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만물(自然萬物)과 인간(人間)의 관계(關係)
<신천성경p612>우주(宇宙)를 관찰(觀察)해 보면, 모두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적관계(相對的關係)를 맺음으로써 존재(存在)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광물(鑛物)의 차원(次元)에서부터 시작(始作)해서 모든 경우(境遇)에 적용(適用)되고 있습니다. 분자(分子)는 양(陽)이온과 음(陰)이온의 결합(結合)을 통(通)해 형성(形成)되었고, 식물(植物)의 경우(境遇) 생존(生存)과 번식(繁殖)은 암수를 대표(代表)하는 암술과 수술의 결합(結合)을 통(通)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이성성상(二性性相)은 동물(動物)의 경우(境遇) 더욱 분명(分明)합니다. 어류(魚類), 조류(鳥類), 포유동물(哺乳動物) 등(等) 모든 동물(動物)은 수컷과 암컷으로 존재(存在)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최고(最高) 창조물(創造物)인 인간(人間)도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로 구분(區分)되어 있습니다.
<신천성경p613> 하나님이 자신(自身)의 모양(模樣)을 실체화(實體化)시킨 것이 우주(宇宙)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생각(生角)하는 것을 그냥 그대로 실체화(實體化)시킨 것이 만물(萬物)의 창조(創造)이기 때문에. 우주(宇宙)는 하나님을 닮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물건(物件)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性品)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주(宇宙)는 하나님이 지은 창조물(創造物)이지만 전체(全體)를 두고 볼 때는 하나님의 한 대상적(對象的)인 존재(存在)라는 것입니다.
<신천성경p613> 자연계(自然界)를 바라보면 독자적(獨自的)인 입장(立場)으로 존속(存續)하는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성(相對性)을 갖고 상대(相對)를 위해 존재(存在)하고 존속(存續)합니다. 미물(微物)의 동물(動物)도, 혹은 광물세계(鑛物世界)의 원소(元素)까지도 반드시 상대적(相對的)인 관계(關係)를 추구(追求)해야 힘이 생기고 작용(作用)이 벌어집니다. 무엇이든지 존재(存在)하려면 힘(力)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인(共認)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宇宙)의 구성(構成)은 힘(力)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힘(力) 자체(自體)는 어떻게 형성(形成)되느냐? 힘(力)은 작용(作用)을 통(通)하지 않고는 발생(發生)할 수 없습니다.
작용(作用)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독자적(獨自的)으로 작용(作用)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세계(科學世界)에 있어서, 더욱이나 화학실험실(化學實驗室)에서는 그런 것을 확실(確實)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실험(實驗)하는 당사자(當事者)가 어떠한 원소(元素)와 원소(元素)를 통(通)해 무슨 작용(作用)을 일으키려고 아무리 힘(力)을 가하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해 봐도 인간(人間)의 힘(力)을 가지고는 작용(作用)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원소(元素)들이 있습니다.
우주(宇宙)를 보게 되면 광물세계(鑛物世界)나 식물세계(植物世界), 동물세계(動物世界)가 쌍쌍(雙雙)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쌍쌍(雙雙)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 천지(天地)가 쌍쌍(雙雙)으로 만들어졌느냐는 것입니다. 새끼를 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수놈과 암놈, 전기(電氣)로 말하면 플러스와 마이너스, 그다음에 양이온과 음이온이 전부(全部) 상대(相對)를 걸어 서로 합(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차원(次元)은 다르지만, 사랑을 중심삼고 합(合)합니다. 사랑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말선248-58> 만물(萬物)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물(萬物)도 눈(目)이 있고 다 감정(感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사람의 사랑의 정(情)을 통(通)해 가지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데 강도(强盜)라면 전부(全部)막아버리는 것입니다. 파탄자(破綻者)라면 막는 것입니다. 쌍쌍제도(雙雙制度)로 되어 있는 이 우주(宇宙)는 모두 다 참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주(宇宙)가 참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을 생각(生角)할 때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느냐는 것입니다. 내 머리칼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신천성경p666> 인류문화(人類文化)는 자연(自然)을 벗어나 생각(生角)할 수 없습니다. 자연(自然)을 떠난 인류문화(人類文化)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제아무리 당당(堂堂)하게 그 위세(威勢)를 자랑하고 권세(權勢)를 누린다고 해도 자연(自然)을 무시(無視)한다면 그 모든 것이 성립(成立)되지 않습니다. 이 와 같이 인간생활(人間生活)을 가치(價値)있게 해주는 것이 자연(自然)이요, 인간(人間) 생애(生涯)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必要)한 것이 자연(自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만상(自然萬象)에 흐르고 있는 심정(心情)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참다운 행복(幸福)을 누릴 수 없고, 하늘과 인연(因緣)을 맺을 수 있는 영광(榮光)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물세계(萬物世界),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원리(原理)와 법칙(法則), 공리(公理)와 공식(公式)을 해명(解明)하기 위해 노력(努力)하는 분야(分野)가 과학(科學)입니다. 그리고 자연(自然)에 깊이 숨어있는 정서적(情緖的)인 분야(分野)를 나타낸 것이 문학(文學)입니다. 자연(自然)에 나타나 있거나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어떤 형태(形態)로서 구상(構想)하여 표현(表現)한 것이, 예술(藝術)입니다. 그리고 자연(自然)의 근본이치(根本理致)를 해명(解明)하려는 분야(分野)가 철학(哲學)입니다.
이런 단계(段階) 위(位)에 있는 것이 종교(宗敎)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종교(宗敎)와 종교(宗敎)가 해명(解明)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자연(自然) 속에 깊이 흐르고 있는 정적(靜的)인 내용(內容)을 해명(解明)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責任)을 종교(宗敎)가 짊어져야 합니다.
<신천성경p667> 여러분은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立場)에서 바라보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대신(代身)한 입장(立場),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통(通)할 수 있는 입장(立場)에서 바라보아야 됩니다. 곤충(昆蟲)이나 새, 혹(或)은 어떤 동물(動物)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인연(因緣) 맺어지는 내적(內的)인 감정(鑑定)을 체득(體得)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떤 공식(公式)과 정의(正義)로써, 즉(卽) 과학적(科學的)인 논리(論理)로써 그것을 해명(解明)하지는 못할지라도, 혹(或)은 문학적(文學的)으로 그 정서(情緖)는 표현(表現)하지는 못할지라도, 혹(或)은 예술적(藝術的)으로 그 미(美)를 표현(表現)하지는 못할지라도, 정서적(情緖的)으로 사랑을 체휼(體恤)하는 힘(力)이 없을지라도 이는 위대(偉大)한 과학자(科學者)요, 위대(偉大)한 문학가(文學家)요, 위대(偉大)한 예술가(藝術家)요, 위대(偉大)한 철학자(哲學者)요, 위대(偉大)한 종교가(宗敎家)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한때에 신비(神祕)스러운 분위기(雰圍氣), 혹(或)은 은혜(恩惠)의 분위기(雰圍氣)에서 자연(自然)의 꽃 한 포기를 바라보는 것을, 마음으로 그리워한 적이 있었습니까? 또 조상(祖上)의 누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대(對)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혹(或)은 산천(山川)을 바라보게 될 때, 품겨들어오는 자극(刺戟)에 자기(自己)도 모르는 찬미(讚美)를 하늘 앞에 드린 일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만물(萬物)의 주인(主人)이 될 자격(資格)이 없다고 선생님(先生任)은 단정(斷定)합니다.
<신천성경p668> 우리는 자기(自己) 주위환경(周圍環境)을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리고 탄식(歎息)하거나 사회(社會)의 모순상(矛盾象)을 바라보고 낙망(落望)하지 말고,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바라보고 그 즐거움에 자기(自己) 슬픈 감정(感情)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萬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새 시대(時代)에 남아지는 사람입니다.
<신천성경p672> 취미생활(趣味生活)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創造)할 때 억지(抑止)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재미를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창조(創造)의 하나님 입장(立場)을 다시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누가 하라고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할 수 없습니다. 잠을 안 자면 안 잤지, 그 일은 안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돈이 개재(介在)되고 환경(環境)이 개재(介在)됩니까?
그렇기 때문에 취미생활(趣味生活), 취미산업(趣味産業), 취미연구(趣味硏究) 등(等)이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는 가운데서 하나 돼 이루어진 것이라야 하나님 앞에 소유(所有)될 수 있는 물건(物件)이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애용(愛用)할 수 있는 물건(物件)이지,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물건(物件)이라는 것입니다. 돈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산업(産業)은 레저산업(産業)이 됩니다. 앞으로 기술산업시대(技術産業時代)는 자동기술(自動技術)로 말미암아 인간(人間)이 일하지 않은 시대(時代)입니다. 그런 때가 옵니다. 지금(只今)도 그렇게 되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버튼만 누르면 기계(機械)가 일을 합니다. 몇 천명(千名)이 작업(作業)하던 공장(工場)에서 서넛만 가지고 밤낮 생산품(生産品)을 내놓을 수 있는 시대(時代)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산업(産業)이 벌어지느냐? 그것이 레저산업(産業)입니다.
앞으로 세계(世界)는 공장(工場)에 가서 일하는 것을 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여행(旅行)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지금(只今) 세계(世界)사람들이 바쁜 생활(生活)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여있고 취미(趣味)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人生)살이에 취미(趣味)가 없습니다. 종(從)이 되어 있습니다. 전부(全部) 부속품(附屬品)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슨 취미(趣味)도 없고, 자기의식(自己意識)도 없이 기계동작(機械動作)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일생(一生)의 80퍼센트 이상(以上)을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취미산업(趣味産業)을 개발(開發)해야 됩니다. 레저산업(産業)이 아닙니다. 취미산업(趣味産業)입니다.
<말선371-282> 우리가 절대 위(爲)하고 투입(投入)하고 잊어버리는 자리에 있으면 먹고 취(取)하더라도 죄(罪)가 아니에요. 타체자각(他體自覺)을 하고 있는 모든 만물(萬物)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받았으면 돌려야 할 책임(責任)이 있기 때문에 큰놈이 작은놈을 더 큰 것을 살리기 위해서 잡아먹는 거예요. 잡아먹는 것이 흡수(吸收)하는 거예요. 보관(保管)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일체권(一體權) 사랑의 뿌리에 도달(到達)시키는 길이 가깝기 때문에 자체(自體)가 흡수(吸收)되는 것을 원(願)하기 때문에 죽음의 길을 환영(歡迎)해야 된다구요. 우리가 영계(靈界))에 가는 것을 환영(歡迎)해야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신천성경p672>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지면 자연(自然)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自然)스럽게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으로써 천국(天國)에 가는 것은 정(正)한 이치(理致)입니다. 취미생활(趣味生活),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의 취미(趣味)가 창조(創造)와 연결(連結)되는 것입니다. 모든 취미(趣味) 거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치지 않습니다. 취미(趣味)가 겹치고 겹치고 해서 자동적(自動的)으로 하나님의 세계(世界)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人間)이 바라는 최고(最高)의 생활(生活)입니다.
<신천성경p670> 자연(自然)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소유결정권(所有決定權)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당신(當身)은 아버지가 된다는 결정권(決定權)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정(決定)을 해가지고는 무엇을 하느냐? 격위(格位)가 생기게 됩니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질서(秩序)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연관(聯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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