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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1. 자막
검은 화면에 하얀색 글씨로 작고 서늘하게 떠오르는 자막.
도달 불능점 (到達 不能粘) :
남극의 한 지점. 남위 82' 08분 동경 54' 58분에 위치.
해발 3700m 고도. 얼음 두께 3000m. 남극대륙 해안에서 가장 먼 지점.
1958년 소련 탐험대 단 한차례 정복. 지구 최저 기온 - 80도 기록.
F.O / F.I.
2004년 최도형 대장이 이끄는 대한민국 탐험대 '도달 불능점' 세계 최초 무보급 횡단 도전. 대원 서재경 이영민 김성훈 양근찬 김민재.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차가운 바람소리.
어두컴컴한 스크린에 천천히 세로로, 떠오르는 영화의 제목,
남극 일기 (南極日記)
2. 남극
화면 확 열리면--
남극의 숨소리 같은 차가운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며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광활한 대륙, 남극이 펼쳐진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빙하, 가파른 눈 언덕 등 남극의 원시적인 배경이 전지자의 시점으로 조용히 보여진다. 왠지 인간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미지의 땅이라는 느낌이 드는 초현실적인 풍경들.
어느새... 남극 한복판의 설원을 비추는.
-그곳엔 일렬로 행군중인 여섯 명의 한국 탐험대가 작은 점처럼 멀리 보인다.
3. 크레바스
고글에 가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섯 명의 탐험대원들이 고요하게 남극의 설원을 행군중이다.
자막/ PM 04:22 남위 00, 동경 00 12월 24일 탐험 10일째.
천천히... 천천히... 탐험대는 무게가 100kg은 나가 보이는 썰매를 끌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앞을 향하고 있다.
갑자기, 푸욱! 대열 맨 앞에 서있던 대원이 땅 밑으로 꺼져 버린다.
너무나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라 넋을 놓고 바라보는 나머지 탐험대...
땅밑으로 꺼진 대원을 따라 들어가던 썰매가 덜컥, 크레바스 앞쪽- 얕은 얼음 둔턱에 걸린다.
크레바스 입구에 양팔을 괸채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추락자.
썰매의 벨트가 그와 썰매를 연결하고 있다. 웃옷에 씌어진 김민재란 이름.
민재가 빠진 구멍 밑에선 후~웅 하는 섬뜩한 바람소리가 올라오고 있다.
이번엔 그를 지탱하고 있던 썰매가 민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둔턱을 넘어, 계속해서 크레바스 입구쪽으로 기울어간다. 빠른 속도로 크레바스 입구를 향해 밀려오는 썰매!
바로 그순간, 크레바스 입구쪽으로 다가온 한 대원이 재빠르게 비상 로프를 꺼내 민재에게 던져준다.
양팔을 여전히 크레바스 입구에 괴고 있는 민재, 한손을 뻗어 간신히 로프를 붙잡는다.
로프를 던져준 대원, 숨 돌릴 새 없이 자신의 몸에 줄을 휘감는다.
그 뒤의 탐험대들도 비상 로프와 연결기구 '카라비나'를 연결해 구조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 동작들이 매우 민첩하고 전문가적이다.
지지직……. 이번엔 민재가 양팔을 괴고 있던 얼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파악! 깨져버리는 얼음.
민재
으아악…! (순식간에 크레바스의 입구 안까지 몸이 빠져 버리는...)
썰매는 크레바스 입구의 턱에 위태롭게 걸린 상태다.
민재, 밑을 바라보면 시커먼 구멍안의 기운이 섬뜩하다.
민재
(호흡이 가빠지는) 헉...헉... (공포스런 표정으로 크레바스 입구쪽에 시선이 가며)
대...대장님...!
그의 뒤에 서있던 대원 역시 엄청난 속도로 크레바스 입구 쪽까지 빨려 들어간다.
미쳐 나머지 탐험대의 로프와 연결이 완료되지 않은 카라비나가 퍽하며 빠져 버린 것. 그러나 민재와 썰매의 무게에 끌려 들어가던 대원은, 위기의 순간에도 목에 걸고 있던 뭔가를 떼어내 나머지 탐험대의 로프에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비상 로프를 연결한다.
이윽고 출렁, 로프가 리듬을 타며 민재와 탐험대를 하나로 묶는다.
도형
전부, 힘껏 당겨!!
전탐험대가 일사분란하게 민재를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간신히... 땅위로 구조돼 나자빠지는 민재.
가볍게 양 손목을 돌리며 일어나는 대원. '그'의 웃옷에 씌어진 최도형이란 이름.
목걸이에서 떼어낸 무언가를 다시 로프에서 분리하는. 그것은 낡고 오래된 무쇠 '카라비나'다.
최도형, 그 구형 카라비나를 소중한 기념물처럼 다시 목걸이에 부착한다.
고글을 올리자 드러나는 얼굴.
나자빠진 민재를 바라보며, 멋적게 웃고 있는 40대 초반의 이 사나이는 탐험대의 대장 최도형이다.
산사나이 특유의 강인함과 함께 알수 없는 기(氣)가 느껴지는 인상.
선행되는 '징글벨'의 작고 희미한 멜로디.
4. 위성 전송 화면/ 크레딧 시퀸스 시작
암전된 화면 저편에서 '징글벨'의 멜로디가 작게 들려오고 있다.
아래의 장면들이 진행되며 스텝, 캐스트의 크레딧이 화면 우측 하단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
어...? 누가 캐롤 틀었나 보네... 들리세요? 아직 화면 안뜨네요...
천천히... 암전된 화면이 밝아지며 잡히는 이미지.
인터넷 상에서 전송되는 화면인지 화질은 불균질 하지만 탐험대의 텐트 내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대원들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어이, 유진씨...!
유진 (목소리)
지금... 남극 한복판에서 여러분들 모습이 전세계에 생중계 되는 거에요!
재경
(30대 후반 정도의 평범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이게... 다 우리 인터넷 위성 기술 덕분 아닙니까... (웃으며) 막내야? 아빠 보이니...?
유진 (목소리)
에이... 재경 선배만 인사 하시지 말구요... 지금 보시는 분들 위해서 탐험대 소개 좀 해 주세요...
재경
으흠... 일단 저는 팀에서 비디오와 전자 장비 담당하고 있는 서재경 이구요.
원래 직장은 동사무소 입니다... 안녕하세요... 제천 본동 주민여러분...! (웃음)
나이는 대장님 다음으로 많은데 후배들이 전혀 대접을 안해주네요. 하하...
(좀 썰렁한 분위기) ...아무래도 카메라를 들고 한명 한명 가까이서...
재경이 카메라를 들어올리는지 잠시 화면이 거칠게 움직인다.
유진 (목소리)
(웃으며) 살살 하세요...
거칠게 줌이 맞춰진후 다시 보이는 화면엔 30대 중반, 통통한 덩치에 사람 좋은 인상을 한 양근찬이 잡힌다. 코펠앞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중. 하얀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재경 (카메라 뒤에서 목소리만)
자, 우리의 밥을 책임지는 양근찬! (누군가 다른 대원의 와~하는 탄성)
벌써 딱, 밥 자알~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근찬
(코펠을 열어 음식 맛을 보며 익살스런 표정으로) 캬... 간 죽인다...!
재경 (목소리)
사실 저거 특수 건조된 식량을 물에 불리기만 하는 건데요.
근찬
앗따, 형님. 이게 얼마나 테크닉이 거시기하게 요하는 일인데 그러십니까...
재경
하긴... 조리사 자격증까지 있는 사람 한테는 너무 단순한 요리 같네요...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뭐 특별한 거라도 준비 했어요...?
근찬, 카메라를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었다는 듯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허허 사람 좋게 웃는다.
5. 텐트 밖/ 크레딧 끝
영화의 마지막 크레딧이 흐르며...
능숙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스틸 카메라 시점으로 잡히는 남극의 절경.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보면 멀리 탐험대의 텐트가 건조하기 그지 없는 앵글로 잡힌다.
찰칵. 사진 찍히는 소리.
이윽고 카메라의 주인이 화면에 등장하면, 30대 중반 이지적이고 차가운 인상, 높은 돗수의 안경형 특수 고글을 끼고 있는 부대장 이영민이다. 익숙하게 휘파람을 부는.
치이익~ 그의 전문가용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방금 찍은 사진이 현상 되어 나오고 있다.
6. 텐트 안
재경의 캠코더로 30대 중반, 다부진 체격에 좀 반골적인 인상인 김성훈이 보인다.
재경
김성훈씨는 지금 뭘하고 있는 겁니까.
성훈
예... 무전기 점검좀...
재경
우리 성훈씨는 지리산에서 오랫동안 구조대 활동을 했었구요.
국내에선 날리던 산악인 인데 비행기 타본건 이번이 처음이었죠, 아마...?
성훈
(손사레를 치며) 에이, 쪽팔리게... 그래도 나 없으면 본부랑 통신이고 뭐고 없어요...
유진 (목소리)
예. 저랑 매일 대화하는 대원이세요!
재경, 유진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카메라를 휙 돌리면-- 미니 노트북의 액정 화면에 유진의 모습이 보인다. 20대 후반의 평범하고 건강한.
유진
오늘은 군대 얘기 안하시네요? (웃음)
성훈
(벌떡 일어서며) 아, 참... 왜 나만 갖고 그래? 대형사고 낸 인물은 따로 있는데...
(웃으며 반투명한 통을 들고 급하게 텐트 입구를 여는) 재경이형...! 나 나갈려요.
텐트문이 확 열리며 보이는 바깥 풍경. 찬란한 백색의 세계.
재경
햐... 이렇게 대낮 같은데 지금 시간이 저녁 7시 입니다...
이게 남극이죠. 6개월은 낮만 계속되고 나머지 6개월은 밤만 계속되는......
(줌으로 당겨 사진을 찍고 있는 영민을 보여주며) 우리 부대장 이영민씨네요.
프로 알피니스트고 험한 산이라면 세계 안가본데가 없죠...
(조용한 어조로) ...근데 지금 뭘 찍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7. 텐트 밖
반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거센 오줌발이 쏟아진다. 통 바깥으로 소변이 튀기기도 하고.
이름표 옆에 붙어있는 해병대 마크.
성훈
(혼잣말로) 시발, 이 넓은 대륙에 오줌을 싸면 얼마나 싼다고... 양놈들... 협약은 지들끼리 만들어 가지고...
성훈, 오줌을 털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사진을 찍는 영민을 발견한 듯. 신기하게 쳐다보는.
성훈
어이, 부대장님! 여기 사진 한 장만 좀 박아줘봐요!
하지만 아무 반응 없이 사진촬영에 열중인 영민.
성훈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뭐야... 시발.
8. 텐트 안
재경의 캠코더 시점으로 보이는 민재.
빨간 양말을 오려 섬세하게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 별 모양 등을 만들고 있다.
재경
오늘 사고 당사자는 아주 딴청을 피고 있네...
민재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태연하게)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다시 태어난 김민재라고 합니다. (웃음) 팀에선 의료 담당 이구요...
여긴 눈에 보이는게 전부, 순백의 흰색이라 너무 아름다워요...
대한민국 남극 탐험대 많이 응원해 주십시오. (우물쭈물) ...화이팅!
유진(목소리)
와... (박수)
재경
나참... 영계라 이거구만...
유진(목소리)
외국서 오래 있었는데도 팀적응이 빠른 것 같아요...
재경
음.. 등반학교의 명문, 스위스 샤모니 등반학교를 졸업했죠, 아마?
특이하게 산악 의료를 전공했구... 이번 지원자 중에 최고의 실력을 보여줘서 데려 왔는데 말이죠...
근찬
앗따! 오늘 우릴 단단히 뺑이치게 혔지라!
민재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뒷쪽을 바라보며) 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재경의 캠코더- 민재가 고개를 조아리는 쪽으로 이동하는 찰나- 삐익~! 하는, 귀 따가운 신호음이 울리며 노트북 액정 화면이 꺼져 버린다.
9. 베이스 캠프
유진
(걱정스런 표정으로 화면을 보며) 예... 아무리 첨단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남극에는 이렇게 가끔 이유를 알수 없는 전파 장애가 생겨요.
이런 것까지 없으면 미지의 땅이 아닌가 봐요. (웃음)
곧 화면이 원상태로 돌아오면, 담배를 피며 텐트에 기대있는 최대장이 보인다.
유진
대장님...!
도형, 희미하게 웃으며 캐롤이 흘러 나오는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를 카메라 쪽으로 들이댄다.
빙 크로스비가 부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흘러 나오고 있다.
도형
(근찬 쪽을 보며) 이거... 부대장 껀가? 음악 좋네...
재경 (목소리)
인제 시간도 다 되가는데... 뭐든 한 말씀 하시죠.
도형
(잠시 카메라를 조용히 바라보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습니다... (멋적은 웃음)
이 장면을 지켜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는 유진.
그녀의 옆에 보이는 가족사진 분위기의 탐험대 단체 사진. 출발전에 찍어 놓은 것 같다.
10. 텐트 안/ 크리스마스 파티
화면 가득, 눈을 둥그렇게 잘라 만든 빵 모양에- 코코아 가루, 프루츠 칵테일 등으로 모양새를 낸 3단 얼음 케익이 보인다. 맨 위엔 별 모양의 알 얼음.
케익 위에 여러 개 꽂혀져 있는 키 큰 성냥에 불이 붙여진다.
근찬
이건... 대장님이 끄셔야지라...
도형
어... (여유로운 표정으로 불을 후~ 끄는...)
대원들
(일동 박수치며) 와...!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음 케익에 숟가락을 들이미는 탐험대.
재경
(한입 먹으며) 아깐 아무것도 준비 안한 것 같더니... (웃음) 완전 과일 빙수 맛이다, 야...
근찬
겨우 빙수라면 섭하요! 이게 바로 남극 특제 빙하 케익이지라, 암...!
성훈
민재, 임마. 너는 뭐 잘한거 있다고 숟가락을 들이미냐.
민재
전 오늘 다시 태어 났으니까 이게 제 생일 케익이에요.
도형
(서늘한 어투로) ...그래...?
순간, 긴장된 표정이 되는 민재.
도형
(얼음 케익 꼭대기의 알 얼음을 민재의 등짝에 스윽 집어 넣으며) 자, 생일 선물.
- 민재, 읔~ 참으며 고통스러워 하고 나머지 대원들, 모두 깔깔 거린다. 무르익는 파티 분위기.
--사이--
캐럴이 흐르는 텐트 안. 등산용 머그 컵에 위스키를 한잔씩 담아 홀짝거리고 있는 대원들.
얼굴이 불그레한 게 왠지 긴장이 풀린 분위기다.
도형
영민아, 오늘 좌표가 어떻게 되지?
영민
(술잔을 옆에 두고 GPS를 확인하며) ...남위 64도 07분, 동경 36도 44분입니다.
도형
이제 1700km쯤 남았나?... 아직 갈길 멀다... 지피에스 정확히 확인했지?
영민
(차갑게 웃으며) 기계가 거짓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도형
(지도를 펼쳐 보이며) 남위 82도 06분 동경 54도 58분... 도달 불능점...
여기가 남극대륙의 가장 끝,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지막 땅이다. 거기다 세계 최초 무보급 횡단... 출발하기 전에 누가 그러더군. 도대체... 거길 왜 가는 거냐.
그렇게 큰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델 가는 게 무슨 의미냐구...
그 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내가 물어봤지.
그럼, 우리가 거길... 죽으러 가는 것처럼 보이냐구...
일순, 착 가라앉는 분위기.
도형
하하... 그랬더니 그 사람, 얼굴이 하얘지데... 그래서 내가 대답해줬지.
우리는 거길 살기 위해 가는 거다. 탐험가는 가장 위험하고 불가능해 보여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을 때 바로 살아있는 거라고...
민재, 근찬 감동한 표정.
도형
...준비기간이 길어져서 우린 하절기 마지막 시즌에 여기 왔다.
지금 우리를 비추는 태양은 두 달 후면 져버린다. 나와 영민이를 빼면 대부분 처음 모이는 팀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탐험 내내 남극의 가장 쨍쨍한 햇빛을 받을 거란 거고, 처음 모인만큼 정예 멤버를 구성 했다는 얘기도 된다.
김민재! 오늘 단단히 확인했지?!
민재
예...!
도형
(각 멤버를 바라보며) 난... 너희들이 꼭 해낼거라 믿는다. 전부 최고의 탐험대니까...
이렇게 가끔 한잔... 그래, 위도 1도를 넘어갈 때 마다 한잔씩 하자.
(플라스틱 술통을 들어 보이며) 그렇게 이거 다 마시고 나면... 그때, 우린 세상 누구도 가지 못한 곳에 서 있을 거다... (잔을 들며) 자...!
대원들의 표정에 새로운 각오들이 떠오르는 듯 하다. 잔을 부딪치며. 누군가 '파이팅'을 외치자, 다같이 파이팅!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키는 대원들. 캬--.
성훈
대장님, 다음번엔 저한테도 기회 좀 주시죠? 여태 먹고 산 게 사람 구하는 건데요...(웃음)
근찬
지는 애인이 위험한 짓 말고 음식점이나 차리자는디... 앗따. 도달 불능점에 태극기 꽂고! 돌아가선 확 우리 지은이랑 결혼 할랍니다!
대원들의 말이 들리고... 카메라는 텐트의 구석진 곳을 잠시 비춘다. 그곳엔 먹다 남은 얼음 케익이 흉하게 녹고 있는 코펠이 보인다.
재경
(지포 라이터를 꺼내 담배를 붙이며) 지은인지 누군지 내 마누라 짝 나겠구만...
햐... 인젠 마누라 한숨소리도 정말 지친다... 동장님한테 매번 장기 휴가 부탁 하기도 눈치보이고...
공감한다는 듯 다들 배시시 웃는다.
재경
이 탐험 끝나면, 난 인제 마누라랑 애 옆에 있을 생각이야... 그래서 마지막이란 각오로 지원한 거구... 남극 도달 불능점까지 가면 이 생활 20년에 멋있는 마무리 아니야?
재경, 자신의 담배에 불이 붙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탁 탁 다시 지포 라이터를 켜보지만 불은 일어나지 않은채 라이터에서 뭔가가 틱 떨어져 나간다.
영민
라이터 돌이 빠진거 같은데...
재경
(좀 허둥대며) 근찬아, 민재야 좀 찾아봐봐... 아... 어디로 떨어진 거야... 참...
재경의 라이터 돌을 찾는 탐험대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점차 잦아들며...
서서히 음산한 음악이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잠시 전에 비췄던 코펠 안의 얼음으로 조금씩 다가서는 카메라.
녹고 있는 얼음으로 카메라 다가가면, 이상한 껍질 같은 물체가 보인다.
대원들의 목소리 완전히 사라지며, 물결에 따라 찰랑 찰랑 움직이던 그 껍질을 초접사(E.C.U)로 잡는 카메라...
ㅡ그 껍질은 아주 오랫동안 얼음 속에 묻혀 있던, 누군가의 너덜너덜해진 안구!
그 안구의 눈동자가 갑자기 관객들을 섬뜩하게 바라본다.
-화면, 급격하게 커트되며 다음의 몽타주 시퀀스가 이어진다.
11. 몽타주(행군)
아주 멀리 여섯 명의 대원들이 행군하고 있는 모습이 잡힌다. 끝도 없는 눈의 지평선.
민재
12월 31일. 탐험 17일째... 지금 시간은 밤 11시...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있는 한밤중이라니... 그래선지 낮도... 밤도 계속되는 것만 같다...
12. 몽타주(휴식)
썰매에 기대앉아 보온병에 담은 식사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탐험대. 고개를 들어 태양을 바라보는 민재... 이글이글 지지 않는 새빨간 태양이 보인다.
민재
저 태양은 하루종일 쨍쨍하게 내려쬐지만 조금도 따듯하지 않다. 그리고 계속 우리를 따라온다.
13. 몽타주(하늘과 땅)
끝도 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과 하얀 땅의 섬뜩한 대비. 그 안에서 텐트를 치고 있는 탐험대.
한쪽 폴대를 잡아 쭈욱 텐트를 일으키는 민재.
민재
매일 걷고 먹고 자는것만 반복해서 그런지... 누군가 내일이 설날이라고 떡국 얘기를 했지만, 아무것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떡국의 맛, 냄새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영민, 근찬과 성훈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조용히 좌표를 확인하는 최대장. 열심히 비디오 촬영중인 재경. 창백하게 파란 하늘이 보인다.
민재
하지만... 하늘을 보고 있을때는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자꾸... 저 새파란 하늘에 빨려들어 갈것만 같다.
14. 몽타주(텐트)
텐트의 미세한 틈으로 살을 자를 듯이 날카롭게 들어오는 태양.
민재
우리 모두가 외계 혹성 한복판에 떨어져 있는 느낌 이랄까...
저 위에 누군가 있는것 같기도 하고... 이건... 나만 그런걸까...
텐트에 스며드는 햇빛을 한쪽 눈을 감은 채 쐬고 있는 민재. 디지털 녹음기를 들고 있다.
다른 대원들은 모두 취침중 인듯 하다.
민재, 숨을 고른 후 뭔가를 말하려 하다 갑자기 하품을 찢어지게 한다.
순식간에 녹초가 된 표정으로 녹음기를 끄는 민재. 침낭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15. 텐트 안, 아침
-아침 6시 23분을 가리키고 있는 전자시계.
대원들, 출발 준비를 하는지 무척 분주한 모습들.
-성훈, 몹시 귀찮은 표정으로 양말을 겹겹이 신고 있다.
성훈
(양말 겹을 세 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 겹을 더 신으며, 잘 들어가지 않는지 인상을 찡그리는 성훈.
-미니 노트북과 비디오 장비를 정리하는 재경.
-근찬, 식량 봉지의 숫자를 세보고 있다. 한참을 세다 순서를 잊어버렸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처음부터 세기 시작하는.
-그 옆에선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민재가, 식량을 싸는데 사용한 한국 신문지를 바라보고 있다.
inter cut- 신문의 헤드라인/ 윤중로 벚꽃놀이 시즌 개막
시민들이 봄의 화사한 햇살을 맞으며 벚꽃을 바라보는 사진.
inter cut- 신문의 헤드라인/ 프로 야구 플레이오프 대 혼전
게임에 열중인 선수들과 객석을 가득 매운 관중들이 함께 보이는 생생한 분위기의 사진.
근찬
(장난스럽게 민재의 뒤통수를 툭 치며) 벌써부터 돌아갈 생각하는겨?!
영민
(텐트 밖에서 소리만) 자, 3분내 준비 끝내고 출발합니다!!
16. 행군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눈으로 뒤덮인 끝 간 데 없는 설원(雪原).
군데군데 엄청난 크기의 빙벽과, 희미한 산의 형체가 지평선 사이로 보일 뿐이다.
자막/ PM 04:22 남위 00, 동경 00 1월 4일 탐험 21일째.
대원들은 똑같은 템포로 반복해서 걷고 또 걷는다. 헉, 헉... 아직은 고른 숨소리들. 하지만 각자 100KG는 되어 보이는 짐 썰매를 끄는 그들의 모습은 힘겨워 보인다.
-대열의 중간에 선 최도형의 '카라비나' 목걸이가 한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흔들거린다.
하늘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얼음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느다란 바늘 같은 수백만개의 미세한 결정체가 태양 아래, 파란 하늘 밑으로 아름답게 반짝거리며 내리는 것이다.
-대원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시 멈춰 서서 이 동화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F.O.
17. 깃발
화면 천천히 F.I. 하면, 고글을 낀 재경의 얼굴이 잡힌다. 멈춰 서서 전방의 무언가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는. 그의 뒤에서 행군중이던 나머지 대원들도 재경 곁에 다가와 멈춰 선다.
영민
(최도형에게) 깃발... 같은데요.
보면, 대원들 몇 미터 앞에 꽂혀져 있는 이상한 깃발.
오랜 세월ㅡ 세찬 바람에 닳고 닳은 깃발은 누가 꽂은 것인지, 어떤 모양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천천히 깃발 주위로 다가가는 대원들.
재경
...국긴가?
민재
국기 같진 않은데요.
도형
...탐험대 깃발이야.
성훈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표시 아닐까요...?
영민
그보단 뭔가를 묻어 놓거나 그런거 같은데요...
깃대를 잡으며 바라보는 최도형의 표정.
대원들, 잠시 동안의 침묵. 모두들, 깃발 아래 눈밭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최대장, 발로 툭툭 깃대 밑을 차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최도형.
대원들, 너나 할 거 없이 그곳을 파보기 시작한다. 얼마나 팠을까. 그들 앞에 하얀 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나뭇조각이 보인다.
나뭇조각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 들어가는 대원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나뭇조각의 실체.
- 그것은 골동품 느낌이 나는 원목 나무상자다. 성훈, 성급하게 원목 상자를 열어보려 하지만 얼어붙은 상자는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억지로 억지로 열려다 콱 하고 부서져 버리는 나무상자.
눈밭위에 동물 가죽 표지의 책과 다 닳아 뭉그러진 연필 조각이 나뒹군다.
재빨리 책을 집어 묻어있는 눈을 후하고 털어 내는 민재.
-가죽표지의 책엔 ANTARCTIC JOURNAL이라는 제목이 씌어져 있다.
성훈
야, 막내... 이거 뭐라고 쓴 거냐?
민재
안타틱... 저널... 남극일기...?
재경
누군가 전에 왔던 탐험가가 남기고 간 거야...!
-성훈, 표지를 넘겨보면 BRITISH EXPEDITION 1922 라는 글자가 보인다.
민재
영국 탐험대 1922년...
근찬
그람, 그기 지금 80년도 넘은 물건이라는 겨...?
영민
80년이 아니라... 몇 천 년 전에 죽은 맘모스도 그 형체만은 그대로 보전해 주는 곳이 남극이야... 어떤 바이러스도 존재하지 않는, 인류의 천연 냉동고가 바로 여기라구...
도형
남극이... 그보단 위험한 데지... 그걸 쓴 사람... 아마... 이 세상에 없을꺼다...
최도형, 아무말 없이 조용히 눈을 감는다.
기도를 하는지 묵념을 하는지 그의 행동이 왠지 엄숙하고 비장하게 느껴진다.
나머지 대원들도 머뭇 거리며 눈을 감기 시작한다.
얼떨결에 묵념을 올리게 된 근찬과 민재, 실눈을 떠 서로를 바라보는.
성훈은 끝까지 눈을 감지 않고 일기장을 바라보지만 영민은 진지하게 묵념에 열중한다.
이윽고 도형, 천천히 눈을 뜨며, 성훈에게 일기를 건네받는.
도형
김민재... (일기장을 툭 민재에게 전한다)
민재
예...?
도형
가져. (민재에게 일기장을 쥐어주는)
민재, 황송한 표정으로 <남극일기>를 받아들곤 대장에게 여러번 고개를 조아려 고마움을 표시한다.
도형, 귀엽다는 듯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불만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성훈.
도형
자... 대열 정비하고... 출발하자...
민재,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품에 집어넣는다.
18. Base Camp / 텐트 (교차)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여름 바닷가를 노래하는 댄스 가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듯한 커피 잔이 보인다. 베이스 캠프의 유진이다.
유진
아, 알겠다. ... 재경선배!
성훈
계속 헛짚네.
유진
뭐야, 그럼 ? 누구에요 ?
성훈
김민재다, 민재 ...
유진
(놀라 커피를 살짝 쏟으며) 정말 ?
성훈
그 일기장, 영국 같은데서 경매 같은거 해서 팔면 돈 꽤나 받겠다 싶었거든, 근데 그걸 그 신삥 새끼한테 주냐 ...시발...
유진
(풋, 웃으며) 열 좀 받았겠네요? 그래두 뭐 ... 최 대장님 답다 ... 멋있네요.
성훈
멋있긴 개뿔... ( 화들짝 )
순간 텐트 문이 열리며 최대장과 대원들이 방금 막 어떤 작업을 마치고 오는 듯, 몸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며 우르르 텐트 안으로 들어온다. 성훈 갑자기 딱딱하고 전형적인 무선 목소리 톤으로 바뀌며 ...
성훈
아, 현재 시간 십구시 오십이분, 전체장비 완전점검 상태 이상무, 기상상태 양호.
전 대원 부상질병 없음 이상 김성훈이었습니다.... 오버.
유진, 금세 상황을 눈치 챈 듯, 삐져나오는 웃음을 쿡 참으며 응답한다.
유진
알겠습니다. 건강 유의하십쇼. 오버...
19. 텐트, 밤
모두 잠든 텐트안 ... 대원들의 자고 있는 모습이 한명 한명 보인다.
-머리맡에 딸이 준 인형을 놓고 자는 재경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텐트 맨끝에서 잠이 잘 오지 않는지 뒤척이던 민재, 이불 속에서 뭔가를 슬며시 끄집어낸다.
영국 탐험대의 <남극일기>... 소중한 보물처럼...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보는 민재...
눈빛이 점점 더 초롱초롱 해지며, 고풍스런 펜글씨가 보이는 일기장 속으로 빠져드는데, 그 옆으로 커다란 근찬의 머리통이 부스스한 얼굴로 스-윽 밀려 들어온다.
얼굴이 닿을 듯, 바로 옆에서 뚱-하게 같이 영어 글씨들을 들여다보는 근찬.
근찬
80년 전엔 뭐 재밌는 일이라두 있어뿌냐?
그제서야 돌아보는 민재, 문득 민망한 듯 ...
민재
...우리랑 비슷하죠, 뭐... 남극 멋지다, 춥다, 해내야 된다...
근찬
앗따, 그딴 뻔한 내용을 뭐 그리 열심히 쐬려 보고 있냐, 시방...
민재
(책장을 넘기며) 어차피 일기는 처음만 좀 알아볼 만 하구요... 나머진 거의 눌어붙고 헤지고 해서... 그냥 그림이나 보는 거죠...뭐.
근찬
그림두 있단 말여 ? 일기장에 ?
민재
진짜에요, 보세요... 이 팀도 우리랑 똑같이 여섯명 이에요... 신기하죠?
민재, 책 중간 중간의 이런 저런 그림들을 보여준다. 남극의 풍경, 탐험대의 장비, 대원들의 모습 등이 엉겨 붙은 페이지들 사이에 거친 펜화로 그려져 있다.
민재
근데... 형, 이 그림 뭐 같아요?
민재가 펼쳐 보이는 가장 뒷 페이지, 거친 펜터치로 그려진 삽화가 보인다.
어둡고 거칠게 그려진 주변 공간은 어떤 곳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고... 탐험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꾸부정하게 앉아서 모닥불을 내려다보고 있는 뒷모습.
민재
...왜 뒷모습을 그렸을까요?
근찬
뭐 ... (피식) 얼굴이 좀 아니었나부지...
민재
(그림을 한동안 바라보다) ... 이거 꼭 최대장님 뒷모습 같지 않아요?
근찬
어이구...(웃으며) 얌마... 방한복 입은 뒷모습이야 다 똑같지... 아예 눈에 뵈는 건 전부 대장님이여...
민재
... (웃음) 그런가...
근찬
(민재의 얼굴을 바라보다) ...근디 니 턱에 그 상채기는 뭐다냐?
민재
(턱의 작은 흉터를 메만지며) 이거요... 사춘기때 방황하다가...
근찬
니가 지금은 어른이고? (웃음)
민재
(좀 가라앉으며) ...제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친척분 집에서 살았는데...
왜 그런거 있잖아요. 나름대로 신경 써주고 잘해주는 데도......
하여튼 말도 않듣고 위험한 짓도 좀 하고... 그러다 가끔 학교 뒷산으로 땡땡이치고 그랬거든요... 근데... 하루는 이상하게 산속에 혼자 있는게 기분이 좋더라구요...
마음도 편해지고... 그러다 어느날 텔레비전에서 최대장님을 봤어요...
근찬
흐흐... 그라지... 왜 아니겄어...
민재
(잠시 미소를 짓다) 그게...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반하신 다음 이었는데... 기자가 정상 정복을 했을 때 기분을 물어 보니까 이러시더라구요. '세상에 혼자 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너무 편안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이 집처럼 느껴졌다...'
산을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건 아마 그 이후 부터 였을 꺼에요...
근찬
그람, 유학은...?
민재
운이죠... 고등학교때 청소년 등반대회 나가서 우승했거든요... 근데 부상이 알프스 연수였어요. 산악 청소년한테 꿈을 준다나 뭐 그런... (미소) 근데 거기 가서 어떻게 버텨서 한국에 안돌아온 거죠...
근찬
니도 꽤 센 놈이구마... 앗따... 우리 탐험대 센 인간들 투성이구만...
민재
에이, 진짜 센 사람은 대장님 뿐이죠...
근찬
그분은 쎈 정도가 아니제.. 니가 외국에 나가 있어서 쪼까 모르는 감네....
민재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르듯) 자세히 좀 얘기해 봐요... 형...
근찬
아녀... 나가 괜한말 꺼냉겨...
민재
에이, 형...!
근찬,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슬리핑백을 푹 덮어써 버린다.
민재, 썰렁한 표정으로 다시 <남극일기>를 바라본다ㅡㅡ맨 앞 페이지를 펼치며 나지막하게 읽는.
민재
...우리는 8월22일 런던을 출발. 아름다운 미지의 대륙, 남극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근찬- 슬리핑백에서 기어 나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한 후, 뭔가를 툭 민재에게 던져준다. 곧바로 이불안으로 숨어버리는 근찬. 민재, 던져준 것을 집어보면 딱딱하게 말린 누룽지다.
씩 웃으며 조심스레 누룽지를 뜯어 먹는 민재. 다시 맨 뒷장의 그림을 펼쳐본다.
화면가득, 혼자서 꾸부정히 앉아있는 남자의 뒷모습 그림이 잡힌다.
20. 구멍, 아침
한참동안...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최도형의 뒷모습.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주먹 만한 크기의 크레바스 입구. 도형, 그 구멍에 얼굴을 가까이 대본다.
우ㅡ웅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강렬한 한기(寒氣).
- 멀리 텐트 앞에서 이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재경.
21. 행군도중 휴식
-아침 행군 후 점심휴식 시간인 듯, 행군의 코스를 의논하는 영민과 도형의 모습이 민재의 시점으로 잡힌다.
-민재는 '남극일기'를 꺼내 읽고 있다. 그 옆 썰매에 기대 쉬고 있는 근찬.
성훈은 영민과 도형 반대 편에서 큰일을 보고 있다. 재경은 맨 뒤에서 캠코더로 뭔가를 확인중이다.
근찬
(열심히 독서중인 민재를 바라보며) 내용 있는 부분이 다 눌어붙은 건 아닌 모양이제?
민재
예... (몇 장, 떨어진 페이지를 보여주며) 중간 부분인데... 66도를 넘어가고 있어요...
근데... 좀 이상해요...
근찬
뭐가?
민재
이거... (첫 페이지의 영국 탐험대 단체 그림과 중간의 그림을 보여주는) 출발할땐 분명히 여섯명이었는데... 여기는 다섯명... 한명이 비잖아요...
근찬
(싱겁다) 참, 나... 한넘은 이거 그리느라 뒤에 빠져 있나 보제...
민재
그런가... 근찬이형... 근데 이 사람들 전부 어떻게 됐을까요...?
근찬
뭐, 무사히 집에 가서 잘 먹고 잘 살았겠제... 영국 탐험대니께 여왕이 주는 훈장이나 트로피도 잔뜩 받지 않았것냐? 헤헤...
성훈
(언제 왔는지 담배를 확 뿜으며) 누구처럼 그런 쇠붙이만 잔뜩 받으면 뭐하냐? ...시발.
민재
예?
성훈
장식장에 훈장, 기념패, 트로피 이런 거 졸라 쌓여 있으면 뭐하냐구...?!
집안이 텅텅 비었는데...!
민재, 의문에 찬 표정으로 근찬을 바라본다. 근찬, 고개를 잘레잘레 흔들며 썰매를 점검한다.
성훈, 계속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남극일기를 곁눈질로 바라보는. 대장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성훈
(대장쪽을 보며) 조또... 끝도 없이 걷는구만... 끝도 없이...
녹화 확인을 하고 있는 재경. 번쩍, 이상한 그림이 끼어 들어 있음을 모니터를 통해 발견한다.
천천히 그 근처의 화면을 재생 해보는. 새벽에 눈밭위에 있는 대장을 찍은 화면이다.
영민
자, 1분 내로 대형 맞춰요!! 하던 것 전부 중지! 다시 출발합니다!
재경, 영민의 지시를 듣느라 한눈을 파는 사이. 정지된 모니터의 화면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장면.
- 바닥을 바라보는 대장의 얼굴위로 스윽... 섬뜩한 느낌의 작은 손이 올라온다.
이 장면을 보지 못한 채, 무심하게 파워 버튼을 OFF하는 재경.
22. 행군
카메라, 여섯 명의 행군 모습을 한 명 한 명 비춘다. 끊임없이 걷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하지만 마치 같은 곳에서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만 같다.
-재경, 다른 대원들보다 좀 힘들어 한다 .
23. 텐트, 밤
소형 카세트에서 30년대 가곡 '세레나데'가 흘러나오는 텐트 안. 카세트에 써있는 '이영민'이란 표식.
노래의 지나치게 낭만적인 분위기와 잡음 섞인 유성기의 음향이 기묘하다.
피곤한 표정의 대원들, 취침 준비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둘 침낭 속에 기어 들어간다.
영민은 지도와 캠퍼스로 앞으로의 경로를 체크중이다.
C.U) 걸어 온 루트를 검은 색 펜으로 표시해 놓은 지도. 목표에 1/4 정도는 온 것 같다.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근찬, 재경, 민재... 하지만 성훈,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무래도 영민의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때문인 듯.
성훈, 양미간이 찌푸려지며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나 카세트를 꺼버린다.
-편안한 표정으로 침낭에 기어 들어가는 성훈.
-영민,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카세트를 켠다.
다시 흘러나오는 기이한 분위기의 옛날 가곡. 다시 눈을 뜨는 성훈. 몹시 불쾌한 표정이다.
숨이 거칠어지며 짜증이 심해지는 것 같다. 다시 일어나 카세트를 꺼버리는. 하지만 이번엔 그가 침낭에 돌아가기도 전에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성훈
(분을 삭이는 목소리로) 이봐요, 부대장님... 다들 자는데 그 짜증나는 노래 좀 끄죠...?!
영민
(계산기와 GPS를 보며 건조하게) 나... 이것 땜에 집중해야 되니까... 잠깐만 좀 놔둬요... 전부 자는 것도 아닌데...
성훈,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주위를 보자, 언제 일어났는지 재경이 뭔가를 찾고있는 모습이 보인다.
성훈, 기가 막히다는 듯 영민을 노려보지만 그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채 하던 일을 계속 할 뿐이다.
화를 달래려는지 큰 심호흡을 하며 침낭 깊숙이 들어가 버리는 성훈.
'서재경' 이라고 쓰여진 플라스틱 통을 찾은 재경. 쪼르르. 그 통에 오줌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점차 오줌 색이 빨갛게 변한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오줌통을 바라보던 재경, 깜짝 놀란 표정이 된다. 동시에 콜록 콜록 기침이 터져나온다.
-재경, 뒤를 돌아보면 영민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일에 열중하고 있다. 천천히 소변 통을 들어 텐트의 뚫린 틈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 빛에 비춰보면, 오줌과 섞이는 피. 굳어지는 재경의 얼굴.
-재경의 바로 뒤에 누워있는 민재ㅡ 비몽사몽의 흐린 눈빛으로 소변 통을 들고 있는 재경을 바라보지만 다시 잠이 엄습하는지, 천천히 천천히 눈이 감겨온다.
24. 악몽
새하얀 눈 위에 잘려진 신체 한 부위가 내동댕이 쳐지며 피를 쏟는 아주 짧은 이미지.
25. 화이트 아웃
정신이 번쩍 드는 민재. 행군 중 순간적으로 졸았나 보다.
정신을 차려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들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들 거칠게 자란 수염과 얼굴에, 동상 화상의 흔적들이 있다.
민재의 앞에서 선두로 나아가고 있는 재경,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발걸음.
자막/ pm01: 56. 남위00, 동경00, 1월 16일 탐험 33일째
계속해서 전진중인 대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위엔 시계(視界)를 가리는 눈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의 구분이 전혀 안 되는, 온통 하얗기만 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마치 앞과 뒤, 위와 아래라는 방향 개념이 사라진 것만 같다. 그 속을 부유하듯 걷고 있는 대원들.
-갑자기 선두의 재경이 푹! 기절하듯 옆으로 쓰러져 버린다. 모든 대원들, 행군을 멈추고 황급히 재경 쪽으로 달려간다.
근찬
(재경의 어깨를 흔들며) 형님, 왜 이러요? 나요, 나!
도형
야, 서재경! 정신 차려, 서재경!!
근찬, 달겨들어 재경의 뺨을 때려 보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도형
막 두들겨 패!! 김민재!! 의료 담당이 뭐하는 거야!?
근찬, 계속해서 심하게 재경의 뺨을 패지만 무반응이다. 이번엔 민재가 직접 재경의 가슴팍을 열어 마사지하듯 두드린다.
도형
근찬아, 침낭 꺼내라! 성훈인 텐트부터 치고! 영민인 날 도와줘!
대원들, 너나 할 거 없이 대장의 지시에 따라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하고.
성훈
(텐트를 치는 도중 백색의 주위를 흘깃 보며) 시발, 이게 말로만 듣던 화이트아웃 이군.
민재, 화이트 아웃이 몰려온 주위와 재경 쪽을 번갈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다.
근찬
아야! 정신 차려라. 이 몹쓸께 사람 홀려 버링께...!
대원들 모두, 마치 '하얀 암흑' 속에 있는 거 같다. 화면 전체가 새하얗게 fade 된다.
26. 텐트 내부
화면 정상적인 상태가 되면, 누워있는 재경의 시점.
둘러앉은 대원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나지막하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체육관에서 말할 때처럼, 몽환적인 하울링으로 재경의 귓전을 맴돈다.
성훈
...재경이형 상태로 봐선 하루 20킬로도 가기 힘들겠어요.
도형
식량이 얼마 남았지?
영민
아직 35일분 여유는 있지만, 더 지체되면...
넋 나간 재경의 얼굴. 초점을 잃은 동공. 다시, 천천히 눈을 감는...
27. 회복, 텐트 내부
재경
나도 모르겠어.....
침낭을 두르고 누워있는 초췌한 모습의 재경. 약간씩 떨리는 음성.
재경
그게 뭐였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 지면서...
민재
그 다음엔요...?
재경
그리고 나선... 아...아무것도 기억이 안나... 생각나는 건... (목소리 격앙되며) 온몸이 오싹해지면서 머리가 하얘지는...느낌...
재경의 말을 듣고 있는 근찬의 무거운 표정. 재경에게 줄 음식을 민재와 함께 만들고 있다.
성훈과 영민은 무덤덤하게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민재, 그들을 너무 한다는 듯 스윽 바라본다.
도형
내일 운행부터 재경인 짐을 최대한 줄여라. 그 나머지는 다른 대원들이 나눠서 진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3킬로그램씩 늘여서 배식하고, 각자 충분히 잘 수 있도록. 내일은 10시부터 움직이자. ...식사 준비들 해.
-일어나 텐트를 나가버리는 최도형.
민재
대장님... 어디 가시는 거에요...?
영민
(텐트 입구쪽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밖에...
민재
...뭐... 하시러요...?
영민
(짜증스런 어투로) ...그냥 계시겠지...
영민의 무성의한 대답에 입을 닫아버리는 민재.
근찬은 재경에게 다가와 죽을 먹인다. 몇 숟가락 받아먹던 재경, 입맛이 없는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근찬
더 들어요.
재경
자꾸 넘어 오려고 그래. 못 먹겠다. (거친 기침이 나오고)
민재
근데... 재경 선배 꼭 감기 걸린 사람 같지 않아요...? 남극엔 바이러스가 없는데...
근찬
.....!?
하지만 성훈과 영민은 자신의 일을 할뿐, 그닥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꾸 없이 자리에 눕는 재경. 근찬, 힘없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재경, 주사를 꺼내 자신의 팔에 꾹 찌르는. 그런 재경을 찌푸리고 바라보는 근찬, 무슨 생각에선지 재경의 짐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다.
-재경이 가져온 딸의 인형이다. 근찬, 재경에게 툭 인형을 던져준다. 인형을 받아든 재경, 근찬을 바라본다.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다. 재경도 따라 웃으려 하지만 힘이 없다...
그가 인형의 배를 누르자 아이가 직접 앙증맞게 부른 징글벨의 감상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 우리 썰매 빨리 달려 종소리 울려라~아
-자신의 일에 열중이던 성훈과 영민도 그제서야 재경 쪽을 바라본다.
-인형을 바라보는 재경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진다.
28. 탈진
화면 멀리, 고통스런 표정으로 혼자 힘겹게 행군중인 재경의 모습이 잡힌다.
그의 한참 앞에선 행군을 멈추고 뒤돌아 선 대원들이, 이 광경을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자막/ PM 01시 51분. 동경-00, 남위-00. 1월 20일. 탐험 37일째.
도형
(스키를 벗으며) 10분간 휴식.
재경에게 다가가는 최도형. 나머지 대원들, 휴식이라는 말과 함께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근찬
부대장님, 오늘 얼마나 왔는겨?
영민
10킬로도 채 안돼...
성훈
에이, 앞만 보고 걸어도 힘든데...!
영민
오죽 힘들면 저러겠어요?
성훈
아, 힘들면 자기만 힘드나...?
영민
(한동안 본다) ...!
근찬
(애써 웃음) 헤헤... 그만 하죠. 이런다고 달라질 거 읍응께...
성훈
(담배를 꺼내며) 에이, 씨.....
뭔가 못마땅한 표정의 영민. 애써 웃음 지으며 분위기를 진정 시키려는 근찬.
걱정스런 눈빛으로 재경이 서있는 쪽을 바라보는 민재. 성훈,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빨아 댄다.
29. 거절
가까이 다가온 최도형. 재경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멈춰 선다.
도형
(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괜찮냐?
재경
(헉헉).....
도형
어때? 상태가?
재경
헉헉... 모르겠어요.... 걸어야 되는 건 알겠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요... 고도 때문에 그런지 머리도 깨질 것 같고...나 때문에 대원들 힘든데... 숨도 막히고... 걸어야 되는데... (심한 기침)
최악의 상태인 듯한 재경. 최도형, 가야할 진로를 돌아본다. 어딘지 불안하다...
도형
그래도 어떡해?...... 가야지...
재경
글쎄, 가야 되는데... 숨이 막히고......
도형
지금 일정 알잖아? 정해진 날짜가 있는 거구, 정해진 보급품이 있는 거구...... 그거에 맞게 딱딱 가줘야, 다음 일정도 차질 없이 진행되는 거구...... 여유라는 자체가 없단 말이야.
재경
그냥 좀... 쉬면 안 됩니까?
도형
(단호하게) 안돼.
재경
......!
도형
지금도 많이 늦었어. 이렇게 가면 어려워.
재경
(간절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헉헉... 정말이지... 진짜 못 걷겠어요... 차라리 내가 없어지던지... 헉... 비행기라도 불러서 탈출하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고글을 쓰는 최도형,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최도형의 고글에 비친 재경의 지친 모습.
잠시 동안의 침묵......
도형
너, 언젠가 얘기했지. 이번 탐험이 네 마지막 탐험이 될 거라구... 그 생각하고 버텨봐...
한 5분 쉬고 천천히 따라와.
재경
대...대장... 도형이형!!
휙. 가버리는 최도형. 절망적인 표정의 재경.
30. 암묵적인 동의
쉬고 있는 대원들에게 다가오는 최도형.
도형
(썰매를 연결하며) 출발하자.
민재
(의아한) ...재경 선배는요?
도형
재경이 상태 맞춰주다 보면, 모두가 지쳐... 92년 로체 등반때도 저러다 결국 해냈었다...
...그건 그렇구... 누가 대열 끝에 서서 재경이 상태 확인하면서 올래...?
난감한 표정의 민재. 다른 대원들을 둘러보는데, 외면한 채 천천히 출발 준비를 하는 성훈과 영민.
민재와 눈이 마주친 근찬마저, 어색하게 눈길을 돌린다. 최도형, 움직임을 멈추고 민재를 쳐다본다.
도형
김민재... 네가 대열 끝에 서라. 재경이가 잘 쫓아오는지 확인하라구. 할 수 있지?
민재
(얼떨결에) 예...
도형
(대원들에게) 자, 가자!
대원들 한 명 한 명 민재를 스치며 지나간다.
민재, 고개를 돌리면, 저만치 지칠 대로 지쳐있는 재경의 모습.
31. 화이트 아웃
헉헉... 힘겨운 숨을 토해내는 민재. '가다 서다' 를 반복하며 뒤따라오는 재경을 살핀다.
본 대와의 거리가 아까보다 훨씬 벌어진 상태. 점차 가빠지는 호흡, 흐려지는 초점...
균형을 잃으며 조금 휘청거리는 민재. 그는 자신의 길을 따라가기에도 힘에 부치는 것이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화이트 아웃. 희뿌연 태양. 어느 순간- 남극이 거친 숨을 내뿜는 것처럼, 저 멀리 재경의 모습이 화이트 아웃에 서서히 가려지기 시작한다.
32. 어둠
재경, 본대의 모습이 눈발에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도 모른 채 멍하게 무언가를 손에 들고 바라본다.
-어린 딸들, 아내와 함께 찍은 애뜻한 느낌의 소형 가족사진.
사진을 품에 넣고 터벅터벅... 다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재경. 헉 헉 숨소리가 거칠다.
화이트 아웃 속 희뿌연 태양이 재경의 눈에 들어온다. 그의 눈은 완전히 풀려있는 상태.
-어디선가 공포스런 톤의 비상 교신음이 희미하게 들리며,
이글거리는 백색 태양이 갑자기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순간, 온주위가 암전된 듯 암흑천지가 된다!
S) 재경의 거친 숨소리. "헉...헉...헉..."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섬뜩한 어둠 뿐...
재경
(공포에 찬 목소리로) 대...대장! 민재야!! 근찬아!!
아무 응답도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암흑. 헉헉... 라이터를 켠다.
공포에 떠는 재경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그의 하얀 입김이 라이터 불빛 위에 퍼진다.
아무리 둘러봐도 깊은 어둠, 암흑뿐이다... 더욱 가빠지는 재경의 숨소리.
- 괴이한 질감의 시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 공포스런 톤의 교신음은 더욱 분명하게 들려온다. 알아들을수 없는 섬뜩한 어조의 목소리는 80년전 영국 탐험대의 비상 교신음!
소름끼치는 음향과 함께, 괴이한 질감의 시선이 확 재경을 덮친다. 순식간에 꺼지는 라이터 불빛.
33. 민재
S) 헉... 헉...
거친 숨과 콧김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희뿌옇게 변한 민재의 고글안 시선. 갑자기 퍽! 하고 앞서가던 누군가의 등에 부딪치며 뒤로 휘청 미끄러진다.
-황급히 고글을 벗으면, 민재를 바라보고 서있는 대원들이 보인다. 어느새 화이트 아웃은 사라졌다.
도형
재경이는?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민재, 뒤돌아보면 재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민재
그게... 헉헉... 그러니까...... (뭐라 설명할 길 없는...)
-상황을 눈치 챈 도형, 영민과 성훈을 바라본다.
34. 영민과 성훈.
영민과 성훈,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영민이 좀 앞서 가는 중.
성훈
...여기서 아까 출발한데까지 얼마나 멀죠?
영민
(시계를 보며) ...다시 출발한 시간이 2시간쯤 전이니까... 멀어봤자 10킬로도 안될 것 같긴한데...
성훈
조난구조 많이 해봐서 아는데요...
영민
(멈춰 뒤돌아보며) ...?
성훈
이번엔 좀 불길해요... 기분이...
영민
(다시 막 앞서나가며) ...장비에도 이상이 없어야 되는데...
성훈
(확 열 받으며) 아니, 지금 사람 보다 기계가 더 신경 쓰인다는 거예요?
영민
내말은... 탐험 기록을 찍어 놓은거나 위성 노트북 같은게 다 없어지면, 우리 전부 빚더미에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에요... 성훈씨도 알잖아. 스폰 받기가 얼마나 힘든지...
성훈
그럼, 지난번 남극 탐험 후엔 누가 빚쟁이가 됐죠?
영민, 갑자기 멈춰 선다. 화를 참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를 뿐, 뒤돌아보지 않는다.
35. 텐트
민재, 걱정스런 표정으로 텐트 밖을 바라보고 있다. 텐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든다.
최도형, 앉은 상태로 조용히 눈을 감고 뭔가 생각에 빠진 듯하다.
민재
......전부 저 때문이에요... 제가 조금만 주의를 했어도... (추위가 느껴지는지 몸을 떠는)
도형
...김민재... 스코트 탐험대의 오츠 얘기 아나?
100년도 훨씬 전에 여기 와서 엄청난 폭풍 때문에 조난 당했던...
그때 탐험대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원시적인 상태였었지.
식량은 떨어져 가고 추위, 배고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대원들을 괴롭혔을꺼다.
그때... 대원 중 한명이었던 오츠는 온몸에 병이 퍼져서, 나머지 탐험대의 행군에 방해가 되는 상태였다...
36. 텐트 밖
끽... 끽... 근찬, 식사준비를 위해 톱으로 얼음을 썰고 있다. 끽... 끽... 얼음이 잘 썰어지지 않는다.
얼음을 썰고 있는 근찬의 뒷편,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듀피크 산이 보인다.
37. 텐트
도형
어느 날 아침, 그는 탐험대 전체를 위해 조용히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영원히...
오츠도 똑같이 춥고 배고프고 무서웠을거다. 하지만 다른 대원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거야... 민재야. 탐험가란건 그런 거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할 수도 있는데... 적어도 자기 자신은 책임져야 되는 거 아니겠냐?
민재
하...하지만... 선배는... (민재, 눈물을 글썽이다 성호를 긋고 짧은 기도를 올리는)
도형, 담담하게 민재를 바라보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벋어 막 눈을 뜬 민재를 덮어준다.
작은 행동이지만 그가 민재를 아끼고 있음을 알수 있다. 민재,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는.
38. 영민과 성훈
영민과 성훈, 멈춰 서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한 표정으로 한참 앞쪽을 바라보고 있다.
성훈
저기라구요?
영민
(지도와 나침반을 확인하며) 그래요... 지금 보이는 데가 아까 출발점이에요...
...길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간거야...
성훈
(확 열받은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애초부터... 환자를 데리고 그렇게 출발하는 게 아니었어...
영민
그건 모두 동의한 결정이야.
성훈
결정을 누가 했는데? 동의? 명령에 동의 같은 게 어디 있어요?!
영민, 성훈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숨을 고른다...
39. 텐트
민재
괜찮으시겠죠? 선배 가족을 봐서라도...
도형
...우리 같은 놈들은 말이야... 같이 탐험에 참가하는 대원들이 가족이야...
민재
대장님은 가족사진 같은 거 안 가져 오셨어요...?
도형
(스윽 말없이 웃으며 눈을 감고 텐트에 기대며) ...가족사진... 많이 찍었잖아...?
민재
......?
도형
나는 니들을, 다 내 새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 넌 아들 같고 재경인 큰 동생 같고...
민재를 크레바스에서 구할 때 썼던 '카라비나'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민재
...그 오래된 카라비나... 어디서 받으신 거예요...?
도형, 얼굴에서 따듯함이 사라지며 다시 눈을 뜬다. 서늘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바라보는.
도형
해발 2100 미터면 아파트 층수로 얼마나 될까... 여기 평균 고도가 2100미터쯤 되나...?
민재
......?
도형
그럼... 몇 백 층은 되겠다... 인간이 만든 건물 중에 세상에 그렇게 높은 건 없지...
40. 영민과 성훈
성훈
지난번 탐험 때도 이런 거죠? 최대장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다 모두 나자빠지니까, 결국에 포기한거 아니냐구요? 그래서 대장은 빚더미에 오르고 대원들 뿔뿔이 흩어지고 그 얼마 후엔... 아들까지...
영민
...그건 지금 상황하고 상관없는 얘기잖아... 그런 거 다 알면서 뭐 하러 지원했어?!
성훈
그러는 부대장님은 다시 왜 왔는데요...?
영민
(발길을 돌려 본진이 있는 쪽을 향하며) 난, 그냥 남극에 다시 오고 싶었을 뿐이야.
그 좁은 땅에서 부대끼면서 지지고 볶는 게 싫어서, 사람들이 안 사는 곳에 오고 싶었을 뿐이라구... 여긴... 인간이 망가트리지 않은 지구의 유일한 땅이잖아.
성훈
(앞서가는 영민을 향해) 그럼, 혼자 무인도나 가지 그랬어요...?
영민
(두터운 안경을 고쳐 쓴 후, 전속력으로 걸으며 혼잣말로) 개새끼...
41. 텐트
무거운 표정의 민재와 최대장. 언제 들어왔는지 근찬도 뭔가를 끓이고 있다. 막 코펠의 물이 지글지글 끓기 시작하는 순간. 근찬, 텐트 밖을 바라보다 뭔가를 발견한 듯 벌떡 일어선다.
-저 멀리 보이는 영민과 성훈. 그러나 재경은 없다...
42. 조난(遭難)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재경을 찾아 나선 대원들.
근찬과 민재는 재경을 소리쳐 부르고, 성훈은 혹 크레바스가 있을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이 보이면 달려가 보지만 재경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영민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넓게 퍼져!!!! 최대한 넓게!!!! 이상한 게 발견되면 바로 조명탄 쏘고!!!
민재
(헉...헉...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는) ...스키자국 하나도 안보이네...
원망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는 민재. 자신이 방금 지나온 자리도 곧 눈이 쌓여 발자국이 사라져 버린다.갑자기 저 앞쪽에서 뭔가가 반짝하고 반사되는 것이 보인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 눈 바닥에 아주 일부분 모습을 드러낸 금속체의 물건.
민재, 바닥을 휘저어 주우면... 재경의 라이터다. 하지만 근방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민재, 낙심한 표정으로 조명탄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팍~!! 조명탄의 불꽃이 터진다.
근찬
(목소리만) 여기!!! 여기여라!!!! 누가 있당께!!!!
43. 시체
일렬횡대로 모여선 다섯 명... 도형을 제외하곤 모두 황망하고 겁에 질린 표정들이다.
ㅡ 그들이 내려다 보는 건 가죽 방한복을 입은 상태로 죽어있는, 미이라처럼 말라버린 외국인의 오래된 시체. 눈을 뜬 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죽어있다. 더욱 섬뜩한 건 그의 한쪽 눈알이 없다는 것.
도형, 다가가 그의 외투에 붙어있는 마크를 확인한다.
BRITISH EXPEDITION 1922, P.O.I
민재
(떨리는 목소리로) 영국 탐험대... 1922년... (자신의 안 포켓에서 '남극일기'를 꺼내드는.)
성훈
어쩐지... 그 일기장인가 뭔가 졸라 느낌이 구리다했어...
근찬
이... 이게... 어떻게 된것이제? 80년 전에 죽은 사람 시체가 왜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잉겨..!
영민
지금 눈이 오고 있는데다... 눈 둔덕은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거니까... 정말 깊숙이 묻히지 않으면 언제든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거지...
성훈
젠장!! 계속 그렇게 여유 잡으면서 설명만 하고 있을 겁니까!! 좀 봐요!!! 재경이형 지금 조난당한 거라구! 예??!!
영민
그래서... 어쩌자구...?!
도형
(침착하게) 김민재, 재경이 라이터 발견한데가 어디야...?
민재
저쪽... 서북쪽 저 밑...
성훈
시발... 재경이 형도 저렇게 되 있는 거 아냐...?
여전히 시체 앞에서 꼼짝없이 서있는 다섯 명의 공포스런 표정.
-이 모습을 정체를 알수 없는 기이한 시선이,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몹시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선행되는 사운드.
S) 치이... 디스 이스 k1... 두유 카피 오버... 치이... 디스 이스 k1... 두유 카피 오버...
44. 텐트
성훈
디스 이스 K1... 두유 카피 오버... 여기는 한국 원정대, 여기는 한국 원정대... 베이스캠프, 감도 양호하면 응답하라. 오버...
치익.... 치익.... 아무런 응답 없는 무전기. 무전기의 주파수를 다시 조작하는 성훈.
성훈
디스 이즈 케이 원, 디스 이즈 케이 원... 두유 카피 오버...
치익... 치익... 치이이익----- 여전히 싸늘하게 들려오는 무전기의 교신음.
절망적으로 굳어지는 대원들의 얼굴.
45. 논쟁
촤악, 펼쳐지는 지도. 지도의 방위선을 따라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는.
성훈
여기서 남동쪽으로 150킬로 정도 가면, 노르웨이 기지가 있어요. 방법은 하납니다. 진로를 수정해서 구조 요청을 하러 가는 거죠.
근찬
150킬로면, 일주일은 걸리겠구마잉...
성훈
죽자 사자 가면 닷새 안에 갈수도 있어.
영민
남동쪽이면 난빙댄데... 무선이 안 되는 건, 악천후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인 것 같고...
성훈
(짜증을 내며) 그래서요, 마냥 기다리자구...?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데 방향을 트는게 그렇게 큰 문제에요? 만약에... 악천후가 일주일 내내 계속 되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호전적으로) 대장님, 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침묵하며 최도형을 바라보는 대원들.
도형
(나직하게) 포기는... 안돼...!
성훈
아니, 그럼 어떡하란 말입니까! 무선도 안 되고 날씨까지 지랄 같은데 한 팀으로 이럴 수는 없잖습니까!!
도형
그래서 더 안 된다는 거야.
성훈
......?
도형
성훈아, 여긴 니네 동네 뒷산이 아니야. 우리가 재경이를 찾기 위해 아무 것도 안한게 아니잖아? 지금 무리하게 코스를 틀어서 구조 요청을 하는거... 그래서 이 탐험을 포기해 버리는 건 재경이도 원치 않을 거다.
성훈
대장님, 지금 재경이형은 어딘지도 모르는 남극 한복판에서 죽어가고 있다구요!!
도형
네가 그렇게 재경이를 위한다면 아까 왜 민재 대신 네가 나서지 않았지?
훨씬 경험이 많은 네가 재경이를 체크하면서 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민재, 고개를 푹 숙인다.
도형
우리는 여길 놀러온 게 아니다... 어떤 위대한 등반이나 탐험에도 다 희생은 따라왔어...!
성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다가는, 전부 아까 그 눈깔 없는 영국 놈 신세가 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건 희생이 아니라 개죽음이라구요!!
도형
(침착하게) 40일 넘게 1000킬로를 왔다... 이제 이 탐험은 그렇게 간단하게 멈출수 있는게 아냐.
할말을 잃은 대원들의 표정.
도형
우리가 성공하면 재경이도 세계 탐험사에 영원히 남게 된다.
...노르웨이 기지로 가려면 너 혼자 가... 다른 대원들은...?
민재, 자신의 책임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진다. 영민, 근찬... 미동도 없이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한다.
영민
(침착하게) 저는... 대장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재경 선배 구조는 BC팀에 아르고로 모르스 송신을 해서, 그쪽에서 추진하는 게 기동력 면이나 시간 면에서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은근히) 근찬이 생각은 어때...?
근찬
...지... 지두... 지금 탐험을 포기해 버리는 것 보담은... 후~! (한숨)
도형
근찬이하고 민재는 현재 남아있는 물품을 정확히 파악해라. 영민이는 내일 일어나자마자 풍향, 풍속, 빠른 진로를 체크해. 베이스캠프에 모르스 송신은... (성훈을 가만히 보는)
성훈, 머리를 숙이고 괴로운 표정을 짓다...
성훈
(민재를 똑바로 보며) 김민재, 너는? 네 생각은 뭐야?!
민재, 어찌할바를 몰라 얼굴이 굳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성훈
십새끼!! 다 너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근데, 어...?!
(민재와 나머지 탐험대를 번갈아 보다) 시발...!
확, 텐트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는.
46. 성훈
원경으로 보이는 성훈의 모습.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고 있다. 새하얀 눈밭위에 검은 머리카락이 후드드득 떨어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성훈. 그 위로 나직하게 들리는 민재의 목소리.
민재의 나레이션
아무런 말도... 정말... 아무런 말도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47. 텐트
민재의 나레이션
남극의 흰색이 날 마비시킨 걸까... 그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불안한 표정의 민재-- 종이에 뭔가를 꼼꼼히 적고 있는 영민과, 자신과 함께 음식 재료를 정리중인 근찬, 무표정한 최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있다.
S) 비명소리처럼 들려오는 물끊는 소리.
--사이
빙 둘러앉아 있는 탐험대. 무표정하게 아르고를 치고 있는 해병대 머리의 성훈이 보인다.
영민
일주일치 식량과 연료, 캠코더와 부속품, 기호 식품 약간을 빼면 별다른 건 없습니다.
근찬
기호식품, 뭘 말하는 거시여라?
영민
담배.
오르고를 치고 있던 헤비 스모커 성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섞인 숨을 내쉰다.
영민
...이제 남은 담배는 각자 호주머니에 들은 것뿐입니다...
성훈,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계속해서 아르고를 친다.
아르고의 모르스 신호가 몽환적으로 울려 퍼지며--
48. 텐트, 한밤중
카메라, 천천히 피곤에 절어 깊이 잠들어 있는 대원들을 비춘다.
하루 동안의 일들이 힘들었는지, 코를 골고 침을 흘리며 잠꼬대를 하는 모습들.
느리게 대원들을 훑던 카메라, 최도형 앞에서 멈춘다.
섬뜩할 정도의 멍한 표정으로 텐트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보면, 텐트 천장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쳐들고 있는 것.
49. ZONE
뭔가 불안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 이상하리만치 이글거리는 태양. 그 한쪽 구석에 보이는 흑점.
최대장, 텐트를 뒤로 하고 넋 놓은 표정으로 걷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긴 그림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최도형. 그의 시점으로 누군가가 보인다.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모습에 점점 포커스가 맞아들면, 아까 시체로 발견됐던 영국 탐험대원이 한참 앞에서 도형을 리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두꺼운 가죽 파카와 털모자를 쓴 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참을 몽유병 환자처럼 걷던 도형.
갑자기 멈춰 선다.
뭔가 정신이 돌아오는 듯 휙 뒤돌아보면, 텐트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딘지 막막한 표정이 되는 도형.
이때, 앞서 가던 영국 탐험대원이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두꺼운 털모자에 가려진 얼굴이, 어둠 깊이 가려져 있다. 그 가려진 어둠이 섬뜩하다.
그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스멀스멀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
아이
(나즈막히) 거기 가지마, 아빠... 같이 놀아. 나랑 같이 놀아...
털모자 속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 새하얀 아이의 얼굴이 확 드러나며 가죽 파카가 꺼져 버린다.
미친 듯이 털모자 안으로 돌진하는 카메라, 급격한 CUT OUT.
50. 텐트, 한밤중
다시 화면은 섬뜩할 정도의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최도형을 비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S) ...치이익... 여기는 베이스 켐프... 치이익... 여기는 베이스 켐프... K1 나와라, 오버...
최대장, 스윽 일어나 무전기의 볼륨을 줄인다.
성훈, 무전기 소리 때문인지 몸을 뒤척이고. 도형, 호주머니에서 스위스 나이프를 빼들어 십자드라이버 부분을 찾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전기의 나사를 돌리기 시작하는 도형.
끼익 끼익, 순식간에 무전기의 뚜껑이 벗겨진다.
한참동안 기계 내부를 고요하게 바라보다, 칩 한 개를 끄집어내 자신의 입 속에 집어넣는 최대장.
사탕을 먹듯 우두둑우두둑 그 부속을 씹어 먹는다.
한참을 씹어 먹던 최도형, 마치 관객을 바라보듯... 광기에 찬 표정으로 카메라의 정면을 응시한다.
51. 탐험대 對 남극
불안한 기운으로 이글거리는 태양, 끝도 없는 새하얀 눈의 지평선.
마치 살아있는 듯 서늘한 기를 내뿜는 태양과 남극을 상대로, 외소하게 서있는 탐험대의 텐트가 강렬한 대칭 구도로 보여진다.
52. 텐트, 새벽
하~아... 누군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로,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자고 있는 김성훈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다.
보면, 그의 건너편에 누워있는 영민이 방금 깬 얼굴로 성훈을 바라보고 있다.
성훈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손을 뻗어 안경을 쓰는 영민.
이번엔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자신이 누워있던 주변을 둘러보지만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성훈 쪽을 바라보는 영민- 갑자기 신경쇠약 직전의 표정으로 변한다.
-보면, 성훈이 영민의 소형 카세트를 머리에 베고 잠들어 있는 것.
영민, 한참 동안 성훈과 그가 베고 있는, 자신의 카세트를 바라본다.
영민
(싸늘한 어조로) 개새끼...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민, 신경질적으로 텐트 문을 열자 화~악, 차가운 한기가 텐트 안에 몰려든다.
그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성훈, 찬 바람이 얼굴에 쏟아지자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찡그린다.
이 모습을 횡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민.
53. 풍속계
텐트의 20여m 앞에서, 디지털 풍향 풍속계로 대장의 지시사항을 점검중인 영민.
계속해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자꾸 삑삑 소리를 내며 오작동을 일으키는 풍향 풍속계.
영민, 스위치를 다시 누르고 탁탁 기계를 쳐보지만 오작동이 계속된다.
54. 텐트안
어느새 멍한 표정으로 일어나 앉아있는 성훈.
자신이 베고 잔 영민의 카세트를 보며 쓴웃음을 짓다 문득 뭔가를 바라보는.
그것은 자고 있는 민재의 곁에 놓여진 <남극일기>. 성훈, 스윽 집어 든다.
조심스레 펼쳐보기 시작하는.
55. 구멍
여전히 오작동을 일이키고 있는 풍향 풍속계.
영민, 다시 처음부터 작동을 시도해보지만 삑삑거리는 소리만 신경질적으로 들릴 뿐이다.
이번엔 히스테리칼하게 스위치를 누르며, 기계를 때려대다 순간적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영민.
- 떨어진 풍향계를 줍는 영민의 손... 카메라 천천히 풍향계가 떨어져 있던 방향으로 다가가면,
관객들은 그곳에 주먹만한 크기의 크레바스입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56. 눌러 붙은 페이지
성훈, <남극일기>의 책장을 무심하게 넘겨보고 있다.
- 아주 멀리 일렬로 걷고 있는 영국 탐험대의 모습.
- 파티를 하는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텐트안 풍경.
- 얼음 소나기가 쏟아지는 전경.
마치 자신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듯한 그림들에 슬슬 기분이 이상해지는 성훈.
이번엔 눌러 붙어 있는 페이지들에 손을 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레 펼쳐지는 책장들.
그 안에 그려진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다 순간, 표정이 굳는.
57. 영민
- 크레바스 내부에서 영민을 바라보는 정체불명의 시선이, 음산한 질감으로 보여진다.
영민, 크레바스의 존재를 모른채 풍향을 재고 있다.
58. 그림
공포에 찬 표정으로, 눌러 붙어 있던 페이지들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는 성훈.
-미친 사람이 죽어라 낙서를 한듯한, 거칠고 섬뜩한 느낌의 수많은 줄, 음영의 어지러운 부조화.
하지만 이 선들을 조금 멀리서 보면, 한쪽 눈알이 없는 핏대선 인간의 공포스런 표정처럼 보이는 것.
다음 페이지에도... 그 다음 페이지에도 광자(狂者)의 선들이 이룬 섬뜩한 표정들이 성훈을 노려본다.
이젠 손까지 떨려오는 성훈.
두려움으로 책을 덮으려는 찰나, 민재가 부스럭 거리며 잠을 깨려 한다.
황급히 <남극일기>를 자신의 포켓에 집어넣는 성훈.
담배 한대를 꺼내물고, 후우~ 놀란 호흡을 진정시키며 텐트 입구를 여는.
59. 폴라로이드
풍속을 제며 멀리 듀피크산을 보는 영민, 호주머니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그 풍경을 찍는다.
성훈
시발, 이런 상황에서도 취미생활이나 하는 사람이 있네...! 어이, 부대장님!!
여기 놀러왔어요? 그렇게 한가해요?
열 받은 영민, 확 성훈 쪽을 노려보면.
성훈
(담배를 빡빡 빨며) 동료가 조난당하건 말건 한가하게 사진이나 찍는다...!
프로의 세계는 다 그렇게 냉정한가 보죠?! ...시발, 그렇게 싸한데서 왜 제 눈앞도 못 보는 인간한텐 관대한지 모르겠네...! 나, 참...!!
영민, 폭발 직전의 분을 삭이는 표정. 흥분 했는지 고글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찬다.
방금 카메라에서 현상된 사진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스윽 눈에 미끄러지는 사진...
그 바로 근처엔 크레바스의 입구가 있다.
마치 흥분된 숨을 쉬는 것처럼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추위에 인화가 멈춰 기괴한 형상이 나타나는 폴라로이드 사진.
60. 출발
전부 어두운 표정으로 출발 준비를 마친 대원들. 한쪽에선 무선 통신기에 매달려 있는 성훈이 보인다.
성훈
(담배를 빡빡 피워대며) 디스 이즈 K1...두유 카피 오버...디스 이즈 K1... 두유 카피 오버...
근찬
(민재에게 기어 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기분 영 꿀꿀하구마잉... 왜, 여직 무선이 안 되는 것잉겨...
민재
(역시 작은 목소리로) 성훈 선배, 어제 취침 직전까지 모르스 송신에 매달려 있었어요... 형... 근데... 내 일기장...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근찬
(민재를 한심스레 바라보며) 앗따... 분명히 네가 어디 깊숙한 곳에 잘 모셔뒀겠지.
그딴걸... 누가 훔쳐뿔기라도 했겄냐? (자신도 모르게 성훈쪽을 바라보는)
성훈
(갑자기 민재와 영민을 향해, 자신의 욕을 속삭이기라도 했다는 듯) 뭐?! 뭐, 임마?!
광분하는 성훈을 보며 오히려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민재.
도형
(건조하게) 영민아, 출발 대형 맞춰.
그들의 행군 방향을 잠시 서늘한 시선으로 보는 영민.
대열 맨 뒤의 성훈, 이번엔 아르고 모르스 송신기를 꺼내다 뭔가 생각이 난 듯 영민쪽을 쳐다본다.
성훈
부대장님... 오늘은 내가 선두에 서면 안될까요?
의심스런 표정으로 성훈을 바라보는 영민.
61. 폴라로이드
그들의 20여m 앞 눈밭, 카메라, 크레바스 입구를 걸고, 탐험대의 모습을 긴장감 있는 앵글로 보여준다. 바로 옆엔 얼어버린 폴라로이드 사진.
62. 대열
김성훈, 모르스 송신기를 집어넣고 느릿느릿 대열 맨 앞으로 자신의 썰매를 끌고 간다.
담배를 꺼내려다 마지막 한대 뿐음을 확인하자 도로 넣어버리는 성훈, 민재를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지나친다. 그의 포켓 바깥쪽에 책같은 무언가가 슬쩍 삐져 나온것을 발견하는 민재.
민재
(당황하며) 저... 선배...
성훈, 민재는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대열 맨 앞에서 혼자 힘차게 출발해 버린다.
-상황을 눈치챈 근찬, 손사레를 치며 민재를 진정시킨다.
민재,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정자세를 잡으려 노력한다.
엄청 빠른 속도로 크레바스 쪽을 향해 걸어 나가는 성훈.
뒤따르기 시작하는 나머지 대원들. 성훈, 크레바스 입구 10여m 앞까지 다가간다.
ㅡ영민, 자신의 지시없이 맘대로 출발해 버린 성훈의 행동에 동공이 커지며 화가 난다.
영민
선두 정지...!! 지금 누가 선두에 서라고 했지? 방향이나 제대로 알고 가는거야...?
성훈
(멈춰서 영민을 노려보며) 그럼, 내가 엉뚱한 방향으로 출발하기라도 했다는 거요?!
영민
(냉소적으로) 당신 생각은 나도 모르지... 가고 싶은데가 도달불능점은 아닌거 같으니까...
영민과 성훈, 일촉즉발의 시선.
근찬
(나침반을 확인한후 갑자기 앞쪽으로 튀어 나오며) 앗따, 방향은 맞구만이라... 선배들이 예민해졌구마... 선두엔 쬐까 젊은 우리가 설것잉께... 민재야, 뭐하냐? 형 뒤에 빨랑 붙어!
근찬- '남극일기'의 행방 때문에 찜찜한 표정을 짓고있는 민재를 확 끌어당겨,
순식간에 선두에 나선다. 정확히 크레바스 쪽을 향해 행군하기 시작하는.
ㅡ크레바스 입구를 걸고, 거의 5m 앞까지 다가오는 근찬과 민재를 긴박하게 바라보는 카메라.
영민
(갑자기 히스테리칼하게) 양근찬 정지!! 선두정지!! 지금 부대장 말이 말로 안 들려?!
근찬과 민재, 크레바스 바로 앞 1~2m 근방에서 멈춰 선다. 겁먹은 표정의 근찬과 민재.
영민
(애써 톤을 낮추며) ...그냥 내가 선두에 설께... 그편이 낳겠다...
성훈, 짜증스런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담배를 필까 말까 고민한다. 도형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영민, 지도와 GPS를 다시 확인한후 미세하게 각을 틀어 크레바스 입구를 지나쳐 앞서 나간다.
다섯 명의 대원들, 이윽고 행군을 개시한다.
선두의 영민... 괜히 태연한척, 여유를 가장하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한다.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바로, 재경의 딸이 준 인형에 내장되어 있던 멜로디인 것. 이 휘파람 소리를 들은 성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남은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다, 마지막 담배를 부러트려 버리는 성훈.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
성훈,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행군을 멈추고 저벅저벅 영민의 곁에 다가가 멱살부터 잡는다.
성훈
당신이 사람이야?! 지금 어떻게 그 노랫소리가 나와!? 어?!
영민
그만해.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말라구.
성훈
그래... 그럼, 시발 이 상황에서 휘파람이나 불어대는 거, 그거야말루 경거망동 아냐?!
탐험가구 나발이구 사람부터 되야 될꺼 아냐!!!
영민
...당신처럼 개기기만 한다고 다 사람이고 탐험가야?! 아마츄어 티내지마.
성훈
이런, 재수 없는 새끼!!!
성훈, 무자비하게 영민을 후려친다.
대원들이 말릴 사이도 없이, 두 사람 엉겨 붙어 눈 위를 뒹굴며 치고받는다.
ㅡ 다시 크레바스 입구를 걸고 치고 받는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 점점 그쪽으로 다가가는.
민재, 대장에게 이 상황의 해결을 바라는 시선을 주지만-- 최도형,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싸움을 개싸움 보듯 바라볼 뿐이다. 보다 못한 근찬, 두 사람을 말리러 달려간다.
성훈, 영민의 고글 안경을 친다. 깨지는 한쪽 안경알. 악~!! 고함을 내지르며 성훈을 밀치는 영민.
민 재
부대장님!! 성훈 선배!!
근 찬
아, 이제 그만들 좀 혀요!!!
한쪽 안경알이 깨진 영민의 시점에서 보이는 성훈. 헉헉대는 두 사람의 숨소리. 다시 한대 맞는 영민, 깨진 안경알의 조각이 눈에 꽂히는 것 같다. 영민의 숨소리가 고통에 못 이겨 거칠어진다.
ㅡ크레바스 입구 바로 옆까지 와있는 두사람.
옆에 보이는 얼음 덩어리를 들어 성훈에게 던지는 영민.
성훈, 재빠르게 피하며 다시 영민에게 달겨든다. 영민, 헉헉거리며 옆으로 미끄러져 성훈을 피한다.
털썩... 혼자 눈밭에 엎어진 성훈 앞에 휘익 바람이 분다.
갑자기 푹하고 배 밑의 눈이 꺼지듯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급격하게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성훈. 영민, 이제서야 상황을 알아차리는 표정이 된다.
쫓아오던 근찬과 민재, 멍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찰나.
도형
전부 가만히 있어!!!!
63. 크레바스 안
최도형의 "가만히 있어!"란 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지는 크레바스 안.
추락하다 간신히 크레바스 구멍 20여 미터 지점의 얼음 기둥에 걸린 성훈의 모습이 보인다.
얼음 기둥에 떨어지며 어딘가를 심하게 찌었는지 미친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공포에 얼어붙어 있는 성훈의 얼굴. 왠지 성훈이 남극일기에서 보았던 그림을 연상시키는 표정.
성훈, 덜덜 떨며 천천히 밑을 내려다보면... 그 밑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암흑의 낭떠러지. 마치 기분 나쁜 숨소리를 내며 성훈을 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느낌.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산한 질감의 시선이 성훈을 바라보고 있다. 우웅~ 하는 섬뜩한 바람소리가 숨소리처럼 밑에서 올라오고 있다.
64. 크레바스 밖
도형
(천천히 크레바스 쪽으로 움직이며) 그대로 가만히 있어... 이영민... 그대로 있으라구...
괜히 움직였다가 주변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김민재, 양근찬은 조심해서 썰매 쪽으로 가...
영민,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꼼짝없이 누워있고 민재와 근찬은 조심조심 썰매 쪽으로 이동한다.
도형, 어느새... 크레바스 입구 근처까지 와있다. 자신의 웃옷에서 비상용 로프를 꺼내드는.
영민에게 로프를 던져준다. 영민,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몸에 로프를 묵고 자신의 웃옷에 있는 비상용 로프를 꺼내, 다시 도형이 던져준 로프를 되감는다.
도형
민재랑 근찬인 빨리 내 썰매에서 제일 튼튼한 클립을 꺼내라.
영민이가 던지는 로프는 카라비나에 고정시키고 니들은 로프를 다시 클립에 묶어서 확실하게 지탱한다. 내말 알겠지??!!
민재, 근찬
예..!!
65. 크레바스 안
성훈에게 생명의 동아줄이 내려오고 있다. 성훈, 벌벌 떨며 그 줄을 바라보고 있다.
성훈
...시...시발... 빨리 ... 빨리좀 내려줘... 이...이러다... 떨어질 것 같단 말야...!!!!
성훈, 고개를 들면 위엔 도형이 그를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다.
66. 크레바스 밖
도형, 이번엔 서늘한 표정으로 로프를 묶은 채 누워있는 영민을 바라본다. 영민, 인상을 찡그리며 최대장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67. 크레바스 안
성훈이 기대고 있는 얼음 기둥이 무게에 못 이겨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내려오는 로프에 계속 손을 뻗어보지만 간발의 차로 로프는 계속 비껴간다.
성훈, 밑을 바라보면 금방 떨어질 것만 같다. 오금이 저려오고 눈물이 날 것 같다.
성훈
시발, 시발...!! (이때 얼음 기둥의 균열이 가속되며 깨져 버린다) 악!!
성훈, 떨어지는 찰나에 간신히 로프를 잡는다.
68. 크레바스 밖
악ㅡ!! 로프를 허리에 맨 영민 역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성훈이 잡은 로프의 무게가 자신의 허리에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인상을 쓰며 주위를 보면ㅡ 10m 뒤에서 동공이 커진 근찬과 민재가 카라비나와 클립에 고정한 로프를 붙잡고 있고, 최대장은 크레바스 입구에 박은 클립을 꽉 붙잡고 있다.
근찬과 민재, 로프를 끌어당기려 하지만 성훈과 영민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잘되지 않는다.
69. 크레바스 안
성훈ㅡ 간신히 동아줄을 움켜쥐었으나 무게 때문에 줄이 조금씩 조금씩 미끄러지며,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피부가 찢어지기 시작하며 피가 흘러나오는.
성훈
개...개새끼들... 돌아가면 전부 고소해 버릴 거야!! 재경이형 살인 방조죄만으로도 니들은 평생, 탐...탐험 못해!!
영민,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참느라 인상이 꾸겨진다.
영민
...제발 좀 조용히 해!!! 다들 널 구해주려고 이러는데... 줄이라도 놓치면 어떻게 할라구 그래!!??
성훈
(완전히 눈이 돌아가 광분하며) 놔봐!! 새꺄! 네가 죽을 때까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해줄께, 어!! 그럴 용기가 있으면 놔보란 말이야!! 이 병신아, 어!!!
영민, 성훈의 고함과 허리의 통증을 더 이상 참기 어렵다. 허리가 부숴 질것만 같다.
70. 크레바스 밖
성훈의 발작적인 고함이 들려오는 가운데. 얼음에 박은 클립을 고정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최대장의 표정 역시,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최도형, 앞을 바라보면 돌풍이 몰려오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썰매와 짐들이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도형, 이번엔 영민 쪽을 바라보면ㅡ 허리가 끊어질듯 고통스러워하는 표정과 마주친다.
10m 뒤의 근찬과 민재가 안간힘을 쓰며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성훈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몰려오는 돌풍과 영민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던 최대장, 다시 한번 성훈을 서늘하게 바라본다.
도형
...어디 다친 데는 없냐...?
71. 크레바스 안
성훈
(악다구니를 쓰며) 시...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허리를 움직여 보며) 아...악...! 시발... 허리가 나갔나... 썅.... 끊어질 것 같네...!!
72. 크레바스 밖
최도형, 성훈을 바라보던 무표정한 얼굴이 갑자기 공포스럽게 변한다.
줄에 매달려 있는 성훈의 뒤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 섬뜩한 느낌의 아이가 업혀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 도형, 클립을 잡고 있는 손의 힘이 순간 느슨해진다.
ㅡ허리를 휘감는 느낌이 달라져 놀란 표정으로 도형을 바라보는 영민.
도형, 넋이 나간 표정으로 코에선 코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73. 크레바스 안
고통스레 매달려 있는 성훈의 머리에 갑자기 피가 똑똑 떨어진다. 성훈, 놀라 위를 바라보면 최도형의 코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똑 똑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검은 피. 후드득후드득 양이 많아진다.
성훈
(짜증스레 악에 받쳐) 이... 이게 뭐야, 시발. 시발!!
74. 크레바스 밖
최도형,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다. 고통을 참느라 충혈된 눈으로 업혀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천천히, 그의 얼굴이 다시 광기에 찬 무표정이 되며 클립에서 손을 놓아 버린다.
ㅡ영민, 이순간을 역시 공포에 찬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에겐 도형의 의지로 클립을 놓아 버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얼음에서 팍 빠져나온 로프가 영민의 허리에서 휘휘 역회전한다.
민재와 근찬, 갑자기 미친듯이 빨려들어가는 로프를 어떻게 할수 없다.
75. 크레바스 안
진땀을 빼며 욕을 해대던 성훈의 손에서 갑자기 줄이 스르르 풀어진다. 순간, 말을 멈추고 위를 쳐다보는 성훈. 도형과 눈이 마주치지만 새빨간 햇빛에 반사되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다.
76. 도형
저 아래, 끝없는 암흑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하는 성훈. 하지만 도형의 눈에는 섬광이 번쩍이며, 이상한 광경이 나타난다.
-플래쉬백
-어딘가로 떨어지는 아이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 스쳐 지나가는 것.
성훈, 마치 블랙홀에 빠지듯 순식간에 어둠에 잠겨 버린다. 화면 가득, 깊고 검은 어둠이 엄습한다.
77. 돌풍
성훈의 추락에 망연자실해 있는 대원들 앞에 눈보라를 동반한 거대한 돌풍이 돌진해 오고 있다.
영민 데굴데굴 굴러 썰매 쪽까지 미끄러지고 도형, 역시 미친 듯이 썰매 쪽을 향해 뛰어 간다. 하지만 걸어가기도 힘들 정도의 바람이 순식간에 그들을 에워싼다.
민재와 근찬, 몹시 흔들거리는 썰매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지탱한다.
-남극의 돌풍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탐험대의 주위를 에워싸며, 사악 사악 그들의 얼굴을 칼날로 베어내듯 날카롭게 매만진다.
근찬- 칼로 살을 에는 듯한 고통에 눈을 꽉 감은 채, 썰매에서 피켈을 꺼내 황급히 땅에 박는다.
민재- 20여m를 미끄러지듯 구르지만 가까스로 콰악! 피켈을 땅에 꽂는다.
최도형- 역시 간신히 썰매까지 당도해 피켈을 땅에 꽂은 근찬을 붙잡는다.
영민은 썰매에 몸을 의지한 채 돌풍을 버티고 있다.
카메라, 피켈에 몸을 의지한 민재의 손목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손목시계 클로즈업. 째깍... 째깍... 째깍... 움직이던 초침이 어느 순간... 틱, 멈춰 버리며 시계의 유리가 쩍 갈라져 버린다.
78. 심연(深淵)
어둠의 나락 속으로 떨어진 성훈. 깊이 수백 미터 어디쯤엔가 턱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남은 숨을 헐떡이며 희미하게 눈을 뜬다. 그의 몽롱한 시선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어떤 커다란 눈이 보인다.
ㅡ 그가 마주보고 있는 것은 수천 년째 얼어붙어 있는 맘모스의 눈이다.
성훈, 거대한 맘모스를 바라보며 다시 눈이 감긴다...
F.O
거친 눈보라 소리가 선행하면,
79. 베이스캠프
각종 구조 지도와 위성 자료가 어지로운 책상 너머로, 계기판과 모니터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유진이 보인다.
아무 신호도 나타나지 않는 위성 좌표계와 치이 하는 잡음만 들려오는 무전기, 어떤 화면도 전송되지 않는 모니터를 앞에 놓고 절망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눈보라가 거세게 불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는 유진. 꼼짝 못하고 있는 헬기의 모습이 보인다.
짧게 신호음이 울리자 바로 전화를 받아드는.
유진
아뇨... 아직 어디에도 탐험대 위치가 나타나질 않아요...
뭐에 홀린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이때, 위성과 연결된 모니터 화면에, 뭔가 거칠게 지직거리는 영상 신호가 잡히기 시작한다.
유진
자... 잠깐만요... 재경 선배 노트북에서 뭔가 신호가 와요...!
어떤 것도 알아 볼수 없는 지직 거리는 화면속에서, 간헐적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이미지.
유진, 있는 힘껏 눈을 뜨고 바라보면... 그 지직 거리는 이미지 속에 괴이한 질감의 (탐험대를 바라보는 공포스런 시선과 유사한) 뭔가가 보일 듯 말 듯 한다.
-이번엔 치.... 하는 무전기의 잡음 너머에서 아주 미세한 톤의 사운드가 들려온다.
유진, 무전기의 볼륨을 최대치로 높인후... 긴장된 표정으로 다시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마치 지옥에서 전송된 듯한 이미지가, 괴이한 질감으로 희미하게 잡힌다.
그건 80년전 영국 탐험대의 행군 모습이다...!
4명뿐인 영국 탐험대가 섬뜩한 느낌으로 느릿느릿 걷고 있는 광경이 간헐적으로 보이는 것!
기겁한 표정의 유진에게 좀 더 크게 들려오는 무전기의 소리.
-두려움과 고통이 가득한 어조 사이에 간신히 SAVE US 라는 문장이 들리는.
영국 탐험대의 비상 교신음이다...
유진,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황급히 모니터의 레코딩 버튼을 누르지만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고.
유진
이... 이게 무슨 일이지...
공황 상태에 빠진 유진 너머로, 계속해서 들려오는 영국 탐험대의 공포스런 비상 교신음.
80. 눈 구덩이 속에서
땅을 파낸 후, 그 눈구덩이 속에 텐트를 치고 들어와 있는 탐험대. 안은 어두침침하다.
랜턴이 켜있지만 조명에 비친 대원들은 넋이 나간 표정의 시체들 같다.
근찬은 훌쩍 훌쩍 눈물을 흘리고 있고, 영민은 한쪽 알이 깨진 안경을 낀 채 평소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최도형은 완전한 무표정이다. 얼빠진 듯 멍한 민재의 얼굴.
민재
(나직하게 혼잣말처럼) ...사람이... 눈으로 본건... 전부 믿을수 있는 걸까요......
난데없는 민재의 말에 멍하게 바라보는 대원들. 세찬 바람소리만이 사방에 가득하고 ...
민재
만약에... 안 그렇다면... 어떤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뭐에 홀린 것처럼... 착각을 할수도 있는거겠죠......?
근찬, 눈물을 닦으며 민재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민재의 포켓에서 툭 떨어지는 <남극일기>. 일기장이 사라졌음을 아는 근찬, 소름끼치는 표정이 된다.
휘익... 외풍이 불며 불길하게 펼쳐지는 일기장의 한 페이지.
-화면 가득, 영국 탐험대의 꾸부정한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 펜화가 잡힌다.
다들 왠지모를 서늘한 기분으로 멍하게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점점 더 거세지는 눈보라 소리가 온 화면을 뒤덮는다.
81. 맑게 개인...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맑은 날씨. 태양에 있는 흑점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ㅡ텐트위에 수북이 쌓인 눈이 툭 툭 떨어져 나가며, 도형의 손이 지상으로 올라온다.
천천히 텐트를 빠져나오는 최도형.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면, 대원들의 썰매가 여기 저기 엎어져 있다. 파손된 정도가 크진 않지만 썰매속의 짐들이 눈밭에 쏟아져 있기도 하다.
-폭풍이 지나간 때문인지, 이상할 정도로 달라져 있는 주변 풍경.
멀리 보이는 듀피크 산의 존재만이, 이곳이 폭풍전과 같은 장소임을 얘기해 주고 있다.
ㅡ민재, 영민, 근찬 순으로 텐트를 빠져나온다. 썰매와 짐의 상태를 바라보며 황망해 하는 대원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들의 썰매와 짐을 확인하기 시작하는 탐험대.
영민
(눈밭에 흩어진 물품을 주워 담다 순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야...
민재
...예?
영민,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다. 그들 썰매가 엎어져 있는 뒤편 어딘가에 훨씬 강도 높게 파손된 썰매를 찾아내는 영민. 바로 성훈의 썰매다. 썰매 안을 뒤져보다 얼굴이 창백해진다.
영민
전부 박살났어... 무선 통신기, 아르고 모르스 송신기... 모두...!
근찬과 민재, 할말을 잃은 멍한 표정이 된다. 잠시 동안의 침묵.
도형
그럼, 더 빨리 도달불능점에 가면 되겠네...!
영민
(이해가 안 되는) 예...?
도형
무선이나 모르스 신호가 다 불가능 하다면 BC에선 당연히 우리가 조난 당한 줄 알고 있을 거다. 그럼 마지막 모르스 송신 지점에 헬기를 보내겠지. 하지만 그 지점은 한참 전이고 신호가 정확하게 갔을 거란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태야.
민재
...아르고로 보내는 신호는 모르스 신호기 때문에... 어디서나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도형
(무표정하게 태양을 가리키며) 저걸 봐라...
태양에 선명한 흑점.
근찬
저... 저건... 흑점 아닌겨?!
영민
(고개를 푹 숙이며 암울한 톤으로) 태양에 흑점이 생기면... 자기장이 변화해 모르스 신호고 뭐고 정확하게 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져... 블리자드가 불거나 추운 실외에서는...특히 전파 방해가 더 심해지지...
도형,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민재와 근찬, 암울한 표정이 된다.
도형
분명히 BC에선 우리의 루트를 추측해서 따라 올 거다. 하지만 헬기가 올 때까지 확신도 없이 마냥 기다릴 순 없다. 그보단... 예정된 기간 안에 도달불능점에 가는 게 가장 확실하게 사는 방법이야. 구조 팀과 우리가 약속한 비상 날짜가 있으니까 그 시점엔 틀림없이 헬기가 오게 되있어...
근찬
(언성을 높여) 대...대장님... 그라도 이건 미친짓이지라... 지가 아무리 모자라도... 이게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겠서라... 대원 둘을 잃었는데... 이...이건...
도형
(전혀 동요되지 않으며) 그래서?! 다시 돌아가자구...? 무전기도 아르고도 없이?
식량은 떨어져가고 해는 보름 있으면 져버리는데?! 양근찬... 너, 바보 아니야?
여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인간을 거부하는 데라구...!
바로 이땅에서 수백명의 탐험가들이 죽어갔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저 흰색... 사람들은 저걸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저 밑에 얼마나 많은 피가 뿌려졌는지, 자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눈을 손에 집으며) 하지만 그래봤자 눈과 얼음이다... 달겨들면 녹여서 마셔버리면 돼...
최대장, 비현실적으로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형
이번 탐험에서 이런 날씨 본적 있어? 이건 남극이 우리한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거다! 자, 빨리 털어내자구. 재경이는 벌써 BC팀에 구조돼서 편하게 쉬고 있을 꺼야...
성훈이는... 니들도 알잖아. 그건 그냥... 사고였다... 이정도 일도 안 일어나면 돌아가서 할 얘기도 없잖아? 안 그래?
영민과 근찬, 뭐에 홀린 듯 최도형의 극단적인 논리에 설득 당한 표정들이다.
민재
(갑자기 귀를 막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지... 지금... 누가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나머지 대원들, 모두 섬뜩한 표정으로 집중하면... 정말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다...가만히 들어보면... 그건 영민이 듣던 30년대 가곡 '세레나데'의 음률.
치지직 거리는 축음기의 잡음과 과도하게 낭만적인 멜로디가 분위기를 서늘하게 만든다.
영민- 자신의 썰매를 뒤져, 헛돌고 있는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든다.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줄을 마구 빼버리는 영민. 서서히 광분(狂奔)하며 플레이어를 미친 듯이 발로 짓밟는다. 민재와 근찬,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최대장, 그런 영민을 보며 어두운 미소를 짓는다.
82. 듀피크
누군가의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듀피크 산이 보인다. 그리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은 얕은 설산(雪山)이지만, 썰매를 끌며 넘어 가기에는 만만치 않을 것처럼 보인다.
-불안과 피로에 지친 표정인 탐험대.
영민
(GPS를 바라보다 후 한숨을 깊게 내쉬며) 목표로 가는 가장 빠른 좌표는 이 방향뿐입니다. 해발 569m의 듀피크를 통과하는... 평지를 돌아 가는 것 보다 거리상 20~30km는 단축되지만...
최도형, 영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키를 벋고 아이젠으로 갈아 신기 시작한다.
도형
겨우 500m짜리 언덕이야... 30킬로면 하루 이상을 벌수 있다.
영민
하지만, 이산을 넘어 간다는 건 너무 무립니다. 썰매를 일일이 정상까지 옮겨야 되는데... 지금의 체력과 사기로는...
도형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전원 출발 준비. 아이젠으로 갈아 신고 두 명씩 로프로 서로를 묶도록. 저녁까지 정상에 간다.
피곤한 표정으로 억지로 아이젠을 꺼내드는 민재와 근찬, 부대장.
도형
김민재! 양근찬!! 빨리 못해?! 부대장 지금 뭐하는 거야?!
-산 위에서 탐험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산한 시선.
83. 등반
헉헉... 두 명씩 로프로 서로를 묶고 꾸역꾸역 경사진 설산을 올라가는 탐험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새하얀 능선에 그들의 발자국이 찍혀간다. 선두의 최대장, 하얀 김을 연신 내뿜으며 탱크처럼 강력하게 전진하고 있다.
- 대열 끝에서 몸무게 때문인지, 중심을 못 잡아서인지 눈밭에 발목이 푹푹 빠지며 힘겹게 올라가는 근찬. 그와 같은 조의 영민, 근찬의 무게 때문에 계속 인상을 쓰며 힘겨운 전진을 해야 한다.
84. 플라스틱 통
누군가의 썰매 자크가 북 열리며 플라스틱 통이 들어 올려진다. 플라스틱 통에 써있는 이영민이란 이름. 바로 소변을 받아놓은 통이다. 행군 도중의 휴식 시간인 듯, 경사진 능선에 멍하게 걸터앉아 있는 대원들. 고글과 마스크로 완전 무장한 상태로 영민의 행동을 바라본다.
영민, 계속해서 몇 개의 소변통을 들어내 눈 바닥에 팽개친다.
데구루루... 비탈면에 미끄러져 내려가는 플라스틱 통들.
민재
...왜 그러시는 거예요...?
영민
(쓱 근찬을 한번 보며) 이것 땜에 너무 무거워... 무게를 줄여야 돼...
민재
그래도 그건...
영민, 이번엔 자신의 옷에 붙어있는 기업체 로고를 떼어내기 시작한다.
근찬, 왠지 영민의 행동이 자신을 의식하는 것처럼 느껴져 부담이 된다.
민재, 고개를 푹 숙여 발 밑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기이하게도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늘을 보는.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놀란 눈으로 창공을 응시하는 민재. 나머지 대원들도 그림자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화창한 가운데 태양만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민재
...이건 무슨 현상이죠...?
영민
...모르겠는데......
최도형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 자신들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 말없이 불안해하고 있다.
어느새 다시, 그림자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림자가 하나... 둘... 세 개까지 불어나는 것이다... 하늘엔 언제 나타났는지, 세 개의 태양이 떠있다. 열 개도 넘는 그림자가 눈 바닥에 어지럽게 퍼져 나간다. 대원들의 얼굴에도 불길한 기운이 퍼져 나간다.
85. 도형과 민재
듀피크의 정상이 가까이 보인다. 채 100m도 되지 않을 듯한 거리. 민재와 최대장 가속도를 내고 있다.
민재, 대장에게 뭔가 묻고 싶은 듯 머뭇거리지만 가열찬 최대장의 속도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민재를 바라보는 도형,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도형
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
민재,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향하며 가열차게 전진하는 최도형의 뒷모습.
86. 발자국
대열 마지막의 근찬, 휘청거리며 푹푹 눈에 발목이 빠진다. 이영민, 안되겠다는 듯 뒤를 돌아본다.
푹 푹 계속 눈에 발목이 빠지며 힘겨워 하는 근찬을 똑바로 바라보는.
영민
먼저 올라갈게.
근찬과 연결된 로프의 카라비나를 떼어내는 영민, 앞만 보고 올라가는 민재와 최대장의 대열에 유유히 합류한다.
푹... 발목에 눈이 빠지다 못해 앞으로 넘어져 버린 근찬. 눈밭에 코를 묻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탐험대의 뒷모습을 간절하게 바라본다. 헉 헉 가쁜 숨을 내쉬며, 탐험대가 하얀 눈밭에 남기고 간 아이젠 발자국에 시선을 주던 근찬. 갑자기 무엇을 보았는지 급격하게 숨이 가빠지며 표정이 새파랗게 질린다.
- 일렬로 나있는 탐험대의 발자국 주변에 여러 라인의 다른 발자국들이 찍혀 있는 것.
자신들만 올라가고 있는 상황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근찬
(눈이 풀리며 질린 목소리로) ...이...이건 허꺼시지라... 하아...하아...
- 이번엔 마치 근찬이 보란 듯이 바로 앞에 스윽 찍히는 발자국.
근찬, 양손으로 미친 듯이 그 발자국을 지우지만 계속해서 찍히는 발자국들.
- 탐험대 발자국 주변에, 순식간에 늘어난 다른 발자국들이 무질서하게 퍼져있다. 공포에 질린 근찬, 벌떡 몸을 일으켜 미친 듯이 정상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87. 듀피크 정상, 텐트
스위스 나이프로 자기 손에 있는 굳은살을 잘라내고 있는 영민.
지친 표정의 민재,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근찬,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솥에 남은 음식을 먹고 있다. 남은 국과 밥과 비스킷, 초콜렛등을 두서 없이 폭식 한다.
민재
...대장님은 어디 계세요?
영민
(텐트 입구로 밖을 내다보며) 밖에...
민재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영민
...그냥... 계셔...
근찬, 밥을 먹다말고 갑자기 피식 웃는다.
근찬
(영민의 서울 말씨를 흉내 내며) 그냥 계셔... 헤헤... 대장님은 맨날 그냥 계시지라...
영민
(표정이 변하며) ...우리 이런 얘기 언제 하지 않았나...? 일주일쯤 전이었나? ... 한 달 전이었나...? 아니, 일년전인가...
서늘한 표정으로 아무말 못하는 민재.
영민
(계속 굳은살 잘라내며) 그때도... 대장은 그냥 있었어... 애가 자살해서 영안실에 있을 때도......
민재
...자살이요...?!
영민
엄마는 야근 나가고 아빠는 산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15층 아파트에서...
열살짜리 꼬마가 떨어졌는데도...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겼는데도... 대장은 그냥 있었어...
그날, 애가 산장까지 전화해서 혼자 있기 무섭다고 아빠를 찾았데... 집에 빨리 오라고... 근데... 대장은 애한테 강해져야 된다면서 오히려 혼을 내고 전화를 끊어버렸지...
근찬
...앗따, 그러니께 시방 위대한 탐험가가 되있는거 아니겄소... 흐흐... 지난번 남극 실패한 빚더미에, 아는 그리되고, 이혼까지 당했어도... 나 같은 넘은 암만 혀도... 흐흐흐...
민재, 최도형의 스토리에 충격을 받은 표정.
근찬, 더욱 가열 차게 폭식에 열중한다. 국을 양말에 흘리는. 흘린 국이 양말에 스며든다.
근찬
(양말을 하나하나 벗겨내며)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지막 양말을 내리는 순간, 얼굴이 어두워지는 근찬. 발가락 끝 부분에 시커멓게 동상이 찾아든 것.
근찬
(혼잣말로) ...고소병이 올라나... 자꾸...보이는구마... 허꺼시...
황급히 양말을 올리며 다시 실성한 사람처럼 폭식에 빠져드는.
88. 빙벽(氷壁)
최도형,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높이에 가운데가 뚫려있는 빙벽앞에 서있다.
마치 개선문처럼 생긴 얼음문의 입구에 들어서는.
그의 뒤편엔 멀리 텐트가 보인다. 빙벽 속으로 들어가는. 섬뜩한 한기가 도는 빙벽 안엔 얼음 동굴의 입구가 있다. 최도형, 무심한 표정으로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89. 얼음 동굴
얼음 동굴 내부. 수정 같은 얼음의 벽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하얗다 못해 서늘하게 파란 얼음의 색체는 살아있는 것 같다.
동굴 안으로 휘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그 바람에 동굴 속에 쌓여있던 눈발이 이리 저리 휘날린다.
최대장, 조용히... 마치 남극의 내장 같은 빙하를 응시하고 있다.
투명한 빙하에 반사된 도형의 모습, 굴절된 얼음 때문에 도형의 얼굴이 공포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이 모습을 비추는 빙하가 숨을 쉬듯 조금씩 조금씩 움직인다...!
최대장의 옆모습,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몸이 덜덜덜 떨려온다.
다다다닥... 이빨까지 떨려오는 가운데, 그의 목에 걸린 카라비나 목걸이가 흔들린다.
찰랑 찰랑 그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린다.
F.O.
90. GPS
F.I.
헉 헉 가열차게 행군중인 탐험대.
자막/ PM 01: 56. 남위80"75', 동경52"56' 1월 30일 탐험 47일째
이번엔 영민이 선두에 서서 전진하고 있다. 근찬ㅡ 맨뒤에서 동상 때문인지, 불편한 걸음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뒤편에 아주 희미하게 듀피크의 형체가 보인다.
ㅡ갑자기 영민의 발에 아그작, 아그작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뭔가가 밟힌다.
멈춰 서서, 천천히 발밑을 내려다보는. 자신이 밟은 것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영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돼 한쪽 안경알뿐인 고글을 고쳐 쓴다. 허리를 숙여 그 무언가를 바라보면 -그건 영민이 일주일 전에 박살 내버렸던 카세트 플레이어의 파편들이다.
ㅡ영민, 손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이름이 매직으로 선명하게 씌여져 있는 카세트 파편을 집어 든다.
영민
(절망적인 목소리로) ...똑...똑같은 지점이야... 못해도 150킬로 이상은 걸었을 텐데...
일주일 전하고 같은 데로 되돌아왔다구...!
영민, 썰매에서 황급히 GPS를 꺼내든다.
ㅡ<남위 80도 75분, 동경 52도 56분>을 표시하고 있다.
민재
(GPS와 카세트 파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좌표 상으로는 분명히 다른 곳이에요..!
(멀리 듀피크의 희미한 형체를 바라보며) 우리 분명히 산을 넘어 왔잖아요...!!
근찬
아니여... 기계 오작동일 것이여... (침낭을 꺼내 GPS를 덮으며) 온도가 너무 낮아서 그런 거지라... 침낭으로 꼭꼭 싸서 보관하면 괜찮아 질것 잉께...
도형
호들갑 떨지 마. (구형 나침반을 들어 보이며) 이젠,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탐험가들 방법으로 가면 돼. 100년 전에도 세상 어디든 나침반과 지도 하나면 갈 수 있었다.
일주일 전과 같은 곳으로 되돌아 왔다면 다시 출발하면 그 뿐이야.
영민
대장님, 이제... 이제... 한계점에 온 거 같습니다... E.L.T를 꺼내시죠...!!
도형
그건 안 돼.
영민
이젠 진짜 E.L.T 뿐입니다! 그걸 켜면 어느 비행기에든 구조신호가 가잖아요... 제발...!
도형
(말 확 끊으며) E.L.T는 정말 결정적일 때 꺼내는 거다...
지금은 그런 비상 상황 아니야... 거의 다 왔어... 길어봐야 일주일이다.
자, 서있어야 몸만 얼어와. 빨리 가자.
영민
김성훈의 말이 맞았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이엘티를 안 꺼내신다면 대장님 말씀을 안 따르겠습니다!
도형
이영민!! 그걸 켜고 안 켜고는 내가 결정하는 거다!!
넌, 탐험대가 목표를 달성시킬 수 있게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도와야 되는거 몰라!!??
영민
지금 저는, 탐험대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도형, 이영민 한참동안 서로를 서늘하게 노려본다.
도형
(나즈막히) 탐험대를 돕는다... 너... 벌써 잊었구나... 왜 우리가 남극에 다시 왔는지를...
영민
그... 그건...!
도형
괜찮아... 지난일은 다 잊으라구 있는 거니까... 전부 잊어 버려도 돼...
근데 이상하지. 난 여기...이 풍경이 너무 낯이 익어. 이 햇빛, 이 공기, 이 바람, 전부 다...
너희들은 안그래? 우리 전부... 태어나기 전부터 여기 산 것 같지 않아?
대원들, 광기(狂氣)가 베어있는 최도형의 목소리에 모두들 무서운 표정이 된다.
도형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이 냄새... 남극에 발을 내딛을 때부터 났어...
아주 조금씩...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구... 이젠 가장 사랑했던 여자의 향기보다 더 강해... 이거 분명히 거기서 부터 불어오는거야...
우리가 도착하면 남극이 새하얀 다리를 벌리고, 반갑게 맞아줄꺼다...
도달불능점에 갈수 있다면, 남극을 이길수 있다면... 앞으로 어떤 기적도 만들 수 있어...!!
영민
그게... 기적이 아니라 저주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이렇게까지 해서 거기 간다는게 무슨 의미죠?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거...
극한의 자연과 싸우다 죽어버린 수천명의 탐험가들... 이제 위대하다고 생각 안해요.
그런식으로 맞서지 않으면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끝까지 객였던 것 뿐이라구요...!
도형, 갑자기 영민의 고글을 벗겨 한쪽 알 뿐인 안경을 뺏어든다. 나머지 안경알은 추위에 노출되자 순식간에 단단한 냉동체가 되어 버린다. 최대장, 그 안경알을 한 손으로 뿌직 부셔버린다.
도형
이제 보이는 게 없으니까 무서운 것도 없지?!
영민, 시익~ 시익~하며 분을 삭이는 듯한 숨소리가 커져간다. GPS를 품에 끌어안고 있던 근찬, 더욱 겁에 질린 듯하다. 민재는 도형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최대장, 혼자 썰매를 이끌고 출발해 버린다.
ㅡ영하 32도를 가리키는 온도계.
91. 환영(幻影)
거의 숨이 끓어질듯 헉헉거리며,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대원들. 서로가 서로를 로프로 연결해 떨어지지 않게 한 상태.
-선두 영민의 시점. 모든 시선이 흐릿하다. 그의 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진공의 설원.
슬쩍 뒤를 돌아보면, 최대장, 민재, 근찬이 보인다. 대열 마지막의 근찬, 간헐적으로 다리를 휘청거리며 대열을 쫓아오고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는.
-민재의 시점. 앞서가는 대장의 뒷모습을 보며 걷고 또 걷는다.
민재의 귀에 자꾸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고통스런 행군의 와중에도 소리에 집중해 보면, 바로 뒤에서 근찬이 내는 넋 나간 혼잣말 소리.
근찬
(알아 들을 수 없이 웅얼대는) 헉...헉... 자꾸... 그러지마... 이건 아니지라... 헉...헉... 말씀이... 심하시구마잉... 헤헤... 여기여라... 누...누가... 어휴... 추버라... 추버...
민재- 고개를 돌려 근찬을 바라보면, 추위 때문에 손끝에 피가 돌지 않는지 팔을 탁 탁 털며 어색한 걸음걸이로 힘겹게 따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계속 혼잣말을 해대는 근찬을 진정시키고 싶지만 행군의 속도가 너무 빨라 어쩔 수 없다. 앞에서 폭주기관차처럼 나아가는 도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민재.
엄청난 피로가 느껴져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온도계, 기온이 영하 32도에서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다. -33, -34, -35...
-다시 영민의 시점. 이빨이 더욱 가열 차게 달그락거리며 추위에 숨이 막혀온다. 눈발이 더욱 세게 날리기 시작하고 날씨는 점점 더 음산해져 온다. 갑자기 그의 흐릿한 시야에 눈의 색이 변질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노랗고 파랗고 검은 눈들.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뒤를 바라보는.
최대장, 민재, 근찬...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누군가 다른 사람!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썰매를 끌고 있다.
-다시 민재의 시점. 갑자기 근찬의 넋두리 소리가 뚝 그친다.
민재,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근찬이 팔을 털고 있다. 안심하며 앞으로 향하는. 그러나 최대장의 뒷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리는 이는 최대장이 아닌 재경이다! 추위에 얼굴이 얼어붙은 것 같은 공포스런 면상. 갑자기 땅은 그대로인 채 하늘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어지럽게 움직인다.
-영민, 공포감에 숨이 가빠지며 멈춰 서려 하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뒤에서 따라오는 누군가가 바로 옆까지 다가온다.
엉망진창으로 얼굴이 깨져 피가 응고되고 뇌의 일부가 돌출 되어 있는 그는 바로 성훈이다!!
영민, 입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지르지만, 비명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바로 그 순간, 무서운 속도로 눈 속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영민. 순식간에 빙하를 뚫고 물 속으로 빠져 버린다. 물에 잠긴 영민의 앞에 투명한 얼음이 사면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다.
투명한 빙하의 밑에서 미친 듯이 얼음을 두들겨 보는 영민. 하지만 얼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 속에 빠져 있는 그의 시야 너머로 나머지 대원들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계속해서 광적으로 빙하를 두들겨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투명한 빙하에 가열 차게 붉은 색의 눈이 쏟아지며 온 시야가 새빨갛게 변해온다. 겨우 영민의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 나오며--
-RED Fade.
92. 기지(基地)
강렬한 눈보라 소리와 함께 서서히 F. I.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최대장과 근찬, 기진맥진하는 영민과 민재를 가까스로 끌어가고 있다.
도형
여기서 퍼지면 안돼!! 양근찬!! 더 세게 못 끌어?!
근찬
(고통을 못이기겠는지 흐느끼며) 흐흐흐...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어라... 더 이상은...어여 텐트 치고 비상조치를 취해야제...... 이러단 부대장님이랑 민재도 가버리지라... 흐흐흐...
근찬, 갑자기 구토가 나오며 퍼져 버린다. 최대장, 근찬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육중한 그를 감당할 수 없다.
도형
일어나!! 안 일어나?! 어!!
근찬을 발로 마구 차는 최대장. 근찬, 울음소리가 더 커지며 꽥 꽥 고통스런 구토를 계속할 뿐 꼼짝하지 않는다. 폭설, 퍼져버린 세 명. 최대장,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앞을 바라본다.
ㅡ그의 시야에 안개가 걷혀지듯 기이한 광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형
이건... 또... 뭐야......
그의 앞에는 1/3쯤 눈에 잠긴, 엄청나게 부식된 상태의 폐 컨테이너 두 동이 보이는 것.
아마도 예전에 기지(基地)로 사용됐던 곳인 듯. 깃대의 자취들이 보인다. 어느 나라말인지 알아 볼 수 없는 이상한 알파벳의 흔적들도, 깨지고 마모되고 일그러져 있는 컨테이너의 군데군데에 보인다.
최대장, 지도를 꺼내 살펴보지만 어디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이다.
GPS는 여전히 <남위- 80도 75분, 동경- 52도 56분>을 가리키고 있다. 최도형, 아주 낮게 허탈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음산하기까지 한 웃음이 이 진공의 공간에 퍼져 나간다.
93. 헬기
요란한 프로펠러 굉음과 함께 화면 가득, 각종 계기판이 잡힌다. 보면, 탐험대를 구조하기 위해 뜬 헬기 내부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지막 GPS 위치를 확인하는 유진과 외국인 기장, 안전요원이 타고 있다. 허허벌판의 설원을 유영하며, 사라진 탐험대를 찾는 헬기의 모습이 원경으로 보인다.
94. 컨테이너
첫 번째 컨테이너의 문을 잡아당겨 보는 최도형. 하지만 문은 부식된 상태에다 얼어붙어 있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손잡이를 미친 듯이 당겨 보고 발로 차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ㅡ20~30여m 정도 떨어져 있는 두 번째 컨테이너를 바라보는 도형.
부식된 상태로 고정 되어있지 않은 문이, 바람에 덜컹 덜컹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다.
95. 근찬과 도형
최도형, 으아아 기합을 넣으며 민재를 엎는다.
허우적대며 텐트를 꺼내고 있는 근찬. 부욱. 바람에 찢겨져 나가는 텐트.
도형
(가만히 근찬을 보다) 약해빠진 새끼......
최도형, 민재를 엎은 채 매몰차게 되돌아서 버린다.
-민재의 희미한 시선으로, 그를 짊어지고 가는 최도형의 옆모습이 보인다.
96. 컨테이너 안
남극지도의 하단 부분이 쭉 찢겨진다.
보면, 그 찢겨진 부분을 담배 모양으로 둘둘 마는 최대장의 태연한 얼굴. 이윽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지도의 찢겨진 부분을 담배처럼 태우는 도형. 후~ 연기를 내뿜고.
겨우 정신을 차린채,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민재. 영민은 여전히 실신해 있는 상태다.
ㅡ덜컹거리던 문을 톱과 나무를 이용해 고정시켜 놓은 폐컨테이너 내부는, 을씨년스럽지만 바람을 피할 수는 있는 수준이다. 도형, 민재에게 툭 초콜릿을 던져준다.
민재
여기가... 어디죠? ...성훈 선배가 얘기했던 그 노르웨이 기진가요...?
최도형, 연기를 내뿜으며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민재,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텐트 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웬일인지 근찬이 보이지 않는다.
민재
근찬이 형은......!
97. 폐기지 밖, 잠시 후
양근찬, 여러 겹의 외투와 슬리핑백을 잔뜩 뒤집어 쓴 채 폭설을 맞고 있다. 민재, 근찬에게 다가가고.
민재
형, 돌았어요?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근찬
(덜덜덜) 텐트가... 텐트가...
근찬이 깔고 앉아 있는 것은 이미 다 찢겨져나간 텐트의 앙상한 골격. 탄식을 내뱉는 민재...
근찬
(덜덜덜) 인자 대장 옆에 있기 싫구마... 날 아주 아주 싫어항게... 난 도망갈 거여... 집에 갈거여... (갑자기 덥석 민재를 잡으며) 민재야, 대장 짐 안에 있는 그거... 누르기만 하면 구조 비행기가 온다는 그거... 니랑 나랑 훔쳐뿔쟈... 응? 민재야...
민재
이엘티를 훔친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요? 정말 우리가 목표 가까이 와 있는 거면 어떻게 할거냐구... 형, 진짜 나도 돌아버리겠어... 뭐가 옳은건지... 어떻게 해야 되는건지 답이 안나와... 생각해보면 대장 말대로 다 사고고 우연이었잖아...
난.... 아직... 최대장을 믿고 싶어... 아니, 진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근찬
니...니는 이제 내편이 아녀... 니는 언제나 대장편잉게...
민재
형, 그게 무슨 소리야!!
근찬
성훈이형...재경이형... 헤헤... 추버라, 추버... 난 약한 새끼가 아녀... 난 이렇게 죽지 않을 껴... 헤헤... 아니라니께... 아녀... 흐흐... 지은아... 지은아...
근찬,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다. 민재, 근찬을 힘겹게 일으켜 세운다.
ㅡ이 모습을 컨테이너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도형. 눈보라가 더 거세지고 있다.
98. 폐컨테이너
문이 덜컥 열리며 눈보라가 컨테이너 안으로 밀려든다. 민재, 헉헉거리며 근찬을 잠시 세워두고 힘들게 문을 닫아 고정시킨다.
ㅡ보면, 대형 주전자엔 물이 끓여지고 있고 영민은 무기력하게 누워있다.
엉거주춤 벽에 기대있던 근찬ㅡ 절뚝거리는 어색한 걸음걸이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동상부위가 아파오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이 모습을 초점이 나간 맨눈으로 지켜보는 영민.
영민
(근찬을 보며 다 알고 있다는 듯) ...어려워... 어렵다구...
민재
부대장님, 자꾸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가 지금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영민
아무것도 모르면서 까불지 말라구... (절망적인 톤으로) 우린 어려워... 다... 죽는다구......
근찬
(순간, 괴성을 지르며) 시방, 누가 죽는다는 소릴하고 지럴이야, 지랄이!! 난 안죽는당께!!!
영민
대장은 목표를 포기 안해... 도달불능점에도 안가고 우리가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니? 지금이라도 이엘티를 뺏고, 대장을 막을 수만 있으면... 살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근찬
나가 그러자구 하잖여... 그렇게 함 될꺼 아녀!!!
영민
눈도 제대로 안보이는 내가? 최대장이라면 죽고 못 사는 민재가? ...양근찬, 네가 할 수 있어? 내가 니 상태 모를 것 같애?
근찬, 아무 말도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왼쪽 발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영민
(갑자기 목소리가 벌벌 떨리며) 나는 봤어... 봤다구...
-혼란스런 표정으로 영민을 바라보는 민재.
물주전자가 물 끓는 것을 알리는 비명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한다. 이때,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며 눈바람이 컨테이너에 쏟아져 들어온다. 최대장이 돌아온 것.
도형
(광적으로 밝은 톤으로) 자, 다들 힘내야지? 지금, 남극이 한판 붙자구 난린데...!
주전자의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싸한 분위기. 근찬, 양쪽 귀를 막으며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댄다.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눈바람이 계속해서 컨테이너의 문을 불안하게 노크한다.
99. 새벽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여전히 컨테이너의 문을 가열 차게 두드리는 눈바람.
번데기 안의 누에들처럼 온갖 외투와 침구류를 잔뜩 겹쳐 덮고 취침중인 대원들.
온도계가 영하 22도를 가리키고 있다. 털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지만 모두 덜덜덜 몸을 떤다.
카메라, 민재에게 다가가면.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가득 퍼져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계속해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곤하게 잠들어 있는 민재를 걸고, 그 뒤에 누군가가 스윽 일어나 은밀하게 뭔가를 하는 장면이 포커스가 나간 상태로 보여진다.
바로 영민이다. 긴장된 손놀림으로 대장의 짐에서 삐삐 크기의 작은 기계를 꺼내는.
그건 E.L.T(Emergency located transmitter 비상위치발신기)다!
정자세로 숨소리 하나 없이 자고 있는 대장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살금살금 문 쪽으로 이동하는 영민. 짐이 가득 들어있는 배낭을 멘 상태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주변을 주섬주섬 손으로 확인하며 움직인다. 이엘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번엔 민재의 것으로 보이는 고글을 푹 눌러 쓰는.
이윽고 문앞...
ㅡ여전히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자고 있는 민재, 한쪽 발이 침낭 밖으로 나온 채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는 근찬.
덜컹 덜컹... 휴대용 톱과 나무로 억지로 막아놓은 입구가 바람에 두들겨 맞고 있다.
문 앞에 서있는 영민, 가슴이 두근거린다.
근찬
(갑자기 잠꼬대) 아, 그렇게 하잖께...! 지은아, 지은아...
근찬의 갑작스런 잠꼬대에 몸을 뒤척이는 대장과 민재. 영민, 긴장한 탓인지 헛기침까지 나온다.
ㅡ그 순간, 거짓말처럼 문을 두드리던 눈보라가 멈춘다. 에라, 모르겠다는 기분으로 톱과 나무를 빼버리고 문을 확 열어젖히는 영민. 컨테이너에 서늘하게 스며드는 바깥 공기.
ㅡ이상한 느낌에 눈을 뜨는 민재.
100. 안개
포커스가 안 맞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는 영민, 아연실색한다.
눈보라는 순간적으로 그쳤지만 앞 뒤 옆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엄청난 안개가 껴있는 것.
영민, 다시 돌아갈까 컨테이너 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엘티와 배낭을 떠올리자 곧 단념하는 표정이 된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101. 컨테이너
민재, 상체를 일으키며 무의식적으로 머리맡의 손목시계를 본다.
시계는 이미 움직이지 않은지 오래다. 보면, 방금 누가 나갔는지 문을 막고 있던 것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근찬과 최도형뿐 영민은 보이지 않는다. 불길한 느낌의 민재.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자신의 고글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민재, 옷을 저며 입으며 확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힌다.
ㅡ침낭바깥에 나와 있는 근찬의 한쪽 발은 확연하게 동상의 흔적이 보이고.
ㅡ정자세로 눈을 감은 채 악마 같은 미소를 짓는 최도형.
102. 컨테이너 밖
엄청난 안개가 휘감고 있는 컨테이너 밖 풍경. 앞 뒤 옆,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다.
영민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민재
부대장님...!
바닥을 보면, 흐릿하게 영민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103. 영민
영민, 민재보다 20여m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화들짝 놀라지만 여전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갑갑하기 그지없다. 걸음이 빨라지는.
104. 컨테이너 안
최도형, 언제 일어났는지 똑바로 앉아 서늘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가 보는 것은 동상의 흔적이 선명한 근찬의 한쪽 발.
105. 영민
S) 부대장님... 어디 계세요?!
겨우 10여m 뒤에서 들리는 민재의 목소리. 영민, 어디 피할 곳이 없나 주위를 살펴본다.
그의 근처에 흐릿하게 보이는 두 번째 폐 컨테이너. 부식된 문이 얼어있다.
배낭에서 중간 크기의 피켈을 꺼내 손잡이를 내리치는 영민. 큰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 애를 쓴다.
문 주위를 에워싼 얼음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106. 컨테이너 안
최도형, 조심스럽게 근찬의 양말을 걷어내고 있다. 참혹하게 썩어들고 있는 시커먼 발목이 드러나고.
도형,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쯧쯧 찬다.
근찬
(잠에서 깨며) 시...시방.... 뭐하는 거요!!
도형
(섬뜩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냥 있으면 어떡하냐?
이대로 놔두면 온몸으로 썩은 기운이 다 퍼질 텐데...
도형, 자신의 배낭을 연다. 이엘티가 사라졌음을 눈치 챈 듯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변하지만 곧 평정심을 찾으며 구호 약품 키트에서 무언가를 꺼내든다.
근찬, 몸을 일으키려 하나 추위에 언 몸과 동상 때문에 마음처럼 되지 않고.
107. 민재
눈보라가 다시 불어온다. 민재가 서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부터, 탁 탁 하는 파열음이 들려오지만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그마저도 곧 잠잠해져 버리는.
영민의 발자국 흔적을 더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는 민재. 불안한 표정이 역력하다.
눈발이 날리며 발자국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108. 컨테이너 안
덜컹 덜컹. 다시, 눈보라가 컨테이너를 때려댄다. 푸욱, 마취 패치를 놓는 도형.
근찬
놔두쇼잉... 난 약한 새끼가 아닝께... 나가 알아서 할거구만이라...!!
도형
니들은 왜 나를 못 믿지? 아버지말 안 듣는 새끼들이 잘되는 거 봤나?
근찬
(주사기운에 서서히 정신을 잃으며) 대...대장님... 그람 지금이라도...신호를...구조 신호를...
도형
인제,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냐... 자, 지금부턴 아무런 고통도 없을 거다...
최대장, 근찬의 썩어 가는 발을 보며 뭔가를 찾는다. 남은 위스키 병이 눈에 들어온다.
109. 두 번째 컨테이너
민재, 조금씩 강해지는 눈보라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며 걸어 나가고 있다. 눈바람에 안개가 걷히며, 민재의 시야에도 두 번째 폐 컨테이너가 모습을 드러낸다. 영민이 들어간 컨테이너의 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그 앞에서 멎어있는 영민의 발자국.
민재
(문을 두들기며) 부대장님! 안에 계세요? (큰소리로) 부대장님!! 거기 계시냐구요??
110. 컨테이너
최도형ㅡ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에 심하게 흔들리는 문을, 탐험 도구들로 고정시켜 놓고 있다.
근찬, 마취 패치 때문에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중.
시커멓게 드러난 동상 부위가 상당히 심각해 보인다.
도형, 이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집어 들고.
111. 두 번째 컨테이너
아직도 안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불안한 표정의 민재ㅡ 콰~악, 문을 박차고 내부로 들어서면, 볕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는 낡디 낡은 폐 컨테이너 내부. 오싹한 분위기다.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선 민재,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피가 역류하는듯 공포스런 표정이 된다.
112. 컨테이너
대장이 집어든 것은 문을 고정시킬 때 썼던 톱이다. 근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113. 지옥도(地獄圖)
민재 앞에 펼쳐진 것은 바로 남극일기 마지막 장에 그려진 그림속 풍경이다...!
ㅡ두터운 겨울 방한복을 껴입고, 꾸부정한 자세로 등을 돌린 채 죽어있는 영국 탐험대원의 뒷모습...
그의 앞엔 불 판 위에 남아있는 뼈다귀등, 뭔가를 구웠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주변엔 <1922년 영국탐험대. P.O.I>의 뱃지를 단 또 다른 시신 서너 구가 수십 개의 토막으로 난자된 채,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한눈에 보아도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 속에서 동료들의 인육을 구워 먹은 참상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등을 돌린 채 누군가의 인육을 구워먹던 대원도 끝내 굶어 죽었는지, 앙상한 해골만이 외투 속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넋 나간 표정으로, <남극일기>의 저자가 이곳을 도망치며 마지막에 보았을 지옥도를 지켜보는 민재.
-속삭이듯 들려오는 영국탐험대의 비상 교신음.
이 섬뜩한 사운드가 컨테이너의 어둠 저 안쪽- 누군가의 씩씩거리는 가쁜 숨소리로 이어진다.
몽유병 환자처럼 흐느적흐느적 어둠 안에 발을 들여놓는 민재.
콰앙! 열려있던 문을 눈보라가 부서트리는 굉음이 울리며, 컨테이너 안엔 더 많은 빛이 스며든다.
컨테이너의 어둠 안쪽에는, 스위스 나이프로 손목을 그은 채 피를 쏟고 있는 영민이 쓰러져 있다...!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민재
안 돼... 안 돼...
달려가 영민을 안고, 손목에서 세어 나오는 피를 막으며 절규하는 민재.
민재
안 돼!! 안 된다구요!!
영민
(거의 안 들리는 작은 소리로) ...우리도... 저렇게... 저렇게... 될 거야...
민재
시발, 그딴 소리하지 말라구 그랬잖아요!!
영민
(쓴웃음을 흘리며 나직하게) ...너... 욕도 할 줄 알았냐...? 햐... 사람은 역시 지내봐야 안대니까...
영민, 민재에게 의지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툭 놓친다. 삐삐 크기의 그 물건은 E.L.T.다.
민재
이건...!?
영민
안 움직여... 대장이 밧데리를 다른 곳에 숨겼어... 아... 머리가 빙빙 돈다... (혼미 해지는)
114. 톱
최도형, 경건한 표정으로 근찬의 썩은 발목을 거침없이 자르기 시작한다.
주사기운에 정신을 잃어가던 근찬, 악!!!!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실신해 버린다.
쓱싹 쓱싹... 근찬의 발목을 자르는 최도형의 섬뜩한 표정.
115. P.O.I
민재, 영민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심장 부근을 미친 듯이 누른다. 어떻게든 의식을 회복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것. 그러나 영민의 정신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손목을 막아 놓은 곳에서도 피가 계속해서 번져 나온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벽 위를 멍하게 보고 있는 영민.
영민
이상해... 모든 게... 희미해 보이니까... 마음이 편해져... (덥수룩한 수염에 손을 가져가며) 면도가 하고 싶다...
민재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며) 부대장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빨리 일어나서 면도하고 여길 뜨자구요... 제가 대장님한테 필요한거 다 뺏을게요... 예?!
영민
(쓴웃음 지으며) ...네가 대장한테 뺏을 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네 모든 걸 다 뺏길걸... 근데... 왜... 성훈이 줄을 놔버렸을까......
민재의 충격적인 반응...
영민
이해가 안가... 그 정도 인간은 아니었는데... 남극이, 남극이 대장을 미치게 만드는거야......
...정말... 여기 다시 오는 게 아니었어......
영민, 싸늘하게 식어간다. 민재ㅡ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며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눈물이 흐르는 그의 흐릿한 시선 너머로, 등을 돌린 채 죽은 영국인의 손끝이 보인다. 그가 손톱으로 짓이겨 파놓은 글자가 바닥에 적혀 있다.
NO, POLE OF INACCESSIBLITY
민재
(흐느끼며) ... 폴 오브 인... 액세스블리티... 도달... 불능점은... 없다...
민재, 넋 나간 표정으로 영국탐험대의 배지를 바라본다.
-1922. BRITISH EXPEDITION P.O.I.
민재
(뭔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영국 탐험대 P.O.I...
배지에 씌어진 약자는 손톱으로 새겨진 지점(POLE OF INACCESSIBLITY)의 약자였던 것이다.
그 영국 탐험대도 도달 불능점을 향하고 있었던 것.
민재, 비명을 토해내며 이번엔 호주머니에서 일기장을 꺼내 무슨 혐오스런 괴물이라도 된다는 듯 온힘을 다해 집어 던진다.
바로, 이때ㅡ 눈보라 소리 너머 멀리, 투투투 하는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벌떡 일어나는 민재, 밖으로 뛰쳐나간다.
손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E.L.T.가 쥐어져 있고.
- <남극일기>의 펼쳐진 마지막 페이지에 갈겨써진 문장 C.U.
자막/ "우리의 욕망이 여길 지옥으로 만들었다... 하느님,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116. 위스키
역시 눈보라 소리 너머 멀리, 투투투 하는 진동음이 들리는 컨테이너 안.
바닥은 온통 검은 피범벅이다. 최도형, 피가 잔뜩 튀긴 얼굴로 아직 근찬의 발목을 자르고 있다.
힘이 드는지 발목을 자르다 말고 옆에 있는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는다.
이번엔 잘린 발목에 소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위스키를 뿌려댄다. 위스키는 곧 빈 병이 되어버리고.
도형
가만... 이건 도달 불능점에 갔을 때 마져 마시기로 한건데...
잠깐 동안 멍하게 빈 위스키와 자르다 만 근찬의 발목을 바라보던 도형. 얼굴에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미소가 번지며 다시 톱을 집어 든다. 투투투하는 진동음이 더 가깝게 들려온다.
117. 헬기
눈보라가 훨씬 심해진 컨테이너 밖. 민재, 진동음이 들려오는 하늘을 바라보면, 그들을 찾고 있는 헬기가 아주 멀리 흐릿하게 보인다. 이 모습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멍하게 바라보던 민재, 정신을 수습하며 양팔을 힘껏 벌린 채 소리를 내지른다.
민재
(목이 터져라) 여기요!!! 여기예요!!!! 여기~~!!!
아무리 외쳐도 헬기의 위치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져 똑바로 서있기 조차 힘든 상태가 되어가고.
민재, 이제 서야 자신의 한쪽 손에 E.L.T가 들려져 있음을 확인하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르고.
민재
조명탄......!
미친 듯이 근찬과 도형이 남아있는 컨테이너로 뛰기 시작한다.
한걸음에 내달려 도착한 컨테이너는 그러나 문이 닫혀 있는 상태.
민재
(문을 잡아당기며) 문열어요!!! 헬기라구요!!! 구조 헬기!!! 아, 지금 뭐하는거에요!!!!!!!
문은 안에서 무언가로 굳게 잠겨있는 상태.
민재, 저 멀리 상공에 보이는 헬기를 바라보며 광적으로 문을 두드리지만 꼼짝하지 않는다.
목이 탄다. 기대와 불길한 기분이 동시에 보이는 얼굴로, 있는 힘을 다해 문에 몸을 부딪치는 민재. 쾅! 쾅!! 꿈쩍 않던 문이 조금씩 움직인다. 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부딪치는.
쾅! 쾅!! 이번엔 사력을 다해 발로 문을 걷어찬다.
...덜컹... 문이 열린다. 그러나 민재, 또다시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 되어 버린다.
118. 컨테이너
ㅡ근찬의 발목을 막 자른 최대장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등을 돌린 최대장은 남극일기의 마지막 장 그림, 두 번째 컨테이너의 식인(食人) 영국 탐험대원과 같은 포즈인 것이다. 잘려진 근찬의 발목이 덜렁 바닥에 나뒹굴며 잘린 부위에선 피가 솟구치고 있다.
도형
(광기에 찬 표정과 따듯한 표정의 기묘한 부조화가 얼굴가득...) 어... 민재 왔구나...
내가 얘 응급조치를 했어... 근데 어쩌지? 다릴 잘라 놨더니... 같이 걸을 수가 없네... 흐흐흐.... 흐흐흐...
휘~이ㅡ 눈보라는 컨테이너 안으로 사정없이 밀려들고, 하늘 멀리선 구조 헬기의 진동음이 투투투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민재, 주먹을 불근 쥐고 온몸이 부숴질듯 바르르 떨다 아ㅡㅡㅡㅡ악!!!!!!!!!! 고함을 내지르며 최대장에게 달겨든다.
퍽! 퍽! 퍽! 근찬에게서 도형을 떼어내며 사정없이 최도형의 얼굴을 내리치는 민재.
손에 쥐고 있던 E.L.T는 바닥에 나뒹굴고. 도형, 안면을 가격 당하다 턱! 민재의 오른손을 잡아챈다.
도형
헉헉... 김민재... 좋아... 다 약해빠진 새끼들만 데려왔나 했더니 너는 배짱을 보여주는구나...! 그래도 널 살려준 아버지를 패는 새낀 개새끼지? 안 그래?!
민재
(버티며) 헉헉... 당신이 무슨 아버지야!! 자식들을 다 죽이는 아버지가 무슨 아버지냐구!!!!!
도형
(철퍼덕, 민재를 넘어뜨리며) 내가 언제 새끼를 죽였다는 거야?! 어?!
크레바스에 떨어지는 놈을 구해준게 누구냐구? 어?!
(바닥에 나자빠진 민재를 마구 발로 차며 목소리가 광자(光子)의 그것으로 변해가는)
너같이 젖비린내 나는 새끼가 뭘 안다고 함부로 씨부라리는 거야??!!
네가 죽음이 뭔지 알아?! 고통이 뭔지 알아??!! 왜 하나같이 견뎌내질 못하는 건데?!
그냥 그 작은 고비 한번만 넘기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하냔 말이야??!!
한번 하기로 하고, 한번 가기로 했으면 죽기 직전까지 싸워봐야 뭐라도 될 거 아니냐구??!! 어??!!
민재, 계속해서 발길질을 당하다 간신히 대장의 발을 잡고 늘어진다. 휘~익!! 미친 듯이 강해진 눈보라가 다시 들이닥친다. 그 힘에 휘청하는 도형을 엎어트리는 민재.
민재
(퍽! 퍽! 다시 대장을 가격하며 울부짖는) 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구!!!!!!
제발 밀어부치지마!!!!! 할 수 없는 건 그냥 할 수 없는 거야!!!! 거기 간다고 죽은 형들이 돌아와??!! 죽은 당신 아들이 돌아오냐구!!! 도달불능점 같은건 없다구!! 그게 있다고 해도 당신을 받아줄리 없단 말이야!!!!
퍽! 퍽! 퍽! 최도형의 얼굴이 뭉개지기 시작한다. 입에선 검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악마처럼 새빨개진 민재의 두 눈. 광적으로 반복되는 주먹질. 예전의 그가 아니다.
꾸욱, 도형의 목을 조르는 민재. 최도형의 눈 흰자위엔 가는 핏줄이, 이마에는 굵은 힘줄이 드러난다.
ㅡ도형의 시점(視點):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자그마한 아이가 헉헉 힘겨워하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이의 목엔 최도형이 언제나 목에 걸고 다니는 피켈 목걸이가 찰랑 찰랑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갑자기 바람이 광포하게 세지며 그 피켈 목걸이가 아이의 목에서 뜯겨져 날아가 버린다.
컨테이너 안에도 최악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 여파로 컨테이너 벽들이 마구 부숴져 나가기 시작하고. 겨우 겨우, 최도형의 목을 조르고 있던 민재도 바람의 힘으로 풀썩 내동댕이쳐진다.
모든 것들이 마치, 남극이 재앙을 내리는 것처럼 폭풍우에 부숴 지고 날아가고 있다.
119. 구조 헬기 내부
헬기의 바로 앞까지 폭설이 무섭게 들이닥친다. 폭설 밑으로 희미하게 컨테이너 기지가 보이는 것 같다. 투투투 프로펠러의 굉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유진, 계속해서 밑으로 날아가자는 손짓을 하며 고함을 지르지만 외국인 기장과 안전요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불가능하다는 표시를 한다.
후~욱! 이번엔 헬기가 난기류에 휩쓸려 뒤로 넘어갈 뻔하고...
유진, 이윽고 눈물을 머금은채 고개를 푹 숙이며 포기해버린다.
120. 대폭풍(大爆風)
폐 컨테이너 주변을 가공할 파괴력으로 공격하는 폭풍우. 기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박살나고 있다.
하늘에 휩쓸려 날아가는 온갖 것들...
카메라 앞으로 대장의 피켈 목걸이가 날아와 확 화면을 덮는다.
BLACK OUT.
121. 배낭
F.I.
새하얀 눈의 벌판에, 폭풍의 이런 저런 흔적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다.
아직 약하게 바람이 불고 있다.
그 설원,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 시체처럼 꼼짝없이 엎어져있는 누군가를 한참동안 바라본다. 갑자기 그의 몸이 조금씩 움직인다. 겨우 겨우 고개를 드는 이는 바로 민재다...
컥 컥... 입에 잔뜩 차있는 눈을 토해내고. 추위 때문에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컨테이너 파편들 틈바구니에서 제일 먼저 근찬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민재, 절망적인 표정으로 근찬에게 달려가 그를 품에 안는. 한쪽 발목이 없는 상태로 싸늘하게 죽어있는 근찬.
민재
(눈시울이 붉어지며) ...형......!
이번엔 민재의 시선 저 멀리 영민의 시체가 보인다. 그러나 최도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민재, 힘겹게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지만 최대장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겨우, 그가 목에 걸고 다니던 카라비나 목걸이만을 찾아낸 민재. 가만히 보면...
ㅡ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 기념' 이란 문구가 씌어있다. 피의 흔적이 묻어있는.
그 피를 눈으로 씻어내는 민재. 자신도 모르게 그 목걸이를 목에 걸며 영민의 시체 곁에 다가선다.
역시 싸늘하게 식어있는 영민의 등엔, 그가 탐험대를 도망치며 짊어지고 나온 배낭이 남아있다.
122. 눈 무덤
민재ㅡ 영민의 배낭을 메고, 근찬의 고글을 낀 채 앞으로 나아간다.
민재의 뒤편엔 그가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두개의 눈 무덤이 보인다. 근찬과 영민의 무덤인 듯.
민재의 나레이션
모르겠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지금 시간이 몇 신지...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직 해가 있다는 것, 그래서 밤이 오려면 며칠의 여유가 있다는 것뿐이다. 지금의 마지막 희망은 오직 그곳에 가는 길뿐이다...
남극의 밤이 오기 전에 도착한다면 본부와 약속한 비상날짜에 구조 헬기를 만날지도 모르기 떠문이다...
123. 끝없는 행군
헉, 헉 거친 숨을 토해내며 진공의 설원을 홀로 행군해 나가는 민재.
나레이션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식량, 나침반, 찢어진 지도, 재경 선배가 남긴 라이터와 조명탄 몇 개... 부대장의 배낭엔 필요한 모든 게 있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것이 남겨진 걸까...
그리고 대장은... 모르겠다... 남극이 그를 영원히 데려간 것일까......
124. 점
화면 가득 백색의 공간이 보인다. 곧 그 백색의 공간에 깊숙이 찍히는 발자국.
힘에 겨운지 배낭을 질질 끌며 걷고 있는 민재를 비춘다. 바람에 찢겨져 나가는 지도와 나침반을 간헐적으로 살펴보는.
고글 속에 보이는 초점 없는 눈빛, 상처투성이인 메마른 얼굴, 수염이 가득 난 면상 곳곳에 검버섯처럼 피어난 동상, 화상 자국들. 또다시 매섭게 눈보라가 치고 있다.
푹, 푹 빠지는 눈에 휘청거리며, 쓰러졌다가는, 또다시 일어나는 민재. 그러나 끝내 눈 위에 무릎을 꿇고 꼬꾸라진다.
--사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쓰러져 있던 민재, 눈 속에서 천천히... 천천히... 정신이 든다.
이윽고 눈을 뜨면... 그는 아직 살아 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는. 흐릿한 고글안의 시점으로 뭔가가 보인다.
그의 바로 앞 광활한 설원의 한 지점에 깃발 하나가 썰렁하게 꽂혀져 있는 것.
보면, 심하게 바랜 옛 소련의 국기다. 국기 밑에 걸린 어떤 표식.
ㅡ< S 82. 06 , W 54. 58 >
그들이 그렇게 가려했던...... 도달 불능점.
민재, 고글을 벗어 던진다. 도달 불능점의 표식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을 멍하게 서있는 민재.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낸다.
그의 디지털 녹음기. REC버튼을 누르는.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녹음기는 그저 도달 불능점에서 불어오는 남극의 서늘한 바람소리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민재, 구조 헬기가 곧 날아올 것 같은지 격앙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서서히 지평선 멀리, 조금씩 해가 기우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민재,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배낭을 뒤진다.
구조 헬기에 대비하려는지 라이터와 조명탄을 꺼내드는.
녹슨 은색 지포 라이터를 탁 켜보는 민재. 조명탄의 개수를 세 본다.
민재
하나, 둘, 셋...
배낭 깊숙한 곳에 보이는 면도기. 민재, 자신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져본다.
무슨 생각에선지 면도기를 꺼내 수염을 쓱쓱 잘라보는. 녹이 쓴 은색 지포 라이터의 반사면을 거울삼아 면도를 하는 민재. 그의 해맑은 얼굴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뭔가 기대에 찬 표정이다.
ㅡㅡ사이
화면 가득 석양의 붉은 햇살이 확 쏟아진다. 그 햇살을 멍하게 바라보는 민재.
좀 전의 기대에 찬 표정은 간데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 헬기는 오지 않는 것이다.
면도를 끝낸 해맑은 얼굴.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햇빛을 손으로 가리며, 어딘가에 등을 기대고 있다.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은 <도달 불능점>의 표식 막대다. 계속해서 비춰오는 따듯하고 낭만적인 느낌의 햇살. 민재는 무표정 상태에서 눈이 시린지, 표정을 찡그린다.
ㅡ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탁 탁 하는 파열음. 그가 은색 지포 라이터를 열었다 닫았다 할 때 나는 소리다.
ㅡ녹이 낀 은색 지포 라이터에서 강렬하게 반사되는 햇빛. 여전히 탁 탁하고 라이터를 열었다 닫는 민재. 화면 가득 잡히는 민재의 얼굴...
카메라ㅡ 그의 눈동자를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잡으면,
해가 빠른 속도로 지는 모습이 민재의 눈동자를 통해 보여진다.
순식간에 온천지가 어둠에 휩싸이는 남극.
화면엔 바람소리와 민재의 숨소리, 탁탁하는 파열음이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라이터를 켜는 민재. 라이터의 불빛만으론 한치 앞도 볼 수 없다...
민재,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지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 흐느낌은 이내 엉엉하는 울음으로 뒤바뀐다.
ㅡ그 울음소리 너머 어디선가 희미하게 다른 음향이 들려온다.
민재, 이상한 기분에 울음을 억지로 억지로 참으며ㅡ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건 누군가가 눈을 밟으며 달려오고 있는 소리다! 머리가 쭈볏 서는 민재, 벌떡 일어난다.
125. 달리는 괴물
촤~악! 달려오는 누군가의 한참 앞에서, 조명탄이 터져 오른다.
저벅 저벅... 헉헉... 그 달리는 괴물은 저쪽 편에 소스라치는 표정으로 서있는 민재를 본다.
126. 설인(雪人)
첫 번째 조명탄을 터트린 민재, 한참 앞에서 달려오는 누군가를 섬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건 도형이다. 얼음과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살아있는 설인(雪人), 달리는 괴물.
허억...! 민재, 숨이 막혀 버릴 것 같다.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하는 민재. 하지만 얼마 뛰지 않아 방향감각을 잃고 몸을 휘청이며 꼬꾸라져 버린다.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려나가는.
헉 헉...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도망친다. 이번엔 눈 바닥에 자꾸만 발이 퍽퍽 빠진다.
민재
악...!
발이 삔 것 같다. 겨우 겨우 눈 속에서 다시 발을 뺀 민재, 두 번째 조명탄을 터트리면.
이번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도형이 보인다!
민재를 붙잡으려는 대장의 손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 소스라치는 공포에 휩싸인 민재. 다시 광적으로 도망친다. 굴러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또 달리고, 달리는 민재...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이 고통스럽다. 헉헉헉... 미로에 빠진듯 설원을 헤매는.
-콰악...! 눈밭에 꼬꾸라지는 민재. 데굴데굴 굴러 몸 반쪽이 눈밭에 꽂혀 버린다.
헉헉헉... 터질 듯 뛰는 심장. 이제는 더 이상 달아날 힘도 달아날 의지도 없다.
민재, 마지막 조명탄을 터트린다. 쒼.... 하늘로 솟구치는 섬광... 촤악! 터지며 온 주위가 환해진다.
민재의 바로 앞까지 달려온 도형. 민재에게 달려든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두 눈을 감아버리는 그...
조명탄의 남은 섬광이 둘을 희미하게 비추고.
민재, 눈을 뜨면... 도형, 민재의 바로 앞에서 숨이 터져라 헐떡이고 있다.
한참을 뛰었음에도 어찌 된일인지 그들의 뒤편엔 <도달불능점>의 표식이 보인다.
결국 두사람은 비슷한 장소를 달리고 또 달렸던 것.
도형
(도달불능점 표식쪽으로 움직이며) 헉헉헉... 남위... 82도 08분... 동경... 54도 58분...
헉헉... 남위 8208.... 동경 5458...헉헉...
민재
헉헉... 그래요... 여기예요...
최도형, <도달불능점> 표식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얼음에 수십년의 세월동안 파뭍혀 있던 표식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쉽게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최도형, 마지막 괴력을 발휘해 표식을 뽑아낸다.
-표식을 집어던지며 푸욱, 눈밭에 주저앉아 버리는 도형.
민재
(울먹이며) 도대체... 도대체... 뭐예요... 그걸 뽑아버린다구 여기가 굉장한 곳이 되는줄 알아요?! ...여긴 그냥... 그냥... 땅에 찍힌... 한 점... 한 점일 뿐이라구요......!
도형
(알아들을수 없이 잦아드는) ...나... 나는... 멈출수가 없어... 가야돼... 가야된다구...
내가 갈수 있는 곳은... 아무도 없고... 누구도... 올수 없는 곳이어야만 돼......
난 그런데 밖에 갈수가 없어... 여긴... 여긴... 날 받아줄수 있는 곳인줄 알았어...
(눈물을 뚝뚝 쏟으며) 김민재...... 너는 날 멈추게 할줄 알았다...
난 혼자 멈출수가 없거든... 어쩔수가 없다구... 네... 네가 나를 멈춰줘야지... 내가 이렇게...
춥고... 무섭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미쳐가고 있는데...... 너는 날 멈추게 했어야지......!!!!!!
서서히 섬광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민재, 역시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는 도형을 바라본다. 숨이 턱에 차 오르는.
언제부터인지 민재의 손에 뭔가가 쥐어져 있다. 손을 펴보려 움직여보지만,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은 하나도 펼수가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한채 완전히 탈진한 민재,
얼어붙은 손과 퍼져버린 대장을 바라보며 눈이 서서히 서서히... 감겨온다...
BLACK OUT.
127. 비전
어두컴컴한 화면 저쪽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
김민재... 일어나... 일어나......!
민재, 눈을 뜨면 너무나 화창한 날씨의 서울 어느 야외 공원이다. 푸른 잔디... 새파란 하늘... 뛰노는 아이들 소리... 민재 앞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근찬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근찬
웬 낮잠을 그리 자는겨? 어여 밥먹어야제...
민재, 믿겨 지지 않는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면... 간이 식탁 위에 보글보글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는 찌개와 하얀 김이 훨훨 올라오는 밥이 보인다.
근찬과 근찬의 애인이 다정하게 간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그 뒤로 안경을 끼지 않은 영민과 맘모스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성훈이 공을 차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성훈
김민재! 인제 깼냐? 피곤했나보다...
영민
야... 너 머리 뒤에 풀 붙었다...
민재, 자신의 머리에 붙은 풀을 떼어내며 잠시 놀라는. 먼 거리에서도 영민이 맨눈으로 알아본 것이다. 그 뒤로 재경이 캠코더를 들고 자신의 딸과 부인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꼬마, 인형을 들고 있다. 살랑 살랑...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민재의 목에 건 무언가가 살랑 살랑 움직인다. 민재, 고개를 숙여 그것을 바라보면...
그건 대장의 카라비나 목걸이다. 민재, 다시 카라비나 목걸이를 바라본다.
ㅡ 1977년 에베레스트 등반 기념. 이라는 문구...
그 목걸이를 뒤집어 보는.
ㅡ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빠가...
라고 적혀 있다.
민재,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들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 가득하다.
민재
대... 대장님은 뭐하고 계세요...?
영민
(공차기를 멈추고 가만히 민재를 바라보며) 글쎄... 거기 그냥 계실 텐데... 대장님은 아직 거기 계셔... 애랑 신나게 놀고 있을 꺼야, 아마...
어느 샌가 민재의 얼굴 밑에서 뭔가 붉은 빛이 번쩍거리는 게 느껴진다.
민재, 아래를 바라보면... 언제 그의 손에 들어왔는지 오른손에 뭔가를 꽉 쥐고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손가락 사이로 붉은빛이 퍼져 나오고 있는것.
민재, 천천히 손가락을 펴보면... 그것은 바로 번쩍 번쩍 붉은빛의 비상신호를 보내는 E.L.T.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E.L.T를 들어 바라보는 민재... 갑자기 무시무시한 찬 바람이 불어온다.
128. 도달불능점
확, 순식간에 남극으로 되돌아온 화면... 단내가 나는 힘겨운 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는 민재.
자신의 손에서 번쩍 번쩍 빨간 불빛을 발하고 있는 E.L.T.
매서운 냉풍이 몰아치고 있지만 민재, 추위를 느낄수 없다.
하늘을 바라보면... 오로라처럼 보이는 신비한 빛의 기운이 주위를 어렴풋이 비추고 있다.
이상한 기분에 대장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하지만 최도형은 그 자리에 없다.
그가 뽑아버린 도달불능점의 표식이 한쪽에 팽개쳐져 있고, 그가 주저앉아 있던 자리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민재,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뻗기 시작한다. 최도형이 앉아 있던 방향에 E.L.T를 갖다대는.
E.L.T의 붉은 불빛은 마치 최도형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처럼 번쩍 번쩍 그의 흔적을 비춘다.
화면, 하늘로 날아오르면... E.L.T의 붉은 불빛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멀리서 그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는 이상한 기운의 시선(視線).
화면, 그 시선의 주인공을 잡으면, 방금 탐험을 출발한 듯한 완전 무장 상태의 최도형이다.
그의 앞엔 한치앞을 볼수 없는 눈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최도형이 서있는 자리는 마치 태풍의 눈처럼 모든 것이 고요한 마지막 장소인 것.
최도형, 저 멀리 보이는 붉은 불빛을 회한과 슬픔, 따듯함을 모두 담은 초인(超人)의 표정으로 한참동안 지켜본다. 왠지 그의 눈가에 아직 눈물이 고여 있는것만 같다.
이제 남극의 음산한 시선은 최도형을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도형, 남극을 마주본다.
최도형 對 남극.
남극의 시선인, 폭풍이 야수처럼 섬뜩한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바람의 움직임과 음영(陰影)이 최도형을 향해 어떤 형상을 만들어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아이가 손을 내미는
-그를 인도하던 영국탐험대원
-재경 성훈 영민 근찬을 연상시키는
-최도형의 모습처럼 보이는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형상을 알수 없는 자연의 미친듯한 소용돌이가, 휘익 휘익 그를 향해 거칠게 달겨들려 한다...!
최도형, 무표정한 얼굴로 순식간에 남극의 시선 속으로 파뭍혀진다.
이제 그는 남극과 영원히 하나가 된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어둠이 내린 남극을 날아가기 시작하는 카메라.
129. 남극일기
어느새, 아직 석양이 땅 끄트머리에 걸려있는 남극의 어느 곳까지 날아온 카메라.
빠른 속도로 지상에 내려앉아, 화면 저 끝쪽의 무언가를 비추면... 그건 '남극일기'다.
몽환적인 황혼이 서늘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바람에 서서히 그 모습이 남극의 얼음속으로 뭍혀져 가는 '남극일기'...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남극속으로 사라져 간다.
이윽고 '남극일기'가 사라진 흰 설원위에 황혼이 지며, 검은 어둠이 휩싸인다.
BLACK OUT
--어두운 화면 바깥에서 하아... 하아... 남극의 숨소리가 서늘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30년대 가곡 '세레나데'가 들려오며 CREDIT.
03/12/02 8th draft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