 그를 설명할 어떤 말도 없다"라고 명확하게 이임학 박사에 대해 정리했다.
이임학 박사, 세계 수학계의 거목 유명한 모든 수학자들이 그와 만나기 위해 이곳 밴쿠버를 찾게 만들었던 '리군 (Ree Group)'의 창시자 임학 리, 1953년 그는 밴쿠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거주한 밴쿠버 한인사의 기록적인 인물이기도 한 그.
이박사는 수없이 반복해서 말했다. "조선말로 해주세요, 조선말로......".
그를 버린 조국에 대해 그의 삶 어느곳에서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조선, 한국이라는 말을 건강이 좋지 않은 지금에도 찾고 있는 그. 그는 이제 삶의 긴 여정을 마치고 조용히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한 그루 가냘픈 동양란이었다.
취재후기
밴쿠버에 한국인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으로 시작됐다.
이박사와 긴시간 몇번의 만남을 통해 그에게 여러번 들어야 했던 내용중 아직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가 연구활동을 연장하기를 원했을때 한국정부는 왜 그의 여권을 강제로 없애버렸나? 그래서 그는 카나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바로 시민권자가 되었다고 한다. 왜 그 당시 정부는 이박사를 한국인이 아니라고 부정했는지, 세계 수학계 거목인 이임학 박사가 "조선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조선말이 편하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지, 라그랑드(Langlands,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n Priceton, USA)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자를 이임학박사가 양육했다면, 그가 한국에서 후배 양성을 했다면 세계수학계 역사에 한국인 수학자들의 역할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947년이던가. 그 때는 새 학술지와 도서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치싸움에만 바쁘고 학문과 대학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남대문 시장을 지나는데 길가에 종이, 책 등 쓰레기 무더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Bulletin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47년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을 주워서 집에 가지고 와서 펼쳐보니 M. Zorn의 2쪽 짜리 논문이 있어 읽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결과가 중요한데 M. Zorn은 모르겠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해보니 금방 해결됨을 알았습니다. 논문을 써서 M. Zorn에게 보내면서 출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논문을 써서 직접 잡지의 편집인에게 보낼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M. Zorn은 그 논문을 1948년 미국 수학회의 「Bulletin」에 투고하였고 그 논문이 194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첫 논문이었습니다. 그 때는 읽고 연구할 잡지, 책 등 자료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연구하기에 참 좋은 환경입니다.大韓數學會史 p.49, '李林學 박사와의 대담' 중에서
잊혀진 한국의 수학자 - 이임학
수학의 발전이 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수학사에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수학자를 소개하는 글에는 현대의 수학자는 별로 없고,
기껏해야 고대의 수학자들이 등장하는게 고작이고.
우리나라의 현대 수학은 일제 시대에 겨우 시작되었고 수학과가 생긴 것은 해방 이후였다.
이렇게 짧은 역사에 세계적인 수학자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과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우리 한국인들만 모르고 있었던 수학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수학과의 이임학(李林學) 교수이다.
1922년에 태어난 이임학 교수는 1939년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수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당시는 수학과가 없어 물리학과로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해방이 되면서 서울대에는 수학과가 새로 생겼는데,
일본인 교수들이 떠난 직후여서 졸업생들 가운데 투표로 교수를 선출하였다고 한다.
이때, 교수로 선출된 이임학 교수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또한 나름대로 연구를 하고 있었다.
1947년 어느 날, 이임학 교수는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다 미군이 버린 쓰레기 더미에서
[미국 수학회지(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한 권을 발견하였다.
책을 보던 그는 막스 조른(Max Zorn)의 논문에 제시된 미해결 문제를 해결하여 조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에는 아무도 외국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편지를 받은 조른은 이임학 교수의 논문을 대시 투고하였는데, 이것이 외국 저널에 실린 한국인의 첫 논문이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수학은 쓰레기 더미에서 꽃을 피운 셈이다. 해방 직후, 제대로 된 수학과도 없던 우리나라에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수학자의 논문이 학술지에 실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간간이 외국 수학자들과 교류하던 이임학 교수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초빙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다른 대학으로부터도 오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한번 간다고 약속한 학교를 바꾼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생각하여 그대로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으로 가게 된다.
캐나다로 유학을 간 이임학 교수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조른에게 보냈던 논문이 학술에 실렸음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 수학계의 초창기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있었는지 증명해 주는 셈이다.
2년만에 박사 과정을 마친 후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 초빙 제의가 올 무렵 이임학 교수는 크나큰 사건을 겪게 된다. 여권을 연장하기 위해 찾아갔던 영사관에서 그의 여권을 압수해 버린 것이다. 뜻밖에 무국적자가 되어 버린 그에게 캐나다 정부는 영주권과 시민권을 주어, 그는 현재 캐나다 국적을 가지고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조선말로 해주세요. 조선말로 해주세요. 조선말을 들으면 다시 생각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조국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은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가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잊혀진 한국인이었다.
당시 수학계의 주된 연구 과제 가운데 군론(群論, Group Theory)이었다. 특히 단순군(單純群, Simple Group)의 분류가 많이 연구되고 있었는데, 이임학 교수는 1960년에 새로운 종류의 단순군들을 발견하여 리군(Ree Group)이라 명명하였다. (단순군은 수에서 소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유한단순군의 연구는 1950년대부터 30~40년동안 15000페이지, 500개 이상의 논문을 쏟아냈을 정도로 활발히 연구되었다.) 그가 새로운 군을 발견한 아이디어는 대단히 명쾌하면서도 효과적이었기에 이후 단순군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임학 교수는 1996년이 되어서야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다. 이 학회에서 필자는 이임학 교수를 직접 뵐 수 있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평소 때의 학회에서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원로 교수들이 오로지 스승인 이임학 교수를 뵙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제자라고 해도 모두 70에 가까운, 그야말로 우리나라 수학계의 원로 중의 원로들. 이런 분들이 이임학 교수를 뵙고서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임학 교수는 특별 강연에서 자신의 발견이 운이 좋아 우연히 발견한 대단치 않은 일이었다며 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업적은 디외도네(Jeam Dieudonne')가 쓴 [순수 수학의 파노라마(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서 군론에 이바지한 위대한 수학자 21인 가운데 한 명으로 이임학 교수를 꼽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이임학 교수의 강연 후, 질문 시간이 주어지자, 군론을 전공한 젊은 교수 한 분이 너무나 겸손한 말투와 모습으로 이 노교수에게 질문을 하였다. "제가 미국에서 군론을 공부할 때, 필독 논문 중의 하나가 한국인이 쓴 것임을 알고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라며 말을 시작한 그 교수의 눈에는 정말로 존경과 흠모의 빛이 넘치고 있었다.
서구에 비해 수학 후진국이던 일본에서 수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데이지 다카기(1875-1960) 라는 수학자 덕분이었다. 당시 수학 최강국이던 독일에서 유학하고 온 그로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현대 수학은 그의 제자들을 거치면서 튼튼한 기초가 확립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은 수학계 최고의 상인 필즈 메달을 받은 수학자를 세 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위대한 수학자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최근까지 그가 누구인지조차 몰랐을 정도로 철저하게 잊고 살았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만약 이임학 교수가 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여권을 뺏기는 일없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분의 지도를 받은 한국인 수학자들이 많이 나왔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수학도 더욱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나라가 군론에 있어 세계 최고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유학생의 여권을 뺏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인해 그는 한국인이 아닌 캐나다 인이 되어야만 했고, 그로 인해 한국 수학계와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나긴 식민지 경험과 전쟁으로 인해 피폐했던 우리나라 수학계도 이제는 양과 질 양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위대한 수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는 열등감 아닌 열등감에 시달려 온 듯하다. 그러나 이제는 잊지 말자. 우리에게는 위대한 수학자 이임학이 있음을.
-puzzlist-

첫댓글 혹시 조른(Zorn)이라는 사람이 Zorn's lemma나오는 그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이제 조른쓰 렘마라고 읽어야 할듯..ㅋ
네- 그 조른이에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