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에 있어서 사사로운 무역이란 별로 없었다. 항상 외국과의 교역은 국가의 관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청淸보다 앞서 명明시대에 황제는 주변의 국가들에게 칙서(勅書)를 적당한 숫자로 발행을 하여 무역의 양을 결정하였다.
보통 중국의 주변 국가는( 변방인 몽골이나 만주, 일본, 조선 등 ) 이 칙서의 숫자가 대단한 재산이며 권한에 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초기 자본금 중의 하나가 칙서였다.
일본의 봉건영주들은 이 칙서를 차지하기 위해 또한 은 채굴권을 빼앗기 위해 수시로 험악한 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나 명明 말에서 청淸 초로 넘어가는 동안 일본의 은 생산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나라가 도쿠가와 가문의 통일 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싸우는 일이 줄어들어 갔었다.
이 무렵의 시기가 [ 임진왜란- 조일전쟁( 일본에서는 조일전쟁이라 부른다) ]이 일어났다는 그것은 결코 은과 무관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앞 회에서 소개한 일본의 이와미 은광은 16세기 초반에 채취를 시작하여 조선에서 회취법이 전해진 후에 비약적으로 생산량이 증가하였으며 오랜 혈전 끝에 이 은광銀鑛을 차지한 모리(森)가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도미 히데요시 가문의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있는 군자금은 이 은광 때문이라 추측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코폴로는 ≪ 동반견문록 ≫에서 일본은 지팡구라 하여 황금의 나라로 묘사했는데 내가 역사를 더듬어 보면 과연 그것이 황금일까? 혹시 은(銀)을 착각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지구상에는 은의 매장량이 금보다도 20배 정도 많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왜 가끔 은이 금보다 비쌌을 때가 있었을까? 아마 그것은 천연상태의 순은( 純銀 )이 순금( 純金 ) 보다도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은은 금보다도 기술적으로 세련된 제련술製鍊術( 대표적으로 회취법 )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라 할 수가 있다.
기원 500년 전 그리스에서는 이른바 ≪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 한창이었다. 수십 년 전에 막강한 페르시아의 침공을 합동으로 물리친 희랍 ( 그리스 )의 여러 나라들은 이제는 내부의 패권을 놓고 사력을 다해 맞붙었다.
그 양대 주인공이 [ 아테네 ]와 [ 스파르타 ]이였다. 전쟁 중에 아테네의 영내 중 [ 라울리온 ] 이란 곳에서 우수한 은광이 발견이 되었다. 아테네의 지도자 중에 [ 니키야스 ]란 인물은 이 은광을 경영하여 아테네에서 실력자가 되었고 이 은광 덕분에 스파르타와 계속 전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루기 위해 은 생산량의 증가에 매달려 은광을 캐내는 노예를 너무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 결과 노예들이 다수 도망을 치고 말았다.
( 예나 지금이나 광산은 항상 하층 계층의 근육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은 생산량이 격감하게 되어 아테네의 재정도 궁핍하게 되었다. 결국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하고 그리스 전체의 패자 자리를 물러 주고 말았다. 물론 중요한 원인으로서 전에 이야기한 전염병( 페스트나 이질 등으로 추정 )도 뺄 수는 없다.
witpo
앞 회에서 말한 개량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회취법 )은 1533년에 하카타의 호상 가미야 주테이가 한반도에서 초청한 일본말로 게이주와 소탄이라는 기술자가 전달했는데 그들의 조선식 이름은 김감불과 검동이다.
그리고 이와미 은광( 일본어: 石見銀山 이와미 긴잔 )은 옛부터 은을 채굴하였던 광산으로 센고쿠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는 대규모의 은광이었다.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전성시절에는 전 세계의 은 생산량의 1/3에 해당이 되는 많은 양이였다고 한다.
광맥은 이와미 국 동부로 현재 시마네 현의 오다 시 오모리를 중심으로 니마 정과 유노쓰 정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광산유적으로 196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같은 해 일본의 지질백선에 선정되었다.
사진은 이와미 은광의 모습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지도. 그리스 내부만이 아니라 이탈리아나 페르시아 근처에도 전쟁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