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백 년 전 선조의 음성
고맙다. 고마워!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일제탄압,
6.25전쟁 등 온갖 고난 겪으면서도
어찌 나를 중심으로 한 친필기록들을
그리 상세히 만들고 알뜰히 보관해 왔더냐!
힘이 난다. 힘이 나!
세 형들 나주에서 저 세상 떠나보내고
모친 모시고 세 동생들과 새 삶의 터를 구축한 영광,
500년 바른 역사가 호남에서 새 빛을 발하는구나!
축복이다. 축복!
38세에 생을 마감하며 모친 노후와
11남매 삶 걱정되어 차마 눈 감지 못했지만
내 피가 흐르는 생명들
몇 만 명이 두 눈을 번쩍거린다니 영생이다 영생!
진실과 사실을 전달하는 친필기록
이두백
정년퇴직하고 15년째 되어 가는데 지금도 아내는 늘 정리하거나 없애버릴 것들을 지적하곤 한다. 오래 되어 퇴색해버린 책들, 신문 스크랩 물들, 각종 메모 물들, 각종 사진들, 액자 및 족자 물들... 그간 각종 월간지들, 문학월간지들과 아주 오래된 책들은 수차 정리하여 복지관 등에 500권 넘게 기증해 오긴 했다. 오래된 단행본 책들도 꽤 기증하거나 버렸었다.
아내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늘 정리하고픈 것들, 정리 후 버리고 싶은 것들은 사실 많다. 또한 너무 많아 정리에 미처 착수하지 못한 것들 또한 아직 많다. 각종 사진들, 일기장들, 업무용 다이어리 노트들, 명함철들, 각종 책들, 35년 직장생활 중 받은 월급봉투들...
그런데 2022년 전주에 사는 한 종친의 전화를 받은 뒤 생각을 좀 바꿀 구실이 생겼다. 그 종친께선 나와 고향이 같은 전남 영광인데 오래된 친필족보와 한 교지를 발견하여 대종회에 알렸고 KBS1 진품명품 감정전문가에게 감정도 의뢰하였다고 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내 성씨본관의 대종회 사무총장으로 봉사하면서 매 분기별 전국모임을 대전 뿌리공원에서 주도해왔고 여러 종친들과 함께 다양한 고증으로 2018년에 바른 대동보를 발간했던 것을 알기에 내게도 연락해 오신 것이다.
그 친필 한문족보를 대종회에서도 바로 입수해 사진도 찍고 탄소연대 측정도 했고 고증도 시작했다. 3월 25일 시향제에서는 몇 백부를 복사해서 종친들에게 나눠드리기도 했다. 그 전주 종친은 전남 영광 및 장성에서 오래 거주한 37년생인 가까운 집안 친척이 2022년 말에 타계하자 문상을 갔고 유품정리과정에 참여했는데 전혀 효용가치가 없어 보이는 고문서들을 유족들이 치우려 하자 본인에게 달라고 하여 빛을 보게 한 셈이라고 했다. 타계한 37년생 그 종친께선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마을의 앞마을, 특히 학교 다닐 때면 늘 지나가고 지나오던 앞마을인 남산마을에서 살아오셨기에 알음이 있던 먼 친척분이셨다. 그 종친과 나의 조상들께서 전남 나주에서 영광으로 삶의 터를 옮겨 잡은 후 500년 가까이 살아오셨는데, 임진왜란, 정유재란,병자호란, 일제침략과 수탈, 6.25사변 등등 온갖 환난을 거치면서도 그 가승보를 대대로 보관해 온 셈이다. 특히 선조들의 오랜 삶의 터인 전남 영광에서 장성으로 삶의 터를 옮겨 살면서도 오래되어 퇴색한 한문으로 된 가승보를 정성껏 잘 보관해 온 셈이다.
원본 크기의 영인본족보를 받아보니 가로 30센티, 세로 40센티로 꽤 컸고 친필 붓으로 쓴 30쪽 분량의 파란색 카버인 소위 청장의 가승보였다. 주인공은 1510년에 태어나서 1547년, 38세에 타계하신 우리 성씨 족보상 죽음공(竹陰公)인 만영(萬榮)이셨고 더 따져보니 13대 직계선조가 되는 분이셨다. 이제까지 전해오는 족보상의 자녀는 3남 3녀였는데 3남 11남매나 되었다. 남자 위주의 족보가 아니고 남녀 모두를 공평히 기록했다. 같이 발견된 교지(敎旨)는 가정(嘉靖)17년 9월, 즉 1538년에 내려졌고 유학 이만영 문과 갑과 제1인 급제출신자(幼學 李萬榮 文科 甲科第1人及第出身者)로 쓰여 있었다. 위로는 부친, 조부, 증조부로부터 시조까지 11대 선조를 상세히 모두 기록하고 있었다.
전해온 바로는 16세기에 가승보주인공인 만영님께서 전남 나주에서 살던 중, 7형제 중 위로 세형을 모두 잃은 후 모친을 모시며 세 동생들과 전남 영광행을 하여 새 삶을 개척했다는데, 현재의 족보상 전남북 및 전국에 퍼진 자손들이 만 명은 넘는 듯 하다.
그 가승보를 보니, 재미있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1499년생인 강원도 양양의 한 종친이 전라도사로 활약할 때(1540년경으로 추정) 전남 영광종친에게서 동 가승보를 필사하기 위해 1차 빌려갔고 역으로, 1521년생 영광종친이 양양부사로 활약하던 1587년에, 가승보를 빌려갔던 양양종친의 아들에게서 다시 빌려왔다고 되어 있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던 16세기에 강원도 양양과 전남 영광 종친간의 교류는 매우 궁금한 사연들을 캐게 만들었다.
그래서 좀 더 윗대의 역사를 거슬러 보니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1455년 및 사육신 생육신이 생길 즈음에 연결이 되었다. 경복궁 제거벼슬을 하고 계시던 선조 분께서 5형제를 두었는데 결과적으로 큰 아들 자손들은 강원도 양양에서, 둘째와 세째 아들 자손들은 전남 함평에서, 넷째 아들 자손들은 강원도 홍천에서, 다섯째 아들 자손들은 제주도와 전남 장성에서 기거하게 된 것이었다.
가승보주인공의 증조부께선 1414년생으로, 1454년 박팽년 천거로 남부참봉에 재수되었는데 바로 밑 동생과 처남인 신죽주의 동생인 신말주와 함께 전남 함평으로 낙향을 했고 영파정이란 정자를 짓고 교과서에도 실리는 시조도 지었다고 한다.
이번에 발견된 청장의가승보로 1차 우리 성씨본관 종친회에서 1633년부터 12차례에 걸쳐 이뤄진 일부 족보 왜곡사실들을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2차로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역사서, 국사편찬위의 질의응답서 등에 기초하여 2011년에 새로 정부에 등록한 우리 성씨본관의 시조 위상을 더 강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에 인터넷과 디지털시대를 사는 종친들 간에 바른 역사의식과 공정 및 정의 정신 속에 더 큰 화합과 융성을 기대해 본다. 3차는 각 대학과 도서관 등에 사본을 기증하여 우리나라 서지학의 일부 역사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대전 뿌리공원에서 전시된 각 성씨들의 족보들을 감상해 본 적이 있는데 최초의 족보들로 전시된 그 족보들보다 더 오래된 기록물이길 기대해 보기도 한다. 첫 번째로 영인본을 국립광주박물관과 대전 뿌리공원에 기증했다.
더 나아가, 이번에 발견된 청장의가승보에 이어 그 후속편 기록 발견도 많이 기대된다. 가승보주인공격인 죽음공(竹陰公) 만영(萬榮)께서 7형제 중 4째이시어서 형들과 동생들 후손들이 친필로 이어 확장시킨 족보가 분명히 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이번에 발견된 청장의가승보의 11남매 기록이다. 11남매 중 5딸들은 동생의 딸들로 확인 되었는데 이는 이어진 상당부분 족보기술들이 어떤 이유로 없어지고, 후손들이 보관 시 빠진 부분들을 못 찾고 남은 것들만 편철하다 보니 그리된 듯 했다.
한편, 청장의가승보 주인공인 내 직계 13대 선조님의 음성이 아래 시와 같이 들리는 듯하다.
5백 년 전 선조의 음성
고맙다. 고마워!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일제탄압,
6.25전쟁 등 온갖 고난 겪으면서도
어찌 나를 중심으로 한 친필기록들을
그리 상세히 만들고 알뜰히 보관해 왔더냐!
힘이 난다. 힘이 나!
세 형들 나주에서 저 세상 떠나보내고
모친 모시고 세 동생들과 새 삶의 터를 구축한 영광,
500년 바른 역사가 호남에서 새 빛을 발하는구나!
축복이다. 축복!
38세에 생을 마감하며 모친 노후와
11남매 삶 걱정되어 차마 눈 감지 못했지만
내 피가 흐르는 생명들
몇 만 명이 두 눈을 번쩍거린다니 영생이다 영생!
골절(骨折)
이두백
우리의 몸을 이뤄주고 활동을 지탱해주는 뼈는 몇 개일까? 신생아일 때는 약 450개에 달하지만 자라면서 서로 뭉치고 합쳐져서 270개 단계를 거치고 성인이 되면 206개라고 한다.
요새 새삼, ‘나에게 이 206개의 뼈들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일까? 일부가 없어져 더 적어진 것은 아닐까?’자문자답해 본다. 그 이유는 4번에 걸쳐 뼈 몇 개가 뚫어졌거나 부러졌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1970년 여름방학으로 기억된다. 광주광역시에 유명한 이비인후과 병원이 있었고 명의라는 소문이 동기동창 친구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시골에 내려가지 않고 자취집에 머물면서 마음먹고 진찰을 받아봤다. 병원진찰을 받아보니 코 안쪽 뼈에 만곡증이 있고 그대로 놔두면 비후성비염, 축농증 등을 유발하여 장기적으로 생활이나 학습에 큰 지장이 될 수 있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래서 젊은 혈기를 믿고 과감히 수술대에 올랐다. 당시 마취기술이 발달 되지 않던 때였던지 기계로 코 안의 한쪽 뼈를 깎아내는데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상당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담당의사분께선 수술이 잘 되었다며, 그날 바로, 코 안 다른 쪽 뼈 깎는 것까지를 권했으나, 너무 아파 그 병원을 도망 나오듯이 뛰쳐나왔고 그 뒤엔 어떤 이비인후과 병원을 지나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중반 어느 해, 직장에서 가진 부서대항 축구경기를 하면서였다. 상대편 팀에서 하늘 높이 공을 차올렸기에, 그 공을 머리로 받아 내 공으로 만들려고, 상대편 선수와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올랐다. 그런데 상대편 선수는 동작이 빨랐던지 나를 고의로 피했던지, 내 몸만 허공에 붕 떴고 내 몸무게와 중력의 힘에 의해 왼팔을 먼저 짚으며 나뒹굴었다. 그 순간 왼팔이 모두 부러져 떨어져나간 듯한 통증이 느껴졌고 호흡도 가빠졌다. 눈을 떠보니 다행히 왼팔은 붙어있는데 팔목이 부러져 축 늘어졌고 손가락들도 움직여지질 않았다. 바로 회사 앞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했고 무조건 머리 위로 왼팔을 올리라고 하여 상당기간, 잘 때나 근무 중에도 깁스한 팔을 높게 들고 다녔다. 절차에 의해 장애인 여부 판정을 했으나 등급은 매겨지지 않았고 관절 일부가 없어졌다고 했다.
세 번째는 2007년 11월에 두 번에 걸친 뇌수술을 할 때였다. 직장에서 안전모를 쓴 상태로 낮은 천장에 심하게 부딪쳐, 두개골 안에서 뇌를 보호하고 있는 3개의 막중 경막이란 곳에서 실핏줄이 파열되었었다고 한다. 3주간 피가 조금씩 흘러 쌓여 뇌 한쪽을 쭈그러트리며 중심에서 상당히 밀어내면서 위기상황을 초래했다. 장녀 결혼식 상견례가 있어 서울에 올라온 때에 위기상황을 맞았기에 119차를 불러 바로 병원에 갔고, 바로 수술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병원으로 앰뷸런스차를 타고 가서, 한 밤 중에 두개골 두 곳을 뚫는 수술을 했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었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이마 위쪽 부분의 두개골엔 패인 살이 메꿔지지 않은 채 만져지곤 한다.
네 번째는 올 9월 1일, 왼 발목 골절되어, 광주광역시 정형외과병원에 가서 약 5센티미터 길이의 나사식 철심을 2개 박는 수술을 한 경우였다. 그날, 고향 영광 동생의 꾸지뽕밭에 가서 꾸지뽕 열매들 수확하는 일 도울 때는 소풍 가듯이 기분이 좋았다. 그곳에서 깃재를 넘어 장성 처가마을에 가서, 밤에 아내의 집안 아저씨격인 90세 어르신을 찾아뵙고, 올 봄 사별하신 아주머니와의 오랜 인생살이, 아주머니 없이 생활해 오신 6개월의 애환 등을 듣다보니 꽤 시간이 흘렀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옆에 개천이 있고 축대도 있었는데 그 푹 꺼진 축대에 발을 헛디뎌 왼발목이 골절되었고 양쪽 손바닥엔 상처를 조금 입은 것이었다. 왼 발목 골절을 수술해준 정형외과 의사 말에 의하면, 수평방향의 왼발목뼈와 함께 왼발 정강이뼈 두 개 중 바깥쪽 가는 뼈도 같이 골절되기 마련인데 내 경우엔 특이하게 발목 수평방향 뼈 일부만 골절되었다고 한다.
왼 발목이 골절되고 보니 일상생활에 제약이 많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집안에선 빌려온 휠체어 도움을 받으나, 가까운 곳에만 나가더라도 두 개의 목발 신세를 져야했다. 그리고 두 개의 발로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고 고마운 것인가를 실감했다. 역설적으로, 68년에 교통사고로 왼쪽 허벅다리를 잃으시고 35년간 목발생활을 해 오신 내 부친의 어려움들을 떠올려봤다. 또한 여러 건강 사정상 오래 고생해오거나, 휠체어나 목발 등을 오래 사용해온 친구들에게도 안부전화를 하게 되었다.( 창원 최영복 친구, 광주광역시 김무열 친구, 최석중 친구 등등)
왼 발목 수술 후 5주 정도 지나서, 한쪽 목발만 사용해서 걸어도 훨씬 편리함을 느낀다. 또 왼발 디딜 때 발목 내부에서 생기던, 쑤시고 쏟아지는 듯한 통증이 완화되어 가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무심코 왼 발목이 무엇에 부딪쳤을 때 깜짝깜짝 놀라던 경우들도 줄어드니 웃음이 나온다. 5개월 정도 지나면 두 개의 철심도 뺄 수 있다니 그땐 달리기도 하고 걸음걸이의 가치와 무게감도 한껏 더 느껴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