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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건립된 112m 높이의 육면체 그랑 아쉬(Grand Arch).건축가 480여명의 공모안 가운데 채택된 디자인으로, 내부에는 프랑스 정부 부처를 비롯해 수만개의 사무실이 입주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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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을 바라보면, 개선문 아치 속으로 멀리 또 하나의 거대한 백색 문이 보인다. ‘신(新) 개선문’으로도 불리는 초대형 건물 ‘그랑 아쉬(Grand Arch)’다. 그랑 아쉬 주변으로는 미래 도시를 연상시키는 은백색 고층 빌딩들이 솟아 있다. 루브르 박물관-콩코드 광장-개선문이 이루는 거대한 축과 일직선상에 놓인 유럽 최대의 비즈니스 지구, 라데팡스(La Defense)다.
‘15분 거리에 놓인 완전히 다른 세계’.
1500여개의 기업체가 입주해 있는 유럽의 대표 신도시 라데팡스를 설명할 때 쓰이는 말이다. 라데팡스의 현대적 분위기는 역사적인 건물들이 보존돼 있는 파리 시내와는 전혀 딴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든 파리 중심가에서 15분이면 신도시 라데팡스에 도달할 수 있다.
225만평(750ha) 규모의 라데팡스가 처음 기획된 것은 무려 반세기 전. 파리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비즈니스 집중지구를 건설함으로써 파리를 유럽의 수도로 격상시킨다는 목표였다. 1958년 구성된 라데팡스개발공사(EPAD)는 64년에 첫 매스터플랜을 내놓았다. 개발계획을 입안하는 데만 6년이 걸렸고 첫 삽을 뜬지 무려 30여년만에 도시의 외형이 완성됐다. 급해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 이같은 장기적인 안목 덕에, 오늘날 라데팡스는 ‘경제신도시의 대명사’이자 파리를 유럽의 대표도시로 만든 원동력으로 부상했다. EPAD는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개발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색적인 것은 하루 15만명이 이용하는 자가용·버스·지하철·고속철도(RER)·국철(SNCF) 등 다양한 교통 인프라가 모두 지하에 배치돼 지상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출-퇴근 시간에 라데팡스를 가로지르는 큰 길을 메우는 것은 자동차의 행렬이 아니라 산책하듯 출렁이며 걸어가는 직장인들의 물결이다. 길가에는 녹지와 휴식공간이 눈에 띄게 많다. 차보다 보행자를 우선하고, 도로보다 공원과 산책로를 우선하는 파리 도시계획 이념이 빚어낸 풍경이다.
애초엔 부족한 사무·주거 공간을 확충하는 것이 당면과제였지만, 그럼에도 EPAD는 이 지역의 장기적인 근무환경을 염두에 뒀다. 시간과 비용을 몇배로 들이면서 7㎞에 달하는 도로를 굳이 지하에 설치한 것은, 결과적으로 쾌적한 보행환경 뿐 아니라 쾌적한 교통환경까지 가져왔다. 라데팡스 통근자의 70~80%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지하에서조차 교통체증은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 랭킹 20위권내 기업 14개가 입주해 있지만, 2만600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지하 주차장은 항상 자리가 남아돈다.
EPDA에서 라데팡스 개발에 40년을 바친 도시개발 전문가 피에르 셰르투르(퐁제쇼세 공과대학 명예연구원)는 “파리 전체 경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발한다는 것이 라데팡스 계획의 대원칙이었다”고 전했다. 근무 환경을 위해 모든 건물은 적어도 한쪽 창문은 햇빛을 볼 수 있도록 방향 및 높이를 조절해 건축됐다. 도시개발이 40년 넘게 진행되다 보니, 건축시기에 따라 건물의 모양도 가지가지다. 거리 곳곳에는 보행자를 위한 크고 작은 조형물들이 눈길을 끈다. 경제적 목적으로 탄생한 신도시가 연중 연주회나 예술축제가 열리는 시민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도 이같이 인간중심 공간 연출 덕이다.
모든 공간이 너무 철저히 계획된 신도시 라데팡스는 생동감이 없다는 비판도 받는다. 옛 것을 소중히 하는 파리 사람들은 뉴욕을 연상시키는 라데팡스 분위기가 낯설고 정이 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적 소리 한번 없이 한적하게만 보이는 이 라데팡스에서 프랑스는 연간 약10억프랑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파리를 명실상부한 유럽의 교량도시로 만든 힘이기도 하다. 셰르투르는 “만약 프랑스가 라데팡스를 만들지 않았다면, 각국의 무역업자들은 런던과 뮌헨의 통로에 놓인 브뤼셀(벨기에)에 더 많이 모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아시아기업을 비롯한 세계적인 기업들은 상당수 파리에 유럽지부를 틀었다. 파리 도심에서 15분 거리에 라데팡스가 있기 때문이다.
(라데팡스=이자연기자 achim@chosun.com>achim@chosun.com )
----------------------------------- 라데팡스 개발의 교훈 '도시와 건축물은 문화유산' 신도시 개발에 반세기 걸려 -----------------------------------건축과 도시설계가 문화·예술의 주요 장르로 추앙받는 프랑스에서 라데팡스는 20세기 후반 도시개발의 실험작이요, 프랑스 도시 건축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온 유럽, 나아가 전 세계의 자랑거리인 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뉴욕 맨해튼을 부러워하던 프랑스인들에게 라데팡스는 역사도시 파리를 지키는 수단이자, 모더니즘의 기술과 예술성, 경제력을 함께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한 무대가 되어왔다.
그러나 모더니즘 전성기에 도시 아이디어와 구조적 틀이 형성된 관계로 모더니즘이 지니는 약점과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엄격한 용도지역구분과 황량하게 펼쳐진 광장, 거미줄같이 얽힌 지하 도로망, 조화롭지 못한 고층건물들, 그래서 인간미가 덜 묻어나는 공간은 신도시들이 갖는 공통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라데팡스의 개발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는 도시와 건축물 모두 후손에게 물려줄 국가적 문화유산으로 만들어나가려는 의지와 장인 정신이다. 그러기에 도시개발의 초기 구상때부터 마지막까지 소홀하게 다루어진 것이 없다. 라데팡스의 새로운 상징물인 ‘그랑 아쉬’ 개발에 얼마나 많은 세계적 건축가들이 초청되었으며, 얼마나 오랜 동안의 산고 끝에 지금과 같은 예술품을 만들었는가를 보면 놀라울 뿐이다. 두번째, 우리는 도시역사 보전의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라데팡스라는 신도시 개발을 통해 현대식 건축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파리 도심부에서는 건축물들을 철저하게 규제함으로써 역사적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 600년 역사도시이면서도 역사성 있는 건물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고, 시장 논리만에 맡겨버린 서울과는 대조적이다. 세번째는 도시 개발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1950년대말부터 시작된 계획이 30년이 지난 후에야 파리의 관문이자, 샹젤리제-개선문을 잇는 중심축을 마감하는 그랑 아쉬를 건설함으로서 라데팡스 개발의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인구 수십만명의 신도시를 만들면서도, 불과 수년만에 계획을 확정하고, 집행하는 우리의 신도시개발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얼마 안 있어 신행정수도를 건설하려는 시점에서 라데팡스의 개발은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안건혁·서울대 공대 교수·도시설계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