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터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간이역에서부터 친구들은 모임 장소를 내게 물었다. 이곳을 떠난지 이 년이 되어가지만 마실터란 곳은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곳이었다. 군산방송국, 신풍초등학교, 그리고 한방병원이 있는 곳 주변으로 왈츠로 꺾어지는 골목에 위치한 그저 허름한 술집이었다. 삼학동 주변의 산에 산에란 곳이 문을 닫음으로해서 다시 찾은 아지트였다. 매번 초등학교 동창들이 찾아가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새롭게 건태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전화를 걸어와 새삼스럽게 반가웠다. 서울에 살지만 한 번인가 만나고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설을 앞두고 언제 한 번 보자는 메시지를 날렸는데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명절에 내려가면 친구들 모임때 연락을 한다고.
중년의 여인들과 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초등학교 친구들은 단연 숫자적으로 많았다. 원래 아홉 명의 용띠들이 모며 만든 모임이었는데 두 명이 빠지고 요즘은 일곱 명의 용이 모이고 있었다. 빙둘러 앉은 곳, 뒤로는 난로와 함께 얼음을 넣은 맥주통이 놓여 있었고 바닥은 마루였다. 우리들은 오랜만에 만나 서로 악수를 하면서 정담을 나누었다. 매번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지만올해는 특히 어린시절을 잘 기억하는 또 다른 친구와의 만남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초등학교 육학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생각하면, 그 확률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음을 생각하면서 서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세월보다 두 배의 세월히 흘러버린 중년의 나이임에도 그 어린 시절의 일들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었다.
연탄재를 나르던 친구들, 우리는 처음 학교 운동장에서 돌을 골라내고 또 연탄재를 날라 비오는 날 질척거리는 운동장에 깔곤 했는데 그 때 손바닥에 그어주던 바를 정자의 글씨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골목마다 연탄재를 들고 오던 학교 운동장행이었다. 달고나와 원료라고도 부르던 찢어먹기 쫀드기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였다. 비석치기를 하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오징어와 해바라기 게임을 즐기던 아이들은 또 구슬치기와 양니 따먹기, 딱지치기와 껌종이 병뚜껑 따먹기까지 수없이도 무언가를 모으는 버릇이 있었다. 앵까며, 삼각형, 팔방, 고무줄, 자치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늘이개놀이 칼싸움, 연날리기, 쥐불놀이 등등 갖가지 놀이도 많았다.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그렇게 미묘하게 사랑의 감정이 피어나던 시절, 우리는 막 성에 눈을 뜨고 있던 시절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걸고도 상대의 숨결을 느낄 정도로 낯선 이성으로 여자 친구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때에도 개울에서 수영을 하다 들켜 팬티 차림으로 선생님에게 벌을 서기도 했을 뿐 아니라 또 매점에서 노트를 훔치다 걸려 교무실 복도에서 내내 벌을 서기도 했다. 그 때엔 무언가를 훔쳐내는 일들이 무슨 유행처럼 번졌다. 학교 앞 문구정에서 물건을 훔치다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말을 듣던 아이도 있었다. 청과물시장으로 과일을 훔치러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그런 일을 뚜룩질이라고 부르며 무슨 영웅적인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스릴을 즐겼다.
유난히 얼굴이 하얗고 이쁘던 아이들에 대한 미묘한 감정은 지금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설레이는 감정으로 남아 있다. 수양버들 길게 뻗어내리던 학교 후문,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쁘장하던 아이를 좋아하던 친구는 그 친구 집에서 할머니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던 날을 잊지 못해 했다. 중학교 시절인가 한 번 길거리에서 만났지만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려주었을 뿐 반가운 인사도 나누지 못하며 헤여졌던 그 어린 시절의 친구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지금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되었을 나이지만, 아직 그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소녀적 모습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탁구부, 배구부 그리고 축구부에 대한 이야기는 옛날의 일들을 더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탁구부 친구들, 성숙이 빨랐던 처녀 같은 여자애들, 그리고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그 포지션을 말하는 건태란 녀석의 기억력으로 해서 더더욱 당시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해망동 얼음이 쏟아져 내리던 부둣가와 배타는 곳으로 향해 뛰어가던 어린 친구들, 도시의 곳곳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어울려 다니면서 놀았던 도시의 구석구석이었다. 한 친구가 새로 나와 이전의 이야기를 하자 서로가 몰랐던 일들을 털어놓으면서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 교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엔 논두렁과 맞닿은 변두리 학교였는데 도시화 속에서 지금은 다시금 아파트가 밀집한 인근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면서 폐교될 정도로 아이들이 급격이 줄어들었다는 학교였다.
우리는 명절이면 그렇게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추억여행을 떠난다. 1990년으로부터 시작을 해 우리가 만난지도 벌써 십 육년을 넘어섰다. 처음엔 김지하의 똥바다를 말하며 술을 마셨다. 은장옥, 별미집 뺑덕이네 등등 우리가 만나온 술집도 다양했다. 지금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아가고 그 하는 일도 다양한 친구들을 통해 우리는 서로가 늙어가는 모습을 확인한다. 박사도 있고 또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도 있고 방송일을 하는 친구와 한전직원이나 공무원도 있다. 다들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고 아이를 하나 밖에 두지 못한 친구들은 늦게라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망설이기도 하고 빠른 친구는 벌써 첫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했다.
군산에 머물 때와 또 다르게 멀리서 돌아와 군산에서 어릴 적 친구를 만나는 기분은 또 남달랐다. 반가움과 함께 내가 지내온 시절을 서로 나누면서 다시금 그 세월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흐뭇하기도 하고 그 때에 그토록 설레였던 일들이 지금 나이들어가면서는 그저 툴툴 널어내며 옛날 이야기를 할 수 있다었다. 명절이면 꼭 찾아오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어느 덧 대학생 때로부터 십 칠년이 되었다. 사이트 하나를 개설한 후부터 서서히 몇 명씩 더 연락이 되고 조금씩 서로의 소식을 나눌 수 있게 되자 다행이었다. 그토록 서로 연락 사무실을 만들자는 둥 여러가지 제안을 많이 했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또 연락을 할 중심이 없어 그저 말로만 그치고 말았었다.
마실터를 빠져나올 때쯤, 친구들과 굳은 악수를 하면서 또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할 것과 새해 복을 기원했다. 초등학교 친구들 중 몇 몇은 다시 또 삼학동 시실리로 향해 그곳에서 또 겹치는 친구들을 만났다. 과부의 술공장을 그만둔 친구는 새로 지은 컨트리 클럽으로 취직을 한다고 했다. 술공장에서 무리한 접대에 속을 많이 버렸다는 친구는 더 이상 술공장에 남아 있다가는 몸이 망가지겠다면서 서둘러 일을 그만두었는데, 뭔가가 어그러져 가기로 한 회사의 책임자가 너무 화려한 경력을 이유로 그를 보류시켰다고 했다. 아직은 대기상태에 있는데 그는 그것이 사장과 책임자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사이가 좋아지면 다시금 자신을 채용할 것이라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실리의 밤은 깊어가고 다음날 차례를 지내러 가야 하는 길이기에 서둘로 귀가했다. 주름이 많은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 후배라고 했는데 이야기 도중 욕을 섞어가면서 실감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트랜스젠더 혹은 게이들의 생활이야기며, 또 법인카드의 접대 이야기까지. 하지만 중요한 건 어릴 적 철모르던 때 서로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만나고 또 누군가는 그런 그를 좋아하고 서로 인연이 되지 않고 서로 얼키고 설킨 만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 변해버린 얼굴을 보면서 실망도 하지만 옛날 이야기를 통해 그 훈훈했던 시절, 그 때는 당당히 말못하고 서로 감정을 붉히던 이야기도 지금에 와서는 떳떳하게 이야기를 했다. 시실리엔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주름진 후배의 목소리가 커지더니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거의 이십 년이 넘은 세월 동안에 만난 친구들은 그저 텔레비전의 프로처럼 그저 반갑다 친구야 하는 느낌 그것이었다. 악수를 하고 온갖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것이었다. 마실터와 시실리, 한밤에 돌아오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다시금 올 설, 변해가는 우리네 모습과 학교교실에서 만난 친구들처럼 반가움과 함께 그 안에서 변해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으로 어릴 적 거닐었던 길들이 아스라히 택시의 창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