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경수행 박명옥 씨
아이 못낳는 괴로움 속 자살시도
정신질환자 도우며 희망 되찾아
지금 나의 삶은 평안하다. 비록 규모는 소박하지만 노인요양원을 운영하며 요양원 식구들과 하루하루를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매일 오전 4시에 눈을 떠 『금강경』 독송으로 하루를 시작해 저녁 12시에나 취침에 들 때도 『금강경』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러나 예전의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나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싶다. 25년 전 나도 남들처럼 결혼을 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유있고 행복한 생활이었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6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돌며 검사와 진료를 받아야 했고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만 갔다. 결국 정신적인 문제까지 동반하면서 신경정신과 치료까지 병행해야 하는 극도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남편은 대리모를 통해 아들을 낳았고 그것이 불화의 불씨가 되어 결국 이혼으로까지 치닫게 됐다.
왜 나만 이렇게 큰일을 당해야 하나. 정말 나는 불행한 존재인가. 이런 망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살아야 할 이유조차 없는 내가 아닌가’라는 극단적인 생각에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어느 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팔과 다리는 묶여있었고 감각이 돌아오기까지는 2주일이나 걸렸다. 그리고 여전히 내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만 갔다.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처절한 사투를 벌일 즈음 한 친구가 정신병원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또한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경험이 있기에 환자들을 아주 특별히 바라보며 내 불행이 이들에 비해 오히려 작은 것이었음을 깨달아 갔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내 존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 의정부에서 시작한 병원 과의 인연이 일산을 거쳐 지금 살고 있는 충남 홍성까지 오게 됐다. 홍성에서의 시작은 병원이 아닌 사회복지법인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이었다. 차츰 복지시설에서의 생활이 적응될 즈음 평소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본 한 지인이 사회복지사업을 해볼 의향이 있느냐며 제의를 했다. 삶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형편도 여의치 않고 여자 혼자 한다는 것이 겁이나 결국 사양을 했다. 그러나 평생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 여러 사람들의 격려와 도움 속에 지금 내가 생활하고 있는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됐다.
1990년 7월 현재 ‘따뜻한 집’이 위치한 이곳에 터를 잡으며 불교와의 인연은 시작됐다. 처음 찾은 이곳은 비워진지 7년이 넘는 고택으로 길은 오간데 없고 나무와 풀이 뒤덮고 있었다. 가옥도 형체만 있을 뿐 동서남북 구분도 되지 않는 이곳에 과연 사람이 살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만 가득했다. 사회에 버림받은 사람들을 오지에 매어 놓고 또 다른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앞섰다.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길을 내고, 집을 수리하고, 주변도 정리해 곧 한적한 산속에 빨간 기와집 하나를 마련했고 그해 9월 복지원력을 실천하게 됐다.
버려진 이들 60명 가족처럼 돌봐
숱한 고난 경전 독송하며 이겨내
버려진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개를 사육해 마련한 수입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불자가 운영하는 저렴한 복지시설’이 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서 전국 각지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며 자기 가족을 맡아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식구는 점점 늘어났다. 20명이 30명이 되고 30명이 다시 40명이 되더니 결국 60명이 넘는 이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게 됐다. 장소가 협소해 컨테이너를 개조 목욕탕과 식당, 화장실 등으로 사용하다 보니 불법 건축물에서 환자를 수용한다며 관청으로부터 제재가 시작됐다. 당시의 고초와 어려움을 어찌 다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다시한번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신축해 정식 절차를 거쳐 1995년 보건복지부로부터 유료양로원의 허가를 취득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더욱 큰 아픔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동안 함께한 가족들은 65세 미만의 환자들이 대부분으로 유료양로시설에서는 함께 살수 없는 이들이었다. 어려움을 나누며 웃고 함께 생활하던 식구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가슴앓이는 결국 견딜 수 없는 고통만으로 내게 주었다. 또 부지를 사고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한 비용들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나의 마음을 더욱 옥죄어 왔다.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4명. 도망가고만 싶었다. 더 이상 헤쳐 나갈 돌파구를 찾지 못한 나는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려고도 했다. 하지만 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눈빛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할 실정이었다.
무겁게 짓누르는 내면의 갈등으로 번민에 쌓여 있을 즈음 이웃에 사는 형님이 나를 찾았다. 그리고 “자넨 전생에 복 짓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며 『천수경』과 1000주(珠)를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는 하루 한번 시간을 정해 기도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천수경』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처음으로 1000주도 돌려봤다. 처음으로 의지할 곳이 생겼다는 이유인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모두가 하나같이 참회할 일 뿐이었다.
자살을 시도했던 일, 따뜻한집 가족들을 잘 보살피지 못한 일, 사회에 분노했던 일, 이웃에 대한 원망과 불평…. 그렇게 『천수경』을 매일매일 독송하고 하루하루를 참회하며 생활해 나갔다.
차츰 원망과 고통이 사라져 갔다. 주변에 대한 원망이 없으니 내 삶은 평안해 졌다. 일을 해도 신이 났고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오늘 하얀 박꽃과 노란 호박꽃을 보며 아름다움을 선물한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애완견 단비를 보며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따뜻한 집에서 생활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매일 삼배를 올리며 다음 생에는 나의 언니 동생으로 태어나 더 잘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작은 나무 그늘에도 감사하고, 삼복더위에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에도 고마움을 느낀다.
『천수경』을 만나고부터 어쩌면 그렇게 신비하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하지 않은 것이 없는지.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얼마 전부터는 『금강경』 독송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을 맺고 있다. 내 삶을 고귀함으로 바꿔 놓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시한번 감사하며 모든 불자들이 날마다 좋은날 되기를 기원한다.
노인요양원 원장
<2005-08-24/816호>
입력일 : 2005-08-2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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