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9)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禍其始此矣
환란은 여기서 시작된다.
광화문에는 두 개의 동상이 있다. 하나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동상이고, 다른 하나는 칼을 잡은 이순신(李舜臣)의 동상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에서부터 각 분야의 걸쳐 혁혁한 업적을 이루도록 한 성군(聖君)이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때에 일본 수군을 서해로 나오지 못하게 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이 두 분은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인물이고 그래서 광화문에 그 상을 세운 것이다.
역사는 지나간 일이고, 지나간 일은 다시 올 일 없는데 왜 지난 시절의 역사를 기억하려고 할까? 아마도 지난 시절을 기억하면서 그 기억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지난 일과 똑같은 일은 반복하여 일어나지 않지만, 그때 입었던 옷을 지금 것으로 바꾸고 그때 사용한 도구를 오늘날 것으로 바꾸어 놓고 보면 놀랍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사적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적 맥락 없이 그저 과거를 치켜세우고 자랑하려 드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우리 조상이 과거에 지금 중국의 산동 반도까지 지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정말일까 아닐까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면 자랑스럽기보다는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의 능력이 과거에 그렇게 훌륭했는데 지금은 한반도 안에 갇혀 있으니, 마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10만 평의 땅을 다 팔아먹고 겨우 1만 평 유지하는 상황과 같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만 평으로 가지고 있던 조상의 후예는 그것을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 팔아먹은 셈이니, 우리는 조상이 물려 준 것을 다 팔아먹은 불초(不肖) 후손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흥하는 집안은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낫고, 아들보다 손자가 더 나을 경우이다. 그 반대로 선조가 아무리 훌륭하여도 그 후손이 선조의 업적을 깎아 먹었다면 그것은 망해 가는 집안이 분명하다. 그래서 산동 지역을 우리의 옛 땅이라는 주장을 듣다 보면 우리는 망해 가는 집안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에 부끄럽다고 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세종대왕과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보는 태도는 세종대왕을 닮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보노라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즉 전철(前轍)을 밟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는 성공한 역사도 공부할 필요가 있지만 실패한 역사도 반드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과거 역사 가운데 실패한 어느 집안 이야기를 해 보자. 후한(後漢) 말은 구 왕조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등장하기 위하여 소용돌이치던 시기였다. 처음에 대단한 기염을 토하였다가 후에는 무너져 버린 집안도 있고 물론 그 반대의 인물도 있다. 후한말 최고의 정점에 올라갈 정도였다고 여지없이 망해 버린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원소(袁紹)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후한말 발호하던 10상시(常侍)의 목을 베고 동부지역의 강자로 등장하여, 당시에 서부지역에서 장안으로 달려온 동탁(董卓)에 대응(對應)하려는 동부지역 강자들이 힘을 합치자고 하면서 원소를 맹주(盟主)로 추대하였다. 그 후에 서부의 강자 동탁(董卓)과 여포(呂布)가 무너졌으니 동부지역의 맹주인 원소는 권력을 움켜쥘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동탁도 죽고, 그 세력인 여포도 죽고 나서 동부지역에서 많은 세력이 등장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단연 으뜸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신흥(新興)하는 조조(曹操)에게 관도(官渡)에서 패전하면서 화를 못 참고 분해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 이 시기를 기록한 자치통감을 보자.
원소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원담(袁譚)·원희(袁熙)·원상(袁尙)이다. 원소의 후처 유씨(劉氏)가 자기 소생인 원상을 총애하여 자주 원소에게 칭찬하니 원소가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아직 이를 드러내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원소는 마침내 자기의 장자(長子)인 원담을 죽은 형 원성(袁成)의 양자로 보내어 청주(淸州, 산동성 북부) 자사로 삼아 내보냈다. 형에게 양자로 보낸다는 구실로 장자를 쫓아 버린 것이다. 이를 본 저수(沮授)가 간하였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1만 명이 토끼를 몰아도 한 사람이 그것을 잡으면 욕심내던 사람이 다 중지하는 것은 몫이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원담이 장자(長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그를 물리쳐서 바깥에 거주하게 하면 화란(禍亂)의 시작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원소의 참모인 저수가 원소 집안에 화란(禍亂)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면서 충언(忠言)한 것이다. 그러나 저수의 이 말에 원소는 “나는 여러 아들에게 각각 한 주씩 점거하게 해서 그들의 능력을 보고자 하는 것이오.”라고 변명하였지만. 막내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 주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고, 다시 고치지 않고 그는 죽었다.
이러한 원소의 결정이 원씨 집안에 화를 불러올 것은 분명하니 설사 아버지 원소가 못난 결정을 했다고 하여도 그 아들들이 제대로 단합하였다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세력이 아직은 조조를 능가하였으니 다시 패권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아버지의 뒤를 물려받은 원상은 형 원담의 세력이 커질까 걱정한 나머지 조조를 막으려고 장비를 지원해 달라는 형 원담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자기 형의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러자 화가 난 형 원담은 결국 조조에게 항복한다. 아버지를 이어 실권을 쥔 원상이 속으로 형 원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다고 하여도 조조를 막기 위하여 장비(裝備)를 보태달라고 했을 때 대의(大義)를 위하여 보태 주었어야 옳다. 또 원담도 동생이 자기를 지원해 주지 않는다고 하여 적인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집안을 망치는 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눈앞의 이해만 보다가 망하는 길로 간 것이다.
결국 원소가 죽은 후에 저수의 말은 사실로 나타났다. 원상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지만, 형인 원담과의 다툼으로 결국 원담과 원상, 그리고 다른 형제인 원희마저 조조에게 격멸되고 만다. 아버지는 세 아들이 싸움하도록 만들었고, 이를 이어받은 세 아들은 아버지의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조조에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남겼다. 이들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원수 조조에게 모든 것을 다 내준 꼴이 되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원소의 흔적은 아들 대에 와서 깡그리 무너졌다.
원소의 어리석은 조치와 그 아들들의 행동을 보면서 지금 우리 정치권에서 원상과 원담이 했던 짓거리가 매일 같이 벌어지지는 것 같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적지 않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싸움이 그렇고, 임진왜란을 불러온 당쟁이 그렇다. 6.25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실패한 전철(前轍)이다. 그런데 멸망했던 그 옛길을 국회의원들이 따라가고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과 문화인들은 광화문에 세워진 세종대왕의 상을 보면서 그의 창의정신을 본받아 이미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은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고생시켰고 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게 하였던 당쟁을 되풀이하고 있다. 저수의 말대로 우리의 화란은 여기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몇명이나 알고 있을까?
첫댓글 아주 좋은 역사평론입니다. 원소와 같은 예를 고구려의 연개소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의원들이 파당적 행태가 크게 염려스럽습니다. 국회의원를 당을 보고 찍어준 결과이기도 합니다. 국회의원이 지금 무소불위의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장래가 염려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