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최고의 부자마을 율목동
율목동(栗木洞)은 1910년대 부터 인천의 최고 부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우리말로 밤나무골 또는 밤나무굴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해 한자 그대로 옮겨져 율목리, 율목정 등으로 불리다 광복 후에 그대로 율목동이 됐다.
이곳 율목동의 경우 밤골이 아니라 밤나무골로 불린 점이나 그 실제 지형으로 볼 때 반골이나 밭골에서 바뀌었다기보다는 실제로 밤나무가 있어 생긴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도 율목공원에 올라가 나무에서 떨어진 밤을 주어먹던 기억이 난다.
1910년대부터 율목동은 인근 내동과 함께 인천의 부자촌으로 불렸다. 당시 이곳에는 부산 등 영남지역에서 인천에 올라와 능숙한 일본어를 앞세워 곡식 중개업 등을 하며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여럿 살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당시까지만 해도 동네가 한산해 지금 율목공원이 있는 언덕배기에는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9천여㎡의 일본인들인 공동묘지가 있었다.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시내 곳곳에 퍼져있던 자국민들의 묘지를 이장해 만든 것인데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자작 벼슬을 받았던 이하영 소유의 임야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화장장도 있었는데, 이 화장터는 1930년대에 도원동으로 이사 갔다. 화장터가 이사를 갔는데도 불구하고 율목공원은 1970년대 초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밤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화장장이 이사를 가자, 그 자리에 새로운 한옥주택가가 생겨나 ‘밤나무골 새 동네’라고 불렸다. 이 새 동네는 당시 서울 명륜동의 한옥 주택가를 보고 만든 것으로, 인천의 각계 유명 인사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됐다.
고 신태범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지금 율목공원에서 긴 담모퉁이 방향으로 시립도서관과 절 ‘용운사’ 등이 있는 이곳 언덕 일대에 당시 일본인 ‘리키타케’의 저택과 정원이었다고 한다. 그가 이렇듯 거부가 된 것에는 위조 동전을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그의 이곳 집터는 9천여㎡나 됐는데 입구에 관리인 사택이 있고, 지금 율목도서관 자리에 저택 본관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관상수와 화단으로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 있었던 일본인 공동묘지는 1960년대 한·일 국교정상화 뒤 일본인들이 남아있던 유해를 인수해 가면서 정리돼 율목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율목동에는 유명 인사들이 무척 많이 살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송암 박두성 선생은 돋보이는 존재다.
원래 강화군 교동면이 고향인 송암 선생은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며 1920년 마침내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을 만들어 오늘날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송암 박두성 -
1963 율목동 25-1 거주 (1888~1963) 75세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8 교동박씨 모태 신앙
묘지; 남동구 수산구청 옆 공동묘지 안장
1913 국립 서울 맹학교(제성원)
1926년 11.04일 훈맹정음 탄생
1936년 영화학교 교장 취임,
점자 성경 전서 76점
1945년 제헌 의회 승인
1962년 국민포장
생가 기념비 1991년 12월 12일 율목동 25-1에 설치
1992년 은관 문화훈장
1994년 9월 15일 생가 매매, 율목 공원으로 비석 이전
매년 4월 교동 상룡리 생가에서 추모식
2002년 문화관굉부로 부터 이달의 인물 선정
21.11.27 59주기
2023. 07. 16
월남촌사랑마을