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4.15.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삼하 11:1~5
*제목; 다윗처럼 살기(31) 믿음이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화니 크로스비’는 유명한 찬송작사가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은혜로운 찬송은 모두 그녀의 작품이라고 할만큼 유명한 찬양이 많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등등.
이런 그녀는 어릴 때 질병을 앓고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런 그녀는 ‘시각이라는 보석을 잃었지만, 내 안에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보석이식 예수님이 계셔서 괜찮다’고 할 정도로 믿음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는 그녀가 눈을 뜨게 될 때, 제일 먼저 보고 될 얼굴이 주님 얼굴이어서 기쁘다고 고백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믿음도 이런 것이 되길 소원한다.
다윗은 그랬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범죄한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오늘 알아보자.
1.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사람이다.
인간만큼 연약한 존재가 있을까? 작은 가시 하나에도 죽을 것 같이 아파하고, 조그마한 일에도 마음이 상해서 전체 일 자체를 망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해주어야 할 대상이지, 사랑을 기대하거나 뭔가가 신뢰를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상처와 실망을 안게 되어 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늘 “여호와를 목자 삼는 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 이 또한 지나갈 줄을 아는 자”인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시원한 생수 같았던 다윗이 범죄한다.
바로 자신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아서이다.”
헬라어로 “죄”는 “하마르티아”이다. 이는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즉,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이다.
지금 이스라엘 상황이 어떠한가? 요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는 암몬과 전쟁 중에 있다. ‘1절’을 보자.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삼하 11:1)
당시 이스라엘은 ‘신정 분리 국가’였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다. 이 또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처럼 왕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앙의 부분은 제사장이 전적으로 맡고, 정치의 부분은 전적으로 왕이 맡은 것이다. 그래서 왕은 나라의 다스리는 부분에 직접 선두에 있어야 했다. 특히 당시에 왕의 가장 큰 역할은 전쟁 시, 최일선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터에, 그것도 최일선에 있어야 하는 몸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편안하게 왕궁에 있다. 죄가 찾아올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가? 아니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나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죄가 당신의 문 앞에 머무를 것이다.
2. 약할 때 반드시 유혹이 찾아온다.
우리가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죄의 자리에 있을 때, 당연히 죄의 유혹이 찾아온다. 그래서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아야 하며, 있지 말아야 할 자리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이다.
궁에 머물러 있는 다윗은, 할 일없이 왕궁 지붕을 거닐다 목욕하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2절’이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2)
그녀는 그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다.(3절) 성경에 보면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고 했다.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의 자리에서 보면, 죄를 지을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녀는 자신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고, 지금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간 사람의 아내였다. 평소의 다윗이라면 그녀를 향해 음욕을 품은 것으로도 하나님께 통회하고 자복했을 사람이다.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죄의 자리로 나가면 이렇게 된다.
이미 음욕이 불타는 다윗은 그녀를 불러 간음을 하였다. 지엄한 왕의 명령이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다윗도 넘어진다. 하물며 우리일까? 화장실에 가면 애를 쓰지 않아도 화장실 냄새가 옷에 밴다. 생선가게에 가면 몸에 비린내가 담긴다. 이런 이치를 잘 알면서 왜 삶과 신앙에서는 지키지 못하는가?
3. 죄는 더 큰 죄를 부른다.
더 무서운 것은 죄가 더 큰 죄를 부른다는 것이다.
처음 다윗의 잘못은 “나태함”이었다. 이 게으름으로 인해 있어야 할 자리(전쟁터)에 있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머무르다 “음욕”이 그 마음에 찾아들었다.
이 음욕은 “기대하지 않았던 임신”(5절)을 초래하였다. 다윗은 여기서 멈추어야했다. 우리아에게 알리고 이 사태를 여기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숨기려고 “헛된 술수” 쓰려한다.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아는 진정 “충신”이고 “의인”이었다. 나라가 전쟁에 있고, 동료들은 사선을 헤매고 있는데 자신만 아내와 동침할 수 없었던 것이다. ‘9, 11, 13절’에 그의 충정과 의로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삼하 11:9)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삼하 11:11)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삼하 11:13)
여기에서 멈추어야 했다. 그의 백성(밧세바)과 충성스러운 신하(우리아)에게 사죄하고,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죄는 다윗을 가만 두지 않았다. ‘15절’이다.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삼하 11:15)
죄가 이렇다. 나태함으로 시작한 것은 이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윗은 이를 통해
백성을 저버리고,
충성스러운 신하도 잃어버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도 크나큰 실망을 안겨드린 것이다.
4. 정 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죄이다. 우리의 죄를 점검해보자.
죄의 자리에서는 유혹이 오게 되어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그 유혹을 이길 수 없다.
나태함으로 시작한 죄는 살인으로 이어진다. 죄가 이토록 무섭다.
다윗이 넘어졌다면 우리는 볼 것도 없다. 이제 철저히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멀리하자. 그것만이 죄를 이기는 길이다.
첫댓글 천하의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다윗이 죄로 인해 넘어진 것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에게 틈을 주어, '나태함'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한 번 시작된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를 이기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늘 말씀과 기도로 "나를 주께 묶는 삶"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