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정(六停)은,
첫째는 대당(大幢)이었다. 진흥왕 5년(544)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자백(紫白)이었다.
둘째는 상주정(上州停)이었다. 진흥왕 13년(552)에 설치하였는데, 문무왕 13년(673)에 귀당(貴幢)으로 고쳤다. 금(衿)의 색깔은 청적(靑赤)이었다.
셋째는 한산정(漢山停)이었다. 본래는 신주정(新州停)이었다. 진흥왕 29년(568)에 신주정을 혁파하고 남천정(南川停)을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26년(604)에 남천정을 혁파하고 한산정을 두었다. 금(衿)의 색깔은 황청(黃靑)이었다.
넷째는 우수정(牛首停)이었다. 본래는 비열홀정(比烈忽停)이었다. 문무왕 13년(673)에 비열홀정을 혁파하고 우수정(牛首停)을 두었다. 금(衿)의 색깔은 녹백(綠白)이었다.
다섯째는 하서정(河西停)이었다. 본래는 실직정(悉直停)이었다. 태종왕 5년(658)에 실직정을 혁파하고 하서정(河西停)을 두었다. 금(衿)의 색깔은 녹백(綠白)이었다.
여섯째는 완산정(完山停)이었다. 본래는 하주정(下州停)이었다. 신문왕 5년(685)에 하주정을 혁파하고 완산정(完山停)을 두었다. 금(衿)의 색깔은 백자(白紫)였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직관/신라/군사제도/군부대의 칭호/9서당
9서당(誓幢)은,
첫째는 녹금서당(綠衿誓幢)이었다.
진평왕 5년(583)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다만 서당(誓幢)이라고만 하였다가, 35년(613)에 녹금서당으로 고쳤다. 금(衿)의 색깔은 녹자(綠紫)였다.
둘째는 자금서당(紫衿誓幢)이었다.
진평왕 47년(625)에 처음으로 낭당(郞幢)을 설치하였다가 문무왕 17년(677)에 자금서당으로 고쳤다. 금(衿)의 색깔은 자록(紫綠)이었다.
셋째는 백금서당(白衿誓幢)이었다.
문무왕 12년(672)에 백제민(百濟民)으로 당(幢)을 만들었다. 금(衿)의 색깔은 백청(白靑)이었다.
넷째는 비금서당(緋衿誓幢)이었다.
문무왕 12년(672)에 처음으로 장창당(長槍幢)을 설치하였다가 효소왕(孝昭王) 2년(693)에 비금서당으로 고쳤다.
다섯째는 황금서당(黃衿誓幢)이었다.
신문왕 3년(683)에 고구려민(高句麗民)으로 당(幢)을 만들었다. 금(衿)의 색깔은 황적(黃赤)이었다.
여섯째는 흑금서당(黑衿誓幢)이었다.
신문왕 3년(682)에 말갈국민(靺鞨國民)으로 당을 만들었다. 금(衿)의 색깔은 흑적(黑赤)이었다.
일곱째는 벽금서당(碧衿誓幢)이었다.
신문왕 6년(686)에 보덕성민(報德城民)으로 당을 만들었다. 금(衿)의 색깔은 벽황(碧黃)이었다.
여덟째는 적금서당(赤衿誓幢)이었다.
신문왕 6년(686)에 또 보덕성민으로 당을 만들었다. 금(衿)의 색깔은 적흑(赤黑)이었다.
아홉째는 청금서당(靑衿誓幢)이었다.
신문왕 7년(687)에 백제의 잔여민[百濟殘民]으로 당(幢)을 만들었다. 금(衿)의 색깔은 청백(靑白)이었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직관/신라/군사제도/군부대의 칭호/10정
10정(停)<혹은 삼천당(三千幢)이라고도 하였다.>은,
첫째는 음리화정(音里火停)이었다.
둘째는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이었다.
셋째는 거사물정(居斯勿停)이었다. 금(衿)의 색깔은 청색이었다.
넷째는 삼량화정(參良火停)이었다.
다섯째는 소삼정(召參停)이었다.
여섯째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었다. 금(衿)의 색깔은 흑색이었다. 일곱째는 남천정(南川停)이었다.
여덟째는 골내근정(骨乃斤停)이었다. 금(衿)의 색깔은 황색이었다.
아홉째는 벌력천정(伐力川停)이었다.
열째는 이화혜정(伊火兮停)이었다. 금(衿)의 색깔은 녹색이었다.
모두 진흥왕 5년(544)에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직관/신라/군사제도/군부대의 칭호/
3무당(三武幢)은
첫째는 백금무당(白衿武幢)이었다. 문무왕 15년(675)에 설치하였다.
둘째는 적금무당(赤衿武幢)이었다. 신문왕 7년(687)에 설치하였다.
셋째는 황금무당(黃衿武幢)이었다. [신문왕] 9년(689)에 설치하였다.
계금당(衿幢)은 태종왕(太宗王) 원년(654)에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계색(色)이었다.
급당(急幢)은 진평왕(眞平王) 27년(605)에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황록(黃綠)이었다.
사천당(四千幢)은 진평왕 13년(591)에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황흑(黃黑)이었다.
개지극당(皆知戟幢)은 신문왕(神文王) 10년(690)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흑적백(黑赤白)이었다.
39여갑당(三十九餘甲幢)<경여갑(京餘甲)·소경여갑(小京餘甲)·외여갑(外餘甲) 등을 말하는데 그 수는 자세하지 않았다.>은 금(衿)이 없었다
(39개의 여갑당을 말한다. 여갑당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를 법흥왕 이전에 중앙에 두어진 군단으로서 후에 京餘甲幢·小京餘甲幢·外餘甲幢 등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는 견해(盧瑾錫, 〈新羅中古期의 軍事組織과 指揮體制〉, 《韓國古代史硏究》 5, 1992, 261∼262쪽)도 있다. 반면에 ‘十九’를 衍字로 보아 『三餘甲幢(京餘甲幢·小京餘甲幢·外餘甲幢)』으로 고쳐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앞의 논문, 235∼245쪽). 그렇지만 細注에 ‘그 수는 자세하지 않다’고 하는 것에 주목하면 여갑당의 수는 셋이 아니라 그 이상일 수가 있다. 따라서 39라는 수는 굳이 衍文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칠당(仇七幢)은 문무왕(文武王) 16년(676)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백색이었다.
계당(二幢)<혹은 외계(外)라고도 하였다.>은, 첫째는 한산주계당(漢山州幢)이었다. 태종왕 원년(654)에 설치하였다. 둘째는 우수주계당(牛首州幢)이었다. 문무왕 12년(672)에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모두 계색(色)이었다.
3변수당(三邊守幢)<또는 변수(邊守)라고도 하였다.>은 신문왕 10년(690)에 설치하였다. 첫째는 한산변(漢山邊)이었다. 둘째는 우수변(牛首邊)이었다. 셋째는 하서변(河西邊)이었다. 금(衿)은 없었다.
신삼천당(新三千幢)<또는 외삼천(外三千)이라고도 하였다.>은, 첫째는 우수주삼천당(牛首州三千幢)이었다. 둘째는 나토군삼천당(奈吐郡三千幢)이었다. 문무왕 12년(672)에 설치하였다. 셋째는 나생군삼천당(奈生郡三千幢)이었다. [문무왕] 16년(676)에 설치하였다. 금(衿)의 색깔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직관/신라/군사제도/휘장
대장군화(大將軍花)는 세 쪽이었다. 길이는 아홉 치, 너비는 세 치 세 푼이었다.
상장군화(上將軍花)는 네 쪽이었다. 길이는 아홉 치 다섯 푼이었다.
하장군화(下將軍花)는 다섯 쪽이었다. 길이는 한 자(尺)였다.
대감화(大監花)는 큰 호랑이의 낯가죽[虎頰皮]으로 [만들었다]. 길이는 아홉 치, 너비는 두 치 다섯 푼이었다. 방울은 황금이었는데 둘레가 한 자 두 치였다.
제감화(弟監花)는 곰의 낯가죽[熊頰皮]으로 [만들었다]. 길이는 여덟 치 다섯 푼이었다. 방울은 백은(白銀)이었는데 둘레가 아홉 치였다.
소감화(少監花)는 수리 꼬리[鷲尾]로 [만들었다]. 방울은 백동(白銅)이었는데 둘레는 여섯 치였다.
대척화(大尺花)는 소감과 같았다. 방울은 철(鐵)이었는데 둘레는 두 치였다. 군사당주화(軍師幢主花)는 큰 호랑이 꼬리[虎尾]로 [만들었다]. 길이는 한 자 여덟 치였다.
군사감화(軍師監花)는 곰의 가슴 가죽[熊胸皮]으로 [만들었다]. 길이는 여덟 치 다섯 푼이었다.
대장척당주화(大匠尺幢主花)는 곰의 앞다리 가죽[熊臂皮]으로 [만들었다]. 길이는 일곱 치였다.<또는 중치 호랑이의 낯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길이는 여덟 치 다섯 푼이라고도 하였다.> 방울은 황금인데 둘레는 아홉 치였다.
삼천당주화(三千幢主花)는 큰 호랑이 꼬리로 [만들었다]. 길이는 한 자 여덟 치였다.
삼천감화(三千監花)는 수리의 꼬리로 [만들었다].
여러 착금당주화(諸著衿幢主花)는 큰 호랑이 꼬리로 [만들었다]. 길이는 한 자 여덟 치 다섯 푼이었다.
화(花)는 맹수의 가죽이나 수리의 깃으로 만들어서 깃대 위에 달았다. 이른바 표범의 꼬리[豹尾]와 같은 것이었다.
지금[고려] 사람들은 이를 면창장군화(面槍將軍花)라고 하나 명칭[物名]은 말하지 않았고, 그 수도 혹은 많고 혹은 적어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방울(鈴)은 길을 갈 때 짐을 실은 말[마바리] 위에 달아 두는 것이었다. 혹은 탁(鐸)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직관/신라/군사제도/여러 군관/장군
여러 군관(諸軍官)
장군(將軍)은 모두 36명이었다.
대당(大幢)을 맡은 [장군은] 4명, 귀당(貴幢)에 4명, 한산정(漢山停)<신라 사람들은 영(營)을 정(停)이라고 하였다.>에 3명, 완산정(完山停)에 3명, 하서정(河西停)에 2명, 우수정(牛首停)에 2명이었다.
비금감(緋衿監)은 48명이었는데 [비금]당(幢)을 거느리는 자는 40명이었고, 기병[馬兵]을 거느리는 자는 8명이었다.
삼국사기 권제38 (잡지 제7) 직관/신라/중앙 정치제도/병부
병부(兵部)영(令)은 1명이었는데 법흥왕(法興王) 3년(516)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진흥왕 5년(544)에 1명을 더하였으며, 태종왕(太宗王) 6년(659)에 또 1명을 더하였다. 관등이 대아찬에서 태대각간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또 재상(宰相)과 사신(私臣)을 겸할 수 있었다.
첫댓글 덕분에 공부좀 했다. 幢 이라는 것이 停과 같은 의미로 하나의 부대 또는 군단으로 쓰였고 별도의 계급칭호로도 쓰였더구나. 부대이름으로 부대위치나 부대 종류를 가늠해 볼수도 있고 말이다. 깃발이나 색에 대해서는 참고로 알아라고 넣었다.
이럴수가! 감사합니다... 지금 쭉 보니까 옷깃의 색깔로 부대 복식을 구분지어 놓았군요!!! 복식이 전체적으로 틀려서 싸울때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는데...호오 재밌는 궁금증도 풀리고 감사!! 이많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