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목요일 맑음. 아마데우스와 함께한 귀국길
미국 중부의 시간으로 19일 새벽 6시에 아침도 먹지 않고 세인트루이스 공항으로 나왔다. 시카고까지 아메리칸 에어라인에 속한 좀 작은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와서, 화물로 부친 짐을 다시 찾아서 끌고서 아세아나 비행기가 있는 국제선 전용 구간까지 옮겨 가서 완전히 다시 탑승 수속을 밟았다. 이렇게 허둥대다가 보니 아침을 먹을 겨를이 없어 10시가 넘은 뒤에 수속을 하면서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들고서 먹었다.
12시에 서울(인천 공항) 행 아세아나에 올라서 14시간 동안을 비행기 안에 갇혀 지내다가 서울에 도착하니 현지 시간으로 20일 오후 4시가 되었다. 꼭 50일 만에 귀국한 것이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비행기의 좁은 공간 안에 움츠리고 앉아서 있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일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자주 당하는 일이니 답답함을 참아 가면서 견디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보는 국내 신문을 한 두어 가지 집어 들고 보다가, 또 글자가 큰 한문 자료를 꺼내서 읽다가, 좌석 앞에 붙은 화면을 열어서 영화 2편을 두 차례씩 보고나니 그런대로 시간이 잘 지나갔다.
퓨어리Fury라는 전쟁 영화와, 아마데우스라는 음악 영화였다. 앞의 것은 2차 대전 때 미군 땡크 부대원이 독일 땡크와 싸우면서 독일 본토를 쳐 들어가는 이야기이고, 뒤의 것은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것인데 20여 년쯤 전에 대구의 극장에서도 본 것이지만, 다시 보니 매우 볼만하였다. 앞의 것은 화면이 그렇게 밝게 보이지 않고, 뒤의 것은 소리가 그렇게 잘 들리지 않았으나 화면은 밝았다.
곁에 앉은 반백의 한 신사와도 말문을 터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고향이 대구라고 하고, 경대를 나와서 브라질에 이민 가서 20년 가까이 살다가, 지금은 분당에 와서 애완용 동물의 유기농 사료 공장을 운영한다고 하면서 국내에서는 드문 일이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된다고 하였다. 이번 걸음은 이 사업을 전공하기 위하여 미국에 유학중인 딸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매우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또 내가 영화를 보기 위하여 화면을 열고, 이어폰을 찾아서 끼는데 많이 도와주었다.
인천 공항에서 짐을 찾고 나오니, 이번에 성대에서 이퇴계를 연구하여 박사를 받게 되는 P씨가 차를 가지고 나왔다. 퇴계학연구원의 일도 좀 하였고, 거기서 하는 내 강의도 좀 들었고, 또 이번 논문심사에 나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인연이 깊어진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무사하게 종심까지 마쳤으니 축하할 일이다. 집 근처에 와서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지나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히려 내가 그 사람에게 인생에 대하여 배워야 할 점이 많았다.
50이 되었을 때, 돈을 벌어서 외국 유학까지 시켰던 아우 내외가 아들 하나를 남겨 놓고 교통사고로 죽어 버리자, 인생살이가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하던 일을 모두 접어놓고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이것 저것, 책만 읽다가, 그래도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게 가장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이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사업으로는 상당히 성공을 하여, 그 사이에 같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기도 하였고, 지금도 노모를 봉양하면서 부모 잃는 조카까지 돌보아주고 있다고 한다. 태권도 3단에 여러 가지 운동도 잘하며, 머리도 좋아서 대학 학부도 들어가기 어려운 데를 거쳤다고 하였다. 내가 서울에 와서 알게 된 새로운 인연인데, 그냥 좀 능력이 있는 사람 정도로만 알았더니 오늘 조용히 앉아서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누고 보니, 참 든든한 후배를 한 사람 얻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틈이 나면 같이 책을 좀 읽자고 하였다.
50일 만에 서울 집에 들어오니, 화분이 많이 마르고, 낡은 책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하나, 딴 탈은 없었고, 아들이 와서 가끔 챙겨둔 우편물이 책상 위에 수두룩한데, 그 사이에 내가 기고하였던 글이 실린 책이 나온 것부터 먼저 찾아서 제대로 실려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하여 좀 읽어 보았다.
8월 21일 금요일 맑음, 독회에도 나가보고, 모임에도 참가하다.
어제 밤에는 늘 에이콘 속에서 살다가 냉방이 없는 곳에 오니, 한결 기분은 좋으나 밤인데도 움직이니 좀 더운 것 같았으나 몇 시간은 잘 잤다. 아침에 명륜동 퇴계학연구에서 있는 《고경중마방》 독회에 나가는데, 전철을 탈까하다가 마침 택시가 보이기에 그것을 타고 가니 요금이 15000원이 넘게 나왔다. 좀 과용한 느낌이 들었지만, 첫날이니 몸을 좀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였다.
그 동안 사서 놓고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보청기를 두 쪽 귀에 다 착용하여 보았다. 좀 시끄럽기야 하지만 들리기는 잘 하니 꼭 새 세상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오늘은 북송 장횡거 선생의 〈서명〉을 읽는데, 이광호 교수의 보충설명이 매우 들을만 하였다.
전에 내가 병이 나기 전에 나에게 《고문진보 후집》을 듣다가 그만 둔 팀에 속한 사람들이 8명이 있었는데, 오늘 그 팀의 사람들이 모두 이 반에 와서 듣겠다고 나타났다. 80대 중반부터 70대 중반까지의 한국 과학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원로 학자들인데, 오늘 와서 들어 보더니 모두 좋다고 하면서, 나를 보고서 다시 《사기》 읽는 모임을 또 하나 만들어 보았으면 어떻겠는지 물었다.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하던 것도 그만 두려고 하는데 좀 부담스럽게도 느껴진다.
오후에는 이광호 교수와 같이 새종로의 프레스 센터에서 열리는 “소학교 한자 교육 부활지지 모임”에 잠시 나가보았다. 전 국무총리 한 분과 현직 국회 부의장 한 분도 오고, 안면이 있는 교수들도 몇 사람이 보였다. 2시간 동안 집회가 계속된다고 하나, 나는 1부 순서만 끝난 뒤에 나왔다. 첫날부터 너무 움직이는 것은 조심스럽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집 사람이 가진 아이폰에 보니, 미국에서 딸이 보낸 사진이 몇장 올라와 있다. 우리를 공항에서 떠나 보내고 들어와서 마당에 나무를 세 그루 새로 심어놓고 찍은 것들이다. 지난밤에 개가 밤새도록 우리가 그 집에 다시 들어오는가 싶어 기다리는지 늘 자던 제 자리에 들어가서 눕지 않고, 입구의 큰 문 앞에 누워 있다가 우리가 거처하던 방에 가끔 와서 들여다보다가 하는 것을 보고서는 딸아이가 개를 붙들고 울었다고 한다. 미물도 정이 들면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집에 들어왔더니 저녁 때 아들이 전화만 하였다. 아들과 딸이 차이다.
얼마동안 늘 푸른 숲이 울창한 공원 같은 마을에 안에서만 살다가 집과 빌딩이 빈틈없이 들어선 서울 안을 한 바퀴 돌고 들어오니 참 소란스럽다는 생각이 드나, 이것이 내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다시 잘 적응하고 또 사랑하고, 또 좀 더 잘 되도록 힘쓸 수밖에 없는 것을…
내 건강이 좋아 보인다고 친구들이 반기니 고맙고 살맛이 되 살아나는 것 같다.
첫댓글 老師蒼蒼은 後人龜鑑이요 先生之風은 山高水長이로다.
과찬은 비례로소이다.
건강하게 잘 다녀오셔서 활동을 하신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곧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