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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따뜻했다네
어느 시대에든 전성기와 황금기는 있다. 비단 일 국의 나라뿐 아니라 어느 사회 그 누구에게도 황금기는 있다. 문물 교류가 활발하고 번창한 문화가 날로 진보하여 꿈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그러한 황금기. 나에게도 황금기가 있었다. 1987년, 당시는 젊은 영화감독 배창호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란 영화로 이름을 날리던 때인데 나 역시도 그해 겨울은 무척 따뜻했다.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그와 별반 차이가 없는 흡사 다양한 인생 역정 대여섯을 일거에 촬영한 황금의 무대가 바로 그때였다. 나는 국내 초유의 연구용 원자로를 우리 손으로 짓겠다는 일에 발탁이 되어 그 공사 감독을 맡았었다. 캐나다 AECL이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전과도 같은 곳과 협업으로 하는 일이라 캐나다 친구가 슈퍼바이저로 상근을 하였으며 그를 상대로 일일 회의를 하고 장비설치를 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역무였는데 갓 서른을 넘긴 주제에 지금 생각해도 나는 꽤 영화로운 감독이었다.
우선에 감독이면서 내가 주연이었던 ‘ 태극기 휘날리고’ 란 무대는 당대의 아주 멋진 연출이었다. 그 연출의 본색은 어디까지나 애국심의 발로였다. 나는 원자로 본체 설치 작업을 당시 실장인 KKC(강경철실장님)이란 분과 같이 맡아서 했었다. 이 일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그 측에서는 일을 주도하는 대가로 10억 원을 요구했었다. 때마침 나의 실장은 AECL이 주최한 PRM(사업 진도검토 회의)에 참석했는데 다녀온 후 당시 단장에게 우리가 독립적으로 해도 할 수 있다는 품의를 받아냈다. 나는 그의 촉수라 할까, 그의 능력을 여전히 신봉한다. 당시 파견 나간 AECL현지 파견소장의 경악할만한 편지내용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말인즉 그러다 망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힐난이었지만 나는 또 다른 이면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어쨌든 이를 하겠다고 나선 내 팀장과 이를 승인한 단장의 용맹함에 비추어 당시 이 장치를 설치해야 할 책무가 있던 시공사인 현대건설은 거의 나자빠진 형국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열의가 대단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프랜트 공사 분야에서는 전 세계에서 한 가닥 하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는 영어로 ‘설치 절차서’를 만들고 장치 개발을 해 특허 출원도 하는 등의 부단한 노력 끝에 마침내 그 일을 해냈다. 당시 특허 물을 현재 근무처는 보유 중인데 현대건설은 요긴하게 쓴 설치 절차서를 훗날 다른 원자로 공사에서도 자기네들이 한 양 유용하게 썼다는 후일담도 들었다.
그런데 그 일 중에 아주 기적 같은 일이 하나 있었다. 당시는 레이저가 측정에 한몫하지 못하던 때로 그 설치 작업이 허용 범위내 잘 설치하였는지를 검측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때 실장은 캐나다에서 보고 온 그들의 측정 장비 이름은 RANK TAILOR HOPSON의 동심형 검측 장비였는데 도시 이 장비를 어찌 구입하고 어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우리는 이 검측의 활용에 대한 타당성을 확보해야 하고 또한 이를 한국원자력 안전기술원에 승인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원자력시설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엄격한 심사가 꼭 뒤따른다. 전국을 수소문해보니 그 장비는 비행기의 가스 터어빈 동심 측정이나 군축용 장형 대포 축이나 미사일 등에 쓰는 것 말고는 쓰는 데가 없었다. 창원에 항공 관련 군수업체로부터 빌려오려 하였지만 성사될 리가 없었다. 결국에 이 장비 때문이라도 AECL의 10억 원의 요구를 받아야 할 상황으로 현지소장의 편지가 아쉽게도 들어맞는 꼴이 되는 아찔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는 불용장비가 발생하면 대덕연구단지에 필요하면 가져가라는 공문을 보내곤 했었다. 여느 때처럼 큰 기대 없이 공람을 훑어보던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분명 그 장비였다. 이것은 거의 기적이라 할 것이었다. 그 덕분으로 우리는 그 장비를 공짜로 얻었는데 거기서 모든 게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장지 활용의 타당성으로서 과연 그 장비가 정확하게 검측을 여전히 유효하게 하느냐 하는 정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닌데 연구단지 내 같이 상주해 있는 표준연구소에서 당연히 우리가 해주어야 한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선뜻 나서서 돈도 거의 안 들이고 한 달간 그 장비를 갖고 검증을 해 여전히 성능이 양호하다는 확인서까지 써주었다. 나는 이 일련의 일이 애국을 하라고 하느님이 친히 보우해 벌어진 일이 아니었던가 하고 지금도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그때가 믿기지 않아 잠이 안 올 때 꿈속의 가이드로 그때를 다시 상기하곤 한다. 그 덕분으로 나와 작업자 5명은 원자로 수조 안에 6개월간 거의 갇혀 지내며 살다시피 해 원자로 설치를 무사히 마쳤다. 지금도 설치도면이 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내 격전지의 처절한 항쟁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 그 무렵 단장인 분은 우리의 설치의 노력을 늘 탐지하러 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통령 표창을 주선하겠다고 누누이 말을 했다. 감독인 나도 그랬지만 작업자들은 현대건설 소속으로 그대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낭설이었고 공사 준공 무렵은 근무처의 높은 분들이 대거 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을 뿐이다. 나는 그렇다 해도 밤 11시까지 일을 한 작업자들에게는 큰 실망을 안겨다 준 셈이다. 나는 그들의 실망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요즘 세상에 누가 밤 11시까지 고정 일당만을 받으며 헌신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들에 대한 죄책감에 다른 일로 상 받을 기회가 많았지만 이후로는 어느 상도 받지를 않았다.
우리 한 시절의 황금기는 그 초창기 설렘과는 무관하게 빛바랜 어둠 속으로 어느새 푸드득 지고 말았다. 원래 황금기는 그렇게 또 순식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세상이 무심하다 하는 말이 일국의 나라 흥망성쇠만을 두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역모에 출중했던 그들과 나의 그해 겨울은 무척 따스하였으며 지금 국내 유일한 그 원자로의 빛나는 영광으로 거룩하기까지 하다. 참 그런데 왜 이 세상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버는 것인지 여전히 모를 일이다. 원자력 뉴스를 말할 때 TV 화면에 늘 등장하는 바로 그 ‘하나로’라는 원자로. 비록 못 지킨 약속의 산실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무명의 용사 5인은 그 매개체 덕분으로 여전히 만나고 있으며 그로 이룬 한 시절의 황금기는 벌써 30년을 넘어서지만 여전히 내 가슴속에서도 몇 편의 영화로 또 그렇게 소담하게 남아 있기도 한 것이다.
‘까꿍’이란 말의 묘미
출산율이 저조한 대한민국에서 어린아이는 정말 귀중한 보배다. 그 귀중한 보배가 작년 시월에 우리 집에 순순히 입성했다. 순식간 집안 전체가 우지끈 달아오르고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아이가 태어난 자체가 집안에 큰 경사인데 왠지 집안일도 술술 잘 풀리는 것 같고 무엇보다 웃음이 끊이지를 않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지 싶다. 집안의 생동감이 아이의 생명력으로부터 만개하고 있다. 3.2㎏으로 태어난 아이는 6개월 만에 거의 3배가 늘었다. 나는 이 영화로움을 시도 때도 없이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갤럭시가 너무 고맙다. 갤럭시는 스펙타클하게 대변신했다. 언제 어디서나 들여다보는 생생 다큐가 나를 즐겁게 한다. 이만한 기록 영화가 있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뼈와 근육과 장기와 기관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면서도 어떻게 정교한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보호받고 배려받아야 할 보배로운 아이는 몸의 성장과 더불어 다양한 기술도 착착 습득해간다. 아이의 성장 과정을 보며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하는 양 감격하고 그로 나름의 분석도 한다. 웃기는 얘기지만 성선설인가 아니면 성악설인가 관찰을 잘 하면 알아낼 것만 같다. 누워 살던 아이는 점차 잡기, 물기, 뜯기, 옹알이, 이유식 먹기를 거쳐 지금은 한창 뒤집기와 억지로 앉히기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며 몇 달 만에 능력치가 빠르게 올라갔다. 원하는 대로 손을 쓸 수 있다는 게 큰 변모다. 분유를 받아먹기만 하다 이젠 젖병을 가까이 가져가면 두 손으로 젖병을 받아 스스로 먹는다. 떡 뻥튀기를 손에 쥐여주면 혼자 다 먹고, 또 달라는 시늉을 한다.
잠시인데도 아이를 보는 게 쉽지는 않다. 아이가 나를 상대로 놀아주는 것만 같다. 황제가 따로 없다. 어찌하면 지루하지 않게 잘 이끌 것인지가 매번 고민이다. 그런 아이는 할아버지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한 걸까. 4개월 조금 넘어 아이가 집에 왔을 때다. 나는 열심히 뛰뛰빵빵 장난감 차를 끌어주었다. 아이는 소리까지 지르며 좋아하고 방긋방긋 웃음으로 내게 즐거움을 표현했다. 나는 그때 나를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5개월이 넘어 집에 다시 왔을 때 이는 착각임을 알았다. 나를 알아보기는커녕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는 잠을 잘 때 칭얼거리는 시간이 길어졌고 급기야 놀다가도 놀아주는 사람이 엄마가 아닌 사람이라는 인식을 한다 치면 울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4개월과 5개월 사이 분명 아이가 의식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책을 찾아보니 그 무렵이 사물의 존재와 시각적 깊이를 인지하는 시점이라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아무한테나 방긋 웃어주던 아이가 빤히 쳐다만 볼 뿐 웃어주지도 않는다. 낯을 가리는 것이다. 대신으로 아이는 어느 참 목놀림이 자유로웠다. 주 양육자인 엄마를 부지런히 찾기 위한 아이가 갖는 우선 발달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휙 고개를 돌리며 엄마를 찾는 아이, 발달 과정이 흥미롭기만 하다. 태어나 냄새에 의존하던 정적으로 지내던 아이가 4개월쯤에는 움직임을 즐거워는 하는데 시야가 아직은 여리니 그냥 웃어서 고맙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는 필시 생존 본능의 유화론 적 발현이지 싶다. 왜 강아지들이 아무한테나 안기고 까부는 그 무렵과도 같은.
비로소 5개월째, 사물을 인지하고 나름의 의식구조를 갖춘다는 그 무렵이어서인지 ‘ 너는 누구냐’ 하듯 엄격해졌으며 아이는 잠을 잘 때 종전과 달리 무척 애를 먹였다. 마치 수험생이 책임감으로 꾸벅 졸다가도 바로 서듯이 졸다가 억지로 몸을 가누며 칭얼거렸다. 눈을 감으면 캄캄한 암흑 속에서 큰 공포가 밀려오는 것 같이 느끼는 것만 같았다. 6개월이 다 되는 지금도 그 현상은 여전하다. 눈을 감아도 편안해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까꿍’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게 바로 그 무렵이다. 생후 4~5개월경의 아기는 시야에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려주어도 눈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므로 아기에게 반드시 엄마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안심을 할 수 있다. 생후 6개월경에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들려주면 엄마 목소리인 것을 인지하고 덜 불안해한다. 하지만 물건을 보여준 후에 수건으로 덮으면 아기는 물건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생후 8~9개월이 되면 눈앞에 있던 물건에 수건을 덮어도 수건 밑에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손으로 수건을 들춰내 물건을 찾는다. 이러한 인지발달에 맞춘 놀이가 바로 '까꿍놀이'다.
아이 장난감 중에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아주 단순한 기능을 갖춘 장난감이 제일 많이 팔린다. 가성비가 떨어진다 싶었는데 이는 그 대문을 통해 엄마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인지능력을 키우는 데 큰 효과가 있어서였다. 그런 ‘까꿍’은 꽤 오랜 전통이 있다. 옹알이할 무렵부터 '도리도리 까꿍', '곤지곤지 잼잼' 등의 소리를 하며 어르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육아법 '단동치기십계훈(檀童治基十戒訓)'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예컨대 '도리도리 까꿍(道理道理 覺躬)'을 '머리를 좌우로 흔들 듯 이리저리 생각해 도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뜻'으로 풀이해 놓았다고 한다. '도리도리(道理道理)'가 그 도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깨달을 각(覺)에 몸 궁(躬)으로 표기되는 '각궁(覺躬)'에서 나왔다는 ‘까꿍’은 맞는 것 같다. 뜻풀이대로 분명 그 시기에 아이는 자아 인식하기 시작하며 분별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까꿍’같은 인식 화법은 아프리카나 외국에도 있다. 이는 아마도 인류가 똑같이 갖는 발달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는 직립 보행으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중력을 이겨내며 뇌에 피를 공급하는 관계로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졌으며 긴 몸의 중심에 자리한 허리에 하중이 가중됨에 따라 만성 요통이 생겨났고 중심을 잘 잡기 위해 골반을 좁히는 바람에 애를 낳는데 큰 고통을 수반해야만 했다. 다행히 생물학적 진화는 또 다른 문화의 진화를 낳았다. 다른 동물들은 출산할 때 혼자 조용한 곳을 찾아서 가지만 인간은 무거운 머리를 혼자 받아낼 수 없는바 경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낳을 수가 없다. 인류가 존엄성을 갖추기 위해 수백 만년의 진화가 거듭된 것이다. 한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데는 집안 전체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요즘 부지런히 ‘까꿍’을 반복한다. 변함없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까꿍’을 자꾸 하다 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고은의 ‘문의 마을에 가서’란 유명한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충북 청원군의 문의 마을은 대청호에 수장되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마을이다. 세상이 신성해진다면 문의는 잠들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이 구절이 ‘자식들이 잘만 된다면 당신은 잠들어도 좋다.’란 구절로만 생각된다. 가족의 표정을 하나하나 챙겼던 아버지 얼굴이 소상히 다시 떠오른다. 그 시 그대로 저만큼 가서 뒤돌아보듯 낮게 위치하여 참고 참으며 여전히 자식들을 껴안은 채 쳐다보는 아버지 그 모습이다. 세속의 희생으로 사라진 문의를 차마 대할 수 없었음인지 시인은 눈으로 덮인 문의의 죽음을 절대 죽음엔 닿지 않는다 하였다. 나의 아버지 또한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 신성한 마음의 곳에 늘 계시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버지는 '각궁(覺躬)'하여 그렇게 내 곁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다. 우리 집 손자도 꼭 그렇게 나를 기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나는 영상 편지를 띄운다. ‘까꿍! 까꿍!’
첫댓글 손자와 놀면서 글 소재를 찾아내는 조작가~~~대단하시고요! 혹시 뵐 기회가 있으면 만원 내놓고 손자 자랑 많이 많이 하시지요?
까꿍에 해당하는 영어표현이 있는데....지금 생각이 안 나네....ㅠㅠ....peekkab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