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심이 강하고, 기존의 관습과 제도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을 두고 ‘반골정신’이 있다 라고 말한다.
보수적 관점에서는 유지해오던 ‘체계’를 흔드는 모양이 되니 거부감이 있고 부정적으로 판단하겠지만, 격변의 시대에는 혁명가이자 변혁가로서 인정받기도 하는 것이 ‘반골’이라 할 수 있다.
‘반골(反骨)’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그 유래는 위,촉,오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 었던 ‘삼국지’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촉나라의 장수 ‘위연’과 관련된 것이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알려진 ‘위연’은 유비의 총애를 받은 장수 였다. 하지만 제갈량은 위연을 신뢰하지 않았고 언젠가는 반역을 꾀할 것으로 믿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위연의 골상을 보아하니 뒤통수에 반골이 있습니다. 나중에 배반할 것이 틀림없으니 미리 화근을 제거해야 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사실 제갈량이 위연을 경계한 것은 반역이 문제가 아니었다. 위연은 위나라에 맞서 연전연승을 했던 용장 (勇將) 이었음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던 것은 그의 성품이 너무 거칠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이 무시되면 위연은 제갈량도 험담하고 다녔다. 아무리 제갈량이라해도 명령이 무시하고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위연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정사 삼국지의 위연에 대한 서술은 온도차가 있다. 《삼국지(三國志) · 촉서(蜀書) 〈위문장전 (魏文長傳)〉》에서는 『원래 위연이 북으로 가 위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남으로 되돌아온 뜻은 양의 등을 제거 하기 위함이었다. 평상시 장수들의 능력이 (위연보다) 못하므로 분명 자기가 제갈량을 대신하는 쪽으로 논의가 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본뜻은 이와 같았을 뿐 배반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위연은 반역을 꾀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연이 반역자의 대명사가 되고, ‘반골’의 상징이 된 것은 《삼국연의(三國演義)》에 기인한다.
역사적 해석과 별개로 제갈량이 ‘반골’의 근거로 본 것은 ‘튀어나온 뒤통수’ 였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베개가 닿는 침골(寢骨)이 발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뭔가 미심적은 면이 있다. 뒤통수가 튀어나온 뒤짱구 머리를 ‘저항적’ 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 타입은 지능이 높고 똑똑한 면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입바른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로 도전과 저항의 상징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뒤통수의 위치에 따른 관법이다.
튀어나온 부위가 침골(寢骨, 머리 중앙 부분)이 아니라 아래쪽이라는 것이다. 관상학의 골상편에서 머리 아래쪽이 튀어나온 것을 두고 ‘음골(陰骨)’이 발달했다고 표현한다. 음골(陰骨)은 활동성보다는 종교(신앙), 철학, 신비학등에 관심을 많이 편인데 이 역시도 ‘반골’로서의 의미로는 아쉬운 점이 있다.
흥미롭게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또 다른 반골의 대상이 등장한다. 위나라의 건국한 ‘조조’가 등용한 ‘사마의’ 또는 ‘사마중달’로 불리우는 그 인물이다. 사마의에 대한 조조의 판단은 의심의 연속이었다.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속에 다른 큰 뜻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마의가 갖고 있는 재능이 아까워 내치지도 못하고 가까이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사마의를 등용될 당시 [이리처럼 목만 돌려 뒤를 볼 수 있는 반골상] 이라는 주변의 말을 듣고 조조는 그를 시험해 보았다. 조조는 사마의를 불러 앞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게 했다. 그랬더니 정말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목을 180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조조는 아들 조비에게도 “사마의는 다른 사람 밑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니 각별히 경계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반골’은 이리(늑대)와 같이 낭고(狼顧, 늑대처럼 두리번 거리는 것을 의미) 를 넘어서 목이 뒤편 까지 돌아가는 것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낭고 (또는 곁눈질) 만으로도 진지하지 못하고 겉다르고 속다른 심성, 교활함, 배신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 경우는 반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 된다. (게다가 목이 180도 돌아가는 정도라고 하니)
그러나 조비는 사마의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그를 감싸주었다. 사마의는 재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직무에 충실했기 때문에 조조도 조금씩 의심을 풀었다.
조비의 뒤를 이어 위나라 황제가 된 명제 조예도 사마의를 중용했다. 명제가 임종을 앞두고 사마의를 찾아 조상(曹爽)과 사마의에게 함께 태자를 보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사마의는 기회를 엿보아 조상을 죽이고 그의 배후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
이때 남녀노소 수많은 조씨가 목숨을 잃었는데, 심지어 출가한 조씨 가문의 딸들도 화를 면치 못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조상이 사마의를 적대시했기 때문이라지만, 사마의에게는 제갈량이나 곽자의와 같은 충성심과 혈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마의가 죽은 후 그의 권력은 아들 사마소가 그대로 이어받았다. 사마소는 그 아버지보다 더 교활하고 충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부하를 시켜 황제를 죽이고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웠다.
그리고 부하에게 죄를 씌워 삼족을 멸했다. 사마소의 권력은 다시 그의 아들 사마염에게 이어졌다. 사마염은 대권을 이어받은 지 넉 달 만에 조씨 황제를 폐위 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사마씨 가문은 삼대째에 이르러 천하를 얻고 서진(西晉)을 세웠다.
그러나 서진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왕위를 둘러싼 내부 세력 다툼이 계속 이어지던 중 외부 침입을 막아내지 못해 결국 37년만에 막을 내렸다. 얼마 후 사마의의 증손자 사마예가 남쪽으로 이동해 ‘동진’을 세웠다.
후에 동진 명제가 대신들에게 사마씨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느냐고 묻자, 이에 대신들은 사마의가 조상을 죽인 일, 사마소가 조씨 황제를 죽이고 허수아비 황제를 세운 일 등을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명제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며 말했다고 한다.
“그런 진(晉)나라가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느냐?”
역사 기록을 보면 사마의의 자손들은 대부분 잔인해서 쉽게 사람을 죽이곤 했는데, 아마도 반골상이었던 사마의의 유전자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참고 자료] 증국번의 처세 外
[ 관명 관상학 연구원 / 010 3764 43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