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호남평야가 시원스럽게 펼쳐진 전라도로 1박2일 지기학교 교사 MT를 떠나는 날이다.
설레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한 교사엠티.
<학교란 무엇인가?> EBS다큐 10부작을 시청한 후 소감문 써서 발표하는 것을 과제로 내주었다.
아이들만 숙제에 대한 부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 동학관련 책을 봐야하는 부담도 있다. 방송을 보는 부담은 있었지만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학원 때문에. 책을 안 읽는 아이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이 방송을 보라고 권해 준다.
책을 보고 있어도 집중을 할 수 없으니 그저 글자만 읽고 있다.
그러면 어떠하리 이왕 떠나는 것 현장에서 열심히 듣고 보면 되지 라고 위안 삼아 떠나본다.
주변사람들은 “놀러 가는데 웬 공부야” 라고 말한다.
참여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자유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말이다.
호남은 최대의 곡창지대로 꼽히지만 이지역의 농민은 하루도 풍족한 날이 없었다.
가혹한 수탈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1894년 정치경제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농민들은 스스로 일어섰다.
그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을 찾았다.
19세기 전반 국내에는 특정가문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세도정치가 펼쳐지면서 백성들은
더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1811년 함경도에서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면서 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농민들이 꿈꾸었던 세상, 전봉준 선생의 고택에 왔다. 태인 동곡마을에 살다 이곳으로 이사 왔고 한다.
이 집의 상량문에는 1878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이곳에서 태어 난건 아니다.
탄생지는 고창군 당초마을이라 한다.
1892년 4월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온갖 학정을 저질렀다.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 아래에 팔왕보라는 새 보를 쌓고 물세를 비싸게 받았다.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상류에 있었던 보이다.
또한 묵은 땅을 일구면 세금을 면제해 준다고 약속하고는 가을에 세금을 거두었다.
농민들이 항의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고 때리고 쫓아냈다.
전봉준과 고부농민들은 이러한 폐해를 군수와 전라감영에 호소하였지만
조병갑은 잠시 익산군수로 갔다가 재차 고부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만큼 조병갑에게는 고부 땅이 노다지였다.
말목장터는 태인 정읍 고부 세 길이 모이는 말목 같은 길이라 말목이고, 장터이라 말목장터이다.
농민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와 날짜는 장날 장터이다.
농민들은 고부관아로 쳐들어가기 전 말목장터에 모였다.
이 마을 저 마을 풍물패를 동원해 1000여명이 사람들을 모집하여 고부관아로 들어갔다.
조병갑은 벌써 도망가고 향리들만 징치하였다.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준다.
농민들은 조병갑의 학정의 대표인 만석보로 향한다. 만석보로 달려와 만석보를 때려 부쉈다.
만석보를 파괴 했다는 것은 조병갑의 학정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봉기한 이후에도 봉기를 더 이어가려고 했지만 후임군수로 박원명이 내려와 온건한 무마책을
써 자연 해산했다.
이후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농민봉기에 가담했던 주도층을 역적죄로 몰고 그들의 가족을
벌함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전봉준은 이용태의 탄압에 고민하다 소수의 무장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현으로 간다.
그곳에서 손화중을 만나 봉기할 것을 결정한다.
김개남이 합세하여 3월20일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전라도 무장현에서 봉기를 하였다.
이것이 제1차 농민전쟁이 되었다. 고부단위의 민란에서 전국단위의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농민군은 창의문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가볍게 행동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평안히 하여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창의문 끝에 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탐관오리를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갑오세 갑오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리”라는 노래가 유행가처럼 불렀다.
갑오년(1894)에 크게 떨쳐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않고
을미년(1895)까지 을미적 을미적 끌다가는
병신년(1896)에는 병신 되어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농민들은 혁명을 오래 끌지 말고 갑오년에 빨리 끝장을 내어 버리자고 하는 것이다.
황토재 전투에서 농민군의 승리는 농민군에게 전국단위로 세력을 넓혀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전주성 싸움에서 경군에게 패배한 농민군은 이탈자가 늘어갔다.
농사철이기 때문에 생활의 터전인 농토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군은 귀화 뜻을 비치면 개혁요구안을 제시한다.
한편 정부는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올 기미를 보이자 빌미를 주기 않기 위해
농민군에게 휴전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뜻과는 다르게 일본군은 전쟁준비를 마쳤다.
청국도 파병준비하고 있음을 통보했다. 일본군은 제물포에 상륙하고, 청국은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정부는 청일 양국 군대의 파병이 양국 충돌과 내정간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철병을 요구하고
농민군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5월 8일 비공식적으로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일본군은 출병목적대로 6월21일 새벽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6월 23일 아산만에 있는 청국 함대를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위기의식을 느낀 농민군은 9월 삼례에서 제2차 봉기를 하였다.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려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였다.
현재 고부관아는 남아 있지 않다. 일제 때 관아를 헐고 초등학교를 세웠다.
관아터 옆으로 향교가 남아있다. 걸려있는 빗장을 열고 슬며시 들어 가 보았다.
명륜당 앞마당엔 오래된 은행나무가 행인이 뜸한 향교를 지킬 뿐이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이 오가는 발걸음이 없었음을 말해 준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있어 담장 밖에서 들여다 볼 뿐이다.
대성전은 높은 축대로 단을 쌓아 위엄이 느껴진다.
첫댓글 동학내용을 정리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밤에 잠 안자면 노안이 심해지고 흰머리가 늘어난다는데^^
잘~읽었어요. 한 눈에 정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