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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초대석] 영산포고등학교 박순용 이사장 | ||||||||||||||||||||||||
영산포고등학교를 전국 최고 명문학교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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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랑하는 내 자식들이다” 영산포 중·고등학교가 달라지고 있다. 58년 전통의 명문에서 신입생 정원 조차 채우지 못하고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외면받던 학교가 밝아지고 있다. 교사 구석구석에서 부지런한 손길이 느껴진다. 전통의 학교를 보여주는 듯 낡은 벽면이 산뜻하게 페인팅되고 정원도 스텐드도 화장실도, 매점과 식당까지도 하나씩 바뀌고 있다. 학생들에게서도 변화가 보인다. 지역에서의 믿음도 커졌다. 마침내 2009년도 신입생 모집에서는 정원을 초과했다. 이 모든 변화는 6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다. 박순용서구의료재단 이사장이 고향의 인재 육성을 ‘내 인생의 마지막 사업’이라 작정하고 영산포중고등학교 이사장에 부임한 이후의 일이다. 영산포 중·고등학교가 전국의 명문학교로 재도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점이다. 박순용이사장의 교육관과 학교 경영관, 영산포 중·고등학교의 비젼을 듣기 위해 나주투데이는 박이사장과의 신년 특별 대담을 가졌다. 대담은 2009년 1월21일, 영산포중·고등학교 이사장실에서 이철웅편집국장과 함께 진행됐다. --------------------------------------------------------------------
이철웅 나주투데이 편집국장(이하 이국장) :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신지도 횟수로는 일년이 지났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박순용이사장(이하 박이사장) : 작년 7월에 취임했으니 7개월 됐나? 아이들과 함께 해보니 보람있다. 깔깔 거리며 웃는 소리가 힘이 되고 내가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같아 즐겁다.
박이사장 : 나는 나주가 고향이다. 영산포 중학교까지 여기서 다녔다. 구진포 모래사장이, 영산강 다리 밑이 내 놀이터였다. 고향을 떠나서 50년을 살다보니 고향이 많이 그립다. 수구초심이라 해야하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고 고향의 인재 육성을 위해 남은 열정 모두를 바치고 싶었다. 이국장 : 나주 안에서도 맡아 하실 수 있는 학교가 많이 있었을텐데요, 여건이나 환경이 더 좋은 학교로. 박이사장 : 교육에 투자하고자 하는 생각을 펼치려 보니 여러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영산포고등학교가 그중에 가장 환경이 좋지 않았다. 기왕 내가 나설 것이라면 손길이 가장 절실한 곳에 내밀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자체 경쟁력이 있다면 스스로 일어서고 일어설 수 없는 곳에 힘을 줘야 고루 발전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기왕이면 꼴찌를 1등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도 컸다. 이국장 : 영산포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취임과 관련해 지역사회와 교육계는 물론이고 특히 영산포지역의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학교를 어떻게 만들고 이끌어가겠습니까. 박이사장 : 첫번째는 명문화다. 영산포고등학교가 전국에서 제일가는 우수한 학교로 성장해나가도록 모든 노력을 다 쏟아야 한다. 그것이 내 포부이자 시민의 바램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국장 : 명문교 육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과 학교운영 계획은?. 박이사장 : 목표는 ‘최고 명문 학교’를 이뤄내는 것이지만 기술적으로 명문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많은 학교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명문 학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내 자식이나 다름없다. 내 눈에는 그들이 그렇게 보인다. 내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나도록 이끌어 주도록 해야 한다. 성적은 전인, 인성 교육을 바탕으로 한 뒤 향상되어야 진정한 교육이 될 것이다. 인성이 바탕 된 아이들에게는 우수한 교수진(敎授陣)만 갖춰준다면 저절로 명문학교로 육성 될 것이다. 인성이 안 된 학생들은 공부잘해도 ‘인재(人才)가 되지 못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 데려다 놓고 공부만 가르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우선 실력있는 학생들을 책임지고 끌어 올 것이다. 올해도 나주 인근 지역에서 10여명을 데려왔다. 이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기숙사와 급식을 제공할 것이다. 이국장 : 명문학교 육성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대안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실력 있는 선생님들의 초빙이 최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박이사장 : 내 자식이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배우게 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욕심이다. 우리 아이들의 맑은 영혼을 채워줄 좋은 선생님을 모셔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원에 상관없이 모셔올 것이다. 우선 행정실 8급은 채용해서 결원이 생기면 정식 교사로 채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을 재단에서 지급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과원이 되더라도 우수한 교사를 확보할 작정이다. 이국장 : 특히 명문교 육성을 위해서는 우수 학생들의 유치가 중요합니다. 영산포중·고등학교에 우수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는 방안은 있습니까. 있다면 구체적으로 말해주십시오. 박이사장 : 장학금 지급은 1차적인 방법이다. 이미 올해 신입생을 대상으로 장학금 2,500만원을 지급했다. 그 이전에 우리학교의 인근 학교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우수 인재를 확보해 나가고 있다. 올해 영산포초, 영강초, 북초, 중앙초등학교 등 4학교에 4천만원을 지원했다. 명목은 결식아동을 없애기 위한 급식지원이었지만 우수 인재 확보 방안과 연계한 학생 예우의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다. 이국장 : 학생들의 급식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시는데.. 박이사장 : 학생들을 내 자식처럼 여긴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밥 못먹고 공납금 못내는 자식이 있다면 그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돈 받지 말아야 한다. 결식 아동은 단 한사람도 없어야 한다. 선생님들께 이런 학생들이 없도록 철저히 조사해 달라 당부했다. 내 사비를 들여서 이 아이들이 당당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사는 모습도 확인해보고 도움이 필요한 학생인지 분명히 살펴봐 줄 것을 당부했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생활 모습을 충분히 알아두는 것도 교육의 중요한 요소 아닌가? 이국장 : 근래에 교장 문제로 이사장님에 대한 일부 학부형들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학부형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장문제와 관련해 이제까지의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박이사장 : 여러 할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았던 분 욕되게 하고 싶진 않다. 내 아이를 맡길 자격이 없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염불보다는 잿밥’이었다. 안타깝다. 필요한 경우가 있다면 모든 이야기 해 드릴 수 있다. 언론에 노출된 것만도 초과수당문제라든가 급식비 횡령 같은 것들이 있다. 그 최고 책임자는 교장이다. 이국장 : 지역사회와 일부 학부형들이 기존 선생님들의 교사로서의 자질과 실력 등에 의외로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있습니까. 박이사장 : 공부를 하지 않는 교사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고 도태시킬 수 밖에 없다. 교사가 뒤떨어지면 학교가 뒤떨어지고 그것은 경영자인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 교사가 가르치는 것 외에 다른 부분에서 부지런한 것도 인정할 수 없다. 일부 선생님 중에 외부 단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계신분도 있고 중요한 사업을 하시는 분도 있다. 그분들은 그 일에 충실하셔야 한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 외에는 어느 것도 학생을 위한 일이라 볼 수 없다. 나는 병원의 경영도 포기한 상태다. 교사는 학교와 학생에만 전념해 달라. 원활한 교육을 위해 부전공도 준비해주길 바란다. 나는 학생의 목소리, 학부형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다행이 학생들이 잘 따라오고 있다. 교사들이 달라지고 있으니까 학생들도 달라지고 있다. 처음 왔을 때 주머니에 손 떡 집어넣고 무뚜뚝하게 인사하던 아이들이 요새는 내가 나타나면 바삐 손 빼고 안녕하세요 한다. 운동장이나 길가에 마구 휴지 버리던 버릇도 고쳐지고 있고 교내에서 싸움 한 번 없다. 몸소 보여주면서 가르쳐야 한다. 교사들이 건성으로 인사받으면 학생들도 건성으로 인사하게 된다. 이런 습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디테일한 부분이다. 이국장 : 영산포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취임 후 지역사회에 이사장님에 대한 궁금증이 많습니다. 성장과정을 비롯한 이사장님의 개인사를 들려주십시오. 박이사장 : 내 고향은 지금 동신대 자리이다. 선친께서 그곳에서 과수원을 하셨다. 중2때 서울로 갔다. 그런데 내가 우리 집안의 복덩이였었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 집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는데 내가 서울로 올라간 1년 사이, 그러니까 내가 집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집안이 갑자기 기울어지기 시작해 과수원을 다 팔아야 했다. 갑자기 집에서 지원해주는 돈이 없어졌으니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검정고시를 보아 서울의 선린상고에 들어갔다. 일하면서 학교 다니고 현재 홍익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수도공대를 다녔다. 그것도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등록했다가 야간으로 진학했고 군대를 다녀온 뒤 3학년으로 편입학해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전기회사에 취직이 됐는데 1인3역을 했다. 회사 사장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아이를 가르치는 입주 가정교사를 했고 회사일에도 충실했다. 그때 사장이 나를 좋게 여겨 특별히 해줄 것이 없느냐 묻길래 아버지의 과수원을 다시 사 달라 청했고 그래서 그 과수원을 다시 구입할 수 있었다. 사실 이때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당시 회사 사정이 내가 없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잘 이겨내게 돼 과수원도 다시 구입해주시고 내게도 회사를 차려 볼 것을 권유해 ‘동양전기’라는 공장을 하나 내게 돼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첫 사업은 실패였다. 아직 공장이 자리를 잡기 전에 석유파동이 났고 사채동결이라는 정책이 급작스럽게 실시되면서 재료값 올라가고 운영자금 회전은 안되고 쉽게 손들고 말았다. 빈 손으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과수원자리에 어린이 집을 설립했다. 어린이 집은 순조롭게 경영이 되었다. 특히 육영재단(1970녀내 어린이 지원 재단)의 지원이 많아 쉽게 운영해 나갔다. 그런데 다시 1975년 육영수여사의 저격 사건이 발생하자 육영재단의 활동이 딱 중단됐다. 육여사가 육영재단의 이사장이었기 때문이다.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1975년 과수원을 다시 팔고 서울로 올라갔다. 동양전기를 다시 시작해 약간의 돈을 모았고 유통·서비스분야 사업을 시작해 적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80년대 초반 중요한 사업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자본이 마련되자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하고 싶었다. 86년 전문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그런 중에 1987년 여수 성심병원이 경영자를 찾았다. 당시 병원을 하면 보건전문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다. 학교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병원을 인수했는데 그후 10년 이상 고생 많이 했고 돈도 많이 들었다. 5년전에 신정훈나주시장이 영산포고등학교에 대해 말했다. 그때는 골프장 사업도 시작한 때라 5년 후에 봅시다 했는데 꼭 4년만에 학교로 왔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국장 :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2009년 새 학기를 맞아 지역사회 교육계와 영산포중·고등학교 학부형들 및 지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박이사장 : 나는 나이가 많아 정치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다. 학교를 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고향에서 봉사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왔는데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학부형 원하는 바가 명문학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니 나는 그렇게 할 것이며 자신이 있다. 내게 믿음을 주면 된다. -------------------------------------------------------------------- 서구(西丘) 박순용(朴順龍) 서구의료재단 명예회장
·전남 나주시 송현동 生 ·수고공과대학(현 홍익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연구과정 수료 ·現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동문회 부회장 ·現 홍익대학교 총동문회 부회장 ·現 법무부 범죄예방 여수협의회 고문 ·現 대한적십자사 전국 대의원총회 대의원 ·現 전라남도 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現 의료법인 서구의료대단 성심종합병원 재단 명예회장 ·現 (주)여수관광레져(City Park C.C) 대표 회장 ·現 2012년 세계박람회 지방유치위원회 위원 ·現 KBC시청자위원회 위원장 ·現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65.12.23 제31사단장 최우수 표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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