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버지의 사랑
堂井 김장수
고비를 넘기고
기윤호 씨. 코로나19 때문에 하마터면 자식들을 영원히 만나볼 수 없을 뻔했던 사람. 하마터면 무연고 고독사를 할 뻔했던 사람,
자칫하면 아들들을 만나보지 못할 뻔했던 사람. 서울 어느 고시원에서 살고 있었던 기윤호 씨였는데,
어느 날 유영미 원장에게 며칠 전 말했다.
“나도 코로나 검사 받아야 하나?”
그러자 유영미 원장은,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우리 고시원에도 확진자가 나왔대요. 다들 검사받으러 가셔야 해요.”
유영미 원장은 이 말을 고시원의 모든 방을 다니며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무연고 확진자가 될 뻔한 상황이었다. 2021년 1월 12일 화요일에, 고시원은 오전부터 시끄러웠는데, 36호실에 사는 주민이 확진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고시원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기윤호 씨도 유영미 원장도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도 음성이었고,
특히 윤호 씨는 덤으로 심장 수술도 무료로 받았다.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고독사를 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일생의 기쁜 날
기윤호 씨는 1평 남짓한 방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밀접 밀폐 밀집 등 이른바 ‘3밀’ 환경인 고시원에서는
5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윤호 씨는 원장 아들이 선물해 준 마스크를 쓰고 다녔기에 확진은 면할 수 있었다.
한편, 46년 전 자식들 곁을 떠난 기윤호 씨.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식들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결단했다.
자칫하면 코로나 사망자가 될 뻔한 아찔한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그 순간에 감사하면서 자식들을 만나야겠다고 원장에게 말하자,
원장은,
“최대한 도울게요.”
이렇게 말했는데, 윤호 씨는 고마움을 나타냈다. 춘추(春秋) 79세의 일이었다.
자식들과의 상봉(1)
2021년 1월 13일 수요일 오후, 기덕윤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덕윤 씨는 1971년 3월 4일에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미워하던 순간도 있었지만, 중년이 되자 아버지를 동정해 왔다. 그런 때에 휴대전화를 받아보니,
“여보세요?”
“혹시, 기덕윤 선생님이 맞으신가요?”
“네, 제가 맞습니다만?”
“…주민센터입니다. 아버님이 기윤호 선생님이시죠? 부친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고시원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는데,
부친께서 무사하셨다고 그러더군요.”
덕윤 씨는,
“아…”
라고 입을 떼다가 아버지가 무사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어도 말이다.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고시원에서 혼자 지내셨어요.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을 때, 아버님께서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셨더라고요.”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으니 말이다. 한편 고시원에서는 아까 말했듯이 총 5명의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와
2주간 폐쇄되었다. 서울 어느 보건소가 고시원 입구에 붙인 ‘일시적 폐쇄 명령서’가 남아 있었는데,
유영미 원장은 고시원 식구들과 남몰래 가족 상봉 준비에 바빴다. 윤호 씨도 3형제를 만날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식들과의 상봉(2)
덕윤 씨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사실 덕윤 씨 3형제는 아버지를 너무나도 보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46년 전 어머니와 3형제를 떠났다. 하지만 덕윤 씨의 기억에는 아버지는 자주 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그런 아버지가 무사하시어 코로나19를 간신히 면하시니, 덕윤 씨는 너무 기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일을 어머니께 상의했더니,
“죽은 사람 소원 들어준다는데, 한 번 만나보자.”
이러시는 것이었다. 덕윤 씨의 형과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은 기 씨와 3형제의 관계를 돌려놓았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들은 가끔 안부 전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저 오가는 형식적인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서로에게 진심을 담은 따뜻한 말도 가끔 나왔다. 덕윤 씨는 아버지가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걸 알게 된 뒤
고심 끝에 동생에게 털어놨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우리가 용돈이라도 모아서 보내드리자.”
동생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차가웠다.
“글쎄요, 형. 생각해 보고 도와드리죠.”
덕윤 씨는 처음에는 차가웠던 동생에게 화도 났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동생이 두 살 때 떠난 아버지였지만, 힘들 때 꼬옥 안아주신 아버지. 동생에게도 형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정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훗날 덕윤 씨의 회고,
“아버지 없이 커서 삶이 힘들었어요. 세상살이에 지치기도 많이 지쳤고요. 2017년 영등포역 근처에서 얼굴 뵌 게
생전 마지막일 뻔했어요. 누굴 돌볼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효도를 해서 후회는 없습니다.
3형제가 효도를 열심히 해서 편히 돌아가셨으니 하늘나라에서도 편안하실 겁니다.”
3형제의 어려운 일생
1975년 어느 날, 아버지 윤호 씨가 집을 떠났다. 당시 덕윤 씨는 다섯 살, 형은 아홉 살, 남동생은 두 살 때였다.
부부가 이별해도 이혼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생 수절하면서도 아버지가 서울에 가시는 상황에도
시어머니와 3형제에게 사랑스러운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떠났어도 3형제는 씩씩하게 자랐다.
할머니는 농사일을 해가며 손자들을 먹여 주시고, 어머니는 밭에서 일하시면서 자식들을 정성으로 키웠다.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시였다. 아버지가 가끔씩 보내주시는 적은 돈으로는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했기에,
덕윤 씨의 형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 10㎞ 거리의 등굣길을 고물 자전거로 다니며 버텼다.
3형제는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이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윤호 씨의 생일은 1942년 7월 31일이었고, 어머니의 생일은 1943년 3월 8일, 덕윤 씨의 생일은 1970년 2월 4일이었다.
형의 생일은 1966년 10월 1일, 동생의 생일은 1973년 5월 6일이었다. 3형제는 부모를 닮아 머리가 좋았고,
또한 할머니와 어머니께 사랑스러운 효자였다. 물론 훗날 만난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잠시의 행복
2010년 1월의 늦은 밤, 기윤호 씨는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는데, 그동안 본 적이 없었던 낯선 천장. 키가 180㎝에 가까운
기 씨의 발가락 끝에 고시원 벽이 닿을 듯 말 듯했다. 68세의 나이에 맞이한 비좁은 고시원에서의 첫날,
추위를 뚫고 먼 곳까지 홀로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 수중(手中)에 돈이 많이 있었으나, 직장에서 은퇴 뒤
아껴서 저축은 할 줄 알았다. 기 씨는 첫 달 윌세 23만원을 내고, 다 큰 3형제에게는 손을 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월 20만~30만원의 기초연금으로 버티면서도 간혹 친구를 통해 일거리를 구해 월세와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
기윤호 씨는 셔츠와 정장 세탁을 세탁소에 항상 맡겼는데, 그는 노년에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하면서도
항상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다니곤 했다.
고시원에서
홀로 시작한 고시원 생활은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고시원은 그 당시 한마디로 ‘외딴 섬’이었다. 방에서 홀로 누워 있으면
외로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기 씨는 그럴수록 용기를 냈다. 아침마다 장을 보며 직접 요리를 해먹고,
꼭 세탁소에서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외출했다. 고시원 근처 청과물 가게에서 싸게 내놓은 과일을 가끔씩 사와서
고시원 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외딴 섬 고시원에서 느끼는 노년의 외로움을 이렇게 달래곤 했다.
“기 선생님이 딸기 같은 걸 잔뜩 가져오셔서 나눠주면 총무나 주민들이 좋아했어요. 고시원에서 신선한 과일 먹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시원에서 지내는 20대 학생들은 아예 기 선생님을 ‘키 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꾸벅 인사를 했죠.
총무들도 ‘선생님’ 이러면서 잘 따랐습니다.”(당시 고시원의 강덕민 원장)
“고시원에 오시는 여느 분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순하시고, 점잖으시고, 남한테 폐를 끼치는 행동은 절대 안 하셨어요.
언젠가 넌지시 자제분 얘기를 꺼내신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왠지 남모를 슬픔과 아픔이 느껴져 자세히 여쭤보진 못했죠.”
(당시 고시원의, 함형진 원장)
2020년 12월 22일 화요일, 기 씨는 10년을 보낸 그 고시원을 떠났다. 건물의 재개발 결정으로 모든 주민들이 쫓겨나듯이
나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찾은 다른 고시원. 살던 곳보다는 낡고 퀴퀴했어도 비슷한 월세에 만족스러웠다.
덕호 씨는 처음 고시원에 들어올 때처럼 추위 속에서 쓸쓸히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
고시원을 떠나다
일흔여덟의 나이가 된 기윤호 씨는 다시 낯선 천장을 마주했다. 좁디좁은 방과 어두운 복도, 그리고 새로운 고시원 주민들.
당시 고시원 원장인 유 원장으로부터 이 사실을 안 가족들은 놀라는 표정이었고, 어떻게든 만나자고 상의도 했다.
고시원을 떠나는 날, 기윤호 씨는 정들었던 고시원 주민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방 정리를 하고 옷가지와 각종 서류들,
박카스 10병과 동전 뭉텅이를 가지고 말이다. 하마터면 코로나19의 희생양이 될 뻔한 윤호 씨. 그 때,
덕윤 씨 3형제와 손주들이 어머니와 함께 윤호 씨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버님, 보고 싶었습니다.”
기덕윤 씨의 형이 먼저 부친에게 말을 건넨다.
“네가 큰애냐? 많이 컸구나.”
“아버님, 저희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아버님, 이제 아버님은 저희가 모실게요.”
“여보, 이제는 제가 모실게요. 저희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아버님, 할머니는 살아 계세요. 저희와 같이 오시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그 효성스러움과 사랑스러움에 통곡하는 기윤호 씨. 3형제와 어머니, 그리고 손주들과 할아버지가 된 기윤호 씨는
끝끝내 통곡하고 만다.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주민들과 고시원 사람들도 눈물을 훔쳤다. 2021년 1월 23일의 일이었다.
못 다한 효도
덕윤 씨 3형제는 부친을 모시고 주민센터에 갔다. 자식들이 힘을 합쳐 부모님을 모시고 못 다한 효도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후, 송별연을 치른 3형제는 논산으로 떠났다. 논산에서 부모님께 못 다한 효도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돈이라든지 복권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후 3형제는 이름난 효자가 되었다.
3형제에게서 오래 전에 멀어진 줄 알았던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더욱더 보고 싶은 존재, 사랑스러운 효도의 대상이 되었다.
손주들도 훌륭하게 컸다. 이제 부모님과 3형제는 전처럼 ‘정(情)’을 사랑으로 나누는 관계로 되돌아갔고,
부자 관계도 더더욱 돈독해졌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을 사랑스러운 부자 관계였다.
기윤호 씨는 3형제와 손자, 손녀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셨고, 며느리들은 기윤호 씨에게 건강식품을 사다가 드리곤 했다.
가족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이 사건은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최후
기윤호 씨가 2030년 11월 10일이 되던 해, 배가 아프다며 병원에 가봤더니, 췌장암 말기란다.
그래서 윤호 씨는 덕윤 씨 3형제에게 유언을 남긴다. 왜냐하면 췌장암 말기라서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언은 다음과 같다.
“얘들아, 미안하다. 앞으로도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고, 싸우지 말거라. 정말로, 고마웠다….”
기윤호 씨는 그렇게 허망한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88세. 3형제는 반듯하게 성장했고, 이름난 효자가 되어 있었다.
손주들도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기윤호 가문은 이름난 효자가 많이 나오는 가문이 되었다.
기 씨는 2030년 11월 23일 오후 서울의 한 추모공원에서 아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되었다.
추모공원에는 전날에 내린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기 씨의 시신은 사후 장례를 치르고 화장되어 작은 추모실에 옮겨졌다.
기윤호 씨는 아무 말이 없지만, 단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 2편이 자식들과 손주들, 방문객들을 반길 뿐이었다.
봄바람 따스하게 불어올 적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이제야 만났네.
이제 사랑하며 살아야지.
사랑하는 아이들아, 천국에서 만나자.
부모님께 효도하며, 나라에 충성하며.
다시 한 번 웃으며
기 윤 호
사랑하는 가족들아, 너무나도 고마웠다.
우리들이 만났으니 오죽해 기쁘겠느냐.
헤어진 부모형제 이제야 만나는 이 날
새로워라 부자지간 이제 헤어지지 말자.
세상에 부모님만큼 큰 사랑이 또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부모 품에 기대라
새롭게 태어난 우리 새롭게 태어난 가정
효행으로 빛났으니 얼마나 명예로우냐.
이제야 만났으니 다신 헤어지지 말자
사랑으로 효행으로 다시 시작하자꾸나.
세상에 부모님만큼 위대한 분 어디 있을까
다시 한 번 뒤돌아보면 너무도 힘겨웠다
세상을 뒤돌아보면 너무나도 허무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웃으며 살자꾸나.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