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우경(安遇慶)은 세계(世系)와 이력(履歷)이 자세하지 않다. 공민왕(恭愍王) 8년(1359)에 안우(安祐) 등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켰고 뒤에 안우 등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였는데, 공로가 모두 1등이었다. 또 흥왕사(興王寺)의 적을 토벌하니 공을 기려 역시 1등으로 하였다. 원(元)에서 홍건적을 평정한 공로로 사신을 보내어 봉훈대부 광문감승(奉訓大夫 廣文監丞)을 제수하였다.
원(元)에서 덕흥군(德興君)을 세워 왕으로 삼아 〈우리나라로〉 보내니 안우경(安遇慶)이 찬성사(贊成事)로서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의주(義州)에 주둔하였다. 파사부(婆娑府)의 탈탈화손(脫脫禾孫, 토토카순)에게 글을 보내기를, “우리나라는 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이 창업하여 왕통을 전한 이래로 적자가 400여 년 동안 계승하였습니다. 원종(元宗)이 처음으로 〈원〉 조정을 섬기자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명령하여 고유의 풍습을 고치지 말라[不改土風]고 하셨으며, 원왕의 적자인 충렬왕(忠烈王)이 〈원〉 공주(公主)를 맞아들여 충선왕(忠宣王)을 낳았고 충선왕 역시 공주를 맞아들여 충숙왕(忠肅王)을 낳았으니, 의(義)로는 임금과 신하가 되고 친(親)으로는 사위와 장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왕은 충숙왕의 적자로 천자의 조정에 입시(入侍)하여 10여 년 동안 자못 공적을 드러냈습니다. 공주를 맞아들여 부마(駙馬)가 되었고 정통을 계승하여 제후국이 되어 사대(事大)의 예를 한 마음으로 정성껏 힘썼습니다. 불행하게도 홍건적(紅巾賊)이 천하에 횡행하여 천자의 민(民)들을 약탈하고 가는 곳마다 불꽃같이 맹렬하였으니 천자의 위세로도 제압하기 어려웠습니다. 지난 기해년(己亥年, 1359) 겨울에 거짓 관직[僞名]인 모평장(毛平章)과 황원판(黃院判) 등의 적 10여만 명이 우리나라로 난입하여 서경(西京)까지 이르렀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일어나 남김없이 한 번에 소탕하였습니다. 또 신축년(辛丑年, 1361)에 사유(沙劉)·반평장(潘平章)·관선생(關先生) 등의 적 30여만 명이 왕경(王京)까지 깊숙이 쳐들어오자 우리 왕이 크게 노하였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용맹을 떨쳐 그 무리들을 모두 섬멸하여 사직(社稷)의 안정을 되찾고 인민들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두 번이나 적을 격파한 일은 이미 〈원〉 중서성(中書省)에 모두 보고하였는데 우리 민이 말하기를, ‘상국(上國)에서 반드시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목을 길게 빼고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나라 사람 최유(崔濡) 등이 원한을 품고 교묘하게 속인 말로 천자의 귀를 현혹시켜서 우리 주상으로 하여금 지위를 잃게 하고, 충선왕이 버렸던 첩의 자식인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타스테무르)를 왕으로 삼아 3,000리 밖 멀리 천자의 민을 괴롭게 하십니까? 무릇 최유 등은 우리 선왕(先王)을 섬기면서 아첨하고 영합하여 〈선왕을〉 불의(不義)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계미년(癸未年, 1343) 중에 〈선왕이〉 남행(南行)하여 돌아오지 못한 것도 최유 같은 악한 무리들이 실은 그렇게 하였던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만 나오면 항상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최유 등이 또 생황(笙簧) 같은 입으로 우리의 큰 공로를 가리고 우리 왕을 폐위하여 이 땅의 무고한 민으로 하여금 편히 살 겨를이 없게 하였으니 이들은 우리나라의 죄인입니다. 우리 왕은 재상 이공수(李公遂)·유인우(柳仁雨)·허강(許綱)·홍순(洪淳) 등을 하정사(賀正使)·사은사(謝恩使)·성절사(聖節使)·천추절사(千秋節使)·계품사(啓稟使)로 삼았습니다. 최유 등이 서로 〈원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가려서 방물(方物)과 표전(表箋)을 빼앗아 전달할 수 없게 하였으며 사신을 구류하여 오직 자신들만 따르게 하였습니다. 또 세조황제께서 명령하여 우리 고유의 풍속을 고치지 말도록[不改土風] 하였고 적자가 계승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최유 등은 〈원〉 조정을 업신여기고 서얼(庶孼)을 세워 왕으로 삼아 우리 고유의 풍속[土風]을 고쳐서 세조황제의 조지(詔旨)를 허공으로 추락시켰으니 이들은 천하의 죄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슴을 치고 이를 갈면서 말하기를,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도 벨 수 있다는 것이 예로부터 항상 있는 법이었다. 최유 같은 무리들의 죄는 처형하는 것만으로 용납되지 못하니 비록 심장과 배를 갈라도 반드시 조정(朝廷)에서 논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노소가 화를 내며 우레와 같이 한마디 하기를, ‘반드시 대병(大兵)을 일으키고 가서 최유 등과 같은 악한 무리들을 토벌하여 살을 먹고 가죽을 자리로 만든 뒤에야 그치리라.’고 하였습니다. 비난[物議]이 용솟음치듯 솟구치니 막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 정병(精兵) 백만 명으로 가서 고려(高麗)의 역적을 토벌하기로 약속을 이미 정하였습니다. 군사가 지나는 곳은 가시밭이 자랄 것입니다. 대군(大軍)이 한꺼번에 말머리를 북쪽으로 향한다면 비록 더욱 금지시키려고 해도 인심이 분노하여 기세가 불꽃과 같아 부딪치는 것마다 반드시 불태워버리니 천하의 무고한 민들이 그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귀하[本職]가 관할하는 각 부락의 사람들은 즉시 가족들을 거두어 일찍 산채(山寨)로 들어가 멀리서 군대의 예봉(銳鋒)을 피하십시오. 또 최유 등 고려의 역적과 구별하여 제색군마(諸色軍馬)로 하여금 외람되어 화를 당하지 말게 하십시오. 최유 등의 악한 무리들을 잡아서 머리를 보내어 귀순하면 우리나라의 분노를 풀뿐만 아니라 상국(上國) 역시 최유 등이 천자를 속이고 법을 어지럽혀서 처형되었음을 알게 되어 장차 후한 상을 내릴 것입니다. 귀하는 자세히 살펴서 곧바로 시행하고, 또한 마땅히 행추밀원동지(行樞密院同知)에 신속하게 보고하여 시행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처음에 안우경(安遇慶)은 병마사(兵馬使) 김지서(金之瑞)와 옥천계(玉天桂)를 시켜 요해처(要害處)를 나누어 지키고, 송분석(宋芬碩)은 의주(義州)의 궁고문(弓庫門)을 지키며, 호군(護軍) 김득화(金得和)는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 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한밤중에 적이 추도(楸島)에 이르렀다고 보고하니 안우경이 사람을 보내어 도순찰사(都巡察使) 이구수(李龜壽)·도병마사(都兵馬使) 홍선(洪瑄)·순무사(巡撫使) 지용수(池龍壽)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당시 사졸들은 춥고 굶주려 움직일 수 없었는데, 동이 트자 적이 강을 건넜다. 안우경이 관속(官屬) 7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에 올라 바라보니 적이 궁고문(弓庫門)을 포위하고 있었다. 안우경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적은 이미 성을 넘어 들어가 문을 지키던 군사를 죽였는데도 송분석은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안우경이 몸소 사졸들의 앞에 서서 방천봉(邦天奉)·함석주(咸石柱)·김득화·현노개(玄奴介)·최흑려(崔黑驢)·나성(羅成) 등과 함께 7번 싸워 물리쳤다. 적이 산에 올라가 아군이 적고 또 원군이 없다는 것을 엿보고 보병과 기병을 7부대로 나누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함께 진격해 왔다. 아군이 버티지 못하고 달아나 성문으로 돌아오는데, 최흑려가 말에서 내려 창을 잡고 성문 밖에 서 있으니 적이 다가오지 못하였으며 아군들이 모두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말에 올라 천천히 말을 몰고 들어갔다. 이구수·홍선·지용수 등은 적이 갑자기 닥쳤음을 알지 못하고 각각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아군이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고 홍선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적에게 사로잡혔다. 아군이 크게 패하고 달아나 안주(安州)를 지키니 적이 선주(宣州)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왕이 명령하여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았고, 또한 우리 태조(太祖)에게도 명령하여 동북면(東北面)에서 정예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이성(泥城)으로 가게 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순(李珣), 도병마사(都兵馬使) 우제(禹磾)와 박춘(朴椿)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이니 아군이 다시 떨쳐 일어나게 되었다. 적의 척후 기병들이 정주(定州)에 도착하자 안우경이 정예 기병 300명을 거느리고 기습하여 깨뜨리고 그들의 장수 송신길(宋臣吉)을 사로잡아 죽이고 조리돌리니 적은 기세를 잃었다. 이에 안우경·이구수·지용수 및 도병마사(都兵馬使) 나세(羅世)는 좌익(左翼)이 되고, 이순·우제·박춘·우리 태조는 우익(右翼)이 되었으며, 최영은 중군(中軍)이 되어 진격하니 정주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내고 약하여 힘써 싸우지 않는다고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꺼렸다. 당시 적이 이미 수주(隨州)의 달천(獺川)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내일 전투는 그대 혼자 맡으라.”고 하였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신을 꺼린다는 것을 알고 다소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다음날에 적이 3부대로 나누자 태조가 중앙을 맡고 수하의 늙은 장수 2명을 좌·우로 삼아 각기 1부대씩 맡게 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태조가 탄 말이 진흙탕에 빠져 매우 위태로웠으나 말이 떨치고 뛰어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경이롭게 여겼다. 태조가 적의 장수 몇 명을 활로 쏘니 적이 이내 흩어져 도망쳤으며, 〈늙은 장수〉 2명은 칼을 뽑아들고 마구 공격하니 적은 이미 달아나 무너지고 오직 먼지만 공중을 가릴 뿐이었다.
왜적이 교동(喬桐)을 도륙하자 경성(京城)이 크게 동요하였다. 왕이 안우경에게 명령하여 지용수·이순과 함께 병마사(兵馬使) 33명을 거느리고 동·서강(東西江)에 나누어 주둔시켰으며 승천부(昇天府)가 그들을 돕게 하였다. 얼마 후에 추성양절선력익찬공신(推誠亮節宣力翊贊功臣) 칭호를 하사하였다.
〈안우경은〉 오인택(吳仁澤)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남원(南原)으로 유배되었으며 노비가 되었고 집을 몰수당하였다. 신돈이 처형되자 소환되어 찬성사가 되었다가 서경도만호(西京都萬戶)로 나갔다. 이순과 함께 오로산성(五老山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원(元)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합랄불화(哈剌不花, 카라부카)를 사로잡아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